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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十長生 <존 웨인 3405EA> 라고 쓰여진 라벨을 퓨어러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르미노라 했던가? 뭐가? 저 금속 말이야... 라벨 테두리의. 그건, 하고 운을 뗐지만 잠디스 역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 마눔 아니었나? 알마눔... 아미눔... 알미넘... 혀를 더 굴려 봤지만 정확한 명칭은 떠오르지 않았다. 누벨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떠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퓨어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도한 일은 아니었다. 아니었지만, 천년 전의 하찮은 금속 때문에 그는 누벨의 죽음을 떠올리게 되었다. 아무렴 어떤가? 하고 잠디스가 중얼 거렸다. 아르미노건 알마눔이건 말일세. 그건 그래, 하고 퓨어러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어떠냐구, 아무렴을 되내이며 퓨어러는 잡다한 감정들을 떨치기 시작했다. 3405EA에서 3407EA까지, 해동이 끝나가는 세 개의 탱크가 잔잔한 소음을 발하고 있었다. 한 개의 탱크당 오백 서른 세 개, 혈관처럼 얽힌 미세감압튜브가 탱크 속의
최정규
요사이 학계에서는 통섭이 화두다. 2005년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가 통섭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고, 통섭원이라는 이름을 내건 학술모임도 생겼으며, 어느 때보다도 학제간의 통합학문 연구의 필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물론 지금껏 오랜 기간 세분화된 분과의 테두리 내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학문들이 단번에 하나의 통일된 틀을 이루어 공동연구의 성과물을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른 감이 있다. 각개각진의 역사가 길고, 나름대로 학문들이 자체적인 통일성을 확보했다고 자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실 통섭의 첫걸음을 내딛는데도 걸리는 문제가 하나둘이 아닌 것 같다. 일단 자연과학(특히 생물학)과 사회과학(혹은 인문과학) 사이의 간극은 심각할 정도로 벌어져있다. 과거 사회진화론이라는 이름으로 남긴 자국이 너무 선명해서인지, 사회과학에서는 어떤 현상의 유전적 기초를 찾는다는 기획 자체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반대로 생물학에서는 개체에 대한 구조
전대호
<행동학자 에드와 나눈 대화> 0. 에드라는 친구가 찾아왔다 고대 그리스 델피에 있던 신전 입구에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가 씌어있었다고 한다. 굳이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가볼 일은 아니다. 누구나 자기 마음속에서 그 경구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엄밀하고 날카롭고 냉정하다는 과학자들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최근 들어 생물학을 선봉에 세워 인간을 해명하는 것을 최대의 과제로 삼고 있으니 말이다. 아니, 알고 보면 오래 전부터 그랬다. 죽은 과학자의 전기에서, 산 과학자와의 대화에서 그들도 인간이며 따라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먼 길에 나선 순례자일 수밖에 없다는 걸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를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 비유한 사람들이 있었다. 집을 떠나 멀리 멀리 나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 그 여정을 처음으로 강조한 이들은 돌아가는 우리가 타야할 배는 시(詩)라고 했다. 또 누구는 종교라 했고, 또 누구
강양구
최근 전 세계적으로 학문 간 교류, 통합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에드워드 윌슨의 Consilience에 대한 학계의 관심도 이런 분위기를 반영한다. 특히 이 책은 국내에서 2005년 <통섭>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학계뿐만 아니라 대중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학문의 경계를 넘나 드려는 이런 시도는 그 자체로 높이 평가돼야 마땅하다. 단, 이런 시도가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지 않고 진리 탐구의 질적 도약으로 이어지려면 엄밀한 평가에 기반을 둔 토론이 병행돼야 할 것이다. <크로스로드>가 생물학에 기반을 둔 학문 간 통합 논의에 비판적 개입을 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쉽지 않은 작업을 위해 전대호, 최정규가 옥고를 보내왔다. 스스로 학문 간 교류, 통합의 최전선에서 활동을 펼치는 이들의 시각은 여러모로 시사적이다. 갖가지 논쟁적 쟁점을 제기하는 이들의 글은 앞으로 이 주제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지도로 읽힌다. 이
주일우
그 이전부터 분쟁의 씨앗은 있었다. 하지만 ‘과학 전쟁’이라고 불렸던 사건의 눈에 보이는 발단은 앨런 소칼의 도발이었다. 과학적 개념이 과학 바깥에서 부적절하게 사용되는 것에 불만을 품은 그가 칼을 들었다. 물리학에서 정립되지 않은 거짓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 현상을 해석한 그의 논문을 심사에서 통과시키고 게재한 잡지는 폐간했다. 과학적으로 올바른지 아닌지도 판단할 능력도 없으면서 과학의 이름을 빌어 사상누각을 짓지 말라는 이야기. 그리고 논란은 거세졌다. 소칼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의 과학적 오류를 파헤친 책을 출판했다. <지적 사기>라는 강도 높은 비난을 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싸움이 어디까지 가는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사실, 조금 더 큰 소요와 논란을 기대했던 내가 보기엔 싱겁게 끝났다. 몇몇 사람이 그 와중에 불이익을 받았다는 소문도 있었고 잡지에서는 이와 관련된 특집들이 마련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불거져 나오던 소리들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잦아
강명관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의 식민지 사람들에게 준 피해가 어찌 한두 가지겠는가마는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것은, 머리 속 깊이 열등감을 박아놓은 것일 게다. 그 열등감 형성의 도구로 활용된 것 또한 여럿이지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과학기술이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닫힌 문을 밀치고 들어왔을 때 서구가 휴대한 품목 중 과학과 테크놀로지, 곧 수학과 물리학, 화학, 그리고 군함과 대포, 기차, 자동차, 전신, 전화 등은 아마도 경이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서구 자본주의의 욕망과 간지(奸智), 무력 앞에 무릎을 꿇고 하루아침에 식민지로 전락했던 비서구 국가들은, 독립 이후에도 늘 열등감에 시달린다. 그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이 한동안의 과제였다. 한국 역시 마찬가지다. 과학 교과서는 서구 근대가 발명, 발견한 과학적 성과로 채워져 있건만, 국사 과목은 청자와 백자, 금속활자와 거북선, 그리고 장영실과 이천을 거론하면서 민족의 우수한 과학을 말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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