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우리 사랑 이야기

소설가

2007년 7월 통권 22호

 야호, 로이, 나의 반신, 나의 폴룩스, 내 쌍둥이 형제. 잘 지내고 있어? 그쪽은 어때? 벌집을 쑤셔놓은 듯이 어수선하겠지? 모바일 뉴스로 보기에는 그렇던데. 경찰에 팬들에, 온갖 사회단체 인권단체에 복제 연구소 사람들까지. 당연한 일이지만 화면에서 네 얼굴도 봤어. 약간 여위어 보이던데, 화장을 그렇게 한 건지 내 걱정 때문에 그런지 모르겠더라. 만약 내 걱정 때문에 여윈 거라면 프로덕션 녀석들 좀 혼나야 해. 네 관리를 하라고 기업에서 받는 돈이 얼만데 널 여위도록 놓아 두냐고. 

  

나? 나는 물론 잘 있지. 어디 있냐고? 길 위, 정확히 말하면 고속도로 위. 지금은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어. 하늘에 붉은빛이 점점 퍼지고, 해는 구름 뒤에 숨어 은빛 가장자리를 찬란하고 선명하게 그려내는데, 캬아- 비록 나는 선글라스를 낀 채 운전대를 잡고 있는 처지라 술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얼얼하게 취할 것만 같아. 이 붉은빛 칵테일 같은 하늘에, 웬일인지 뻥뻥 뚫려 있는 도로에서 귀를 스치는 바람의 속도에, 마침내 결정했다, 끝냈다는 안도감에, 그리고……우리 세계와 아무 상관 없이 내 옆에 앉아 지도를 보고 있는 미치에게. 

  

그래, 그 애 이름은 미치야. 그 애는 미치거든. 

  

아니, 그렇게 한꺼번에 물어대지는 마. 서두를 것 없어. 우리는 끝없이, 끝없이 달릴 테니까. 우리는 그럴 수 있어. 뒤에 남긴 세계는 하나도 아쉽지 않거든. 내가 아쉬운 건 너뿐이야, 로이. 내 형제, 알에서부터 지금까지 함께한 나의 반쪽. 

  

그래서 이 이야기를 너한테 전하는 거야. 내가 없어지더라도 이 이야기는 네가 알고 있어야 하니까. 나를 생각할 때 이 이야기도 함께 떠올릴 사람이 세상에 적어도 하나는 있어야 하고, 부모도 친척도 없이 세상에 떨어진 내게 이 이야기를 전할 사람은 너뿐이야. 내가 너를 보고 싶은 만큼, 이야기는 너를 필요로 해. 

  

그러니까 잘 들어. 

  

이 이야기는 나 자신이니까.

    

우리 생활이 늘 그랬듯이 이야기는 광고에서 시작해. 하지만 무슨 제품 광고였더라? 하여간 빙과류 광고인 건 확실해. 작년에는 워낙 덥다고 해서 새 음료수, 새 빙과류, 습기와 온기를 빠르게 공기 중으로 배출한다는 신소재 여름 옷 광고가 수도 없이 들어왔잖아. 대부분 너와 함께 찍은 것이었지만, 그건 당시 한창 뜨기 시작하던 가수 민아리가 파트너였어. 내가 무더운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먹다가 던지면 태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추던 민아리가 그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내가 먹던 부분을 한입 베어 물고, 다음 순간 민아리가 달달 떨면서 편의점 옆 정자 아래에 나타나 내게 안긴다는 그저 그런 내용이었어. “시원한 여름 속에 따뜻한 사랑을 꽃 피우세요” 같은 민망한 카피가 달리는 광고였지.

  

하지만 그 광고에는 좋은 점이 딱 하나 있었어. 집 근처에서 찍는다는 것. 그때 나는 크루즈 여행 광고를 찍느라고 두 주 동안 집을 비운 참이었고, 너는 아마 대학에 갓 입학한 젊은이를 위한 안전한 신차 광고를 찍느라 미국에 가 있었을 거야. 너도 알다시피 며칠씩 지방이나 외국을 돌아다니느라 수업을 빠질 필요도 없고, 프로덕션 스튜디오에서 곧장 학교로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 편한 일이잖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촬영에 임했어. 문제는 민아리였지. 인형같이 희고 작은 얼굴에 섹시 바디로 떠오르던 이 아가씨, CF는 처음이었으니 어찌나 NG를 많이 내던지. 늘 추던 자기 춤도 몇 번을 틀리고, 열여덟 되도록 연애도 한번 안 해봤는지(절대 안 믿어!) 내가 어깨에 팔을 두를 때마다 움찔움찔 굳는 바람에 혼났어. 촬영이 끝나고 마무리까지 다 되었을 때는 아홉 시가 넘었고 스태프들이 모두 파김치가 되어버렸어. 민아리 쪽에서도 민망했는지 저녁을 사겠다고 했는데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그 자리에 빠져버렸어. 더 이상 그 아가씨 얼굴을 보았다가는 그날 먹은 아이스크림 맛이 입 안에서 온통 엉겨 붙어버릴 것 같더라고. 

  

아마 그래서였을 거야. 돌아오는 길에 집 앞 편의점에 들른 것은. 유지방분이 흠뻑 밴 느끼한 단맛이 아니라 달든 쓰든 좋으니 상큼하고 뱃속까지 시원한 것을 먹고 싶다는 충동이 인 거지. 4월이라 해가 지자 날은 서늘했지만 몇 시간쯤 조명을 쐰 내 몸은 여전히 뜨끈뜨끈 달아올라 있었거든. 나는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우롱차 캔 세 개를 사서 그 자리에서 들이켠 다음 다시 카스 두 캔과 17차 1.5리터 페트병을 샀어. 계산하러 가면서 나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입 안에 상처가 났는데 연한 레몬수로 입을 가신 것같이, 상쾌하면서도 아프고 불쾌한 느낌이었어. 하지만 나는 피곤하고 멍청했어. 집에 돌아와 아직까지 입 안에 남아 있던 아이스크림의 단맛을 맥주로 씻어낸 다음에야 그 이상한 느낌이 무엇인지 깨달았지. 계산대에 있는 여자 아이가 나를 무심코 보고 지나친 거야. 

  

이상하잖아, 그렇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매스컴을 탄 사람들이야. 모든 사람들이 우리 얼굴을 알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해.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우리가 지나가면 남자들은 안 보는 척 질투 어린 눈으로 흘끔거리고, 여자들은 대놓고 넋을 잃고 바라보지. 우리 또래의 여자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데, 그렇게 완벽하게 무심한 표정으로, “5500원입니다.”라고 말하고, 계산기를 찍는……그래, 그렇게 나를 그냥 손님 대하듯 하는 여자 아이는 처음 본 거야. 그렇다고 그 여자 아이가 예쁜 건 아니었어. 예쁘거나 멋진 젊은 남녀들 중에는 우리가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래봤자 자신들의 패배라는 것은 깨닫지 못하고 말이야.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매스컴을 점령했고, 그 후 20년 동안 자신이 어떻게 보이고 어떻게 카메라에 들어가는지 계속 의식하고 살던 사람들이야. 우리는 태어나는 데 성공한 이후 달을 밟은 암스트롱보다, 비틀스보다, 후세인보다, 마돈나보다, 조지 부시보다 더 많이 매스컴에 노출된 사람들이야. 태어나서 5년, 10년, 그 후에 갑자기 자기가 이성에게(기껏해야 이성에게!) 멋지게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된 늦둥이들에게 질 턱이 없잖아.

  

그런데 그 여자 아이는 나를 무심하게 바라본 거야. 고등학교를 갓 졸업했을까 말까 한 그 여자 아이가.

  

그건 내가 아는 어떤 범주에도 들어맞지 않는 이야기였어. 그래서 나는 로이, 너에게마저 그 일을 이야기하지 않은 거야. 그때만 해도 그 일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내게는 거기에 맞는 단어가 없었어. 문장이 없었어. 아니, ‘우리에게는’이라고 해야겠지. 이제 나는 말할 수 있으니까. 그 애는 내게 무심했다고.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찜찜했어. 하지만 잊어버렸지. 그건 아직 소쩍새 울음소리가 들리고 라일락 향기가 막 풍기기 시작한 늦은 4월 하룻밤의 일에 지나지 않았거든.

  

두 번째로 그 아이의 존재를 의식한 건, 로이, 네가 돌아오기 전날 밤이었어. 

  

우리 냉장고에 늘 채워져 있는 캔 맥주와 병맥주를 다 마시고 나서도 목이 말랐던 걸 보면 그때 나는 좀 흥분해 있었나 봐. 뭐니 뭐니 해도 쌍둥이 형제인 너와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이건 우리 둘에게 부과되는 적응 훈련이기도 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계속 목이 타고 머리가 어질어질했어. 아마 OP(Ordinary People)들은 그런 상태를 ‘취했다’고 하겠지. 하지만 육체적으로야 그럴 리가 없잖아?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술이 강하니까. 머리로는 그렇게 알고 있었어. 그런데 목은 소금물을 삼킨 것처럼 계속 타오르고, 냉장고에 술은 없고, 나는 네가 없어 외로운 거야. 어쩌겠어? 술을 사러 나가야지.

  

어쩌면 그날 나는 그 아이가 그때 편의점에 있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이십대 초반의 남녀가 얽히는 일에서 보통 생각하는 그런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니야. 다만 나는 그때, 나를 알아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거야. 로이 없는 조이를 보고 신기해하거나 접근하려 하거나 반대로 진열장 너머 인형 구경하듯 하는 시선이. 하지만 누가 혼자 있는 나를 보고 그런 시선을 던지지 않겠어? 로이 없는 조이가 아니라 조이 없는 로이라 해도, 아니 둘이 함께 있다 해도 마찬가지지. 다만 네가 없는 동안 느끼는 관객들의 시선은 더욱 노골적이고, 그래서 편의점의 유리벽 너머 그 아이가 보였을 때 나는 안도했어. 하지만 계산할 때 그 아이가 다시 보낸 그 무심한 시선은 나를 약간 상처 입혔어. 나는 아마도 이번에는 그 아이가 나를 알아볼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나 봐. 그리고 술기운이 약간 더해져서, 허튼 말을 내뱉고 만 거야.

  

“이봐요, 나 몰라요?”

  

그 아이는 1리터짜리 페트병 세 개의 바코드를 빠르게 찍으며 멀뚱하니 나를 바라보았어. 그러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더군. 

  

“알아요, 애드 돌(Ad Doll).”

  

“……. 이봐요, 그거 실례잖아.”

  

물론 모두 우리를 그렇게 부른다는 건 알고 있었어. 애드 돌. 인간복제로 태어난 쌍둥이 형제. 민영화한 복제 연구소에서 세계 최초로 민영 자본으로 ‘제작’한 아이들. 여러 기업들의 합자로 미모와 체력, 학습 능력 유전자를 강화하는 데 성공한 일란성 쌍생아. 남양 임페리얼 분유를 먹이고, 가베 교구와 한글나라 영어나라를 학습하고, 네 살 때부터 영창 피아노로 피아노를 배우고, 대한검도회의 호구를 쓰고 죽도를 들었지. 우리 둘의 연탄곡 연주나 대련 장면은 인터넷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어. 하얀 얼굴에 동그랗고 또렷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보며 생긋 웃는 우리 모습은 광고 화면으로는 최고였지. 우리 생활은 협찬 상품들로 채워졌고, 우리를 위한 전속 프로덕션도 설립되었어. 물론 우리만 유전자 실험에 성공한 것은 아니니까 프로덕션에 유망주가 모자랄 일은 없어. 하지만 어느 세계에나 최초의 스타에게 붙는 프리미엄은 있는 것 아니겠어? 그게 바로 우리고, 그래서 사람들이 우리를 애드 돌이나 애드 트윈이라고 부르는 것은 알아. 하지만 그 명칭을 면전에 대놓고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어.

  

여자아이는 어깨를 으쓱하더군.

  

“하지만 그럼 뭐라고 불러요? 조이? 로이? 어느 쪽인지 모르겠는데요.”

  

“최소한 우리 이름은 알고 있네요.”

  

나는 아직도 얼떨떨한 채 말했어. 그 여자 아이가 맥주를 비닐봉지에 넣어주며 씩 웃더군.

  

“태어나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으니까요.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러면 적어도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보다 손아래라는 이야기인데. 나는 반사적으로 그 아이를 훑어보고, 가슴에 달린 이름표를 보았어. 얼굴은 눈에 띄게 예쁘지도 않고 밉상이지도 않고, 키나 몸매도 그저 그랬어. 하지만 한 가지는 눈길을 끌었어. 윤미치. 희한한 이름이더군. 

  

바로 그때 다른 손님이 들어오는 바람에 우리가 계산대에서 나눈 짧은 대화는 끝났어. 그날 밤 나는 술을 마시고 네가 돌아온다는 생각과, 편의점에서 일하는 별난 이름의 여자 아이 생각을 번갈아 하다 잠들었어. 

  

  

네가 돌아온 다음에도 적응 훈련은 계속되었지. 예전에는 촬영을 같이 하지 않아도 시간이 남으면 함께 있는 게 자연스러웠는데, 이제는 같이 촬영하는 일을 맡지 않으면 늘 떨어져 있어야 했어. 매니저는 우리 스케줄을 조금씩 어긋나게 잡으며 밉살스럽게도 이렇게 말했지. 이제 너희도 성인이 되면 각자의 삶을 살아야 하잖아. 대중이 너희를 늘 쌍둥이로만 알고 있으면 너희 하나하나는 톱스타가 되지 못한다고. 후배들도 있는데 너희가 잘 되어야지.

  

미친 새끼. 우리가 무슨 1950년대의 십남매 장남쯤 돼?

  

“하긴,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니네.”

  

내가 처음 투덜거렸을 때 미치는 웃으면서 그렇게 말했어. 그때는 이미 너를 기다리면서 밤을 보내다가 무엇인가 살 핑계를 만들어 편의점에 가는 일상에 익숙해져 가던 때였지. 아니면 네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편의점에 5분, 10분씩 들러 미치와 이야기를 하거나. 그래, 이제 너도 알겠지? 자그마하고 눈에 띄는 곳 없던 여자 애. 어깨까지 오는 무난한 머리에 말도 없고, 오랫동안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한 덕분에 계산하는 손만 재빠르던 점원. 그때쯤 우리는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말을 놓고 있었어. 알고 보니 미치와 우리는 동갑이더라고. 

  

“틀린 말이 아니긴 뭐가 아냐!”

  

나는 약간 화를 냈어. 그러자 미치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어. 웃을 때, 열심히 말할 때, 무엇인가를 집중해서 들여다볼 때, 입술을 깨물 때, 그 애의 표정은 비할 바 없이 다채롭고 생생해져. 하지만 그때는 그 표정마저 미워 보이더군.

  

“하지만 그렇잖아. 너희는 모두 같은 유전자 풀의 형제들 아니야? 너와 로이가 성공하고 나서 대량생산한 거 아니었어? 그렇게 치면 대가족 장남, 아니 종손 맞네 뭐.”

  

“아냐! 정자와 난자 기증자가 다 다르다고! 게다가 유전자조작인간은 그런 식으로 대량생산될 수 있는 게 아니야. 너 도대체 인간 유전자 조작에 대해서 상식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미치는 어깨를 으쓱했어.

  

“글쎄, 난 잘 모르겠어. 솔직히 인간 유전자 조작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생물에게 정해진 특성을 발현시키는 것이 유전자의 염기서열이라면, 어떤 특성이 강해지도록 유전자를 조작하면 나중에는 특성에 맞춰 유전자가 똑같아지지 않을까? 예쁘고, 잘생기고, 건강하고, 머리 좋고, 2세는 못 낳고, 이런 인간들이 떼거리로 있다면 그 인간들은 같은 종족이라고 봐도 되는 거잖아.”

  

나는 자기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리고 미치를 바라보았어. 그런 이야기는 들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었거든. 그런 내 모습을 본체만체하고 미치가 말을 계속했어.

  

“인간과 쥐의 유전자가 다른 부분은 기껏해야 2퍼센트라더라. 그러면 인간끼리 유전자가 다른 부분은 어느 정도겠어? 아주 적겠지. 그 적은 부분 중에서 비슷비슷한 특성을 나타내는 유전자끼리 한데 모여 있다면, 그 유전자들끼리는 가족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손을 댔건 안 댔건 무슨 상관이야? 옛날식으로 이야기하면 성형미인이건 아니건 미인은 미인인 거지. 꿩 잡는 게 매고, 쥐 잡는 게 고양이고.”

  

아쉽게도 그 다음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어. 편의점에 손님이 들어왔거든. 편의점에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나는 집에 돌아가거나 밖으로 나가기로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어 있었어. 안 그러면 손님은 내게 주의를 쏟기 마련이고, 결국 편의점 일에 폐를 끼치게 되니까. 나는 미련을 품은 채 집으로 갔어. 너는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았고, 미치의 이야기는 한참 동안 뇌리에 머물러 떠나지 않았어.

  

또, 이런 대화도 나눈 적이 있었어. 역시 한밤중의 편의점이었어. 그날 너는 먼저 돌아와 자고 있었고, 나는 잠이 안 와 한참을 망설이다가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떼었어. 밤 근무인 미치는 늘 그렇듯이 무심하고 다정하게 나를 맞아주었어. 시시한 이야기를 한두 마디 하다가 내가 불쑥 물었어.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지. 네 이름 참 특이해. 무슨 뜻으로 지은 거야?”

  

그때 미치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어. 내가 불편할 정도로. 물어보면 안 되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즈음에 미치가 입을 열었어.

  

“나, 미치(美癡)거든. 그건 속칭이고, 원 병명은 테드 창의 SF 작품에 나오는 장치 이름을 따서 칼리그노시아(실미증(失美症))야. 사람 인상과 미모를 식별할 수 있게 하는 우뇌의 시냅스 하나가 어떻게 꼬여버린 병.”

  

“뭐? 정말이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질러버렸어. 하지만 그러고 나자 서서히 이해가 되었어. 미치가 내게 보여 준 그 한결같은 무심함이 어디서 나왔는지. 미치는 정말로 내가 잘생겼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 거야. 

  

“하지만 그걸 그대로 이름으로 삼다니, 너희 부모님도 어지간하시다.”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내고 나서야 그 말이 실례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미치는 씁쓸하게 웃었어.

  

“우리 아버지가 잘 생겼거든.”

  

미치는 그 말만 하고 입을 다물었어. 나는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

  

“우리 아버지는 모든 사람에게서 잘 생겼다는 말을 듣고 싶어했어. 최소한 모든 여자들에게 듣고 싶었나 봐. 엄마는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아버지한테 반했고, 아버지에게 만족스러운 아내가 되었어.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버지는 딸한테도 그런 걸 바란 거야. 눈을 반짝이며 아버지에게 동경과 찬탄의 눈길을 보내는 거. 그런데 딸이 자기한테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 병원에 데려가 보니 미치라는 판정이 나온 거야. 우리 아버지 기분이 어땠겠어? 그 다음부터 나를 미치라고 부른 거야.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정말 그게 내 이름인 줄 알았어. 철이 들 때까지는 그저 집에서 부르는 이름과 바깥 이름이 다르다고만 생각했고. 내 친구들 중에서도 그런 아이들은 좀 있었으니까. 나중에 왜 내 이름을 미치라고 부르는지 알고 나서, 오냐, 그렇다면 그걸 내 이름으로 삼아주마 하고 생각했어. 이제는 어디 가나 내 이름을 미치라고 해.”

  

굉장히 입맛이 쓴 이야기지? 지금까지 내 가족이야 너뿐이었고, 교과서에 나오는 가족이건 친구들에게 이야기 듣는 가족이건 가족이란 상당히 기분 좋고 의지할 만한 보금자리라는 식이었기 때문에, 나는 부모라는 사람이 그렇게……음……재수 없게 굴 수 있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 나는 머리를 긁었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슨 말인지 해야 할 것 같았어.

  

“그렇다면 따로 이름이 있긴 있는 거야?”

  

내가 해놓고도 참 서툰 말이라고 생각했지. 이건 뭐 분위기를 풀어주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위로가 되는 것도 아니고……하지만 의외로 미치는 이 말에 활짝 웃었어.

  

“너, 생각보다 재미있구나. 그럼 당연히 따로 있지. 태어나자마자 애를 미치라고 부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나는 미치가 기분 상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한숨 돌렸어. 그날은 그야말로 계속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지. 워낙 내가 실수를 많이 하기도 했고. 더욱 다행하게도, 미치는 다음 질문에도 그리 기분 나빠하지 않았어. 

  

“그럼 원래 이름은 뭐야?”

  

“미영. 윤미영. 흔한 이름이지?”

  

“미영이라…….”

  

미영. 맞아. 미치 말대로 흔해. 하지만 예뻐. 예쁜 이름이야.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뭐, 그런 식으로 우리는 사귀어간 거야. 

  

그래.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우리 사귀던 거였구나.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어.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점점 더 길고 유쾌해진다고만 생각했지.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손 한 번 잡지 않았고 키스 한 번 하지 않았거든.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더 솔직해지고 편안해졌어. 

  

“그럼 너희 어머니는 아버지가 너를 그렇게 부르는데 아무 소리도 안 하셔?”

  

“우리 엄마는 아버지를 아직도 굉장히 좋아하시거든. 그런 면에서는 아버지가 장가 잘 드신 거지. 아버지는 숭배자가 필요한 사람이고, 엄마는 우상이 필요한 사람이니까.”

  

이런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지.

  

“너는 왜 대학에 안 갔어?”

  

“난 공부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당연히 성적도 안 좋고. 게다가 우리 집이 넉넉한 편도 아니어서, 대학 졸업하고 취직을 못하면 무척 부담스러울 거야. 그런데 동생은 성적이 좋거든. 내가 동생 등록금을 보태는 편이 훨씬 마음이 편해. 집에 빚지는 기분도 없고.”

  

“……그렇구나. 그렇게들도 하는구나.”

  

“그런데 너는 어때? 애드 돌이라는 건 평생 광고주가 시키는 대로 물건을 쓰고 살아야 하는 거야?”

  

“꼭 그렇지는 않아. 우리를 연구하고 탄생시키는 데 민간합자기금이 큰 몫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방식이거든. 여러 기업이 합자해서 만든 유전자인간 연구 재단이 있고, 내가 소속된 프로덕션이 그곳에 연구 자금을 후원하는 식으로 되어 있어. 기업은 나나 로이를 광고모델로 쓸 때 프로덕션에 모델료를 지불하고, 프로덕션에서는 그 돈에서 재단 후원비와 우리 생활비를 내주는 거지. 하지만 광고 상품을 고를 때 우리 선호도도 반영되고, 광고주가 모델을 교체하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평생 같은 물건만 쓰고 살아야 하는 건 아니야. 그냥 일반 CF 모델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돼.”

  

“그러면 평생 CF 모델로 사는 거야?”

  

“프로덕션 측의 계획으로는 이학년 때 나와 로이가 영화에 출연하기로 되어 있어. 우리 개런티의 몇 퍼센트는 계속 적립되고, 나중에 우리 광고나 작품 출연이 뜸해지면 그 적립금을 가지고 우리가 원하는 사업을 하게 돼. 물론 사업의 이익금 중 얼마가량은 프로덕션에 들어가지.”

  

“말하자면 연구 재단과 프로덕션이 너희를 평생 책임져 주는 부모 같은 거네? 자기는 아니라고 그래도 대가족 종손 맞네요 뭐.”

  

이런 이야기도 할 수 있게 되었어. 흔히 남녀 사이에 오간다고 생각하는 로맨틱하고 달콤한 대사 같은 건 없었어. 달콤한 말은 광고 찍을 때 상대에게 하는 것으로 충분했고(질리지!), 어둠침침한 카페에서 둘만 앉아 있을 시간 같은 것은 없었으니까. 어둠과 침묵은 연인들의 친구라는 것도 우리에게는 거짓말이었어. 우리는 불빛 환한 편의점에서 계속 이야기했고, 손님이 오면 이야기를 그치고 내가 돌아갔어. 나는 한 번도 미치를 바래다주지 않았고 미치도 내게 무엇을 바라는 티를 낸 적이 없어. 이렇게 지내다가 미치가 편의점을 그만두면 어떻게 연락할 건지, 우리 사이가 어떻게 발전할 수 있을지도 전혀 생각해 보지 않았어. 그러고 보니 나, 참 생각 없었다. 그렇지?

  

하지만 그때는 그랬어. 마법에 걸린 기분이었어. 나는 평생 스무 살일 것 같았고, 미치는 평생 그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것만 같았어. 시간이 흘러가고 우리가 변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그 일이 터지기까지는.

  

  

  

너도 알다시피 우리에게는 친자 확인 소송이 몇 건 걸려 있어. 브라운관에 비치는 우리가 자기 젊었을 때와 좀 닮은 것 같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그리 쉽게 변호사에게 뛰어가는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 건에 대해서만은 매니저와 우리의 의견이 일치했지. 참, 염치들도 없으셔. 천만 번 양보해서 그들 중 한 명이 우리를 수정시킨 정자와 난자의 소유자들이라고 하더라도, 그 유전자가 우리에게 형질 그대로 전해진 것도 아니잖아. 분재해서 키운 노송나무가 노송의 작품일까, 정원사의 작품일까? 우리는 잘 만들어진 분재 정원이었고, 현대 유전자 공학기술과 자본이라는 정원사가 우리를 탄생시켰다는 데 아무 이의도 불만도 없었어. 하지만 누구나 그렇게 생각해 주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지.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부터 좀 찜찜한 기분이 들긴 했어. 왜, 그런 거 있잖아. 뒤에서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서 홱 뒤를 돌아보면 아무도 없는 거. 하지만 그런 느낌에 실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그저 신경이 좀 예민해졌나 보다, 역시 늘 붙어 있던 너와 떨어져 있으니 허전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어슬렁거리다가 일 스케줄에 따라 움직이고, 집에 돌아오면서 편의점에 들르고, 그런 일과가 계속되었지. 

  

그리고 그 일이 터졌어. 사실 그 순간에 대해서는 별 기억이 안 나. 미치를 보기 위해 편의점에 들렀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덮쳐들어 내 목에 선뜩한 것을 들이대고, 이어 목이 뜨끈해지더니 미치가 비명을 지르고, 편의점의 유리 벽이 깨지고, 그런 다음 경찰차가 달려오고…….

  

이제는 다 알려진 일이지만, 사건 전말은 그랬어. 우리에게 친자 확인 소송을 건 사람들 중에는 돈을 노린 사기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야. 20여 년 전 만 세 살 된 아이를 잃어버린 어느 어머니도 있었지. 그 아이와 우리가 상관있을 리 없는데, 아이를 잃어버리고 20년 남짓 편집증에 빠져 있던 어머니의 머리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야. 그 어머니는 자기가 처녀 적에 난자 기증을 했고 그 난자에서 나온 것이 우리들이라는 망상까지 하게 되었어. 키우던 아이를 잃어버렸으니 결국 자기는 자기 난자에서 나온 아이들을 되찾을 정당한 권리가 있다고 믿은 거고. 그런데 법이 우리를 속이며 쓸데없는 절차로 친권 회복을 방해했다는 거야. 그래서 이 어머니는 자기가 직접 친권을 행사하기로 결심하고 어찌저찌 우리 집 주소를 알아냈어. 그리고 며칠 동안 우리 집과 우리가 나오는 시간을 관찰하다가 마침 미치를 만나러 가던 나를 뒤에서 덮친 거야. 왜 다짜고짜 칼을 들고 덮쳤느냐고? 내가 프로덕션에 철저히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그래서 일단 칼을 들고 나를 납치한 다음 설득하려고 했다나. 하여간 그 ‘설득용’ 칼이 목을 베는 바람에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뒷걸음쳤고, 내 몸무게에 그 여자 몸무게가 겹쳐지면서 편의점 유리벽이 부서졌고, 미치는 그 와중에 용케 정신을 차리고 파출소로 직접 연결된 방범 벨을 눌렀고, 그리고 경찰차가 와서 우리 목숨을 구했지. 그 여자는 등에 온통 유리 파편이 박힌 채 출혈 쇼크로 몸부림치고 있었고, 나도 자칫하면 경동맥이 절개될 뻔했어. 정말 위기일발이었다니까.

  

그보다 더 곤란했던 건, 이른바 인터넷 대안언론이라는 곳에서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사실 확인도 해보지 않고 길고 애절하게 써주면서 ‘유전자 조작인간의 문제점’을 시리즈로 연재한 일이야. 당연히 매니저는 명예훼손죄로 그 가짜 어머니와 언론사를 고소했어. 그러자 그쪽에서도 흥분한 나머지 ‘자기 어머니일지도 모르는 사람을 고소하는 냉혈 조이’, ‘역시 인공 인간의 한계인가’ 어쩌고 하는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며 나를 비난했어. 응? 그런 건 매니저가 안 보여줬다고? 그건 잘한 일이네. 봐봤자 속만 상했을 거야. 나도 별로 신경 안 쓰는 일이고. 사실, 내가 신경 쓸 일은 따로 있었거든. 

  

미치가 편의점에서 해고되었어.

  

처음에는 몰랐어. 퇴원한 다음에 워낙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도 많았고, 신경 쓸 일도 많았어. 속상한 이야기지만 심지어 인터넷에는 자작극이라는 이야기까지 돌고 있었잖아? 너와 매니저와 함께 기사 점검하고, 계약한 광고 회사들에게 사건을 설명하고 이쪽이 피해자라는 입장을 역설하고, 그 와중에도 건질 수 있는 계약은 건지려고 노력하고, 어디 갈 때면 경호원이 꼬박꼬박 따라다니고, 그러다 보니 한 달가량은 전혀 정신이 없었어. 눈코 뜰 새 없이 그렇게 지내다가 모처럼 한가한 어느 날 저녁, 문득 아파트 창문 밖을 내다보았어. 

  

15층에서 내다보는 창밖은 아름다웠어. 하늘은 눈높이에서 장밋빛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어느 새 깊어진 가을 저녁 바람은 놀에 감싸인 구름에서 서늘하게 불어왔지. 앞에는 연갈색 아파트가 우뚝 서 있는데 까마득한 아래에서 아이들이 자전거와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며 자기들끼리 놀고 있었어. 수천 수만 년 되풀이되어 온 풍경이지만 나를 위해서만 단 하루 단 10분 존재하는 것 같은 풍경. 그 광경을 보다 보니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느낌이었어. 구름과 같은 높이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바람을 타고 날고 있는 기분. 그리고 옆에 미치가 함께 날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뭐야, 내가 미쳤나 봐! 지금껏 미치를 잊고 있었다니!

  

나는 허둥지둥 옷을 걸치고 문 밖에 나섰어. 경호원들이 우루루 따라 나왔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계단을 달렸어. 참 이상하지, 분명 엘리베이터가 빠르고 편한데 계단을 달려 내려가다니. 하지만 그때는 그랬어. 조금이라도 내 몸을 더 움직여야 미치와 더 빨리 가까워질 것 같았지. 나는 숨을 헐떡거리며 구르다시피 편의점 문을 열었어. 하지만 그곳에서 나를 맞은 건 미치의 얼굴이 아니었어.

  

“윤……미치……어디 있어요?”

  

나는 터질 듯한 숨을 고르며 처음 보는 점원 아가씨에게 물었어. 점원은 처음에는 갑자기 뛰어 들어와 영문 모를 말을 하고 있는 남자 때문에 멍하니 서 있더니 다음 순간 확 얼굴이 밝아졌어. 내 얼굴을 알아본 거야. 

  

“어머, 조이! 조이 맞죠? 여기 이 동네 사는 거예요? 나 조이 팬이에요. 얼마 전에 그런 일 당해서 어떡해요? 앗, 그러면 그 편의점이 바로 여기? 어쩜 좋아! 이제 몸은 괜찮아요?”

  

그 아가씨가 호들갑을 떨어준 덕분에 숨이 가라앉았어. 나는 최대한 매력적인 광고용 얼굴을 지어가면서 말했어.

  

“이제 괜찮아요. 고마워요. 다 팬 여러분 덕분이죠. 그런데 지금 윤미치 씨 근무시간 아닌가요?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는데.”

  

“윤미치 씨? 모르겠는데요. 저는 여기 온 지 20일 정도밖에 안 됐어요. 그전에 근무하시던 분인 것 같은데요.”

  

“낮 시간 근무로 바뀐 건 아니고요?”

  

“제가 낮 시간 근무자한테 인수인계하고 가는걸요. 그런 분 안 계세요.”

  

순간 머리가 멍해졌어. 그러고 보니 나는 미치의 핸드폰 번호를 물어본 적도 없었고, 새벽에 근무가 끝나는 미치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한 적도 없었어. 나는 늘 마음 내킬 때 편의점에 찾아왔고 미치가 그런 내 이야기 상대가 되어주는 건 당연하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었어. 이게 무슨 오만이었을까. 들어갈 때의 기세와는 달리 편의점을 나오는 내 다리는 형편없이 휘청거렸어. 경호원들이 부축해 주지 않았으면 집까지 돌아가지도 못했을지 몰라.

  

그런 다음 나는 힘닿는 대로 미치를 찾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어. 편의점 사장은 내가 얽힌 그 사건 때문에 미치를 해고했다고 했어. 내 팬클럽 여학생들이 편의점 앞에서 미치를 붙잡고 소란을 떤 모양이야. 미치를 탓하려고 한 일인지, 당시 정황을 알자고 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미치는 아주 난처해졌어. 그 소란 중에 물건을 슬쩍하는 학생들까지 생기자 지긋지긋해져서 미치를 내보냈대. 이력서는 미치를 내보낸 후 폐기해 버렸기 때문에 전화번호도 알 수 없었어. 편의점 실마리가 끊기자 미치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다른 단서도 없었어. 

  

그런데 설상가상, 매니저가 황당한 일거리를 물고 왔지. 나더러 공익광고협의회 광고에 나가라는 거야. 그것도 금연 광고에. 

  

“도대체 뭐가 문제예요? 왜 날 거기로 보내려고 해요? 난 아직 군대 가지 않아도 되고 담배도 안 피우잖아요.”

  

나는 항변했지. 정당한 항변이었다고 생각해. 공익광고협의회 광고는 돈도 안 되고, 국방부 광고와 함께 연예사병들의 병역복무일수를 채워주는 역할이나 하는 거잖아. 하지만 매니저도 물러서지 않았어.

  

“조이 너는 모를지 몰라도 이번 사건 때문에 네 안티가 많이 생겼어. 그러니까 자원 봉사한다 생각하고 공익광고에 가서 이미지 좀 씻고 오라고.”

  

“아니, 왜 내 안티가 생겨요? 나는 그 미친 여자한테 당한 피해자라고요!”

  

“조용히 좀 해! 아직 유전자 검사 결과도 안 나왔고, 네가 그렇게 말하는 게 어디로 흘러나가면 이미지만 더 나빠져.”

  

“…….”

  

“온갖 찌라시에 별 소문이 다 기사로 나왔다고. 그 여자가 진짜 네 엄마라는 둥, 네가 편의점 직원과 놀아나다가 그 애의 엄마한테 당한 거라는 둥. 큰 매체들이야 소송을 걸고 인맥을 동원하고 해서 막을 수 있지만 인터넷이나 자잘한 매체들까지 다 막아낼 수는 없어. 그러니까 가서 정신 수양하는 셈 치고 한 달 정도만 봉사해 줘. 그때쯤이면 유전자 검사 결과가 나올 테니까.”

  

“씹할, 한마디로 나, 팽당하는 거네?”

  

이번에는 매니저가 말이 없었어. 그 모습을 보니 더 확신이 서더라. 그 사건 때문에 CF 쪽이 우수수 취소된 거야.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안하고 틀어박혀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말이 날 테고. 꿀리는 거 없이 활동을 계속하는 모습은 보여야겠는데 나갈 무대는 없다는 거지. 그래서 ‘내 책임은 아니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던 것에 자숙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공익광고협의회에서 광고 하나 찍고 오라는 거야. 

  

“그런데 왜 하필이면 금연 광고예요? 난 담배 안 피우는데.”

  

“담배 광고에는 몇 번 나갔잖아. 방향을 바꿔서 금연 광고를 찍으면 너만 한 자식들을 둔 부모 층을 공략할 수 있어. 원래 부모들에게는 회개한 탕아가 더 어필하기 마련이거든.”

  

네에네에. 어련하시겠습니까. 속이 상하기는 했지만 할 말은 없었어. 매니저는 유능한 사람이고 나름대로 내게 제일 좋은 길을 뚫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까. 

  

처음 가 본 공익광고협의회 스튜디오는 우리가 늘 CF를 찍던 곳과는 사뭇 달랐어. 아니, 조명과 세트 설치하고 촬영하는 곳이 달라봤자 얼마나 다르겠느냐고 너는 웃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더라. 우리는 사무적인 일을 프로덕션과 매니저가 다 처리하니까 감독이고 조명이고 다른 스태프고 ‘언제 어디서 또 보게 될지 모를 사람들’이라는 생각 때문에 서로 겉치레만이라도 싹싹하게 해주는 게 습관이 되어 있잖아. 그쪽은 그렇지가 않아. 광고 종류에 따라 광고입찰 금액이 정해져 있고, 그 금액에 맞춰 모든 것이 결정되는 거야. 세트에 얼마를 들이고 스태프를 얼마나 써먹느냐, 배우를 얼마나 굴리느냐. 그 사람들은 나같이 스캔들을 잠재우러 온 배우들이나 연예사병들을 ‘자원봉사단원’, 비꼬는 의미에서 ‘자봉’이라고 부르는데, 이 ‘자봉’이야말로 그쪽의 밥이야. 이쪽도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 왔기 때문에 튕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거든.

  

나 같은 경우는 더욱 안 좋았지. 알고 보니 원래 배우는 다른 사람으로 정해져 있었는데 매니저가 수를 써서 나를 그 자리에 들이민 모양이야. 사실 내가 생각해도 원래 맡기로 한 P씨 쪽이 금연 광고에는 훨씬 더 잘 맞았어. 그 사람은 나이 40에 폐기종 때문에 애써 금연을 한 사람이었으니까. 시리즈 광고를 그 사람에 맞추어 콘티나 뭐나 다 짜 놓았는데 갑자기 중심 배우가 나로 교체되니 감독도 스태프들도 꽤 화가 나 있었던 것 같아. 한편 나는 나대로 갑자기 금연광고에 출연하게 되어 시큰둥해 있는 데다가 미치 때문에 얼이 반쯤 빠져 있었으니 더더군다나 그 사람들에게 곱게 보일 리가 없었어. 우리는 삐걱거리면서 위태위태하게 일을 해나갔어. 나는 회의를 들어가는 둥 마는 둥했고, 찍을 때마다 NG는 기본이었어. 

  

그런 식으로 해서 일이 잘될 리가 없지. 결국 3주째 촬영에서 폭탄이 터지고야 말았어. 사실 시작하기 전부터 ‘유전자가 아무리 뛰어나도 담배에는 당할 수 없습니다’ 하는 카피가 마음에 안 들었어. 나는 지금까지 ‘최초의 상용 유전자 인간 조이’였는데, 그 카피는 나를 단지 뛰어난 유전자로 만들어버리고 있었으니까. 고율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수정란 같은 것으로 말이야. 그런데 감독은 한술 더 떴어.

  

“자, 옷 벗어. 다 벗어.”

  

“네?”

  

“뭐야, 저번 회의 때 뭐했어? 콘티 안 보고 왔어?”

  

나는 할 말이 없었고, 옆에서 몇몇 사람이 키득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렸어.

  

“일단 전신 나체사진을 찍는 거야. 그리고 부위별로 클로즈업해서 옆에 장기 흡연 암 환자 사진을 배치하는 거지. 고전적인 금연 광고지만 모델이 너니까 좀 먹힐 거야.”

  

나는 주춤주춤 옷을 벗었어. 호기심에 찬 시선들이 맨몸에 꽂히는 게 그대로 느껴졌어. 흥, 유전자 인간이라고 해도 기껏 저거구나. 잘 다듬어지기는 했다마는, 어차피 원래 그런 제품으로 제작된 거잖아. 내가 팬티만 남기고 다 벗었을 때 감독이 또 한번 손짓했어.

  

“팬티도 벗어.”

  

“네?”

  

“아, 고환암 부분은 안 찍을 거야?”

  

순간 제어할 수 없는 불덩어리가 뱃속에서부터 밀려 올라왔어. 수컷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도 좋고, 수치심이라는 인간의 본능이라고 해도 좋아. 하여간 더 참을 수가 없었어. 나는 주섬주섬 다시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어. 먼저 바지를 입고, 그 다음 셔츠를 입고……감독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어. 

  

“야 인마,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못합니다.”

  

“지금 뭐야, 자봉이라고 유세하는 거야?”

  

“…….”

  

“야 이 새끼야, 잘 들어. 너는 CF 한번 찍을 때마다 몇 천, 몇 억씩 버니까 잘 모르겠지만, 이쪽은 다 국민 세금으로 일하고 있는 거라고. 너 같은 녀석 경력 세탁하려고 네 나이 두 배씩 되는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모여서 고생하고 있는데, 어차피 애도 못 낳는 물건 찍는다고…….”

  

그다음 말은 들리지 않았어. 감독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스튜디오 밖으로 뛰어나갔으니까.

  

거리, 거리, 거리, 사람, 사람, 사람. 그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 한 시간에 십칠 킬로미터를 뛸 수 있는 우리의 폐활량과 근력으로 나는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렸어. 그때 차에 안 치여 죽은 건 정말 요행이야. 분명 신호등 같은 건 하나도 지키지 않았을 텐데. 어디에서 어디로 얼마 동안 달렸는지도 모르겠어. 어느 순간 얼굴을 때리는 습기 찬 바람에 정신을 차려보니 한강대교를 건너고 있었어. 앞뒤로 넓게 펼쳐진 파란 물결을 보며 걸음을 늦추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어. 분명 매니저겠지. 불같이 화를 내고 있겠지. 이 사태를 어떻게 이야기하나. 뭐라고 수습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기계적으로 전화를 받고 있었어. 

  

“여보세요? 조이?”

  

순간 발걸음이 뚝 멈추었어. 애타게 찾고 있었지만 들리지 않던 목소리. 다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바로 그 목소리. 

  

“미치? 미치야? 미치 맞아?”

  

“조이 맞구나! 나 미치야. 지금 어디야?”

  

“이 번호 어떻게 알고…….”

  

순간 나도 모르게 목울대가 시큰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어. 지금까지 당한 모든 수모가 가슴에서 녹아 눈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 같았어. 나는 한 손으로 한강대교 난간을 잡고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잡은 채 끅끅대며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어. 미치는 여전히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어. 

  

“너네 팬클럽 회장 애가 나한테 타박상을 좀 입혔거든. 네 전화번호 대고 돈 좀 주고 합의할래, 아니면 폭행죄로 들어갈래 하니까 얘는 못 가르쳐준다고 버텼는데, 그쪽 부모가 애를 다그쳐서……어? 조이, 울어? 왜 울어?”

  

“아무……흑……아무것도 아니야. 지……지금 너는 어디야?”

  

“여기 지금 신촌이야. 집에 있으면 답답하기만 하고 눈치 보이고 그래서 밖에 나와 있어. 잠깐 볼까?”

  

나는 울음을 삼키고 소맷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어. 

  

“기다려줘. 차 갖고 금방 그리로 갈게. 그리고 미치.”

  

“응?”

  

“잠깐 보지 말자. 오래오래 같이 있자. 사랑해.”

  

간단히 말하자면 미치는 내 고백을 받아주었어. 자기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었어. 여기까지야. 나와 내 차가 한꺼번에 없어지고, 너는 야윈 얼굴로 화면에 나타나고, 나는 직업과 반신을 잃은 대신 사랑을 얻은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 우리는 지금 고속도로를 타고 끝없이 달리고 있어. 어디까지 갈까? 그건 나도 모르겠어. 아마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달릴 거야. 내가 CF와 유전자를 떠나 다른 일로 벌어먹고 살 수 있는 곳까지. 미치가 미영이라는 본래 이름을 찾아 나와 함께 살 수 있는 곳까지. 그곳이 어딘지는 모르지만 바로 그런 곳까지. 

  

그러고 보면 우리를 만든 과학자들은 우리 이름을 참 잘 붙여주었어. 조이와 로이. 기쁨과 왕. 너는 네 앞에 놓인 길을 달리렴. 우리를 위해 놓여 있던 길을 끝까지 달려, 그 끝에서 왕이 되도록 해. 나는 나의 기쁨을 찾아 그 길에서 벗어날 거야. 그리고 언젠가 네가 밤하늘의 별처럼 빛나는 날, 나와 미영이는 한적한 어둠을 즐기면서 아래에서 너를 바라볼 거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선망이 아니라 형제에 대한 애정의 눈길로. 

  

그러면 안녕, 로이. 안녕, 애드 돌, 안녕, 미치. 시선과 노출로 얼룩진 모든 과거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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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경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