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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범
"예, 그렇습니다, 반장님. 2년 사관입니다." 인성이 감광판을 보며 묻자 군견병은 형편없는 발음으로 대답했다. 인성은 무의식 중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근무 중이긴 하지만, 면담이라 생각하고 편하게 대답하게. 군견 부대원과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군. 나는 아직 군견 내무반밖에 가보질 못해서 말이야." 인성은 '내무반'이란 말을 집어넣으며 군견병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하지만 수진이라는 그 병사는 표정에 별 변화가 없었다. (어쩌면 인성이 눈치 채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사람이라면 모를까 동물 표정을 읽는 데는 별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애견이 아니라 크러스였다. 사나움 말고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내가 알기로 군견병은 사병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고 들었네. 사관이라고 불리지만, 실제 사관은 아니라고. 맞는가? 자네를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확실히 해두자는 거니까 기분 나빠하지 말고 대답해 주게나." "예, 맞습니다, 반장님. 그리고 군견병은 근무한 연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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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진
필자는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지금이 몇 시이지?'였다. 곧이어 '아!, 글을 빨리 써야 하는데, 의식에 대하여'라는 생각이 필자를 압박하였다. 그리고 곧 이은 다른 생각은 '아!, 잠에서 깨어나 의식의 세계로 돌아오니까 '의식'이 의식되는구나!'였다……. 우리는 평소 잠든 무의식의 세계와 깨어 있는 의식의 세계를 왕래하며 살고 있지만, 의식이 무엇인지 별로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의식이 의식될 때, 누구나 한번쯤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떠올린 경험이 있으리라. '의식이 도대체 무엇일까?' '의식이 의식되었다'는 말에서 두 '의식'이라는 용어는 엄밀히 말해 서로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앞의 '의식'은 영어의 'consciousness'로, 우리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보고, 듣고, 느끼며, 생각하는 모든 정신작용이 작동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고, 뒤의 '의식'은 영어의 'awareness'로, 무엇을 알고 깨닫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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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21세기라고 했을 때 우리 의식 속에 떠오르는 가장 강력한 이미지 하나가 생명공학이다. 우리는 이제 생명을 이해했고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생명에 대한 조작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 우리가 말하는 '생명'은 토끼나 개구리에서 소나무, 물이끼에 이르는 '살아 있는' 생명체들을 이르며, 생명을 이해했다는 의미는 이들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그 구성성분들을 최소한 물리와 화학의 이해수준으로 이끌어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20세기 후반의 생명과학이 이룩해낸 자랑할 만한 지성사적 성과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것으로써 생명에 대한 이해는 끝이 나고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이것의 공학적 활용만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의 생명 이해는 생명에 대한 한 단면의 이해라 할 수 있으며,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이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이미 파악한 몇 가지 사실들로 환원될 수 없는 훨씬 더 복합적 성격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
홍승우
정재승
1945년 에르빈 슈뢰딩거가 더블린에서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을 하고 그것을 책으로 묶어낸 후,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물리학적인 관점에서 생명과 의식을 기술할 수 있느냐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금도 물리학자들 중에는 '불확실한 양자적 요동'이 의식의 출발점이라고 믿으며 신경세포 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세포내에서 양자효과를 관찰할 수 있기를 희망하며 연구하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렇다면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한지 60년이 지난 지금, 과학자들은 의식과 생명에 대해 어떤 답을 가지고 있을까? 본 호에서는 물리학을 포함해 좀더 포괄적인 관점에서 생명현상을 아우르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서울대 장회익 교수와 현장에서 의식에 관해 깊이 있는 연구를 해 온 김재진 교수께 21세기 최신 관점에서 생명과 의식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그들의 해답은 명쾌하고 꽤 그럴듯해 보인다. 그 동안 크로스로드의 글들을 즐겨온 독자들이라
이정모
"재미있게 놀아!" "응, 아빠도!" 딸아이와 아빠가 헤어지는 장면이다. 어딜까? 놀이동산 아니면 친구 생일파티? 아니다. 아침에 학교 앞에서 헤어지는 아빠와 딸이 나누는 대화다. 아니, 대화였다. 내가 독일에서 공부할 때 딸아이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침마다 우리는 이렇게 대화했다. 왜? 학교는 재미있게 노는 곳이니까. "오늘도 재미있게 놀아!" "아빠, 학교는 노는 곳이 아니야!" 아빠와 아이가 귀국했다. 대한민국의 초등학교는 노는 곳이 아닌가 보다. 그럼 뭘 하지? 설마 땅 파면서 일하나? 학교생활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집에서는 분명히 '공부'란 것을 했다. 초등학생이 참고서를 구입해 형광펜으로 줄을 그어가며 읽었고, 연습장에 내용을 반복하여 쓰면서 암기했다. 그리고 무수한 숙제를 했다. 학교는 더 이상 재미있는 곳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학창시절에는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아마 전라남도의 한적한 바닷가에서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유학 온 초등학교 4학년 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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