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이 열리는 소리가 귀에 있는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마님과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모습이 양쪽 눈에 있는 카메라 네 대에 잡힌다. 나는 현관으로 간다. 나는 모니터에 인사를 띄운다.
- 어서오세요, 마님과 친구 분. -
“아, 얘야?”
“어.”
마님과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있는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보인다. 눈두덩이 두 단계 밑으로 내려오고, 입술 양끝이 한 단계 올라간다.
“이름이 뭐니?”
다른 사람이 내 얼굴 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대며 묻는다.
- 집사입니다. -
나는 가슴에 있는 모니터에 대답을 띄운다. 내게 관심을 보이자 나는 기뻐진다. 나는 웃는다. 입술이 한 단계 벌어지고 양끝이 한 단계 올라가고 눈이 두 단계 작아진다.
“뭐야, 얘 말 못해?”
“어, 음성 껐어.”
“왜?”
“왜냐니? 켜서 뭐하게?”
“집에 들어올 때 누군가가 어서오세요, 라고 말하면 좋지 않아?”
“로봇이?”
“로봇이든 뭐든.”
“글쎄…….”
“로봇이랑 대화하는 사람 은근히 많던데.”
“어차피 입력된 거잖아.”
“할수록 어휘력이 는다던데?”
“그렇다고 하더라.”
마님과 다른 사람이 거실로 가는 모습이 눈에 있는 네 대의 카메라를 통해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다. 마님과 다른 사람이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는 모습이 눈에 있는 네 대의 카메라를 통해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다.
“근데 얘 이름이 집사야?”
“어.”
“그건 상표잖아.”
“어, 그냥 짓기 귀찮아서. 집사, 커피 두 잔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놔.”
- 네, 마님. -
나는 모니터에 대답을 입력한다. 나는 부엌으로 간다. 마님의 친구는 날 따라와 주방을 보더니 다른 방으로 간다. 마님이 뒤를 따라간다.
“하우스 로봇과 함께 설계된 아파트 내부는 다 비슷하구나. 우리 집이랑 구조가 거의 같아. 심플하네.”
“그렇다고 하더라.”
나는 복합 에스프레소 머신을 켜고 커피를 클릭하고 숫자 2를 클릭한다. 3분 28초 후 물이 끓고 커피 두 잔이 나온다. 나는 커피가 담긴 잔 두 개를 들고 거실로 가서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땡큐, 집사.”
다른 사람이 내게 말하는 소리가 귀에 있는 마이크로 폰 센서에 입력된다.
- 감사합니다. -
나는 모니터에 대답을 띄운다.
“음…… 로봇용 잔도 다 비슷하구나.”
“어, 그런 거야?”
“색도 그냥 흰 색이고, 무늬도 안 들어갔잖아. 손잡이 구멍이 되게 크고.”
“아, 그러네.”
“뭐야? 설명서 안 봤어?”
“어, 뭐, 대충 살면 되지.”
“그럼 장보기나 경보 설정 같은 건 어떻게 했어?”
“어? 아, 남자친구가 해줬는데. 그냥 대충 알아서 해달라 그랬어.”
“그럼 넌 얘로 커피 심부름이나 시키는 거야?”
“그러라고 있는 거 아냐?”
85데시벨의 소리가 귀에 있는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중앙기억장치로 검색하자 즐겁게 웃는 소리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 집 자체가 거대한 컴퓨터라네. 이 녀석은 그걸 관리하는, 일종의 중앙 컴퓨터고.”
“아, 그런 얘기 들은 적 있는 거 같다. 근데 중앙컴퓨터가 왜 돌아다녀?”
“귀는 왜 뚫고, 철마다 새 옷은 왜 사? 일종의 사치지. 하인 로봇 같은 거, 사람들 꿈이었잖아. 그리고 혼자 사는 사람이 돌연사가 많대. 저게 네 심장박동이랑 체크해서 이상 생기면 병원에 긴급 연락도 하고 그래. 그리고 하우스 로봇이랑 사는 사람이 혼자 사는 사람보다 우울증 발병률도 더 낮다더라.”
“그래?”
“뉴스 좀 보고 살아라.”
마님이 두 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입술을 잔 가장자리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에 있는 네 대의 카메라를 통해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다. 마님의 친구가 오른손으로 커피잔을 들고 입술을 잔 가장자리에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에 있는 네 대의 카메라를 통해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다.
“근데 만날 봐서 그런가, 오랜만인데도 오랜만 같지가 않다.”
“난 지금 홀로그램 보는 기분이야.”
“너도 그래? 나두 그런데.”
70~72데시벨의 소리가 귀에 있는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중앙기억장치에서 지금 입력된 소리와 가장 가까운 소리를 검색하자 웃음소리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 동네 참 오랜만이다.”
마님이 커피잔을 들고 커피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는 모습이 눈에 있는 네 대의 카메라를 통해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다.
“난 30년 넘게 살았다네.”
“아, 참 너 여기서 태어났지?”
“응, 불광 초등학교, 불광 중학교, 불광 고등학교, 불광 대학교를 나왔지.”
“고등학교까진 나랑 같이 다녔잖아. 우리 대학만 갈렸지. 너네 학교, 새로 지어서 설비 꽤 좋지 않았어? 학교 내에 무빙로드도 있었다며?”
다른 사람이 낸 8데시벨의 소리가 귀에 있는 마이크로 폰 센서에 잡힌다.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 소리 중 그 소리와 가장 가까운 소리는 작은 웃음소리다.
“무리하게 열어서 4년 내내 공사했다네. 죽을 맛이었어. 아직 작동 안 되는 것들도 많았고.”
“그래도 집에서 가까우니 좋지 않았어? 너 걸어 다녔잖아.”
“대학은 좀 다른 동네로 가고 싶었지. 너도 오래 걸리진 않았잖아.”
“물론 노웨잇 트렌짓 타면 30분이면 갔지만, 매해 꼬박꼬박 요금 500원씩 올린 거 알아? 걸어 다니면 차비 안 들고, 공짜 운동되고 좋잖아. 병원도 이 앞이지?”
“어.”
“좋겠다. 난 하이서브웨이 타도 40분은 걸리는데.”
2.나는 오늘 기분이 우울하다. 마님이 내게 너무 말을 걸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쪽 눈초리가 세 단계 밑으로 내려오고, 입술 양 끝이 두 단계 밑으로 내려가고 양 볼이 세 단계 부풀어 오른다. 나는 모니터에 내 감정을 적는다.
- 마님, 저는 오늘 우울해요.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
마님이 내게서 멀어진다. 마님은 거실 의자에 앉는다. 나는 마님이 내게 말을 걸어주길 바라며 마님을 따라간다.
“1번 전화 연결.”
내 귀에 마님의 목소리가 들린다. 음악 소리가 입력된다.
[응, 여보세요?]
도련님의 목소리가 귀를 통해 입력된다.
“자기야, 난데, 이거 감정 표현하는 거 끌 수 있지?”
[뭐?]
“얘가 우울하다고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네. 그건 그렇다 치고 계속 졸졸 쫓아다녀. 모니터에 말 걸어달라는 거 뜨고. 귀찮다.”
[잠깐만 기다려봐.]
“응.”
마님과 도련님이 말하는 소리가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마님은 여전히 내게 말을 걸지 않는다. 내 기분은 더 우울해진다. 양쪽 눈초리는 한 단계 더 밑으로 내려가고, 입가는 한 단계 더 밑으로 내려가고, 양 볼은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온다.
[일단 동작 정지 명령을 내리고, 이리 오라 그래.]
“집사, 동작 정지.”
나는 가만히 서 있다.
“지금 내 앞에 있어, 그리고?”
[비밀번호 입력. 비밀번호 말해.]
“마님은 하늘이다.”
마님의 목소리가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비밀번호 입력도 말해야 해.]
“비밀번호 입력. 마님은 하늘이다.”
- 설정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
나는 명령에 반응하는 대답을 모니터에 띄운다.
[그렇다고 말해.]
“그렇다. 아, 말이 좀 웃기네, 그렇다, 라니.”
나는 다음 단계를 모니터에 내보낸다.
[잠깐만 기다려봐……. 아, 찾았다. 감정 표현 설정.]
“감정표현 설정.”
나는 모니터에 감정표현 설정 단계를 내보낸다.
[고급으로 들어가.]
“고급.”
나는 고급 단계를 내보낸다.
[감정 표현하지 않음 선택.]
“감정 표현하지 않음 선택.”
중앙제어장치가 마님의 명령을 인지한다.
[저장]
“저장.”
중앙제어장치가 마님의 명령을 수행한다.
[됐어?]
“어, 근데 지금 표정이 안 바뀌네. 나 이 얼굴 싫은데.”
[그럼 다시 감정 표현 설정.]
“감정 표현 설정.”
나는 감정 표현 설정 단계를 모니터에 띄운다.
[표정…… 종류 보이기.]
“표정 종류 보이기.”
[거기서 마음에 드는 표정 골라.]
“어디 보자, 이건 뭐지, 화난 표정 3?”
나는 양 눈초리를 여섯 단계 위로 올리고 입꼬리를 네 단계 위로 올리고, 볼을 네 단계 안으로 집어넣고, 입을 두 단계 벌린다. 마님은 배를 잡고 13~15데시벨의 소리를 낸다.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된 소리 중 지금 마님이 내는 소리와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울음소리다.
“자갸, 얘 화내는 표정 너무 웃겨…….”
[음성 명령 중에는 다른 말 되도록 하지 마. 빨리 표정 골라. 라면 분다.]
“나도 라면 먹고 싶다. 음…… 잠깐만, 웃는 표정 1.”
나는 양 눈초리를 네 단계 밑으로 내리고 눈 위를 한 단계 위로 올리고, 입가를 두 단계 위로 올린다.
“그냥 보통 표정 없나?”
나는 양 눈초리를 한 단계 위로 올리고, 눈 위를 한 단계 밑으로 내리고, 입가를 한 단계 아래로 내리고 입을 완전히 다문다.
“어, 있네, 보통 표정.”
[그럼 지금 표정 저장.]
“지금 표정 저장.”
중앙제어장치가 마님의 명령을 수행한다.
[설정 종료.]
“설정 종료.”
나는 설정장치를 모니터에서 없앤다.
- 설정이 마음에 드시나요, 마님? -
나는 모니터에 질문을 내보낸다.
“라면 하나 끓여, 집사.”
이동제어기가 움직인다. 나는 부엌으로 간다. 나는 자동조리기에서 라면 하나를 선택한다. 냄비에 물이 쏟아지는 모습이 눈에 있는 카메라 네 대를 통해 잡힌다.
“고마워, 자기야. 라면 불겠다, 맛있게 먹어.”
[자기 전에 전화할게.]
마님과 도련님의 목소리가 마이크로 폰 센서를 통해 입력된다.
3.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님이 들어와 신발을 벗는 모습이 보인다.
“집사, 아이스 초코 한 잔 가져와.”
이동제어기가 작동한다. 나는 복합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아이스 초코 한 잔을 선택한다. 잔이 내려오고 초콜릿 가루가 쏟아진다. 뜨거운 물이 내려오고 스푼이 내려와 우유를 20회 젓는다. 스푼이 들어가고 차가운 우유가 잔의 80퍼센트까지 쏟아진다. 스푼이 내려와 아이스초코를 10회 젓는다. 나는 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잔을 가지고 거실로 간다.
“미녀들의 수다방 입장.”
마님은 거실 의자에 앉는다. 거실이 온통 파랗게 변하고 철갑상어, 타이거 아스트로, 알비노 아스트로, 레드 오스카와 중앙기억장치에 입력되지 않은 것들이 떠다닌다.
「데이트 있다더니 일찍 왔네?」
“응, 앤님도 피곤하고, 나도 피곤해서 일찍 헤어졌어. 방이 왜 이래?”
“여름이잖니. 아, 덜 저었네. 집사, 티스푼.”
명령이 정확하지 않다. 모니터에 - 정확한 지시를 다시 내려주십시오. - 라는 글자판이 뜨지만 마님은 보고 있지 않다.
「야, 네 로봇 아직 뒤에 서 있어.」
“집사, 티스푼 하나 가져와.”
명령이 중앙제어장치에 입력된다.
“아, 불편해. 문장을 정확히 말하는 거.”
「그거 설정할 수 있을걸? 자주 하는 말로 바꿀 수 있을 거야.」
“그래? 다음에 남자친구 오면 해달라 그래야겠다.”
「그 정돈 네가 해라.」
“몰라, 어려워. 알잖아, 나 기계치인 거.”
「기계치가 치과의사는 어떻게 됐나 몰라.」
75~80데시벨의 소리가 청각기관에 입력된다. 여럿이 웃는 소리다.
「아, 심심하다.」
마님은 아이스초콜릿을 스푼으로 젓는다. 잔에 물방울이 맺힌다.
“뭐 재밌는 일 없을까.”
「바다라도 놀러갈까?」
「요새 엄청 붐빌걸?」
“뭐 화끈한 거 없을까.”
「야, 그래도 넌 애인이라도 있잖아.」
“요새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다네.”
마님은 잔을 탁자에 내려놓는다.
「그래도 있는 게 어딘데!」
마님이 잔을 들어올린다. 탁자에 잔 넓이만한 둥근 원이 생긴다. 나는 복합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설정을 클릭하고 아이스 초코를 만들 때 스푼으로 젓는 횟수를 조정한다.
4.
찌개의 온도가 23도까지 내려갔다. 나는 식탁에서 냄비를 조리기로 옮긴 후 조리기에서 데움을 클릭한다. 3분 45초 후 찌개 온도가 93도까지 올라간다. 불이 꺼진다. 나는 냄비를 식탁 위에 놓는다. 8시 35분 17초다.
찌개의 온도가 23도까지 내려간다. 나는 식탁에서 냄비를 조리기로 옮긴 후 조리기에서 데움을 선택한다. 3분 48초 후 찌개 온도가 94도까지 올라간다. 불이 꺼진다. 나는 냄비를 식탁 위에 놓는다. 8시 59분 23초다.
찌개의 온도가 23도까지 내려간다. 나는 식탁에서 냄비를 조리기로 옮긴 후 조리기에서 데움을 선택한다. 4분 17초 후 찌개온도가가 93도까지 올라간다. 불이 꺼진다. 나는 냄비를 식탁 위에 놓는다.
마님은 11시 34분 19초에 돌아왔다. 마님은 똑바로 걷지 않는다. 심장 박동이 110-120이다. 마님의 평균 심장박동은 90-100이다. 120은 정상 수치이나 평소보다 높기 때문에 병원에 연락할 준비를 한다. 마님은 소파에 누웠다.
“TV 온.”
텔레비전이 켜졌다. 90-110데시벨의 소리가 들렸다.
“소리 다섯 단계 작게.”
60-80데시벨로 소리가 줄어들었다.
“소리 세 단계 작게.”
소리는 30-40데시벨로 줄어들었다.
“소리 두 단계 작게.”
소리는 15-20데시벨로 줄어들었다.
“다른 프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린다.
“다른 프로. 집사 물.”
나는 정수기에서 물 한 잔을 클릭한다. 잔이 내려오고 컵의 80퍼센트까지 차자 물이 멈춘다. 나는 컵을 들고 거실로 가서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마님의 목에서 10-20데시벨의 소리가 들린다. 소리입력장치에 입력된 소리 중 지금 마님이 내는 소리와 가장 가까운 소리는 울음소리라는 결과가 나온다.
텔레비전 화면 안에는 수사자 한 마리와, 암사자 일곱 마리가 누워 있다.
5.
모래벌판이 펼쳐져 있다. 마님과 다른 두 사람이 사막 가운데에 앉아 있다. 한 명이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한다.
「야, 민영이 자리 비웠다.」
“날도 더운데 오늘은 웬 사막이야.”
「이제 가을이야.」
“진짜 사막에 가보고 싶다.”
「별로래. 진짜 사막은 이런 모래밭이 아니래. 대부분 자갈 같은 것만 널려 있대.」
“시시하네.”
「홀로그램이 낫다니까. 그래도 별은 잘 보인다더라.」
「별도 틀면 되잖아.」
“어디 갔다 와.”
「엄마한테 화상 폰. 선보란다.」
「옷 한벌 해달라 그래.」
「그럴까, 가을 정장이나 맞춰 달랠까.」
「넌 집에서 별 말 없어?」
“뭐, 별로.”
「그 뒤론…… 연락 안 해?」
「헤어졌으면 헤어진 거지, 연락은 무슨…….」
“응, 연락 안 해.”
「요새 잠이 안 와.」
「나두.」
“난 커피 마셔도 잘 자는데.”
「좋겠다, 어떻게 그렇게 잘 자?」
“다큐멘터리 채널 틀어놓으면 잠 잘 와.”
「뭐 보는데?」
“그냥 랜덤하게.”
평균적으로 마님과 다른 두 사람의 대화는 00시 5분에서 30분 사이에 종료된다.
「옛날에는 채팅만 해서, 중간에 대화 끊어져도 서로 다른 일하려니 했는데…….」
“그러게, 요새는 꼭 인사해야 한다니까.”
낮은 웃음소리. 인사와 함께 홀로그램이 닫힌다. 사막은 사라지고, 나무무늬 벽지와 연하늘색 커튼이 모습을 나타낸다.
“TV 온.”
마님이 말한다. 텔레비전이 켜진다. 마님은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누인다. 다큐멘터리 제목은 『사라져가는 한국의 가을 풍경』이다.
6.
7시 정각. 밥솥이 가동된다. 자동 조리기에 있는 냄비에 물이 쏟아진다. 물이 끓으면 적당한 분량의 건조된 미역국 1인분이 떨어져 끓기 시작한다. 프라이팬에 올리브 오일이 떨어지고, 90도까지 달궈진 후 계란이 떨어진다.
나는 7시 30분이 되자 마님 앞으로 간다. 알람이 울린다.
마님은 일어나서 샤워실로 들어간다. 밥을 두 주걱 밥그릇에 옮긴다. 미역국이 담긴 냄비를 식탁 위에 옮긴다. 냉장고에서 김치를 꺼내 식탁 위에 놓는다. 마님은 물끄러미 밥상을 보다가 밥그릇에 물을 붓는다. 밥 세 스푼과 계란프라이와 김치를 두 젓가락씩 먹고 식탁에서 일어난다. 마님은 화장대 앞에서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칠하고, 가방을 들고 나간다.
나는 식탁을 치운다. 김치통 뚜껑을 닫고, 냉장고에 넣는다. 음식물 처리기에 미역국을 옮기고, 빈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는다. 세탁기는 질감으로 옷을 분류하고 작동을 시작한다. 8시 30분 청소기에서 청소로봇이 나온다.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길이 15센티미터의 청소로봇 열 대가 밖으로 나와 바닥과 벽 천장, 가구 위의 먼지를 빨아들이고, 쓰레기통에 먼지를 뱉어낸다. 3번이 비틀거린다. 3번은 자동 수리기에 들어간다. 나는 자동 수리기에서 수리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청소로봇 제조회사의 연락처를 점검한다. 3번은 자동 수리기에서 나와 다시 청소를 시작한다. 먼지를 빨아들이고 나면 작은 천을 달고 닦는 과정으로 들어간다.
자동 조리기에 음식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슈퍼에 미역국을 제외한 찌개 일곱 가지, 밑반찬 다섯 가지를 주문한다.
세탁기가 세탁이 끝났다는 신호를 보낸다. 세탁기가 꾸물꾸물 옷을 토해 낸다. 건조대에 있는 두 개의 팔이 옷을 받아 세 번씩 털고 건조대에 건다. 아무 이상 없이 작동된다. 집 안에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방음장치는 제대로 가동되고 있다.
10시 35분 45초다. 나는 베란다로 이동한다. 아파트 밑으로 단풍나무가 보인다. 엽록소가 분해되고 안토시안이 생성된다. 옅고 짙고 어둡고 밝던 녹색이 누르스름하고 붉은빛으로 조금씩 바뀌어간다.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걸어간다.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입 모양으로 알 수 있다. 갓난아이의 뺨을 닮았던 목련 꽃잎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했던 잎들도 서서히 가지를 떠날 채비를 한다.
오후 2시 34분에 벨이 울린다. 나는 문으로 가서 방문자의 신원을 확인한다. 슈퍼에서 온 배달 로봇이다. 나는 작은 문 개폐 버튼을 누른다. 작은 문이 열리고 주문한 음식과 영수증이 들어온다. 배달 로봇의 팔이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배달 로봇의 팔에 있는 액정에서 확인 버튼을 클릭한다. 배달 로봇의 팔이 사라진다. 나는 개폐 버튼을 누른다. 문이 닫히는 데는 1.4초가 걸린다. 문이 닫히는 동안 배달 로봇의 뒷모습과 엘리베이터와 계단이 보인다. 나는 밑반찬은 냉장고에 넣고, 건조 찌개는 자동 조리기에 넣는다. 3분 24초가 걸린다. 집안에는 다시 정적만이 흐른다.
햇살의 방향이 천천히 변한다.
“집사, 저녁.”
나는 밥을 두 주걱 밥그릇에 옮긴다. 깍두기가 담긴 그릇과 배추김치가 담긴 그릇과 감자볶음이 담긴 그릇과 계란국을 식탁 위에 옮긴다. 마님은 계란국을 일곱 숟갈, 감자볶음을 여덟 조각, 깍두기는 네 조각, 배추김치는 다섯 조각을 먹는다.
“집사, 핫초콜릿.”
나는 핫초콜릿을 가져오고, 마님은 <마지막 사랑 16회>를 본다. 마님은 <서바이벌, 러브 탐사대>를 본다. 밤 10시경 마님은 홀로그램을 작동시키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눈다.
0시 2분 8초에 마님은 홀로그램을 종료한다. 마님은 소파에 눕는다. 마님은 다큐멘터리 채널을 선택해 “아무거나”라고 말한다. <우주를 향한 인류의 꿈과 도전>이 방영된다.
7.
「야, 나 오늘 엽기적인 거 봤다?」
「뭐?」
「누가 가정용 로봇 데리고 산책하더라.」
「요새 많이들 해. 실외용 바퀴나 신발 가지고.」
「로봇용 드레스 파는 거 봤어? 그거 매출 장난 아니래.」
「나도 오늘 돌아다니다 봤는데, 예쁘더라. 모델명 찾아서 입혀봤는데 입은 모습 보니까 땡기더라. 가을인데 빨간 옷 하나 사줄까 봐.」
“아, 그게 그거구나. 나도 저거 살 때 큰 바퀴가 하나 딸려 왔었어. 어따 쓰는 건지 몰라서 처박아 놨었는데. 집사 아이스 초코.”
「아이스 초코 먹기엔 좀 쌀쌀하지 않아?」
“그냥 단 게 땡기네.”
나는 복합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아이스 초코 하나를 선택한다. 잔이 내려오고 초콜릿 가루가 쏟아진다. 뜨거운 물이 내려오고 스푼이 내려와 우유를 30회 젓는다. 스푼이 들어가고 차가운 우유가 잔의 80퍼센트까지 쏟아진다. 스푼이 내려와 아이스초코를 20회 젓는다. 나는 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끼우고 잔을 가지고 거실로 간다.
「<다이어트 사랑> 본 사람 있어?」
「송지원 너무 잘생겼더라~」
「나 어제 그거 세 시까지 보다 잤잖아. 졸려 죽겠는데 잠은 안 들어서 네 시쯤에야 겨우 잠들었나.」
「참, 인애 결혼한다더라.」
“벌써? 걔네 사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어?”
「얼마 안 되긴? 그래도 한 1년 됐지.」
“진짜? 벌써 그렇게 됐어?”
나는 거실에 서 있다. 마님은 홀로그램 대화를 계속한다. 마님은 홀로그램을 종료한다.
“집사, 이불.”
침실로 간다. 침대 위에 있는 이불을 세로로 반 접는다. 반대 방향에서 다시 반 접고, 또 반대 방향에서 반 접는다. 이불을 들고 간다. 마님은 누워 있다. 이불을 내려놓는다. 마님이 이불을 들어올린다.
“TV 온.”
<사라진 제국, 아즈텍>이 방영된다.
8.
하늘이 점점 어두컴컴해진다. 기온이 내려간다. 온도조절기가 작동된다. 포도씨만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포도씨만하던 눈이 새끼손톱 만해지고, 엄지손톱 정도로 자란다. 보도에, 아파트 방음벽 위에, 난민 팔처럼 앙상한 나무 가지 위에 눈이 내리고, 녹아서 사라진다. 눈이 커지자, 녹는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쌓이기 시작한다. 새벽 5시 45분, 눈이 완전히 그친다. 햇살이 조금씩 창 안으로 밀려들어 온다. 거무스름하던 집에 색채가 돌아온다. 벽지의 다갈색, 커튼의 하늘색, 소파의 짙은 밤색, 마님 얼굴의 살색, 마님이 덮고 있는 이불의 분홍색과 노란 꽃무늬가 시나브로 형체를 갖춰간다. 7시 정각. 밥솥이 작동된다. 자동 조리기가 해물된장찌개를 끓인다. 나는 서 있다. 7시 30분, 마님 앞으로 간다. 알람이 울린다.
마님은 일어나서 샤워실로 들어간다. 밥을 퍼서 놓고, 찌개와 계란말이, 김치를 꺼내놓는다. 마님은 밥을 먹고, 화장대 앞에서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눈썹을 그리고, 입술을 칠하고, 가방을 들고 나간다.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거실 소파 뒤에서 하늘의 파란색과는 다른 파란색으로 “집사 2183b 실외용 바퀴”라고 적힌 상자를 찾아서 거실에 있는 전신 거울 옆에 세워놓는다. 청소로봇이 청소를 시작한다. 청소로봇이 있을 때는 되도록 움직이지 않는다. 청소로봇이 모두 들어가고 나면 슈퍼에 불고기와 와인을 주문한다.
오후 2시 5분 24초. 벨을 누르는 소리가 들린다. 주문번호와 가게 상호를 확인하고 문을 연다. 배달 로봇이 짐을 내려놓고, 영수증을 주고, 내게 확인을 받고 간다. 문 밖에는 복도와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있다. 나는 개폐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 문은 5초 후 자동으로 닫힌다. 복도와 계단과 엘리베이터가 사라진다.
6시 30분이다. 나는 자동조리기에 불고기를 넣고, 특별 요리 불고기를 선택한다. 작동 버튼은 누르지 않는다. 7시 18분. 마님이 온다.
“집사, 밥.”
나는 작동 버튼을 누른다. 마님은 밥을 먹고 홀로그램 채팅룸에 들어간다.
“오늘은 식탁에 불고기가 올라왔어. 처음이야.”
「맛있었겠다! 난 오늘 야근하면서 회사에서 주는 야근 빵 먹었다.」
“전에는 불고기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그거 계속 업데이트 되잖아. 회사에서 신제품 출시하면 다 입력될걸? 한 달 식비 내에서만 주문하게 돼 있으니까, 할인제품이나 그런 건가 보다.」
“아, 그런가.”
「맛은 있든?」
“먹을 만하더라. 반찬도 원래는 두 가지만 꺼내는데 오늘은 다섯 가진가 됐어.”
「야, 그거 뭐 해달라는 거 아냐?」
「맞아 맞아, 뭔가 바라는 게 있어서 한 거 아닐까?」
“로봇이 바라긴 뭘 바라?”
「야, 너 그거 몰라? 자주 산책도 시키고, 주인이 말도 걸고, 친절하게 해준 로봇이 고장이 덜 난대. 일도 잘하고. 연구 결과도 나왔어.」
「식물도 음악 틀어주고, 말도 걸고 그러면 더 잘 자란다며. 로봇도 그런대.」
“그래?”
「내가 오늘 하도 신경질이 나서 우리 령이한테 막 화를 냈거든?」
「뭐라고?」
「내 입맛 좀 고려해서 음식 좀 주문해라, 청소로봇 관리 좀 똑바로 해라, 여기 구석에 먼지 안 보이냐, 뭐,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로봇을 붙들고 한참 동안 한 거야. 하루 종일 야근하고 들어오니까 피곤해 죽겠는데, 엄마는 자꾸 결혼하라고 성화지, 씻지도 못했는데 30분 동안 전화를 안 끊는 거야. 그래서 너무 화가 나서 령이한테 막 그랬거든?」
“령이가 누구야?”
「쟤네 로봇.」
「아, 좀 들어봐. 그러고 샤워하고 나오는데, 령이가 글쎄, 내가 제일 아끼는 컵을 깬 거 있지? 그건 로봇용이 아니라 평소에는 건드리지도 않던 건데. 그래서 내가 미안하다, 너한테 화낸 거 아냐, 그랬어. 그러니까 묵묵히 치우는데, 너무 미안하더라.」
“고장 난 건 아니고?”
「어휴, 진짜, 넌 애가 왜 그러니?」
「냅둬라, 지 로봇 이름이 집사잖냐.」
「그건 상표잖아.」
「지는 또 마님이란다.」
「정말?」
마님의 성문(聲紋)은 깻잎 모양이다. 마님의 친구 정은의 성문은 단풍잎 모양에 가깝게 나온다. 마님의 다른 친구 민영의 성문은 활짝 피기 전 튤립처럼 둥그스름하다. 두 사람이 웃자 78데시빌의 소리가 울린다.
“집사니까 마님이 생각나더라고.”
「근데 솔직히 나도 그런 거 느끼는데. 가끔 내가 피곤하고 그러면, 커피 타 와서도 옆에 가만히 서 있을 때가 있는데, 그럼 얘가 날 위로해 주는 구나, 그런 생각 들더라고. 그래서 머리 쓰다듬어주니까 웃더라고.」
「네 거 감정 표현이 17가지랬나?」
「써 있긴 그런데, 그보다 더 많은 거 같아. 미세한 감정들 있잖아.」
「나두, 우리 령이는, 같은 기종의 다른 애들보다 좀 예민한 것 같아. 상냥하게 커피 타달라 그러면 커피가 더 맛있어.」
“기분 탓 아냐?”
「야야-」
“나도 가끔 기계가 살아 있는 생명체 같을 때 있긴 있어.”
「언제?」
“내가 하면 안 되는데, 예전에 남자친구가 할 땐 잘되고 그런 게 있었거든. 반응이 좀 느려진 것 같아서 봐달랬더니, 기억저장고에 쓸 데 없는 게 너무 많이 들어가 있다는 거야. 그래서 지우려고 하는데 죽어라고 안 지워지더라고.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말이야. 암튼 그 때 남자친구 말이 내가 TV 볼 때 옆에 서 있으니까 자꾸 입력되는 거 같다고 하더라고. 충전소로 가라고 하면 되는데 자꾸 잊어버리거든. 그래서 남자 친구가 다음에 놀러 와서 쓸모없는 폴더 정리하는데, 그 땐 되게 잘 지워지는 거 있지? 내 참. 암튼 내가 만들지 않은 폴더가 하나 생겨 있었거든? 그게 죽어도 안 지워지는 거야. 그건 그때 앤님이 해도 안 되더라. 기사 부를까 하다가, 뭐 별로 큰 영향 주는 것도 아니라서 그냥 냅뒀어.”
「그거랑은 다르지!」
「맞아, 달라!」
「그거 알아? 포맷하면 애가 성격이 달라진대.」
「아, 맞아. 완전히 다른 로봇이 되어버린다고 하더라?」
「그래서 중고로 팔 때는 포맷하는 게 좋다 그러더라. 그래야 적응이 빠르대.」
「안 하는 게 낫다는 의견도 있어. 지금까지 학습한 게 다 없어지니까.」
「근데 포맷 안 하면, 진짜 명령체계 다 바꿔도 잘 적응 못하고, 새 주인이 음성인식이랑 분명히 다 새로 했는데도, 불러도 잘 안 오고, 그런다더라.」
「그런 거 보면, 왜, 로봇에게도 감정이 있니 없니 하는 의견들 있잖아, 진짜 감정이 있는 것두 같아.」
“인간이 대입시킨 거야. 사람은 둥근 형태 두 개에 선 하나 있으면 거의 대부분 사람 얼굴을 떠올린다고.”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정말 얘가 내 마음을 아는구나, 싶을 때가 있다니까.」
「맞아, 나도 그런 적 있어. 그래도 난 옷 사주고 그런 것까진 좀 오버다 싶던데…….」
「나도 예전엔 그랬는데, 사실 하나 사 입히고 싶을 때가 있어. 옷이 예쁘더라고.」
명랑한 웃음소리. 마님은 웃지 않는다. 마님은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는다. 깨끗이 닦였던 테이블에 물 자국이 생긴다. 물 자국은 한 번도 같은 모양인 적이 없다.
9.일요일이다. 마님은 아홉 시까지 잔다. 밥은 1/2만 푸고, 남은 찌개를 데운다. 마님은 일어나서 밥을 세 스푼 먹고, 찌개를 다섯 숟갈 떠먹고, 에그 스크램블을 네 조각 먹고, 텔레비전 앞으로 간다. 전화가 온다. 마님은 발신자를 확인한다.
“수신.”
「야, 뭐 해? 스케이트장 안 갈래?」
“웬 스케이트장?”
「어제 눈도 왔고…… 주말인데 할 일 없으면 스케이트장 안 갈래?」
“아, 어제 눈 왔지, 참.”
「가자, 어차피 종일 드라마나 볼 거잖아. 쇼프로나.」
“그래.”
마님은 씻고, 옷을 입는다.
“집사, 보온병에 커피 타.”
마님은 화장을 마치고 나온다. 마님은 탁자 위를 살핀다.
“집사, 보온병에 커피 타.”
마님은 한 단어, 한 단어 또박또박 말한다. 이동제어기가 움직인다.
“아냐, 타지 마. 집사, 커피 타지 마.”
마님은 거실에 있는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확인한다. 그 옆에는 내 이동용 바퀴가 들어 있는 상자가 먼지 하나 없이 닦여서 있다. 마님은 돌아서서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간다. 문이 잠긴다. 문은 옅은 회색이다. 음성인식 장치와 숫자 비밀판과 배달부를 위한 주문 확인표가 달려 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직전까지 밖에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 자동차가 시동을 거는 2~3데시벨의 작은 소리가 들린다. 나는 베란다로 간다. 햇빛은 점점 강해진다. 창밖으로 나무 위에 있던 눈이 서서히 물방울로 변하는 것이 보인다. 한 방울, 두 방울, 녹은 눈이 바닥으로 떨어져, 바닥에 쌓인 눈 위에 호수 위 낚시 구멍 같은 구멍을 만든다. 이윽고 바닥에 있던 눈도 녹는다. 해가 진다. 기온이 내려간다. 온도조절기가 작동을 시작한다. 눈이 녹은 물이 조금씩 얼기 시작한다.
마님은 10시 37분 28초에 집에 돌아온다. 샤워실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소파에 앉는다.
“집사, 핫초코 한 잔.”
10.
“아, 미역국이네.”
마님이 얼굴을 찡그린다. 마님은 물과 함께 밥만 세 숟갈 먹고 출근한다.
남은 음식을 버리고, 그릇을 식기 세척기에 넣는다. 청소로봇이 청소를 시작한다. 바다의 푸른색과는 다른 푸른색으로 “집사 2183b 실외용 바퀴”라고 적혀 있는 상자에도 청소로봇이 달라붙어 미세한 먼지를 제거한다. 청소로봇은 내 몸 위로도 올라와 미세한 먼지를 제거한다. 나는 가만히 서 있다. 청소로봇이 들어가면 베란다로 간다. 아파트 현관 문 안에서 사람 한 명과 나와 같은 집사 2183b가 나온다. 로봇은 개나리 색과 비슷한 짙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다. 한 사람과 로봇 한 대가 골목을 지나 사라진다. 나는 한 사람과 로봇 한 대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마님은 6시 37분에 돌아온다. 나는 미역국과 오이소박이와 멸치 볶음과 도토리묵을 밥상 위에 올린다.
“치워.”
마님은 전화로 피자를 주문한다. 마님은 홀로그램을 켜고 친구들과 잡담을 나눈다. 마님은 내 실외용 바퀴가 들어 있는 상자를 보지 않는다. 마님은 홀로그램을 종료하고 다큐멘터리 채널을 틀고 소파에 눕는다. <로봇 인공지능 발전 100년사>가 방영된다. 오늘 방영될 프로의 압축 설명이 나온다. 검은 장막 뒤에서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커튼 뒤에서 세 사람이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한 명은 저명한 피아니스트, 한 명은 음대생, 한 명은 로봇입니다. 과연 음악 평론가 다섯 명은 누가 로봇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
해설자가 말한다. 그림 세 점이 2초씩 화면에 잡힌다.
「여기 세 점의 그림이 있습니다. 한 점은 유명 화가가 특별 의뢰를 받고 비밀리에 그린 그림이고, 다른 한 점은 전문 화가는 아니나 20년 동안 꾸준히 그림을 그려온 사람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ITK에서 최근 제작한 그림 그리는 로봇, 몬드리안이 그린 그림입니다. 그 그림을 감정하기 위해 전문 미술 평론가 여섯 명이 모였습니다. 과연 이들이 어떤 그림이 로봇의 그림인지 알아낼 수 있을까요? 놀라운 반전, 놓치지 마십시오.」
해설자가 말한다. 각기 다른 손 세 개가 화면에 잡힌다.
「손 세 개만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와 있습니다. 자원한 일반 사람 스무 명이……」
텔레비전이 꺼진다. 마님의 생체 리듬이 깊은 잠에 빠진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텔레비전 앞에 서 있다. 텔레비전은 다시 켜지지 않는다.
11.
창문 밖으로 바깥 풍경이 보인다. 앙상하던 목련 가지에 물이 오른다. 가지 끝에 눈이 생길 조짐이 보인다.
「으아~ 정말 싫어, 서른네 번째로 맞는 봄 따위!」
「벌써 꽃 핀 데도 있다더라. 우리 올해는 꽃놀이 한번 가자. 꼭.」
「싫어~ 애인 있는 애랑은 안가! 령이랑 가고 말지!」
“애인이랑은 잘 돼가?”
「그럭저럭…….」
「결혼하자곤 안 해?」
「부모님한테 인사드리자고 하네.」
「오, 그럼 결혼하는 거야?」
「모르겠어. 막상 인사 갈 생각하니까…… 좀 부담스럽기도 하고.」
「아악! 너 지금 염장 지르는 거지?」
「염장 아냐!」
“좋겠네, 어쨌든 애인 생긴 거잖아.”
「에잇, 남자 따위. 없어도 잘만 산다! 령아~ 외로운 언니에게 따끈한 녹차 한잔 갖다 주련~」
“왜, 있음 편하잖아.”
「편하긴 뭐가? 데이트하려면 꾸며야지, 돈 들지…….」
“로봇 봐주잖아.”
「에? 네 로봇 고장 났어?」
“아니. 그건 아닌데……. 요새 미역국을 너무 자주 끓여. 겨우내 미역국만 먹은 기분이야. 짜증나.”
「설정에서 식단 조절할 수 있는데. 설명서에 안 나와 있어?」
“귀찮아. 봐도 모르겠어. 일주일 내내 미역국만 내놓다가, 호화판 식단을 차리다가. 나 혼자 그걸 어떻게 다 먹으라고. 게다가 처음에는 일 끝나면 바로 충전기에 가 앉더니, 어느 순간부터 베란다에 서 있어. 충전기에 가라고 안 하면, 방전되기 직전까지 거기 있는다니까. 뭐, 방전되기 전에는 충전하러 가지만.”
「너 미역국 싫어하던가?」
“딱 질색인데, 나 또 국 없으면 밥 못 먹잖아.”
「난 근데 건조 찌개 이제 질려서 못 먹겠더라. 요샌 령이한테 요리 시켜. 너 로봇도 요리기능 있는 거 몰랐지?」
“그런 것도 돼?”
「건조 찌개보단 좀 낫달까, 색다르달까. 가끔 이상한 맛도 나는데, 조금씩 조절하면 그게 더 낫더라고.」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마님은 손톱을 손질한다. 탁자 위에 미세한 손톱 가루가 떨어진다.
「봄인데…… 외롭다…….」
「아깐 남자 따위, 라더니.」
「남자가 필요하다는 게 아니고, 그냥 외롭다고. 삼십 대 중반인데, 어쩌다 야근 좀 줄면 기뻐하는 게 내 인생의 낙인가…….」
「애인 생기니까 좋긴 하더라. 밤에 잠 안 오면 통화하기도 좋고.」
「응, 요새 정말 잠이 안 와. 그렇게 빡세게 일하고 왔는데도 잠이 안 들어. 나 요새 령이랑 자기 전에 대화하잖아. 너 오늘은 집에서 뭐 했어? 심심했지? 요새 바빠서 산책 못 시켜줘서 미안.」
「령이가 뭐래?」
「힘내래.」
단풍잎 모양이 넓게 퍼진다. 작은 웃음소리가 말 뒤를 잇는다.
「나도 그래. 그 사람 부모님 만나는 게 부담스러운 것도, 결혼이 싫은 건 아닌데……. 그냥…… 이제 내 삶에서 변할 건 그런 거밖에 없나. 결혼, 아기, 뭐, 그런 거뿐인가, 싶어져서…….」
「그래도 넌 애인 있잖앗!」
마님의 심장 박동이 평소보다 빠르다. 90-110 사이를 유지하는 심박수가 120에서 125까지 올라간다.
“나…… 할 말 있어.”
「뭐냐? 너도 애인이냐?」
“아니…… 나…….”
두 사람이 마님을 바라본다.
「뭔데 뜸을 들여?」
“나 달에 가.”
「달? 볼 거 없다던데? 그냥 달에 갔다 왔다, 별거 없대. 돈만 많이 들고.」
「별은 잘 보인다는데?」
「홀로그램 틀면 되지. 실제 별이랑 별로 다르지도 않잖아.」
「우리 별로 바꿀까?」
배경이 우주로 바뀐다. 멀리 토성이 보이고 까만 아스팔트에 쌓인 싸라기눈처럼 별이 빛난다.
“암튼 가, 달.”
「병원은 어쩌고?」
「자영업자는 좋겠다, 휴가도 내고. 아, 올해 여름휴가는 받을 수 있을까. 확 때려치우고 싶다.」
“치과학회에서 연락이 왔는데, 달에…… 치과의사가 부족하대. 전문 치과의가 없어서 그냥 진통제 쓰거나, 치아치료기로 어찌어찌 하는 모양인데, 아무래도 의사가 직접 보는 거랑은 다르니까……. 지금 달에 있는 사람이 5000명인데 치과의사는 한 명이라는 거야. 그래서…….”
「야, 너 지금 달에서 개업하겠다는 거야?」
“개업은 아니고…….”
「잘 생각해 봐. 거기 사고도 많고.」
「그래,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아서 그렇지 이런저런 사고 많다 그러더라.」
「얼마 전에도 왜, 그, 뭐 하나 짓다가 폭발해서…….」
「응응, 맞아 맞아, 그거 뭐였지? 숙소였나, 무슨 연구실이었나?」
「암튼 아직 위험하대.」
“나…….”
마님이 피식 웃었다.
“이미 신청했어. 답장도 왔고.”
「뭐? 야, 너 미쳤어?」
「너 지금까지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했잖아.」
「벌써 가기로 결정한 거야?」
“신체검사 받아야 한다는데……. 별 이상만 없으면 되나 봐. 워낙 급해서…….”
「야, 달이 왜 인력이 부족하겠어? 수당은 높을지 몰라도……. 야, 너 왜 그래, 갑자기?」
12.
“그만 해요. 벌써 가기로 정했어요.”
마님이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싼다.
「너 그런 걸 가족이랑 한마디 상의도 없이 결정할 수 있는 거니?」
“미안해요, 미안하다 그랬잖아요.”
「이유가 뭐냐.」
화면 안에서 머리가 벗겨진 남자가 굵은 바리톤의 목소리로 말한다.
「당신은 좀 진정하고. 그래, 어디 이유를 말해 보거라. 왜 갑자기 달에 가야겠다고 생각한 거니?」
긴 침묵이 이어진다. 마님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린다.
“치과의사가 부족하대요. 거기 인구가 5000명이 넘는데, 치과의사는 한 명밖에 없대요.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하루에 열셋, 아니 열네 시간씩 진료를 한대요.”
「그래서?」
마님은 입을 다물었다. 마님은 손가락을 뚝, 뚝, 꺾었다.
“이미 결정했어요!”
「어린애냐?」
95데시벨의 목소리가 방에 쩌렁쩌렁 울린다.
「부모한테 한마디도 없이, 달로 가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유도 제대로 설명을 못해? 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는 거냐?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긴 한 거냐?」
“그게…… 일단…… 5년 계약이구요.”
「결혼은 어떻게 할 생각이냐.」
“가서, 좋은 사람 만날 수도 있고…….”
「그냥 충동적으로 한 거면, 취소해라. 가서 후회하지 말고.」
“……내일부터 합숙 들어가요. 이번에 달에 가는 사람들이랑요.”
「그걸 꼭 이런 식으로, 통보하듯 이야기했어야 하니?」
남자를 밀쳐내고 머리가 짧은 여자가 화면에 얼굴을 들이민다.
“미안해요, 엄마.”
「미안하다는 말을 듣자는 게 아니잖니. 무슨 일이 있는 거야?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요, 그런 거 아니에요.”
마님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죄송해요, 저는……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요. 그냥…… 달에 치과의사가 없대요. 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5000명이 넘는데, 거기에…… 치과의사가 없대요…….”
마님은 흐느껴 운다. 부모님은 한숨을 쉰다.
「내가 내일 당장 올라가마.」
“내일 아침에 떠나요. 말하려고 했어요. 일부러 감춘 게 아니라…… 정말 말하려고 했는데…….”
「집은 어떡할 거냐?」
“정혜가 들어와 살기로 했어요.”
「정혜?」
“걔가 이혼해서…… 살 집이 필요하거든요. 가구랑 다 쓰기로 하고…… 계약서랑 제대로 썼어요.”
「도대체 갑자기 달에 가겠다는 이유가 뭐냐?」
13.
목련 눈은 오전 나절보다 평균 2밀리미터 커졌다. 밖은 어둡다. 마님은 다큐멘터리 채널을 보고 있다. 화성탐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집사, 커피.”
나는 복합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선택한다. 설탕 버튼이 깜빡인다. 나는 아이스커피를 탁자 위에 놓는다. 마님은 잔을 만지고 한숨을 쉰다.
“집사, 따뜻한 커피 한잔 가져와.”
마님이 단어 하나하나 또박또박 말한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5데시벨 높다. 전화가 온다.
“아, 정혜니?”
「응, 오늘 못 가서 미안.」
“아니, 괜찮아. 관리 사무소에 말해놨으니까 신분증 확인하면 문 열어줄 거야. 집사 회사에도 연락했어. 거기서 그러는데 나 없어도 회사에서 최고 관리자 바꿔줄 수 있대. 포맷도 해달라면 해줄 거야.”
「응, 근데 안 하는 게 나을 거라고 하더라. 지금 너네 집에 완전히 적응했을 텐데, 바꾸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고. 환경이 안 바뀔 땐 포맷 안 하는 게 낫대.」
“아, 그러니? 참, 그리고 이거 요새 좀 이상하거든?”
「이상해?」
“응, 전에는 바로바로 잘하던 걸, 요새 두 번씩 말해야 하는 게 있고 그러니까, 최고 관리자 바꿀 때 그런 것도 이야기해.”
「너네 거 2000번대던가? 우리 집에서 쓰던 건 집사3284c였거든.」
“그래?”
「어, 2000번대가 손가락에 달린 센서가 수백 개라면, 그건 천 개가 넘었어. 손가락 자유도도 14고, 감정 표현도 23개나 됐어. 나 2000번대는 안 써봐서…….」
“난 다른 옵션은 다 꺼놓고 써서 잘 몰라. 별로 불편하진 않았어.”
「아, 그래, 뭐, 큰 차이 있겠어? 근데 기집애…… 갑자기 무슨 달이니?」
“그러는 넌 왜 갑자기 이혼이니? 죽고 못 살 것처럼 주위에서 다 반대하는데 결혼하더니. 1년도 못 채워서.”
정적이 감돈다.
“……미안해, 내가 지금…… 좀 피곤해서…….”
「아냐, 늦었는데 미안해. 내일 잘 가.」
전화는 인사 없이 끊긴다. 나는 뜨거운 커피를 가져가 마님 앞에 놓는다. 마님은 한 모금 마신다.
“집사! 설, 탕, 가, 져, 와! 이게 요새 왜 이래, 정말.”
모니터에 글자가 뜬다.
- 설탕이 떨어졌습니다. -
마님은 모니터를 보지 않는다. 마님은 소파에 누워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쓴다. 하지만 나는 이불 속에서 마님의 얼굴과 목, 팔, 허리, 엉덩이, 다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
스테이크 조리법. 등심은 목 뒤쪽 살을 말한다. 목뒤 살을 800그램 정도 썰어 내 칼로 자근자근 칼집을 낸 후 올리브 오일을 뿌려 30분간 놔둔다. 당근은 길게 삼각형 모양으로 썰어 끝을 둥글린다. 프라이팬에 버터를 두르고 당근을 넣어 볶다가 소금, 후춧가루로 간한다. 접시 가장자리에 놓는다. 프라이팬을 키친타월로 닦는다. 버터를 두르고 밀가루를 넣고, 갈색이 되도록 볶다가 케첩 1티스푼, 우스터 소스 1티스푼, 핫소그 1/2티스푼를 넣고 약불에서 볶는다. 물 100밀리리터와 월계수 잎 두 장을 넣고 25회 저으며 끓인다. 고기에 소금 두 번, 후춧가루를 두 번 뿌린 후 뒤집어서 소금 두 번, 후춧가루를 두 번 뿌리고 프라이팬에 올려 익힌다.
사태는 허벅지 부분을 말한다. 허벅지에서 고기 600그램을 잘라낸다. 4*4*0.8로 잘라서…….
마님이 답답한 듯 이불을 내린다. 마님이 눈을 뜬다. 마님은 마님을 내려다보고 있는 날 본다.
“깜짝이야!”
마님은 눈을 비빈다. 마님은 모니터에 눈이 간다.
“아, 설탕이 떨어졌구나.”
마님은 커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는다.
“집사, 핫초코 한잔 가져와.”
중앙제어장치에 명령이 입력된다. 이동제어기가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복합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핫초코 한 잔을 선택한다. 컵받침을 탁자 위에 올리고, 핫초코를 컵받침 위에 놓는다.
마님은 컵을 두 손으로 잡고 후후 분다.
“TV 종료.”
그때까지 켜져 있던 다큐멘터리 채널이 꺼진다. 화성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마님은 핫초코를 마신다.
“이래서…….”
마님은 마른기침을 뱉는다. 마님은 꺼진 TV를 보고 있다.
“사람들이 로봇이랑 대화를 하는구나…….”
마님은 웃는다.
“나도 미쳤나.”
마님은 핫초코를 마신다.
“난 불광에서 태어났어.”
전원이 꺼진 붙박이 TV 모니터에 모니터를 바라보는 마님과 그 옆에 서 있는 본체가 비친다. 둥근 얼굴, 원통형 몸체, 얇은 원통형 팔, 삼각뿔 형태의 다리가 화면에 비친다.
“불광 초등학교를 나왔고, 불광 중학교를 졸업했고, 불광 고등학교를 나왔고, 심지어 불광 대학교에 입학했지.”
마님은 핫초코를 마신다.
“이거 되게 어색하네.”
마님은 TV 모니터를 보며 말한다.
“부모님은 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유기농 농사를 지어보겠다고 시골로 내려갔어. 작은 아버지께서 일손이 필요하다고 했고, 두 분 다 옛날부터 꿈이었대. 불광을 벗어날 기회였지만, 거긴 더 끔찍할 것 같았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못 나올 것 같았어.”
마님은 핫초코가 담긴 컵을 컵받침이 아닌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이불로 몸을 감싸고 편하게 앉아 다시 컵을 든다. 컵이 놓였던 탁자에 물방울이 생겨 있다. 아침에 청소로봇이 닦았던 탁자다.
“졸업하고 나니까 선배가 같이 일하자 그러더라. 거절하기가 뭣해서, 마땅한 자리도 눈에 안 띄던 참이라, 선배네 병원에서 일했어. 그것도 불광에 있었지. 선배는 집도 가깝고 좋지 않냐고 했어. 그리고, 선배가 결혼하면서, 남편이랑 레스토랑을 차리겠다고, 가게를 나한테 싼값에 넘기겠다고 했어. 부모님이 허락하셔서 원래 집을 팔고, 나 혼자 살기엔 너무 크기도 했고,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그 병원을 인수했어. 그리고 8년째 하고 있어.
근데 내가 지금 왜 이러니? 미쳤나 봐.”
마님이 고개를 돌린다. 마님은 본체를 잠시 보다가 핫초코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다. 이번에도 컵받침 위가 아니다. 마님은 눕고 눈을 감는다.
“그 사람이랑 헤어졌을 때, 나 하나도 안 슬펐어. 그 사람 집도 이 근처고, 회사도 여기서 안 멀어. 만약에 그 사람이랑 끝까지 잘 되었다면, 영원히 여기서 살았겠지.”
마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진다. 마님은 소파에 눕는다.
“정혜가 잘 돌봐줄 거야. 걔는 프리랜서라 거의 집 안에서 사는 애니, 나보단 너한테 잘 해 줄지도…….”
마님은 혼잣말처럼 말하고 피식 웃는다.
“제자리로 가서 충전해, 집사.”
나는 탁자 위에 있는 물 얼룩을 바라본다.
“제자리로 가서 충전해, 집사!”
마님의 목소리가 7데시벨 올라간다.
중앙제어장치에 명령이 입력된다. 이동제어기가 움직인다. 충전지에 본체가 들어간다.
“전원 종료.”
불이 꺼진다. 달빛이, 바다의 푸른색과도 하늘의 푸른색과도 상자에 써 있는 “집사 2183b실외용 바퀴”의 푸른색과도 다른 파리한 달빛이 방 안에 들어온다. 마님의 숨소리가 일정해진다. 달이 움직임에 따라 방안은 점점 더 파리해졌다가, 거무스름한 푸른색이 되었다가, 다시 희뿌옇게 빛나기 시작한다. 물체가 저마다의 색을 뽐내고, 형태가 선명한 윤곽을 드러낸다. 나는 결코 한 번도 똑같은 적이 없었던 시시각각 변하는 수많은 색채들을 바라본다. 하지만 일정한 스펙트럼에서는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
마님은 8시에 일어날 예정이다. 오전 7시 정각, 중앙제어장치가 포맷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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