SCI-FI

지구의 아이들에게

소설가

2007년 10월 통권 25호

 

그곳은 정부 청사라고 부르기엔 너무나도 작고 초라했으며 만남이 이루어진 먼지 쌓인 남루한 집무실의 모습이 그들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직전까지만 해도 기사를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불편할 듯한, 바닥에 끌리는 헝겊 치마를 입은 초라한 노인. 지구 임시정부의 주석 양첸 케촉의 첫인상을 극복하기에도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난 그에게 나는 그만 주석께선 사무실에 계시냐고 물었던 것이다. 나중에 무안해하며 사과하는 내게 거듭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원래 우리 직원이 마중을 나오기로 했는데 마침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웠습니다. 제가 안내를 해드릴 테니 어서들 들어오세요.”
우리는 그의 안내를 받으며 임시정부 청사를 둘러보았다. 말이 청사지 그저 일층을 전시관 비슷하게 꾸며놓은 사 층짜리 허름한 건물에 불과했다. 일을 도와주는 두 사람은 근처에 있는 집에서 살면서 출퇴근을 한다고 하니 이 건물에서 사는 사람은 주석 혼자라는데,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뉴스 기사에서만 보았던 저명한 정치인을 직접 만나게 된다는 설렘과 기대도 변두리 행성에서 만난 이 노인만큼 낡고 초라하게 사그라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열여덟 개의 행성과 서른두 개의 국가 및 부족연합, 다섯 개의 무역연맹과 열한 개의 경제공동체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약 육천 억의 개체수를 자랑하는 은하연방 정치·경제의 최대세력인 메르윈 종족. 그런 메르윈 소유의 열여덟 번째 행성이 된 지구에 대한 독립을 주장한 양첸 케촉 주석. 그는 지식인 계층을 통해 알려지며 민족주의와 저항정신을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올라 있었다.
내가 일하는 잡지사에서 그를 인터뷰하기로 결정한 것도 은하계 각지의 도움을 얻고 추진한 지구 방문이 결국 메르윈 정부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였다. 그때 강력하게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청했던 건 내가 그와 같은 메르윈 종족이라는 점도 한몫 했지만(내가 사는 행성에선 메르윈이 소수민족이다), 무엇보다 내겐 큰 호기심이 있었다.
은하연방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대한 세력, 은하계 어디로 가든 어디에서 살든 대접받을 수 있는 메르윈 종족으로 살 수 있을 텐데도 정말 작고도 작은 변방의 소행성 지구인임을 자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더구나 그런 메르윈을 상대로 메르윈의 별을 자신들에게 돌려달라고 주장하며 이길 리도 없는 투쟁을 평생 계속하고 있는 건 어째서일까. 그 덕분에 유명인사가 되고 굵직한 인권상과 평화상을 받긴 했으나 어쩌면 그게 목적이 아닐는지. 속물이란 말을 들을지라도 나는 그 부분을 정말로 진지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잡지사에서는 두말없이 나에게 인터뷰를 맡겼다. 사실 에누말루이 소행성대를 넘어서 외곽의 행성으로 가는 험난한 출장을 반길 사람은 없을 테니 다들 신참의 지원을 두 팔 벌려 환영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사진기자와 단 둘이서 두 번의 혜성 궤도 운항선과 네 번의 우주 항공기를 갈아타며 멀고도 험한 출장을 떠나 이곳에 이르렀다.
우린 책상과 손님용 테이블과 소파를 제외하면 벽을 둘러싼 책장과 넘치도록 쌓인 책이 집기의 전부라고 해도 좋을 사무실에서 주석이 친히 내주는 엽차와 떡을 대접받았다. 나와는 달리 사진기자가 꽤 조급해하는 눈치여서 바로 인터뷰에 들어가야 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하루 만에 인터뷰를 마치고 내일까지 돌아가서 모레 아침에는 정상적으로 출근하고 인터뷰 내용을 정리하여 글피 아침에는 완전한 기사를 제출해야만 하는 빡빡한 일정으로 움직여야만 하는 처지였으니까.
사실 햇병아리 기자인 나는 편집부 정치국에서 미리 짜놓은 질문지를 보고 인터뷰를 진행하기만 해도 되었다. 하지만 기껏 여기까지 와서 다른 매체에서 다룬 식상한 질문을 되풀이 하고 싶진 않았다. 무엇보다 내가 품었던 호기심이 실제 인물을 보니 겉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궁금하면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어린 시절, 메르윈의 사절단을 직접 만난 이야기에 대해 말씀해달라고 청했다.
그는 잠시 말없이 벽 한쪽을 바라보았다. 아무 의미도 없는 들판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내 시선을 의식한 주석이 고향의 풍경이라는 짤막한 설명을 덧붙이고는 몸을 일으켜 서재 한구석에서 커다란 사진첩을 꺼내어 가지고 왔다. 그가 펼쳐 보여준 사진첩 안에는 비닐에 싸인 종이들이 가득했다. 스케치북에서 뜯어낸 듯 한쪽 면이 우툴두툴한, 변색되고 구겨진 낡은 종이. 어릴 때 직접 목탄과 색연필로 그렸다는 투박하고 비뚤비뚤한 그림.
“남들에게 좀처럼 보여주지 않았던 거라오. 실은 부끄러워서…….”
우리에게 보여준 그림은 세 장. 그리고 우리에게 들려준 건 그 그림에 얽힌 세 가지 이야기였다.

* * * * * * * * * *


첫 번째 그림은 검은 색연필로 그린 원통이었다. 급하게 그린 듯 선도 비뚤어졌고, 원통이 검은색이라는 걸 표현하려는 듯 가운데쯤에 몇 개의 사선이 거칠게 그려져 있을 뿐이었다. 어린아이의 낙서 같은 그림을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 우리를 누군가 본다면 우스꽝스럽다고 여길 게 틀림없다.
“이건 제가, 아니 우리 지구인들이 처음 만난 외계인의 모습이랍니다.”
그는 그림을 가리키며 소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고 마주보고 웃어줘야 하는 건지 무슨 숨은 의미가 있는 건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내가 알기로 은하연방에 원통처럼 생긴 구성원은 없으니까. 지적 생물체는 아니지만 빨리 움직이는 그라토플리아를 크로키로 표현하려면 그냥 원통처럼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동면 중인 하이바쿤들도 믕타사 지방에서는 보호색 덕분에 시커먼 바위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원통과는 거리가 멀다.
내가 뭔가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사진기자를 쳐다보자 그도 나와 똑같은 감정을 담은 얼굴로 내게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3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 우리는 종족의 장벽을 넘어 같은 감정을 나눈 후 다시 케촉 주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그림을 쓰다듬으려는 듯 손을 가까이 가져가며 회한이 겹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날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말을 하며 그는 정말로 살며시 눈을 감았다.
“어제처럼 선명하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그는 쑥스러운지 입 꼬리를 살짝 치켜세우며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않는다. “그림이나 사진을 보고 설명하는 것처럼 묘사할 수 있지요.”
그날은 구름이 조금 많지만 맑은 날이었고, 바람에 야생국화의 냄새가 났고, 잠부이 콩을 수확할 시기가 다가오던 때였다. 어린아이였던 양첸 케촉은 그날따라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일찍 일어났다. 소풍날과 운동회를 제외하면 그렇게 일찍 일어난 적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온통 감자 냄새가 집 안에 가득했다. 어머니는 감자를 잔뜩 쪄서 보자기에 잘 싼 후 그의 허리춤에 매어주었다.
케촉이 이방인과 만나는 조촐한 사절단에 동행하게 되었음을 알게 된 건 바로 전날이었다. 그 전부터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모이기만 하면 ‘뒷산에 내려앉은 비행접시’에 대한 얘기꽃을 가득 피우곤 했다. 어떤 아이는 그들이 열 개의 다리를 가졌다고 했고, 또 어떤 아이는 그들의 몸이 황금으로 이루어져서 몸에서 금가루가 떨어져 나온다고도 했다. 다른 아이는 그들의 얼굴이 세 개이고 눈이 열둘이라 어디를 쳐다보고 말을 해야 할지 어려울 거라고 충고 아닌 충고를 해주기도 했다. 그들이 불어넣은 호기심과 두려움이 케촉의 마음을 풍선처럼 크게 부풀려 둥실둥실 떠다니도록 만들었으리라.
드디어 외계인을 만나러 가는 날, 어린 케촉은 한 손에 그림도구를 넣은 가방을 들고 허리춤에 찐 감자를 싼 도시락을 매고 사절단의 일원으로서 집을 나섰다. 하지만 사절단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적은 인원이었다. 볼 때마다 늘 고드름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기다란 은회색 수염을 기른 장로 어르신과 그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은 안경 쓴 아저씨와 케촉의 아버지, 그리고 마차를 모는 마부까지 모두 다섯 사람이었다. 비행접시가 마을에 보낸 메시지는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대표자 다섯 사람만 자기들을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가 동행하게 되었을까. 사진기도 없는 당시 지구의 문명 수준을 생각하면 기록을 남기기 위해서는 그림을 그리는 방법밖에 없었을 것이다. 분명 그 시절의 그는 매일 손에서 목탄이나 붓을 놓지 않을 정도로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다고 하지만 어린아이가 잘 그리면 얼마나 잘 그렸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그 점을 지적하자 그도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분명 저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어른들이 계셨을 거예요. 하지만 장로님께선 굳이 저를 지목하셨지요. 어르신의 깊은 생각을 지금 헤아려보면, 아마도 어른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을 경우 어린아이인 나에게서 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셨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대상에 대해 더 솔직하고 직감적으로 대응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갖고 계셨겠지요.”
마침내 작은 언덕 위, 비행접시의 앞에 도달한 일행은 마차에서 내렸다. 케촉은 마부 아저씨와 함께 조금 떨어진 마차 옆에 있었다. 어린 케촉은 스케치북을 꼭 끌어안고 비행접시 안에서 나올 이방인의 모습을 꼭 자세히 그리리라 마음먹었다. 이 자리에 없는 수십 수백 명의 사람들은 그 그림을 통해서밖에는 저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을 테니, 곧 그들에게는 그가 그린 모습이 바로 외계인의 모습 자체인 셈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느껴본 막중한 책임감에 손가락이 떨릴 정도라고 말했다.
“사실 비행접시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람에 눈이 부셔서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어요. 그 바람에 비행접시의 문이 어떻게 열렸는지도 눈치 채지 못했지요…….”
처음 모습을 드러낸 건 시커먼 원통이었다. 그와 비슷한 키의 원통. 바퀴는 아주 작고 소리가 나지 않았기에 움직이는 자체가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하지만 외계인의 모습이 고작 움직이는 검은 원기둥 형태라는 건 어린아이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열 개의 촉수도 금가루도 열두 개의 눈도 없는 금속 덩어리는 주위의 풍광을 몸에 수놓으며 풀밭을 마치 얼음판 위를 미끄러져 이동하듯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열린 문에서 하나의 형체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케촉은 얼른 스케치북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투박하게 그린 원통 따위는 벌써 잊어버렸다. 벌써 비행접시 안에서의 모습만으로 그가 머리와 팔다리를 지닌 직립형 생물이란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진짜 외계인이 등장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그는 놀라움과 호기심을 억누르고 오직 외계인의 모습만을 정확히 담으려고 떨리는 손가락에 힘을 준다.
그렇지만 그 인물이 푸른 하늘 아래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드러내었을 때, 어른들은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나 허둥대었다. 그리고 아이는 멍하니 있었다. 사실 그의 모습을 열심히 그릴 필요도 없었다. 그는 하얗고 몸에 착 붙는 옷을 입고 있었을 뿐, 두 쌍의 눈과 팔다리, 전신을 감싼 은빛이 감도는 푸른 털, 튀어나온 입과 몇 가닥의 수염, 부드러운 꼬리…… 어디 할 것 없이 모두 똑같았다. 그는 지구인들과 완전히 똑같은 외모였다.
그가 약간 격양된 목소리로 그 부분을 묘사할 때, 사진기자와 나는 다시금 서로를 쳐다보았다. 지구인들이 겪었을 놀라움을 헤아려보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원시적 생활을 하던 민족이 고등문명과 접촉했을 때 느꼈을 일종의 컬처 쇼크 같은 것이려나 생각하며 그 상황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그 사람은…… 그를 비롯해 같이 왔던 이들은 모두 옷차림을 제외한다면 우리와 정말 닮았더랬지요. 평범한 옷을 입고 마을 한복판이나 시장통 한가운데 서 있어도 누구 하나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걸요.”
대표로 나선 인물, 사절단의 단장이 맨 처음 한 것은 우호의 표시이자 무기가 없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서 손바닥을 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다음 그의 입에서 끄르륵하는 소리가 나왔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목소리가 들려서, 모두들 깜짝 놀라 그쪽을 쳐다보았다.
“여러분, 만나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저는 아·플라라고 합니다.”
말 하나하나를 끊는 딱딱하고 억양 없는 목소리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원통으로, 모두들 진짜 외계인의 모습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다. 철기 후반 문명에 속한 그들에게는 놀라운 일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번역이 가능한 건 비행접시가 성층권에 도달할 무렵부터 작은 로봇을 통해 지구의 언어를 수집·분석한 덕분이었다.
“아·플라는 1차 지구조사 파견단의 단장으로 저희 일행과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죠. 그러니까 지구에 처음으로 온…… 아니 두 번째라고 해야 할까요…… 메르윈 종족의 사절이지요.”
그가 말을 중간에 고친 이유를 물어보려다가 지구에 대해 알게 된 계기가 된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숨겨진 메르윈의 별, 지구〉. 은하의 변방에 있던 작은 별에 메르윈 종족의 후예가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은하탐사단에 발견된 그 별은 자랑스러운 메르윈 행성연합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는 내용이다.
지구 임시정부는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을 부정했고, 메르윈 연방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그들은 괴뢰정부나 테러 단체로 취급받아왔다. 주석이 퀘이사 인권상을 수상함으로써 겨우 이 초라한 임시정부가 은하권의 주목을 받았으나 그것은 그때의 어린아이가 이렇게 노인이 되었을 정도로 오랜 세월에 걸쳐 흐른 이야기다.

* * * * * * * * * *


두 번째로 주석이 보여준 그림은 다름 아닌 아·플라의 초상화였다. 어린 시절에 그린 투박한 목탄화였기에 그가 지적인 인상을 가진 메르윈 종족 성인남성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초상화를 보여주고 난 후 주석의 입가에는 약간은 쓸쓸해 보이는 미소가 남아 있었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그는 오랜 옛날 헤어진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들의 첫 만남은 다큐멘터리의 이야기와 거의 같았다. 1차 파견단장 아·플라는 장로 일행에게 간단히 자기들이 온 메르윈 행성을 소개한다. 많은 어려운 낱말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못해서 번역기는 중간 중간 으르렁거리는 듯한 메르윈어(語)를 토해내었다.
그 속에서 충격적인 진실이 스스로를 지구인이라 믿었던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지구의 원주민은 1000년 전에 이미 멸종했고 지금 이들은 자신들의 동족, 지구인들에게 남겨준 메르윈 종족의 후손이라는 것.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이들에게 아·플라는 하나의 영상을 보여준다. 이 영상을 가능한 많은 지구 거주민(그는 ‘지구인’이라 부르지 않았다)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덧붙이며.

그 영상은 1000년 전의 것이었다. 황폐한 지구의 풍경. 지금과 같은 녹림은 보이지도 않는다. 회색빛 하늘, 메마르고 거친 땅 위에 불쑬불쑥 솟은 콘크리트의 협곡. 시커멓고 길쭉한 시체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머리는 둥글고, 팔다리가 길고 가늘며, 전신에 털도 꼬리도 없는 존재들. 아·플라의 선언은 그들을 숨 막히게 만들었다. 이들이 진짜 지구인입니다. 이들은 지구에서 자연 진화로 태어나 약 300만 년 동안 지구의 유일무이한 지적 생명체로 군림했습니다. 최대 개체수는 110억에 이르렀으나, 핵전쟁과 이상기후, 그로 인한 환경오염으로 유발된 전염병으로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99.9954퍼센트의 개체가 사망한 상태였고 생존자들도 100퍼센트 불임상태였습니다.조사단은 생존자를 모아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지만 불임을 해결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지구 원주민의 생명을 앗아간 그 병은 조사단에게는 아무 피해를 끼치지 못했다. 그래서 조사단은 지구의 재건을 위해 자신들의 아이를 맡기기로 결심했다.
“지구인의 슬픔과 고통은 자신들이 죽는다는 사실보다 후손이 남지 않는다는 점. 이 지구가 죽음의 별이 된 채로 텅 빌 거란 사실을 알았을 때 더욱 컸다고 조사단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조금도 닮지 않은 아이를 받아 안았노라고 아·플라는 말했지요.”
그렇게 지구의 원주민은 메르윈 종족의 아이들을 받아서 그들에게 지구를 물려주기로 했다. 조사단은 떠났고, 지구상의 마지막 지구인이 숨을 거두기까지는 백 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로 인하여 그 작지만 물이 풍부한 별은 온전히 메르윈 종족의 것이 되었다, 라고 아·플라와 다큐멘터리는 입을 모아 말했다.
아·플라가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나 조사단의 영상을 보여준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들이 만난 그 날이 조사단이 왔다간 후로 정확히 천 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메르윈의 아기가 지구에 첫발을 딛은 그 날로부터 천 년의 세월.
“뒤에 알게 된 것이지만 지구의 천 년이 은하 표준시각으로는 79공전년 정도 된다고 하더군요. 은하연방에서는 한 행성을 77공전년 이상 점유한 국가나 종족에게 영구적인 소유권을 인정해준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들이 왜 갑자기 사절단을 빙자하여 돌아왔는지 이해가 되더군요.”
노인의 말투는 잔잔했지만 진중했다. 그 안에는 깊은 회환과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저 아래 침전해 있던 분노가 잔잔한 수면의 흔들림으로 서서히 피어올라 스며들듯이.

* * * * * * * * * *



비행접시가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 후, 장로 일행이 돌아오고 사절단의 존재가 알려지자 마을의 분위기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 없을 정도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워졌다. 담장 곳곳에 벽보가 나붙었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외계인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사절단의 방문, 자신들이 진짜 지구인이 아니라는 진실, 그리고 이 마을에 머물게 된 사절단의 대표 아·플라. 그는 지구에 대해 알고 싶다는 학구적인 호기심만으로 동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예정에도 없던 지구 체류를 결심한 것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폭풍의 한가운데에 놓인 것과 같았다. 그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아·플라의 방문과 사절단의 목적에 대한 뜬소문을 퍼뜨렸고, 이내 두 무리로 나뉘어져 매일 광장 앞에 모여서 설전과 토론, 가끔은 다툼을 벌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모여서 토론하고 싸우는 모습은 이전에도 볼 수 없었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습니다. 저 역시 농사를 짓고 고기를 낚던 사람들이 현수막이나 피켓을 들고 광장에 몰려나와 외계인을 처형하라거나 고향으로 돌아가 잘 살자는 둥의 주장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더랬지요…….”
단순히 외세에 대한 개방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그들 민족, 더 나아가 그들의 존재 자체에 대한 정체성이 걸린 문제였기에 파견단 단장 아·플라가 머물게 된 그 작은 마을은 어느새 지구 전체의 운명을 건 대표자들의 투쟁의 장(場)이 된 셈이었다.
주석은 이야기가 길어져서 미안하다며 마침 돌아온 직원이 준비한 다과상을 들였다. 무심코 그쪽을 쳐다보려는데 사진기자가 갑자기 그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머리를 붙잡더니 옆으로 돌렸다. 시야에 들어온 건 서재에 가득 꽂힌 낡은 책들.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기다리고 있자니 주석이 아 참, 깜박했군요, 라고 성급히 사과를 한다. 사진기자의 손가락이 물러나 고개를 원래대로 돌리니 테이블 위에는 급히 보자기를 덮어놓은 무언가가 보였다.
“죄송합니다. 경황이 없어 식사 준비도 미처 못한 바람에 간단하게 술과 안주를 준비했는데 메르윈의 풍습을 잊어버리고 말았네요 글쎄. 늙으면 이렇답니다. 메르윈들 사이에서 이십 년 넘게 살았는데도 그걸 까먹다니…….”
보자기의 중간에 쑥 튀어나온 부분이 술병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허허헛.” 갑자기 주석이 웃음을 터뜨려 우리는 동시에 그를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서……. 아·플라가 처음 우리 마을에 오던 날이었죠. 우린 그를 환영하기 위해 성대한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고기를 썰고, 떡을 찌고, 전을 부치고…… 물론 술을 빼놓을 수가 없었죠. 커다란 연회장이 준비되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음식과 술을 들고 모였습니다. 어느 때보다 크고 즐거운 잔치판이었죠. 아버지는 그 와중에서도 이 틈을 노려 도박판을 벌이는 이들을 잡아서 꾸짖느라 바빴지만……. 그런데 그 안에서 유독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잔칫상의 주인공 아·플라란 말씀이지요. 그가 나고 자란 메르윈의 풍습과 예절로는 상상도 못할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그에게는 그야말로 외계종족의 야만적인 풍습이 아니었을까요? 후후후. 나중에 그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고 어린 저는 배가 아프도록 웃었지요. 하지만 그에게서 메르윈 사람들의 사는 모습 같은 걸 듣고는 많은 걸 배웠답니다. 뭐랄까 각자의 사는 모습은 다르지만 존중해줘야 하지 않을까…… 모범생 같은 소리를 했지만 전 사실 수업시간에도 그림만 그리던 문제아였어요. 그래도 메르윈 언어를 배우는 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지요. 아·플라와 저는 서로 상대의 말을 배우고 자신의 말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주위의 사물을 그려서 그 아래에 우리말과 메르윈어를 적어가며 단어장을 만들었죠. 아플라는 그걸 보고 우리말을 배우고, 저는 메르윈어를 배우고…… 누가 그렇게 즐겁게 배울 수가 있었을까요.”
잠시 회한에 젖던 그가 얼굴을 내 쪽으로 돌리며 진지한 얼굴로 거듭 사과를 하자 나는 정말로 괜찮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 메르윈 종족에게 술이 갖는 신성하고 엄숙한 의미를 생각하면 아·플라가 느꼈을 당혹감은 충분히 이해가 가능하다. 백주대낮에 술판을 벌이는 모습은 분명 야만적으로 보였겠지. 더구나 술독을 열어놓고 대접 같은 큰 그릇으로 술을 마시는 모습은 이를테면 거리 한 복판에서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것과도 비슷할 정도의 결례다. 무릇 우리 메르윈에게 술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비밀스럽고 신성한 연회의 상징이고, 오늘날에도 그 영향을 받아 술을 마실 때는 불을 꺼 주위를 어둡게 하고 주둥이가 좁은 호리병에 담아서 조금씩 마셔야 한다. 술의 모습과 냄새를 감춰야 함은 물론, 마시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응당 갖춰야 할 당연한 예의였다.
그렇지만 나는 거듭 괜찮다며 문득 떠오른 외할아버지를 예로 들었다.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는 노쇠하여 집에만 계셨는데 식구들이 모두 잠든 밤이면 홀로 식탁에 앉아 밥그릇에 술을 담아 마셨다. 그래서 자다가 화장실에 가려고 방을 나오기만 하면 늘 시큼한 술 냄새가 나곤 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랐기에 메르윈 종족들도 겉으로는 술을 신성하게 다룬다고 하지만 사실은 마음껏 술을 마시고 싶어 하지 않을까, 각자 집에서는 대접에 떠 마시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글쎄요……. 그거 재미있는 말씀이네요.”
그는 내 이야기를 정말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들으며 내 얼굴을 찬찬히 살피는 듯 바라보았다. 마치 내 콧수염의 개수라도 세어보려는 듯한 세심한 눈길이었다. 난 당황스러워 시선을 떨구었다.
“그럼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그는 내 말을 핑계 삼아 보자기를 걷었고, 대신 나를 위해 깔때기와 주둥이가 좁은 병을 하나 가져와 조심스레 병 안에 술을 부어서 주었다. 그 때문에 이야기는 한동안 중단되었지만, 안주 없이 술만 두 잔을 연거푸 마신 그는 목에 막힌 무언가가 술에 씻겨 내려가기라도 한 듯 한층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플라는 처음에 장로님 댁에 머물기로 했지만 하루도 버티지 못했지요. 만나고 싶다며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아버지는 그를 우리 집 지하창고에 숨겨두었죠. 나중엔 그를 죽이겠다고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잘 한 일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덕분에 나도 아·플라와 매일 만날 수 있어서 좋았지요.”
사람들의 아·플라에 대한 태도는 둘로 나뉘었다. 지구를 침략하기 위해 보낸 앞잡이 혹은 고향별에서 선진문명을 전해주러온 구세주. 이렇듯 아·플라를 둘러싼 논의는 결국 지구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문제로 확대되었다. 외계인을 쫓아내고 지구를 지킬 것인가, 외계의 문명을 받아들일 것인가.
누군가는 외계의 문명을 배워 잘 살고 싶을 것이고, 누군가는 현재의 평화가 깨질 것을 두려워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외계인의 검은 속셈에 속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들 속에서 토론하고 싸우며 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분이 송두리째 뒤바뀌는 대격변기의 한가운데에 놓인 부락민들.
이때 철저히 메르윈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그 유명한 다큐멘터리는 여기서 하나의 큰 반전이랄지, 전환점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을 보여준다. 2차 파견단의 도착과 아·플라의 암살이 그것이다.

* * * * * * * * * *


그 사건은 지구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차대한 사건이지만 실은 그들 자신이 자기들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었다. 사건은 벌어졌고,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고 그 후에 벌어진 모든 일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아·플라는 사실 지구에 올 때까지만 해도 지구에 대해 아는 것은 다큐멘터리의 내용 정도밖에는 없었다. 그의 방문 목적도 우주공항 건설부지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구와 지구인에 대해 알아갈수록, 그 모든 것들에 애정을 느낄수록 아·플라는 자신의 임무와 메르윈 종족의 목적을 떠올리며 괴로워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싸우는 걸 보고 마음 아파하며 몇 번이나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털어놓고자 했으나 신변의 위험 때문에 늘 숨어 지내야만 했기에, 그가 속마음을 털어놓은 건 어린 케촉이 유일했다.
“아·플라는 저에게 몇 번이나 말했어요. 여기 지구에 사는 우리들은 절대 메르윈 종족이 아니라 지구인이라고. 둘 사이에는 외모의 유사함 외에는 없다고. 둘은 그저 한 혈족에서 갈라져 나왔을 뿐 전혀 다른 종족이라고. 이런 지구인들을 억지로 메르윈의 후손으로 만드는 건 은하계 영토를 확장하려는 야심에서 비롯된 짓일 뿐이라고…….”
그런 어느 날, 아·플라는 탐사선으로부터 예기치 못한 연락을 받는다. 메르윈의 2차 지구 파견단이 곧 도착하여 지구가 메르윈의 영토로 인정받았음을 선포할 거라는 소식이었다. 뿐만 아니라 2차 파견단은 군대를 포함한 대규모 인원으로 지구에 머무르며 통치를 행할 직할정부 임원들도 포함한다고 했다.
그 통신은 아·플라 자신도 직할정부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는 희소식을 겸한 연락이었으나 그에게는 비극적인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다. 아·플라는 침통한 심정으로 고민을 거듭하다 장로에게 이 소식을 알린다. 이는 노골적인 지구침략 및 정복행위에 다름 아니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직접 은하연방에 연락을 취해 지구가 독립 종족으로 이루어진 행성임을 알리고 독자적으로 은하연방에 가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로와 안경 아저씨, 케촉의 아버지 모두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케촉의 도움으로 그의 생각은 정확하게 전달되었으나 그들은 메르윈이라는 자들이 왜 지구를 탐내는지, 지구를 점령해서 무엇을 하려는지도 몰랐지만 무엇보다 그들은 지구가 누군가의 소유물이 될 수 있고 그걸 정복이나 점령할 수 있다는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이 등장할 차례다. 2차 파견단이 1차 때의 조그만 비행접시와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의 거대한 규모의 우주항모를 타고 나타나자 마을 사람들의 흥분과 공포, 호기심과 두려움은 일대 절정에 이른다. 다큐멘터리〈숨겨진 메르윈의 별, 지구〉에서는 이때의 모습을 영상으로 재연해서 보여주었는데, 미개종족이 거대 우주선의 그림자 아래에 모여 놀라워하는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주어서 기억에 선명했다.
이때 아·플라가 케촉과 함께 광장 한복판, 운집해 있던 군중 속 한가운데에 나타난다. 임시로 만든 연단에 올라 입고 있던 옷을 벗고 지구에 올 때 입었던 우주복 차림이 되자 비로소 모두들 그가 아·플라임을 알아보았다.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파견단의 방문을 환영하며 지구인은 이제부터 자랑스러운 메르윈 종족의 일원이 될 것임을 선언하고, 연설을 마치고 연단을 내려와 군중들에 감싸인 상태에서 외계인 추방을 외치는 무리의 일원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그때 거기에 있던 이들은 모두 진실을 알고 있지요. 그 연설의 내용은…… 메르윈이 만든 그 엉터리 다큐멘터리와는 정반대였습니다.”
약간의 술기운 때문에 조금은 정신을 놓은 상태에서 옛이야기처럼 길고 지루한 노인의 말을 듣던 나는 돌연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놀랐다. 다큐멘터리가 거짓이었다고? 물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진실이란 증거도 없겠지만, 달리 지구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접한 그 다큐멘터리의 내용은 부지불식간에 나를 비롯한 은하계 사람들에게 지구의 역사처럼 확고부동하게 인지된 상태였다. 그런데 눈앞의 이 왜소한 노인에 의해 철옹성처럼 세워진 진실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주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사진첩을 넘겨 세 번째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그날 아·플라가 암살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린 그림이었다. 그 그림의 옆에는 짙은 갈색의 천 조각이 비닐로 밀봉되어 있었다.
“저는 이렇게 증거를 갖고 있습니다. 제가 그린 그림만으로는 믿어줄 사람이 없을 것 같았기에, 저는 그가 입었던 옷의 일부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한 남자가 쓰러진 모습을 위에서 바라본 광경이었다. 배에 단도가 깊숙이 박혀 있었고, 입부터 가슴, 등과 땅바닥까지 온통 피투성이였다. 색연필로 그려진 그 그림의 절반 정도는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아·플라는 지구인들은 메르윈 종족과는 전혀 다르며, 지구는 메르윈의 영토가 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메르윈이 노리는 건 지구의 영토와 자원이고 지구인들은 모두 노예와 같은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다함께 힘을 모아 메르윈의 파견단을 쫓아내고 지구의 이름으로 은하연방의 일원이 되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특히 그가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라도 도와주겠다고 한 대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는 그 연설을 마친 직후 목숨을 잃고 말았으니까요…….”
연설을 마친 아·플라는 지구인의 옷을 다시 입고 연단을 내려갔다. 케촉이 그의 곁에 가려고 한 순간, 한 남자가 외계인의 앞잡이 주제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달려들었다. 그가 꺼낸 단도가 아·플라의 가슴에 박혔고, 잠시 비틀거리던 그는 군중들이 모두 둥글게 원을 그리며 자기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걸 보게 된다. 마치 아·플라를 구경하고 있는 듯,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거리에 떨어진 채로.
누구의 부축도 받지 못하고 아·플라는 잠시 휘청거리며 단도를 뽑으려고 하다가 무언가에 발이 걸린 듯 갑작스레 넘어졌다. 조금 늦게 피습을 안 케촉과 아버지가 달려와 그를 일으키려 했을 때, 이미 그는 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몸에서 흘러나온 피가 주위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사람들은 그의 피가 행여나 발에 닿을까 봐 더 멀리 물러날 뿐 누구도 도우려 하지 않았다.
“당시 저는 너무 놀라고 슬퍼서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이상한 점 투성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 단도는 손바닥 길이 정도로 짧았는데 아·플라는 어째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었을까요. 아버지는 외계인의 몸이 우리보다 약한 것 같다고 말씀하셨지만 시신을 살펴본 의사 선생님은 우리가 알려주기 전까지 외계인인지도 알아차리지 못했어요. 유전적으로 그와 우리는 완전히 동일한 종족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시신과 함께 불태울 예정이었던 그의 옷을 살펴보다가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하고 그 부분을 잘라내어 제 호주머니에 넣었답니다. 그게 바로 이거예요.”
그는 밀봉한 천 조각을 보여주었다. 굳은 피로 뒤덮여 원래 색을 짐작하기 어려운 그 천 조각은 중앙에 동그란 구멍이 나 있었다. 나와 달리 사진기자는 금방 그 구멍의 의미를 알아내었다.
“광선총……. 그러니까 지구인에게 살해당한 게 아니란 말이군요!”
노인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시 우리 지구인에게 무기라고는 검과 활, 창과 투석 정도밖에 없었지요. 그 누구든 광선총을 줍는다고 해도 그걸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역시…… 그 2차 파견단에서 누군가가……?”
“틀림없습니다. 당시 의술이 부족했던 탓인지 의사 선생님은 그의 몸을 관통한 총상을 발견하지 못했고, 아·플라의 시신은 그대로 화장되고 말았지요. 하지만 제가 가진 이 옷 조각은 광선총만이 가능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지구의 어떤 무기로도 이렇게 정확한 동그라미 흔적만 남기며 옷과 몸을 뚫을 수 없거든요. 제 기억에 남은 그의 마지막 행동도 이걸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는 칼을 뽑으려다가 무언가에 떠밀린 듯 갑자기 넘어져 많은 피를 흘리면서 숨을 거두었지요. 주위에 아무도 없었는데……. 저는 그가 검을 찔린 배보다 입과 가슴에서 더 많은 피를 흘리고 있었음을 기억합니다. 그건 분명 하늘 위 탐사선에서 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자들 중 누군가가 그가 자신들에게 방해가 될 것임을 알고 광선총을 쏘았던 거겠지요. 마침 칼에 찔리자 그 기회를 노렸을지도 모르고요. 분명한 건 그 다큐멘터리 때문에 저는 이 사실을 밝힐 기회를 잃었다는 점입니다. 그게 너무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다 그걸 진짜라고 믿고 있을 테니, 이제 와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세상은 저를 거짓말쟁이나 음모론자로 취급하려 들겠지요…….”
그의 마지막 말은 마치 나에게 하는 말인 것처럼 느껴졌고, 그에 대한 화답처럼 나는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하고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인터뷰 기사에 꼭 넣겠노라고. 이런 충동이 나 자신도 놀랄 정도로 강하게 솟구쳐서 흥분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 말았다.

* * * * * * * * * *


그 후의 이야기는 큰 줄기는 다큐멘터리의 내용과 동일했지만 어떤 부분은 완전히 달랐다. 2차 파견단은 부락의 광장에 거대한 청사를 짓고 지구가 메르윈 종족의 열여덟 번째 행성이 되었음을 선언했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해안에 우주공항 건설이 추진되었고 주민들은 공사를 위한 인부로 동원되었다. 다큐멘터리는 그들이 메르윈의 일원이 되었음을 기뻐하며 많은 보수를 받고 일했다고 말했지만 주석은 아·플라의 연설과 죽음에 감명받은 지구인들이 하나로 뜻을 모아 공사를 반대하고 메르윈의 행위를 침략이라며 성토했으나 강력한 군사력 앞에 이내 굴복했다고 반박했다. 그들은 노동자라기보다는 노예였고 말만 메르윈 종족의 일원이었지 직할정부에게는 말도 안 통하는 미개한 원주민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다. 지구에는 우주공항, 은하통신망 기지국 등이 건설되어 은하연방과의 교류와 소통이 가능해졌고 지구는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수자원을 갖춘 지역으로 각광을 받아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다. 지구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싸구려 노동자로 부려 먹히며 노예처럼 비참하게 살았고 직할정부가 중간에서 그들에게 돌아갈 보수를 가로채며 호의호식했다.
케촉은 당시 메르윈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지구인이었고, 그 덕분에 메르윈 모성(母星)으로 이주하여 연합정부 밑에서 통역 및 자료 번역 같은 일을 했다. 공무원으로서 비교적 윤택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나 그는 지구에 남겨진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는데 혼자만 잘살고 있는 것 같이 느껴져 양심의 가책을 받았노라고 털어놓았다.
그 후 그는 방송국에서 지구 소개 영상을 제작할 때 자문을 맡았던 걸 계기로 만난 방송 프로듀서와 함께 지구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한다. 원래의 의도대로라면 메르윈의 지구침략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은하연방에 지구를 도와달라는 메시지를 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숨겨진 별, 지구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그 다큐멘터리는 결국 완성되지 못했고, 메르윈 정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내용으로 고쳐서 방영했으니, 바로 그 유명한〈숨겨진 메르윈의 별, 지구〉의 탄생에 얽힌 비화가 여기서 밝혀진 셈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퇴직을 하고 지구로 돌아온다. 그의 노력으로 지구 임시정부가 설립되고 케촉의 아버지를 주석으로 추대하였으나 앞날은 순탄치 않았다. 은하연방 각지에 지구의 실상과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메르윈 직할정부의 탄압으로 청사마저 빼앗기고 긴 도피생활이 이어졌다. 결국 아버지의 사후 직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주석에 취임한 그는 소수의 동료들과 함께 지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은하계 곳곳을 떠돌며 도움을 청했으나 연방의 패권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메르윈의 눈치를 보느라 지구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지원해주는 종족이나 국가는 없었다. 언제 메르윈 정부에 체포되어 반정부단체의 주동자라는 죄목으로 처벌받을지 모를 위태로운 상황이었으나, 케촉 주석이 퀘이사 인권상과 아·테브 평화상을 수상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그의 이름은 순식간에 은하계 전체에 알려졌고 민족주의를 상징하는 저명한 독립운동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런 인물을 체포하거나 처벌하면 메르윈 정부의 도덕성에 상처를 입을 것이 뻔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골치 아픈 상황에 이른 셈이었다. 그래서 메르윈 정부는 직접 탄압하지 못하는 대신 다른 정부나 단체에서 지구 임시정부를 지원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취했다. 또한 케촉 주석은 지구 방문을 몇 차례나 시도했으나 메르윈 정부의 방해로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한 채 몇십 년 동안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이 변방 행성에서 가난하고 쓸쓸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있었던 지구 방문이 무산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일곱 번째 방문 시도였다고 들었는데요.”
나는 이번 인터뷰의 계기가 되기도 했던 이 소식에 대해 물어볼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질문을 했으나 주석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언론에 알려진 공식 방문 시도가 일곱 번이지요. 실제로 저는 서른 번, 마흔 번, 그 이상으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지구로 가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때마다 메르윈 정부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그건 놀라운 발언이었다. 무엇 때문에 그는 지구로 돌아가려는 걸까. 무엇을 위해서 그는 이토록 노력하는 걸까. 처음 품었던 의문을 마침내 입 밖에 내어야만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솔직히 이 말을 직접 당사자에게 건네기란 참으로 어렵고도 미안한 일이었다. 그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나는 이 온유하고 다정한 노인을 한 인간으로 좋아하게 되었던 것이다. 솔직하고, 아이처럼 밝게 웃을 줄 알고, 진실을 밝히는 데 두려움이 없고, 자신의 의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말이다. 그런 그에게 지구인임을 자처하고 지구 반환을 요구하는 ‘속셈’이 뭐냐고 물어보는 건 실례를 넘어서 죄를 짓는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결국 호기심에 굴복한 나는 미리 준비해온 인터뷰 질문을 가장해서, 최대한 건조한 말투를 내려고 애쓰며 물었다. 메르윈 종족으로 사는 게 훨씬 유리할 텐데 왜 지구인임을 자처하며 도피생활을 하느냐고, 지구 반환을 요청한다고 메르윈이 순순히 포기할 리 없을 텐데 어째서 독립운동을 계속 하느냐고, 인권상을 받아 유명인사가 되었는데 어째서 이렇게 가난하게…… 나는 목이 메어 질문을 끝까지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노인은 손수건을 집어 들고 눈가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나이를 먹으니 눈이 시리고 눈물이 자주 흐르네요……. 저도 이제 늙었고 내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음을 느낍니다. 그저 죽기 전에 지구에 한번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면 소원이지요. 지금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구인임을 잊어가고 있습니다. 메르윈의 언어와 문물을 접한 아이들은 자기들이 메르윈 종족이라고 생각하며 자라나겠지요. 한 세대만 지나면 지구인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메르윈 정부가 모르는 게 있어요. 그들은 그저 내가 늙어 죽으면 모든 게 끝날 걸로 생각하고 있지만 틀렸어요.”
지구가 메르윈의 영토로 편입된 후 많은 지구인들이 은하연방 각지에 나가 있다. 그들이 자기들의 고향을 잊지 않고 자기 아이들에게 그 마음을 전해준다면, 자신이 지구인의 후손임을 잊지 않는다면 지구는 영원히 지구로 남아 있을 수 있으며 언젠가 메르윈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다. 주석은 그렇게 굳게 믿고 있었다.
예전의 나라면 이런 생각을 이상주의자의 낙관론이라며 비웃었을는지 모른다. 저도 모르게 그에게 감화된 지금도 그 순진한 믿음이 이루어지긴 힘들 거란 생각이 들기는 하다. 지금 지구인도 사실상 메르윈 종족의 후손인데 우주로 나간 이들이 과연 자신을 지구인이라고 생각할까. 더구나 메르윈이라면 어디가도 꿇리지 않을 세력인데 그런 특권을 포기하고 이름도 몰라줄 지구인을 자처할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참, 그런데 아까 외조부 이야기를 하셨지요.” 갑자기 그가 나를 보며 좀 전의 이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놀라게 했다.
“밤이 되면 혼자서 술을 대접에 담아 드셨다고…… 제가 알기로 메르윈들은 결코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혼자 있더라도 말이죠.”
옆에 앉아 있던 사진기자가 동의의 몸짓을 한다. 메르윈 종족도 아닌 주제에 나보다도 메르윈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자랑하던 사람이 말이다.
그런데 그게 어쨌단 말인가. 그렇다면 내 외할아버지는 메르윈 종족이 아니란 말인가? 이 은하연방에 푸른 털과 탐스런 꼬리를 가진 직립생물은 메르윈 종족 말고는 없을 텐데. 메르윈 종족과 똑같이 생겼으며 같은 핏줄에서 갈라져 나왔으면서도 이를 부정하는 종족은…… 지구인밖에는 없다.
나를 바라보는 노인의 깊은 눈동자는 바로 그런 사실을 내게 무언으로 전달하고 있었다. 굳이 그의 입이 움직이지 않더라도 나는 그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듣는다. 이 세상에 지구인은 얼마든지 있다. 바로 너의 외할아버지도 지구인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너도 다름 아닌 지구인의 후손이다.
설마라는 낱말을 입 안에서 몇 번이나 굴리면서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해보려 했다. 나는 부모님이나 그 누구에게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그렇지만 외할아버지가 지구인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주병에 걸려 고생하셨고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치매를 앓았다. 늘 말없이 방 안에 있었고 밤이면 식탁에 나와 홀로 술을 드시곤 했다.
가끔 방에다 오줌을 싼다는 이유로 부모님은 내가 외할아버지 방 근처에 얼씬대지도 못하게 막았다. 식사도 늘 어머니가 날라주어 방에서 혼자 드셨기에 지금 생각하면 외할아버지는 자기 방에 갇힌 죄수와도 같았다. 그런 그가 유일하게 집 안을 돌아다닐 수 있는 시간은 가족들이 모두 잠든 밤이었고 내가 그를 볼 수 있는 것도 그때뿐이었다. 그러나 외할아버지는 말을 할 줄 모르거나 실어증에 걸린 사람처럼 묵묵히 그저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돌아가실 때까지 외할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어본 일은 없었고 유품은 모두 부모님의 손에 의해 버려졌으며 방은 창고로 쓰였다. 외할아버지에 대한 내 기억은 그게 다였다.
“이거, 시간이 너무 늦었군요. 내일 돌아가셔야 할 텐데 오래 붙잡아두고 있어서 죄송합니다. 또 물어보실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자리를 정리하며 주석이 말했다. 나는 그저 멍청하게 고개를 저었다. 외할아버지의 일로 혼란스러워서 인터뷰에 대한 것도 잊어버릴 지경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아까 하신 질문에 대답을 드려야겠는데…… 대신 오히려 제가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만약 외조부께서 지구인이었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지구인의 후손임을 주위에 밝힐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사실을 숨기고 계속 메르윈으로 사실 수도 있겠지요. 분명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메르윈으로 사는 게 더 유리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저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지구에서 나고 자랐음을 잊지 않는다면 그는 지구인이고, 지구에서 살지 않더라도 지구인의 후손임을 잊지 않는다면 그 역시 지구인이라고 말이지요.”
그의 목소리가 아득히 먼 우주 저편에서 들려오듯 몽롱한 내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사진기자가 내 몸을 일으켜줄 정도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 사이엔가 인터뷰를 마치고 우리는 사무실을 나서고 있었다. 나는 밤늦은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던 임시정부 직원 두 사람에게 사과의 말을 건네었고, 사진기자는 괜찮다며 밝은 미소를 보여준 그들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았다. 마지막으로 현관에서 우리를 배웅하며 주석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나에게만 들리도록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인터뷰를 하게 되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생명은 언젠가 사라지고 저도 예외는 아니겠지요. 하지만 글은 생명보다 오래 살아남습니다. 저는 글의 힘을 믿으니까요. 제 기억과 영혼의 일부가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로 전해질 것입니다……. 좋은 기사를 쓰시길 바라고 있겠습니다. 가시는 길 편안하시길…….”

* * * * * * * * * *


돌아오는 궤도 운항선의 불편한 좌석에서 나는 눈을 감고 노인과의 만남을 되새기고 있었다.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그와의 만남은 신비로운 영적 체험처럼 느껴졌고, 수많은 책과 낡은 종이의 숲 속에서 책 곰팡이 냄새에 감싸인 채로 만난 케촉 주석은 마치 고대 신화 속에서 나온 현신(顯身)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 깊이 무겁게 자리 잡은 건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외할아버지였다. 대접에 술을 담아 마시던 케촉 주석의 모습이 똑같은 방식으로 술을 마시던 외할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지며 그들 두 사람이 어쩐지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마치 물 속에서 들여다본 것처럼 흐릿하게 일렁이는 외할아버지의 모습만이 내 주위를 감싸며 흐르고 있었다.



정말로 외할아버지는 지구인이었을까. 어쩌면 그저 술을 좋아하는 메르윈 종족일지도 모른다. 이미 세상에 증거는 남아 있지 않으니 알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어쩌면 어머니는 뭔가 알고 계실지 모르니 이번에 집에 돌아가면 꼭 물어봐야겠다. 그동안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던, 물어보지도 않던 내 가계와 핏줄에 대해서 말이다.그 결과가, 진실이 무엇이든 좋다. 비록 내가 지구인의 후손이 맞을 가능성만큼이나 아닐 가능성 또한 높겠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나는 노인의, 어린 케촉의 이야기에 깊은 흥미와 교감을 느꼈다. 이미 그의 기억과 영혼의 일부가 지금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는 걸 느낀다. 그 흐름이 끊기지 않고 이어져 강을 이루고, 은하수가 되어 우주 너머로 흐를 수 있기를. 그런 바람을 담아 나는 이 이야기를 되도록이면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이 우주 어딘가에 있을 지구의 아이들에게. 

댓글 0
  • There is no comment.

댓글을 작성하기 위해 로그인을 해주세요

registrant
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