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長生
<존 웨인 3405EA> 라고 쓰여진 라벨을 퓨어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르미노라 했던가? 뭐가? 저 금속 말이야... 라벨 테두리의. 그건, 하고 운을 뗐지만 잠디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 마눔 아니었나? 알마눔... 아미눔... 알미넘... 혀를 더 굴려 봤지만 정확한 명칭은 떠오르지 않았다. 누벨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퓨어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천년 전의 하찮은 금속 때문에 그는 누벨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렴 어떤가? 하고 잠디스가 중얼 거렸다. 아르미노건 알마눔이건 말일세. 그건 그래, 하고 퓨어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어떠냐구, 아무렴을 되내이며 퓨어러는 잡다한 감정들을 떨치기 시작했다. 3405EA에서 3407EA까지, 해동이 끝나가는 세 개의 탱크가 잔잔한 소음을 발하고 있었다. 한 개의 탱크당 오백 서른 세 개, 혈관처럼 얽힌 미세감압튜브가 탱크 속의 증기와 가스를 분출하는 소리였다. 해동은 일주일 째 계속되고 있었다.
클래식은 지겨워, 하고 잠디스가 중얼거렸다. 퓨어러가 별 대꾸를 않자 지겨워 죽겠다니까! 하며 탱크를 걷어찼다. 누벨이 있었다면 꿈도 못꿀 행동이었다. 역시나 예전의 잠디스를 떠올려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퓨어러는 생각했다. 문득 붉은 피가 뒤엉킨 누벨의 눈이 아직도 자신을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젠장할... 나도 그래, 그렇다구. 그렇다고 캡슐을 걷어 차진 않았지만, 퓨어러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20세기에서 22세기 사이에 입고된 탱크들을 그들은 <클래식>이라 불렀다. 과학의 수준만큼, 냉동 방식도 탱크의 형식도 제각각이어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클래식을 칭하는 용어도 그래서 제각각이었다. 망할 놈의 클래식, 씹할 클래식, 얼어 죽을... 클래식. 언 채로 살아있는 인간이, 하지만 그 속에 잠들어 있었다. 어떤 열악한 클래식도, 아무리 조잡한 클래식에도... 누벨의 기억을 떨치며 퓨어러는 투명한 바닥 아래의 어둠과, 그 속에 늘어선 탱크들을 바라보았다. 천년 동안 모여든 만 이천 일흔 다섯 개의 탱크가 끔찍한 곤충의 알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눈에 익은 풍경이지만 볼 때 마다 춥다는 느낌이 들고는 했다. 역시 알마눔이었나? 다시 금속의 명칭을 거론하며 잠디스가 낄낄거렸다. 생소한 웃음소리였다. 예전의 잠디스는 결코 저런 식으로 웃지 않았다. 아르민? 알만? 알미눔? 조명을 받은 라벨이 반짝하며 빛을 발했다. 불분명한 금속의 명칭에 비해 분명하고, 뚜렷한 은색이었다. <존 웨인 3405EA>란 양각(陽刻)에, 그래서 자신의 동공이 음각되는 기분을 퓨어러는 느꼈다.
천년 전에는 그에게도 저명한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위대했을지도 모를 그 이름은, 하지만 지금은 사라졌다. 그런 이름이 사라진 건 확실히 애석한 일이지만, 지난 천년을 생각한다면 새발의 피처럼 사소한 일이었다.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하물며 누군가의 이름 같은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노아스가 보유한 만 이천 일흔 다섯 명의 이름은 그래서 하나였다. 존 웨인. 그리고 그 뒤에 저마다의 관리번호가 붙어 있었다. 신탁자의 실명(實名)을 열람할 수 있는건 재단의 대표나 학술위원장 정도였다. 어쩌면 그들도 서로의 동의를 구해야 할지 모른다고 퓨어러는 생각했다. 비밀 - 지금의 노아스를 완성시킨 건 천년을 지켜온 비밀이었다. 비밀로, 비밀리에, 비밀스럽게 모든 것은 이룩되었다. 비밀을 만든 이도, 비밀을 감춘 이도 지금은 모두 사라졌지만.
퓨어러도 잠디스도, 하지만 노아스의 기원에 대해선 소상히 알고 있었다. 누벨은 늘 재단의 역사와 생명의 존엄성을 직원들에게 강조했었다. 발단은 한 사람의 영화배우였다. 존 웨인. 20세기라는, 까마득한 중세의 인물이다. 재단의 열람자료에는 상세한 기록이 보관되어 있었다. 1954년. 일의 발단은 존 웨인이 <정복자>란 제목의 영화에 출연하면서였다. 촬영지는 광활한 사막이었다. 중세 미국의 아리조나 피닉스 외곽. 불행히도 그곳은 1952년까지 숱한 핵실험이 자행되던 장소였다. 정부는 어떤 주의나 경고도 없이 촬영을 허가해 주었고, 그 후 오년 사이 삼백 열 일곱 명이나 되는 출연진들이 모두 암으로 사망했다. 존 웨인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한쪽 폐를 제거했고, 암세포가 전이되면서 하나씩 자신의 장기를 적출해야 했다. 뒤늦게 그는 정부의 음모를 알아 차렸다. 그들은 오염지역에서의 촬영을 허가해줬을 뿐더러, 지속적으로 출연자들의 오염수치를 측정해오고 있었다. 냉전시대의 정부에겐 방사능에 관한 인체실험자료가 절실히 필요했다. 분노한 그는 모든 사실을 알리겠노라 정부를 협박했고, 정부는 그럴듯한 속임수로 당대의 스타를 진정시켰다. 속임수의 핵심은 냉동(冷凍)이었다. 냉동인간. 먼 미래에 의학이 암을 정복하면 그때 당신을 소생시키겠다는 약속이었다. 터무니 없는 그 약속이, 그러나 천년을 이끌 사후신탁(死後信託)의 시초가 된다. 1979년의 일이었다.
<눈의 여왕>은... 이대로 폐쇄하는게 옳지 않을까요? 언젠가 누벨에게 퓨어러가 던진 말이었다. 왜? 라는 물음이 누벨의 사려깊은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전... 이곳의 인간들을 깨워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으로서의 생각인가? 나즈막한 누벨의 질문에 퓨어러는 머뭇거렸다. 근본적으로 노아스의 직원들에겐 <개인>의 인식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고 누벨이 반문했다. 퓨어러가 입을 다물자 누벨이 자신의 말을 이어갔다. 신탁자들도 개인의 의지로 여기 잠들어 있는 거라네. 만 이천 일흔 다섯 명의 개인과 노아스는 계약을 체결했고 우린 거기 따른 책임을 져야만 하네. 그들이... 누구라도 말입니까? 그들이 누구라도... 우린 개인이 아니라 노아스니까. 개인으로서, 천년 전의 약속이 과연 유효한 것일까 하고 퓨어러는 생각했다. 개인으로서의 사색은 노아스의 직원인 그에겐 언제나 서툴고 무효한 것이었다. <눈의 여왕>은 지하 삼백 미터, 만 이천 일흔 다섯 개의 탱크가 보관된 노아스의 중심 둠이었다. 방대한 둠의 내부에는 가끔 원인을 알 수 없는 바람소리가 지상의 그것처럼 울리곤 했다. 지진파의 영향이라는 해석 보다는, 모두가 그것을 여왕의 울음이라 부르길 좋아했다. 때마침 그때 여왕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슬픔에 겨운 울음 같기도 했고, 만 이천여개의 알을 보듬고 흐르는 느린 곡조의 자장가 같기도 했다. 듣기에 따라, 그랬다. 퓨어러는 자신의 느낌을 가지지 않으려 업무에 집중했다.
존 쿠삭 스크리머도 20세기의 인물이었다. 밝혀지지 않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는 냉동상태의 존 웨인을 정부로부터 사들였다. 비밀스런 작업이었다. 여러모로 쿠삭은 미스테리한 인물이었다. 국제적인 로비스트, 비운의 생명공학자, 은퇴한 CIA 관리... 그의 정체에 대한 설은 분분했지만, 후세의 어떤 사학자도 그의 과거를 밝혀내진 못했다. 하지만 모두가 수긍하는 그의 실체가 있었다. 바로 노아스의 창설자 존 쿠삭 스크리머다. 미처 인류가 암을 정복하지 못한 시대였다. 치료가 불가능한 여러 질병 앞에 인류는 누구나 노출되어 있었다. 그런 시대에, 냉동된 존 웨인이 거대한 사업의 열쇠가 될 거라 쿠삭은 확신했다. 우선 그는 존 웨인의 잠을 깨웠다. 폐가 적출된 채 냉동된 서부의 건맨은, 그러나 눈을 뜨지 않았다. 아니, 애초 깨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쿠삭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가 필요로 한 건 존 웨인의 세포와 유전자였다. 자신의 팀과 함께 그는 존 웨인을 복제했고, 순조롭게 서부의 건맨을 부활시켰다. 세상의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지하세계의 과학이었다.
쿠삭의 계획은 거기서 출발했다. 불치병에 걸린 소수의 전직 지도자들에게 그는 존 웨인의 부활소식을 통보했다. 종교와 윤리의 그늘을 벗어난 비밀스런 접근이었다. 하나 둘, 정치와 경제의 비윤리적인 라인을 통해 사후신탁의 가능성을 타진해오는 인물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다. 암에 걸린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독재자들, 불치의 성병에 걸린 미국과 유럽의 관료들, 재벌들이 속속 비서진을 보내왔다. 극비리에 소문은 남미의 군벌과 아랍의 왕족들에게도 전해졌다. 그들은 흑심과 의심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중 몇몇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존 웨인을 확인해야만 했다. 잘 훈련된, 그리고 훨씬 젊어진 서부의 건맨은 농담까지 건네가며 자신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쿠삭은 곧 노아스를 창설했고, 노아스는 쿠삭의 예측보다 수천 배는 거대해졌다. 신탁자들은 재산을, 또 권력을 자신의 신체와 함께 노아스에서 냉동시켰다. 노아스는 이미 지하에 숨어있는 하나의 국가가 되어 있었다.
이런... 이건 진짜 황인종이군! 잠디스가 소리쳤다. <눈의 여왕>이 관장하는 해동 시스템이 이제 막 생명의 숨결을 탱크 속에 불어 넣을 즈음이었다. 증기가 걷힌 탱크의 작은 창을 통해 퓨어러와 잠디스는 신탁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황인종을 실제로 보게되다니... 하고 잠디스가 다시 낄낄거렸다. 물끄러미, 퓨어러도 눈앞의 창을 응시했다. <존 웨인 3405 EA>는 입을 굳게 다문 표정의 노인이었다. 인종이 나뉘어있던 중세의 역사를 증명하듯 신탁자들은 모두 순수한 동양인이었다. 벌써 수십 차례 천년의 잠을 깨우곤 했지만 동양인을 본 것은 퓨어러도 처음이었다. 어떨까? 하고 잠디스가 히죽거렸다. 힐끗 퓨어러를 쳐다보는 그의 눈에서 퓨어러는 이상한 광채 같은 걸 볼 수 있었다. 반짝하며, 누벨의 죽음이 다시금 떠올랐다. 개인으로서의 그 느낌을, 퓨어러는 서둘러 지우고만 싶었다.
이물질 발견을 뜻하는 경고음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당황하지 않고, 퓨어러는 탱크의 내부를 차례차례 스캔했다.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십자가 목걸이나 묵주 따위를 두른 채 냉동된 인간들이 더러 있었다. 참으로 중세의 인간이란... 생각을 하며 퓨어러는 스캔의 결과를 기다렸다. 이물질은 <3405EA>의 오른 손에 쥐여 있었다. 반지도 아니고 뭐야 저게? 잠디스가 중얼거렸다. 해동의 마지막 단계를 위해 그들은 탱크 속의 이물질을 제거해야만 했다. 기계손에 자신의 팔을 끼우며 잠디스가 투덜거렸다. 이젠... 이럴 필요도... 실은 말이야... 안 그래? 아니, 그러나 필요하다고 퓨어러는 생각했다. <눈의 여왕>은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프로그램이었다. 오차와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으면 더 이상 자신을 진행시키지 않았다. 탱크 속으로 들어간 잠디스의 기계손은, 그래서 입처럼 투덜거릴 수 없었다. 여왕이 고개를 끄덕일만큼 조심스런 동작으로, 잠디스는 <3405EA>의 오른 손을 서서히 해제시켰다. 얼마나 꽉 쥐고 있던지... 나 원. 이윽고 분리된 이물질을 흡인한 후 비웃음을 띤 잠디스가 팔을 빼며 소리쳤다. 기계손 오른 어깨의 박스를 열어 퓨어러는 이물질을 확인했다. 그것은 터무니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그리고 반짝이는 천 조각이었다. 구겨진 천을 펼쳐본 퓨어러의 눈이 순간 놀라움으로 가득찼다. 이걸 보게나 잠디스. 천에는 정교한 색실로 수놓아진 한 폭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하고 잠디스도 말을 잇지 못했다. 노아스 본관의 로비를 장식한 거대한 벽화가 작고 정교한 한 장의 천에 완벽하게 펼쳐져 있었다. 노아스의 직원이라면, 누구나 그 그림을 알고 있었다. 십장생도(十長生圖)였다. 고대의 십장생 중 생물들은 이미 지상에서 자취를 감춘지 오래였다. 29세기였다.
BL 7
<3405EA>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높은 천장, 실은 그 어디쯤 시선이 머물렀지만 투명한 벽 때문에 허공을 보고있는 느낌이었다. 지긋이 그는 눈을 감았다. 벽과 시설물, 자신에게 입혀진 옷의 감촉만으로도 그는 미래를 실감할 수 있었다. 꿈을 꾸고있는 듯 했다. 얼마나 긴 시간이 흐른 걸까. 장자(莊子)의 구절들을 떠올리며 그는 묵상에 빠져들었다. 구절들은 하나 틀림 없이 머리 속에 떠올랐고 그는 자신의 손으로 넘겨 읽던 책의 느낌, 낡고 바랜 종이의 질감까지도 어렴풋이 떠올릴 수 있었다. 마치, 어제의 일 같았다.
키우던 작은 분재와, 자신의 서재와 소파, 도자기가 놓인 거실의 풍경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일주일 전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분재에 물을 주었다. 바다를 차고 떠오르는 해, 작지만 그런 기상이 느껴지는 우아한 해송(海松)이었다. 지금쯤 물을 줘야할텐데, 라는 생각마저도 부질 없이 떠올랐다. 일주일 전의 그 기억은 어쩌면 수십 년, 수백 년 전의 일일 것이다. 고통이 밀려왔다. 익숙해진 암(癌)의 통증이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만에 생소한 느낌으로 육신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다시 장자를 되뇌이는 그의 입가에, 그러나 희미한 미소가 번져 올랐다. 삶의 갈림길에서 그는 언제나 과감한 결단을 내리곤 했다. 단 한번도 그는 후회한 적이 없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살아있었다. 이번에도 자신이 옳았음을, 자신이 결국 암을 이길 거란 사실을 비로소 실감하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한 그루의 소나무처럼 느껴졌다. 그 밑둥에, 이제 미래의 의학이 철갑(鐵甲)을 둘러줄 것임을, 그는 일주일 전에도 믿고 있었다. 수십 년, 어쩌면 수백 년 동안의 확신이었다. 그는 자신을 확신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작고, 잦은 발걸음 소리와 작고, 고른 기계음 같은 것이 잔잔한 물결처럼 귓전에 스며들었다. 천천히 그는 눈을 떴다. 눈앞에는 믿지 못할 얼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여... 보. <3406EA>였다. 와락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떨리는 그녀의 어깨 뒤로 역시나 낯익은 얼굴이 눈물을 훔치며 서있었다. <3407EA>였다. 세 사람은 곧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미래라는 낯선 환경이 그들의 감동을 더욱 격하게 만들었다.
각하, 절부터 받으십시오.
어허, 이 사람 하며 <3405EA>가 만류했지만 <3407EA>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에어겔 재질의 바닥은 서늘했지만 그는 주저 없이 자신의 몸을 밀착시켰다. 특이한 자세였다. 복통에 시달리는 인간 같기도 하고, 배를 깔고 앉은 늙은 개 같기도 했다. 충직한 늙은 개처럼 그는 한 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당신이 옳았어요. 이걸... 아아, 믿을 수가 없네. 눈물을 훔치던 <3406EA>가 떨리는 목소리로 두런거렸다. 뭘, 하고 <3405EA>가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나야 결정만 내린 거지... 나서서 수고한 건 전부 이 사람 아닌가. 자, 그만 일어서게. 다시 두발로 선 <3407EA>는 차마 말을 못 이으며 고개를 떨구었다. 저까지 거둬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각하께서... 이게 다... 그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3405EA>는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한 차례 여왕의 울음소리가 외벽을 두드리며 지나갔다. <3405EA>의 눈썹이 바람을 맞은 해송처럼 그 소리에 꿈틀 했다.
여기 사람들 하고 얘기는 해봤나? 지긋이 눈을 감은 채 <3405EA>가 물었다. 해봤습니다만...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영어를 쓰지 않는다고?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각하... 세계의 흐름에도 많은 변화가 생긴 것 같습니다. 어허... 하고 <3405EA>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게 다문 입술 근처에 주름 하나가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너무 근심 마십시오 각하, 설마하니 미국에 어떤 변고가 있겠습니까? 세계공용어 같은 게 생겼을 수도 있고... 아무튼 이곳의 시스템이 정상이고, 또 이토록 발전한 걸 보면 큰 근심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3407EA>의 말에 <3405EA>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자네의 판단이니 허튼 추측은 아닐테지.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사람들도 아주 선해 보였어요. <3406EA>도 자신이 만난 미래인들에 대해 좋은 인상을 늘어 놓았다. 그나저나... 하고 <3405EA>가 말을 이었다. 그건 문제 없이 잘 치렀나 모르겠군. 뭘 말입니까? 우리들... 가짜장례식 말일세. 약속이라도 한듯 셋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각하의 장례식은 국장(國葬) 아니었겠습니까? <3407EA>의 말은 더 큰 웃음을 자아냈다. 다 좋은데... 그걸 못본 건 참 아쉽단 말이야, 하며 <3405EA>는 눈물을 훔쳤다. 다시 폭소가 터져나왔다. 그건 그렇고... 좀 춥다는 기분 들지 않나? 여긴 아무도 없고 말이야... 아, 아마도 통역관을 부르러 가는 눈치였습니다. 게다가 전 전혀 안 추운데요. 그냥 느낌이 그러신 것 아닙니까? 그런... 걸까? 그럼요 각하, 하긴 이곳의 재질이랄까... 그런게 너무 눈부시고 매끄러워 저도 처음엔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3407EA>의 말에 위안을 받긴 했지만, 그는 어쩐지 으슬으슬한 기분이었다. 중얼거리는 그의 음성에도 약간의 쇳소리가 묻어 있었다. 아무튼 좀 차가운 거 같고... 딱딱해. 여긴... 자부동(さぶどん) 같은게 없나?
퓨어러는 이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뉴인은 왜 안오지란 물음에 잠디스는 이렇게 말했다. 뭐하러? 그리고 퓨어러의 이마에 지긋이 검지를 눌러 돌렸다. 정신을 차리란 뜻의 조롱이었다. 그랬다. 히죽거리는 잠디스의 말 그대로 기뉴인이 올 이유가 없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촉망 받던 기뉴인의 업무도 이제 사라졌다. 재단을 통털어 기뉴인은 중세 영어를 가장 완벽하게 구사하는 통역관이었다. 육백여년 전 중국어와 영어가 폐합되면서 지금의 지구어(地球語)가 만들어졌다. 영어의 자취는 서서히 희미해졌고, 삼백년 정도가 흐른 후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오래 전부터 영어는 학문의 대상일 뿐이었다. 아마도 노아스는 중세의 영어를 필요로 하는 지구의 유일한 장소였을 것이다. 흔치 않은 재능으로 기뉴인은 노아스의 특급대우를 받았다. <눈의 여왕>이 우는 소리가 통제실의 외벽을 흔들었다. 소리의 공명을 가슴 깊이 느끼며 퓨어러는 사년 전의 첫 부활을 말없이 떠올렸다. 동방박사들이 여왕을 방문한 날이라며 누벨은 흥분을 감추지 않았다. 불과 사년 전의 그날이 퓨어러에겐 천년 전처럼 느껴졌다.
의학은 눈부신 성장을 했다. 21세기의 불치병이 정복된 건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다. 물론 암이 신형, 변종의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중세처럼 치명적이고 위협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24세기 이후의 신탁자들은 대개가 정신질환이었다. 바이러스도 점차 신경계를 공격하는 성향이 강해졌다. 문명의 발달과 함께 인류는 현저히 <정신적인> 개체로 변해갔고, 마치 약속처럼 인류의 질병도 <정신적인> 것으로 변해왔다. 노아스가 계약을 이행할 때가 되었다 판단한 것도 무려 육백년 전의 일이었다.
사년 전의 그날처럼, 육백년 전의 그날도 노아스의 역사에선 빠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신탁자의 부활은 세 차례의 실패 끝에 성공을 거두었다. 세 차례의 실패도 노아스의 책임은 아니었다. 20세기의 낙후한 냉동기술이 이미 신탁자들을 냉동과정에서 절명시킨 탓이었다. 해동은 완벽했지만 탱크 속엔 영혼이 사라진 육신만이 남아 있었다. 신탁자들에 대한 예우로 재단은 그들의 시신을 땅에 묻어 주었다. 사라진, 중세의 장례 문화를 따른 것이었다. 얼음의 관에서 해방된 신탁자들은 결국 땅이란 이름의 관 속으로 사라져 갔다. 같은 시기에 입고된 여섯 개의 클래식도 그들과 운명을 같이 했다.
그리고 <존 웨인 1904NA>가 깨어났다. 생명, 자체로서는 완벽한 부활이었다. 노아스의 의학은 대장 전체에 전이된 암을 완전히 제거했고, 역시나 치명적일 수 있는 심근경색과 간염, 그외의 소소한 모든 질환을 그의 육신에서 걷어냈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기억(記憶)이었다. 끝끝내 <존 웨인 1904NA>의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신탁자와 상관 없는 새로운 인격체로 여생을 살아야 했다. 두 번의 해동을 더 감행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평범한 기억상실이 아닌 무(無)의 상태 - 많은 연구를 거듭했지만 원인을 밝혀낼 수 없었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재단의 원로들은 <계약 위반>이란 결론을 스스로에게 부과했다. 부활 프로젝트는 다시 기나긴 침묵의 강속으로 가라 앉았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사년 전 그날 아침 누벨이 했던 말이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진 않았지만, 퓨어러는 누벨이 했던 말들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이 뇌와 세포, 즉 인체에 국한된 거라면 해동 후에도 고스란히 남아있어야 한다는 거지... 가돌리늄(Gd) 뇌에 의한 대체실험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어. 경이롭지 않나? 인간에게 아직도 과학 너머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둠의 천정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누벨의 눈은 너머의 더 먼곳을 보고있는 느낌이었다. 여왕도... 과학의 영역이지 않습니까? 하고 퓨어러가 물었다. 퓨어러의 말처럼, 과학 너머의 영역을 해결한 것은 여왕이었다.
<눈의 여왕>이 탄생한 것은 칠백년 전이었다. 과학윤리가 사회전반을 지배하고 인체 복제와 인체 냉동이 완벽히 금지된 시기였다. 지하로, 더 지하로 노아스는 스며들었다. 철저한 비밀과 거대한 공사에는 지배 권력의 비호가 뒤따랐다. 미래에 우리는 인류의 보편적인 생명연장 수단이 될 것이다 라고 했던 쿠삭 스크리머의 예견과는 달리, 인체 냉동은 결국 극소수의 특권으로 남게 되었다. 자신의 안식처를 위해 지배자들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노아스엔 수세기에 걸쳐 누적된 천문학적 액수의 신탁금이 있었다. 웅장한 건축물이자 하나의 자치구이며, 그 자체가 거대한 인공지능인 <눈의 여왕>은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지상에 지구를 운영하는 컴퓨터란 닉네임의 <바벨론>이 있다면 지하엔 <눈의 여왕>이 있었다. 진화형 컴퓨터인 여왕은 그후 모든 신탁자들의 어머니가 되었다. 반 세기 정도 여왕과 노아스 연구진의 공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지만, 여왕과 인간의 공조는 곧 막을 내리게 되었다. 여왕의 정보습득과 추리, 진화의 속도를 연구진이 따라잡을 수 없어서였다. 지상의 세계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었다. 여왕은 자신의 쌍둥이 오빠인 바벨론과 공조했고 달의 <비너스>와 화성의 <메러디언>을 신하로 두었으며, 은하계를 벗어난 수많은 인공물들을 자신의 기사(騎士)로 활용했다. 여왕의 자궁 속에 잠들어있는 신탁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아스는 여왕에게 모든 것을 신탁해야만 했다.
기억의 문제를, 여왕이 해결한 것은 사년 전이었다. 육백년 만에 여왕은 프로젝트의 재개를 선언했고, 스스로 자신의 자궁을 열어 한 구의 클래식을 인양했다. 노아스 최초의 축복 <존 웨인 2137NA>는 그렇게 해서 눈을 떴다. 완벽한 해동이었다. 그는 중세 미국의 상원의원이었던 자신의 과거를 또렷이 기억했고, 노아스는 그의 육체를 잠식한 에이즈를 완전히 제거했다. 쿠삭 스크리머의 환상이 비로소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비밀리에 이루어진 노아스의 성공은 지상의 지도자들을 열광케 했다. 쿠삭의 가설이 실현된 그날 지상의 본관에서는 대규모의 축제가 열렸다. 연구진의 대표였던 누벨은 축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다만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동방박사들이 우리의 여왕을 찾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옥상에 낙타를 쉬게 하고, 미지의 정보를 안고 지하의 마굿간을 찾았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여왕이 도달한 지점까지 우리 스스로가 그 해법을 추리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인류는 미처 도달하지 못했지만 인류의 과학은 도달해 있습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얼굴로 - 제대로 그걸 감추지도 못한 채 -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누구나 예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누벨은 많은 자책을 했지만 퓨어러는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었다. 정해진 축사를 읽게 한 것은 노아스의 대표 데머린이었다. 그는 지상의 인물이었다. 합법적인 재단의 대표로서 신탁금을 운용하고 정치에 이용해 온 전형적인 비즈니스맨이었다. 지상과 지하로 양분된 노아스의 운명처럼20세기의 쿠삭 스크리머는 그렇게 두 인물, 데머린과 누벨로 나뉘어 있었다. 데머린의 노아스와 누벨의 노아스는 다른 것이었지만 결국 노아스는 하나였고, 둘은 근본적으로 자신의 <개인>을 가질 수 없었다.
숙소로 이어진 통로에서 퓨어러는 싱글벙글 웃고있는 기뉴인과 마주쳤다. 잠디스도 함께였다. 어디 가는 길인가? 퓨어러의 인사에 기뉴인은 뜻밖의 대답을 건네왔다. 아, 신탁자들을 만나러 가는 길일세. 잠시 혼란스러웠지만 그런가? 하고 퓨어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지로 퓨어러의 이마를 살짝 누르며 잠디스가 속삭였다. 아아, 무엇보다 무료해서 말이야. 잠디스의 검지를 손으로 걷어내며 다시 퓨어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반짝이는 잠디스의 눈을 퓨어러는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같이 갈텐가? 하고 잠디스가 물었다. 어쩔 수 없는, 두렵고도 이상한 힘 같은 것이 잠디스의 목소리에 실려 있었다. 인공태양이 만들어낸 눈부신 바닥을 쳐다보며 퓨어러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무료한 두 개의 그림자가 곡선의 통로를 따라 서성이며 사라졌다. 그 뒤를 또 하나의 그림자가 작은 얼룩처럼 따라 붙었다.
환한 얼굴로 대화하는 기뉴인을 보자 모든 것이 예전 같았다. 기뉴인은 주로 <3407EA>와 대화를 했고, 중간 중간 <3407EA>가 나머지 신탁자들에게 대화의 내용을 전달하는 눈치였다. 천년이란 시간에 대해 신탁자들은 모두 놀라워 했고, 그런 그들의 반응을 무료한 기뉴인은 즐기고 있었다. 대화가 삼십 분 정도 이어지자 기뉴인의 표정에 다시금 따분함이 밀려들었다. 아아, 하고 기뉴인이 두손을 비벼댔다. 잠디스가 끼어든 것은 두 사람의 대화가 거의 뜸해졌을 무렵이었다. 이걸 좀 물어봐 줄래? 잠디스가 건넨 것은 작은 금속 조각이었다. 낯익은, 탱크에서 떼어낸 <존 웨인 3405EA>의 라벨이었다. 뭘 물어봐 달라는 거지? 기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재질... 재질에 대해서 말이야. 금속을 받아든 <3407EA>는 신중하게 그것을 살피고 또 살폈다. 띄엄띄엄 이어지는 중세의 영어 속에서 퓨어러도 확실히 알미늄이란 단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잠디스는 이상하리만치 날뛰며 좋아했다. 그렇지, 바로 그... 알... 마늄? 히죽거리며 외치는 잠디스를 향해 <3407EA>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다. 알미늄! 금속처럼 환하고 눈부신 미소였다.
각하!
세 사람의 미래인이 사라지고 나자 <3407EA>가 외쳤다. 믿어지십니까? 각하께선 천년 만에 부활하신 겁니다. <3406EA>도 눈물을 글썽이며 어쩔 줄 몰라했다. 아마도 그녀는 훗날 해동될 자신의 자녀들을 떠올리는 눈치였다. 지긋이 감았던 눈을 뜨며 <3405EA>도 감격에 겨운 표정이었다. 그래, 좀 자세한 얘길 해보지 그래. 우선 각하의 병은 완벽한 치료가 가능하답니다. 즉 건강을 되찾으시는 겁니다. 그리고 신탁금을 연금 형식으로 지급받을 수 있습니다. 계약의 조항 그대롭니다. 예상한대로 언어는 하나로 통일되었고... 또 국가와 인종, 민족의 개념도 거의 사라진 듯 합니다. 오래 전에 인류가 전체적으로 각성한 시기가 있었다더군요. 그후 줄곧 평화의 시대가 이어져왔고... 또 문명의 황금기가... 그리고 또
차근 차근히.
시정하겠습니다. <3407EA>가 허리를 숙인 사이 여왕의 울음소리가 통로를 지나갔다. 그 소리엔 머나먼 시공을 건너 뛴 신탁자들을 침묵케하는 힘이 있었다. 소리가 통로를 완전히 빠져나갈 때까지 <3405EA>는 미동도 않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미국은? 하고 그가 힘주어 물었다. 신중하게, 그리고 느린 말투로 <3407EA>가 답변을 이어갔다. 국가라는 흔적은 사라졌지만 현재 연합이란 것의 중추는 중국과 미국이 주도한 것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역사의 흐름을 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랍니다. 통역자로서 신탁자들이 자주 묻는 질문을 추려 따로 공부한 정도라 하더군요. 한국은... 한국은 어떻게 되었나? 한국에 대해선... 단어의 뜻을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천년이 흘렀습니다 각하.
모쪼록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운명이라고 말입니다. 하나의 연합으로 폐합되었다 해도 자치구라든지, 어떤 형태로든 한국은 존속하지 않겠습니까? 각하, 하늘은 분명 각하를 선택했습니다. 새롭게, 29세기의 한국은 또다시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전 이것을 천명(天命)이라 느끼고 있습니다.
말일세, 하고 <3405EA>가 입을 열었다. 이것이 꿈인가... 이 말이야. 과거의 내가 현재의 꿈을 꾸는 것인지... 현재의 내가 과거의 꿈을 꿨던 것인지... 한 차례 장자를 인용한 후 그는 <3407EA>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어떤 꿈을 꾼다 해도 자네가 없으면 그 꿈을 이룰 수 있겠나 말일세? <3407EA>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주인의 곁에서 천년을 늙어온 충직한 개처럼, 주름진 그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감회가 밀려들었다. 인공태양의 조명 속에서 그것은 더욱 찬란하게 느껴졌다.
숙소로 돌아온 퓨어러는 방진(防塵) 도어가 완전히 차단된 뒤에야 비로소 <개인>이 될 수 있었다. 자신의 이마에 손을 얹고서 그는 말없이 사색에 빠져 들었다. 헤어지기 직전에도 잠디스의 손가락이 자신의 이마를 지긋이 눌렀다. 예전엔 누구도 서로에게 그런 식의 접촉을 행한 적이 없었다. 퓨어러는 서서히 잠디스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기뉴인도, 더불어 자기 자신도 무서워지고 있었다. 젠장할... 하고 그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누벨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오오 누벨, 하고 그는 자신의 머리를 양팔 사이에 파묻었다, 파묻고, 싶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의 의지였다.
아마도, 여왕이 찾은 해법은 외계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네. 오랜 검증이 필요하겠지만 은하계 너머로 나간 무수한 여왕의 수족 중 하나가 어떤 정보를 얻은 것만은 분명하네. 그것은 혹시 신의 뜻이 아니었을까? 드디어 인간에게 부활을 허락한다는... 사년 전 그날의 누벨을 떠올리며 퓨어러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처음 경험해 본 <개인>의 눈물은 더없이 뜨겁고 아픈 것이었다. 신의 뜻은 과연 어떤 걸까? 동방박사는 여왕을 방문했지만 지구를 방문한 것은 또다른 개체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
BL7이 지구를 찾아옴으로서.
좋은 아침
천년 전에는, 아니 그후에도 인류를 공격한 바이러스들은 자신의 이름을 가져왔었다. 에볼라, 에이즈, 사스... 인류에게 조금만 더 관대했다면BL7도 저명한 이름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이름을 얻지 않았다. 인류에게 자신의 이름을 지을 시간을 허락치 않은 것이었다. 사년 전, 노아스의 <부활>이 있은 바로 그해의 일이다.
발원지도, 케리어(매개체)에 대해서도 알려지지 않았다. 성층권의 어떤 방역위성도 그들의 침투를 감지하지 못했고, 지구의 운영자 - 바벨론조차도 그들의 급습을 예견하지 못했다. 대륙 곳곳에서 재앙은 시작되었고 인류에겐 그것을 조사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사흘 만에 아메리카 대륙의 생명체 절반이 줄어 들었다. 접촉은 물론 공기로도 감염이 되었고, 잠복기는 고작 두 시간에 불과했다. BL(bio safety level)7의, 역사상 최강의 바이러스였다. 감염자들의 뇌는 녹아내렸고, 순식간에 그들의 영혼은 육신을 빠져나갔다. 지옥의 불이 번지는 듯한 확산이었다. 지상의 인류는 전멸했다.
아마도, 극소수의 폐쇄 인류가 살아 남았을 것이다. 우리처럼 폐쇄 시설에서 생활한 상당수의 인간이 있지 않겠냐고 누벨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이백 여명의 지배 계급을 이끌고 지하로 피신한 데머린도 우리에겐 문명의 힘이 있다며 힘주어 연설했다. 달에도 화성에도, 인류는 남아있었다. 남극을 비롯한 지구 곳곳의 폐쇄시설에도 누벨의 말처럼 인류가 남아있었다. 갸날픈 통신의 끈은, 그러나 점점 끊어지기 시작했다. BL7은 남극을 휘덮었고, 무인수송선과 같은 갖가지 케리어를 통해 달과 화성까지 재앙을 전파했다. 그리고 일년 전, 바벨론이 정지했다. 다섯 겹의 둠을 굳건히 걸어 잠근채 여왕은 큰 소리로 울부 짖었다. 지진파의 영향일 뿐이야 하고 잠디스가 중얼거렸지만, 퓨어러는 그것을 지구의 울음이라 느낀지 오래였다. 바벨론과 함께, 희망의 빛도 꺼져버린 듯 했다.
노아스의 원칙을 깨고 이백 여명의 지배 계급이 한꺼번에 냉동되었다. 지구라는 자연이 언젠가 스스로의 인터페론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누벨은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지만, 냉동을 권유한 데머린의 입장은 누벨과는 다른 것이었다. 데머린은 이미 현실의 식량난을 걱정하고 있었다. 무인수송튜브를 통해 남아있는 지상의 식량을 가져올 순 있었지만, 어떤 형태의 식량도 오염의 가능성에서 벗어나있지 않았다. 안전한 것은 이곳의 식량 뿐이었다.
희미한 조명 아래서 퓨어러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주머니 속에 넣어둔 작은 천조각을 떠올리게 되었다. 천천히 그는 조각천을 꺼내 들었고, 더 천천히, 자신의 손바닥 위에 그것을 펼쳐 놓았다. 해와 달, 바위와 소나무... 여러 동물이 수놓여진 한 폭의 그림이 부드러운 촉감으로 퓨어러의 <개인>을 위로해 주었다. 그림 속에 퓨어러는 자신의 얼굴을 파묻었다. 해와 달, 바위와 키작은 소나무들이 비를 맞듯 퓨어러의 눈물에 젖고 또 젖었다. 곧, 퓨어러는 잠이 들었다.
좋은 아침이었다. 인공 태양의 변함 없는 조명이지만, 분명 지상의 날씨도 아름다우리라 생각되는 날이 있었다. 그날 아침 퓨어러의 기분이 그랬다. 홀로그램 모니터로 데머린의 지시를 전해 듣고, 식당에서 잠디스와 기뉴인을 만났다. 이번엔 우리 차례인가? 하고 고기를 썰며 잠디스가 말했다. 한 사람의 노아스로서, 퓨어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히죽이는 잠디스의 입가에서 퓨어러는 묘한 기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지금과는 너무 다른 잠디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파오매틱 파이프로 처음 누벨의 머리를 내려칠 때의 - 공포에 질린 그 얼굴을 퓨어러는 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얼굴도 잠디스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오히려 편안한 것은 누벨의 얼굴이었다. 용서하게, 그리고 용서하겠네... 라고 중얼거린 후 누벨은 곧 눈을 감았다. 저는 개인이 아니기 때문에, 개인이 아니므로... 하고 퓨어러의 마음이 울부짖고 울부짖었다. 명령을 내린 것은 데머린이겠지만,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누구도 처벌 받지 않았다. 남은 고기를 마저 비운 후 셋은 함께 자리를 일어섰다.
어떤 한 가지 사안에 대해, 누벨은 강력하게 데머린과 대치했었다. 식량이 거의 바닥을 드러낸 칠 개월 전의 일이었다. 쿠삭 스크리머가 살아 있다면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파오매틱 파이프를 집어 들며 퓨어러는 생각했다. 오늘은 좀 심심치 않겠는걸, 하고 잠디스가 중얼거렸다. 기뉴인이 껄껄 댔으므로 그러게, 하고 퓨어러도 응답을 했다. 눈부신 곡선의 통로 위를 파이프를 든 세 개의 그림자가 빠르게 지나갔다. 마침 그 뒤를, 여왕의 울음소리가 거대한 얼룩처럼 따라붙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손을 치켜들며 기뉴인이 소리치자 신탁자들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역력히 떠올랐다. 기뉴인과 잠디스의 등 뒤에 선 채, 퓨어러는 말없이 바닥을 내려 보았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목소리가 그래도 조금은 불편하게 느껴졌다. 즐기는 듯 기뉴인은 무의미한 대화를 몇 번이고 더 이었다. 뭐? 하고 기뉴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방... 석? 방석이라는 게 뭐지. 고개를 돌려 퓨어러에게 물었지만 그로선 발음 자체를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세차게, 퓨어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 앞에서 뒷짐을 진 잠디스의 파이프가 고개를 가로젓듯 끄덕이고 있었다.
안전한 식량은 바로, 노아스의 내부에 냉동되어 있다고 데머린은 판단했다. 인간은 끝끝내 살아 남을 거란 그의 연설처럼, 웅장한 울음소리가 둠의 외벽을 울리고 지나갔다. 파오매틱 파이프를 굳이 쓸 이유야 없었지만, 수십 차례의 경험을 통해 터득한 방법이었다. 그것은 육질(肉質)의 문제였다. 누구나 부드러운 고기를 원했고, 잠디스도 그 방법을 선호했다. 퓨어러는 눈을 감았다. 좋은 아침이라고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을 걸었다.
0
독자님의 정보를 입력해주세요.
* 는 필수항목입니다
첨부파일은 최대 3개까지 가능하며, 전체 용량은 10MB 이하까지 업로드 가능합니다. 첨부파일 이름은 특수기호(?!,.&^~)를 제외해주세요.(첨부 가능 확장자 jpg,jpeg,png,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