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처럼 기울어진 천정을 보며 잠에서 깼다. 남편은 바람이 드는 창문가에서 온몸으로 한기를 막고 웅크리고 자고 있었다. 낮은 집에서 사느라 늘 구부정한 자세여서 190에 가까운 덩치가 왜소해 보였다.아무도 켜지 않은 테피스트리가 제멋대로 켜지고 아무 채널이나 나오다가 다시 조용해졌다. 여기가 어디더라. 잠에서 덜 깬 머리가 무거웠다. 내 몸은 계속 꿈속을 헤매고 싶었지만 허리의 묶은 통증이 명료하게 의식을 깨웠다. 여기는 우리집이다. 지상이 멸망한 후의 지저세계. 사실 멸망 전에도 우리처럼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은 지하층에 살았기 때문에 딱히 세상이 달라진 건 없었다.나는 벽돌이 매달린 듯 무겁고 감각 없는 허리를 달래며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보았다. 오늘은 벽돌 모서리에 찔리는 고통 없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등에선 여전히 진땀이 났다.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아픔과 굶주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한계를 넘었다 싶으면 다음 한계가 나타날 뿐, 그런 것들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다. 잠자던 아이가 날카롭게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울었다. 아기들은 울면서 태어나고 온종일 울었다. 아기들은 왜 우는 걸까. 낙원에서 추방된 게 슬퍼서? 기다리고 있는 삶이 고될 걸 알아서? 아니면 그저, 살아남은 게 슬퍼서? <달>과 <방주>에서는 이제 아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들었다. 거기엔 수명연장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후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여기 <지하>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오염지역에서 일하느라 불임이 팽배하고 생존에 시달리다 살다보니 아무도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점점 불러오는 내 배를 보면서 먹은 것도 없는데 살이 찐다고, 유전자 변형 식품 때문에 생긴 후유증이라고 생각했다. 산업재해와 환경오염 유전자 변형 식품섭취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지하인에게 신체 변형은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악성종양이나 사지절단마비가 아니면 다행이고, 그렇다 한들 치료 없이 그냥저냥 버티다 죽었다. 치료비를 쓰고 얼마간 목숨을 연명한 들 병원의 노하우 쌓기에 돈을 쳐들이는 일이며 회복하기가 어렵다는 건 다들 알았다. 운 좋게 회복해도 전 같은 삶을 다시 살 수도 없었다. 병구환로 자리를 비운 동안 일자리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치료에 돈을 쓰면, 쓴 만큼 다른 가족의 생계를 갉아먹는 일이란 걸 다들 알았다. 그래서 나는 몇 달 동안 어지럼증과 구토에 시달리며 가공된 유전자 조작 식품조차 제대로 못 넘기고 격무에도 늘기만 하는 체중을 보며 당연히 암이라고 생각했다. 병원에 갈 필요도 없었다. 임신인 것은 7개월이 넘어서야 알았다. 우리 부부가 닥친 현실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누군가 진짜 아기는 비싸게 팔린다는 이야길 슬쩍 들려주었다. 임신부의 양수랑 태반, 아기의 탯줄과 태내 혈액까지도 큰 돈이 된다고 했다. 나는 잠시 내 몸과 생명에 위태롭지 않은 부산물을 얼마에 팔 수 있을지 계산했던 것도 같다. 아기에게 이름을 지어주기 전까지.우는 아이 옆에 누워 토닥토닥 달래고 일어나는데 뒤늦게 무딘 톱칼이 허리를 저미는 통증이 찾아왔다. 아이를 깨울까봐 잠시 숨을 눌러 참고 천천히 몸을 돌려 다시 일어났다. 세찬 강물처럼 울던 아이는 돌을 간질이는 샘물처럼 부드러운 숨을 뱉으며 잠들었다. 나는 잠깐의 평화 속에서 숨을 고르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붙박이 선반에 빼곡한 살림살이를 훑었다. 필요한 것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 문지방 하나 넘는 부엌으로 건너가 작은 저장고를 열어 불려둔 쌀과 분말 야채를 끓여 아기 먹일 것을 준비했다. 어디선가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나타나 다리에 이마를 부빗고 꼬리를 슬쩍 발등에 감으며 스쳐갔다. 사료통에서 얼마 남지 않은 고양이 먹이를 꺼내주자 저쪽에서 날카롭게 ‘냥! 꾸루록.’ 소리를 내며 검은 줄무늬 고양이가 나타났다. 회색 고양이가 ‘하악’ 소리를 내며 앞발질 했다. 검은 고양이는 두어 발 물러나 회색 고양이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남은 걸 먹었다. 고양이들이 다투는 소리에 남편이 깼다.“기차가 철로를 지나는 소리를 들었어. 창 옆에 바람구멍으로.” 밤 내내 잔뜩 옹송그렸던 몸을 편 남편은 저물녁 그림자처럼 길었고 한기에 질린 얼굴은 얼룩덜룩했다. 미닫이 창문을 열자 밖이 아니라 흙으로 꽉 막힌 격벽이 드러났다. 갑자기 현실이 쿵 소리를 내며 사방에 가득 찼다. 겁에 질려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간신히 무너질 거 같은 자신을 다그쳤다. 버텨. 도망치지 마.“오늘은 가야해.”유전자 변형 콩을 조금 불려 소금과 볶은 것을 아침으로 먹고 남편이 말했다. 나도 안다. 우리가 아직 도전할 힘이 있을 때, 고양이 밥까지 먹어치우고 서로를 잡아먹기 전에 가야했다.“그래.”마침내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지금껏 몇 번이나 풀었다가 다시 싼 필수품을 빈집들을 뒤져 찾아낸 가볍고 질긴 배낭에 담아 서로의 어깨에 매 주었다. 남편은 특히 내 배낭 무게에 신중을 기했다. 허리가 조금만 덜 아팠더라면 더 많은 짐을 지고 더 멀리 더 빨리 떠날 수 있었을 텐데 다른 사람들처럼. 하지만 사고와 출산으로 얼룩진 허리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남편이 일을 쉬는 기간에 <지표>에 ‘대재앙’이 닥쳤다. 요통이 심해 운신을 할 수 없는 나 대신 아픈 아기를 돌보느라 휴가를 내자 사업주는 간단히 남편을 잘라버렸다. 남편은 우리가족 덕분에 자기가 목숨을 구했다고 말했다. 우는 아메바와 다름없는 갓난애와 아파서 짐덩이가 된 아내를 먹여 살리느라 말 그대로 뼛골 빠지게 일하는데 우리 덕분에 살았다니 기묘한 기분이었다. 피곤해서 시커면 얼굴로 출근한 남편은 퇴근할 때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어깨는 날이 갈수록 구부정해졌다. <지표>에서 일할 때 본 날마다 마르던 달처럼. 남편이 월급을 가져올 때면 정말 두 손으로 뼈 값을 받는 기분이었다. 그 기분을 덜기 위해 월급날은 특별히 합성고기를 사다 상에 올렸다. 남편의 잃어버린 살점을 보태려는 것처럼. ‘당신도 먹지?’남편이 권했지만 입으로 들어가는 게 남편의 살 같아서 좀처럼 젓가락을 들 수가 없었다. 어쩌면 정말로 남편은 골수를 빼 팔았을 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매일 마르고 굽어지는 걸 보면.배낭에는 2리터들이 물병 두 개. 비상식량과 칼과 가위, 나일론 끈과 실과 바늘, 물을 거를 면보와 크고 가벼운 솥, 자가 손전등과 라이터와 양초를 넣었다. 자가 손전등은 자기 부상체에서 불법보부상이 떨이로 파는 것을 아이 장난감 삼아 산 것이고, 라이터는 아기의 첫 생일 초를 켤 때 썼던 거였다. 혹시나 싶어 남편의 예비 안경과 아이가 커가면서 입을 수 있도록 넉넉한 여벌옷과 가진 중에 가장 크고 두껍고 접으면 작아지고 이불삼아 덮을 수도 있을 패딩과 프라폴리스 담요를 침낭삼아 챙겼다. 무엇이 더 필요해질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아는 전쟁과 기아, 극한의 상황은 모두 화면과 이야기 속에만 있었다. 그곳에서 필요했던 모든 것이 우리에겐 필요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리고 마음도. 그 생각이 들자 엔티크 샾에서 구매한 가볍고 튼튼한 노트와 쉽게 닳아지지 않을 펜, 굴러다니는 연필 몇 점이 눈에 들어왔다. 연필은 젓가락 대신으로도 쓸 수 있었다.아무리 준비를 해도 마음이 허전했다. 모든 편리한 도구들과 언제나 필요했던 자질구레한 것들을 두고 떠난다는 게 두렵고 아쉽기만 했다. 반대로 당장 뛰쳐나가 모든 위험을 맞닥뜨리고 단박에 해결해버리고 싶기도 했다. 용기는 두려움의 뒷면이다.“너무 많잖아.”남편이 말했다. “뭐가 필요할지 모르잖아.”내가 말했다.“다시 가지러 오면 되지.”남편이 등을 돌렸다. 다시 돌아올 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둘 다 입에 담지 않았다. 남편이 빈집에서 가져온 요가 책과 몇 가지 운동기구로 내 몸은 일상생활이 가능 할 만큼은 회복했다. 하지만 밖은 일상이 아니고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요전번에도 빈집 탐색에 나섰다가 바닥이 꺼지는 바람에 골반뼈가 어긋나 한참동안 고생했었다. 정말로 길을 떠나면 위험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나였다. 아픈 아내를 챙기느라 남편이 쓸데없는 힘을 쓰게 될까봐 겁이 났다. 이제 아장아장 걷는 아이를 거두기에도 벅찬데 내가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두려움이 몰려왔다. 다른 무엇보다 그게 가장 끔찍했다.“그렇지 않아. 아이는 언제나 돌보는 사람이 필요하고 하나인 것 보다 둘인 게 나아. 어떤 상황이라도.”남편이 내 마음을 읽었다. 동갑인데도 나보다 크고 어른스럽던 남편이 더 커보였다. 하지만 그늘진 얼굴 한편에서 나는 남편이 다 하지 않은 책망을 읽었다. 아니 그건 남편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를 책망하는 거였다. 그걸 깨닫는데 아주 오래 걸렸다. 대안 없이 직장을 그만뒀을 때, 분수에 맞지 않는 비싼 카페에 앉았을 때, 백화점에 들어갔을 때, 세일 딱지가 없는 물건을 샀을 때, 늦잠을 잤을 때, 집안일을 미뤘을 때, 아이가 아플 때, 나는 유령의 속삭임처럼 맴도는 구설수와 날카로운 손가락질을 느꼈다. 그건 모두 나였다.“이리오렴.”남편이 아이를 맡았다. 변변히 먹인 것이 없으나 남편을 닮아 아이는 쑥쑥 길어졌다. 아이는 혼자 걸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안전하지 않은 길들을 대비해 남편이 아기 띠를 맸다. 내가 아무리 운동으로 근력을 키워도 망가진 허리로는 아이의 무게를 버틸 수가 없었다. 다친 나보다는 온전한 남편이 생존력이 높을 거라 남편과 아이를 같이 엮기도 했다. 남은 짐들을 최대한 이고지고 나니 등 뒤에 고양이가 남아 있었다. 회색 줄무늬 큰 고양이와 검은 줄무늬 날씬한 고양이. 녀석들은 몸의 부피가 아닌 올올한 털의 개수로 존재감을 과시하며 매일 매시간 매초마다 한 방울씩 내 안에 떨어지던 우울과 불안과 죄책감을 물리쳐 주었었다. 저 밖엔 고양이가 필요 없겠지. 감정을 느끼기는 커녕 ‘내’가 ‘나’일 수조차 없을테니까. 고양이는 개처럼 사람을 따라오지 않았다. 케이지에 고양이를 넣고 어디까지 갈수 있는지 몇번이나 연습해 봤었다. 고양이만 들고도 동네를 다 벗어날 수가 없었다. 돌아올 기력을 보충하고 허리 통증이 잦아들려면 중간에 아주 많이 쉬어야 했다.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남편은 고양이 알레르기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함께 사는 걸 감당해주었다. 지켜야 할 것의 우선순위는 너무나 명확해서 나는 울었다.첫 무리의 사람들이 떠나면서 두려움에 내몰려 짐을 쌌을 때 고양이는 염두에도 없었다. 하지만 허리 때문에 주저앉자 기대에 찬 표정으로 밥그릇 앞에 앉아 있는 노란 눈과 마주쳤다. 죽이고 가는 편이 나을까? 결국은 굶주리고 병들어 고통 받다가 앙상하게 죽어갈 바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남은 고양이 사료를 오르내리기 쉽고 해충과 습기가 차지 않는 곳을 골라 쟁여 놓았다. 하루라도 고양이가 삶을 누리길 바라고 죽음을 모른 채 죽기를 바라면서. 실은 내 눈에 새긴 건강한 모습 그대로 두고 가고 싶은 거다. 아무리 상대를 위한대도 실은 나를 위한 거라는 죄책감이 한번, 마음을 더 옥죘다.우리는 길게 이어진 빈집을 하나씩 등지면서 검은 길을 걸었다. 이 길보다 더 어두운 곳으로 나아가자니 두려움에 발걸음이 땅에 달라붙었다. 나는 딱 두 걸음, 엉키지는 않지만 무슨 일이 있어서 서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만 앞서 가는 남편과 그 옆에 종종이는 아이에게만 집중했다. 걷는 게 쉬워지진 않았지만 내딛는 발에 힘이 실렸다.“다들 어디로 갔을까?” 피로에 짓눌린 어둠을 밀치며 간신히 말이 입 밖으로 나갔다. “그건 모르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갈 데가 있다는 거지.”남편의 목소리도 무겁고 갈라졌다. 우리는 아이를 가운데 두고 서로 손을 한번 꾹 잡고 놓았다. 첫날의 행로는 모든 집들의 마지막 집에서 멈췄다. 우리는 여길 등대집이라고 불렀다. 전봇대에 연결된 가로등이 마지막으로 밝혀진 집이기 때문이었다. 그 집 주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방법을 썼는지, 아니면 떠나면서 무슨 일이 있던건지, 한집씩 전깃불이 사라지고 오래된 촛불을 밝히게 된 후에도 그 가로등에선 빛이 났다. 남편은 이 너머의 길들을 미리 탐색해 두었다. 나도 여기까진 혼자 와 본적이 있었다. 먹을 것을 뒤져 찾느라 한 집씩 제치다가 어느 날 홀린 듯이 길의 끝까지 걸어본 날이었다. 그 뒤로도 체력을 기를 겸 가끔 왔다. 자주 오진 않았다. 집들이 끝나는 점을 마주할 용기가 나는 날은 많지 않았다. 가로등 뒤로 색이 바랜 꿈결 같은 집들이 고요히 서로에게 기대 무너져 가는 게 보였다. 나는 지붕이 보이는 끝까지 훑어본 다음 어둠 속으로 발길을 돌렸다.몇 차례 사람들이 떠나고 미처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서로를 돌보았다. 대부분 병약자들이고 정상인은 드물었다. 마지막에 정상인은 남편만 남았다. 갓난 아기와 아픈 아내 때문에 떠나지 못한 남편은 남은 사람들을 돌보며 주검을 수습하기도 했다. 혼자 시체를 묻고 온 날이면 남편의 침묵은 더 깊고 낡아 부스러질 것처럼 바래 있었다. 그런 날 남편은 아껴둔 술을 한 모금 깊게 마셨다. 사실 아끼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남은 술은 아주 많았다. 나는 왜 남편이 그걸 다 마시고 영영 떠나버리지 않는지 늘 궁금했다. 마을을 떠난 사람들은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숨겨 두고 간 비상식량을 뒤져 먹으며 한동안은 사람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워서든, 두고 간 것들이 필요해서든, 아니면 더 갈 곳이 없어서든. 하지만 아무도, 단 한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남편은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 ‘돌아오지 않는 건 갈 곳이 있다는 뜻이야.’한동안 교대로 빈집들에서 필요품을 조달하면서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살피고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남편과의 대화의 전부였다. 우리는 농담처럼 서로를 무덤지기라고 불렀다. “그 사람은 <달>로 잘 갔을까?”내가 말했다.“누구말이야?”남편이 물었다.“내 조산사. <지표>에서 무슨 일이 나면 <달>로 가는 <방주>를 탄 댔거든.”“글쎄. 조산사 일을 해서 <방주>를 탈만큼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을까...”남편은 말꼬리를 흐렸다. 나는 남편이 삼킨 ‘다행히 돈을 모아 방주를 탄대도 달에서 버틸 돈이 있을까’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조산사가 될 정도의 교육을 받으려면 집안에 돈이 얼마쯤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의 일로 수다를 떨기엔 너무 피곤했다. 나는 아이를 안고 몸을 웅크렸다. 어둠 속에서 아이의 눈은 반짝반짝 빛났다. 어릴 때 읽은 동화가 떠올랐다. 눈이 유난히 맑은 ‘별의 눈동자’라는 여자아이가 사람들이 감추고 싶은 속마음을 폭로했다가 친엄마에게마저 버려져서 차가운 눈밭에 누워 있다가 별빛이 눈에 스며 천국까지 꿰뚫어보자 천사들이 아이를 데려 갔다는 이야기였다. 이 애도 어둠과 천정과 지표를 뚫고 밤하늘과 <달>을 보게 될까? 천사들이 ‘별의 눈동자’를 데리러 왔던 것처럼 <달>에서 아이를 데리러 올까?허리가 욱신댔다. 내일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 몸은 어디까지 버텨줄까. 오늘 우리가 알던 모든 장소가 끝났고 내일은 전혀 알지 못하는 길을 밟을 것이다. 꿈결에 부드럽게 손목에 감기는 털의 촉감이 느껴졌다. 눈을 뜨면 아무것도 없으리란 걸 알기 때문에 뜨고 싶지 않았다. 내가 놓아버린 포근함이 마음의 위안이 되는 건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마음에 빛을 품지 않고 어떻게 이 어둠을 버틸까. 어떻게 앞으로 나아갈까. 나는 비릿한 아이의 머릿내를 맡이며 눈가에 물이 고이기도 전에 잠들었다. 회색 줄무늬 고양이의 배고픈 혀가 까끌까끌하게 이마를 핥았다. 손에 줄 것이 없어서 꿈속에서도 마음이 아팠다. 침구를 정돈해 넣으면서 고양이 털을 몇 올 발견한 나는 그걸 보물처럼 싸서 제일 튼튼한 주머니에 깊숙이 넣었다. 그리운 마음을 작은 무덤에 묻는 것 같았다. “옛날처럼 종이 사진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남편이 말했다. “있어도 옛날처럼 가볍진 않을 걸.”내가 말했다. 대부분의 매체가 전자식이고, 굳이 닳아빠지고 공간만 차지하는 종이를 사용하지 않은지는 아주 오래 되었다. 지구 환경보전과 자원 활용 제한 때문에 가벼운 진짜 종이는 완전히 사라졌고 박물관이나 엔티크 샾에서나 볼수 있었다. 우리가 쓰는 종이는 재활용자원과 돌가루를 합성한 질기고 무거운 합성물이었다.사람들이 지나다니던 아기자기한 돌담길이 끝나자 검댕으로 더껑이 진 넓은 터널 나타났다. 우리는 터널 안의 도로를 따라 걸었다. 아직은 문명 밖으로 나갈 이유도 여력도 없었다. 세상이 하나인 때가 있었다고 했다. 구글 글라스 북 속에서. 이제 <달>과 <지표>와 <지하>와 그사이에 무수한 무중력 구역과 자기부상 구역으로 나뉘었다. 아니 어쩌면 세상은 단 한번도 하나인 적이 없었을 지도 몰랐다. 마추픽추의 가장 오래된 도시 유적마저 꼭대기에 사는 사람과 최하층이 엄격이 구분되어 최상층에서 쓴 물을 차례로 아래 사람들이 썼다고 했다. 물은 아래로 흐르면서 부유물과 오물투성이가 되어서 최하층에서 쓴 물은 아주 더러웠을 것이다. 물은 아래로 흐른다. 흐르면서 부유물과 오물을 쓸어 점점 더러워진다. 물처럼 계급적인 물질도 드물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니 모든 물질이 계급적이었다. 모든 나쁘고 더러운 것은 아래로 지하로, 좋은 것은 위로 하늘로 올라간다. 원래 지구는 우주의 먼지와 쓰레기로 똘똘 뭉친 물질이다. 모든 찬란한 것들은 더러운 땅에 붙들리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해 달아났다. 부모에게서 달아나는 아이들처럼, 중력에서 달아나는 <달>처럼. <달>에서 버려진 폐기물은 <지표>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지표>에서 버려진 폐기물은 <지하>에서 재분류되어 쓰였다. <지표>에서 난 가장 좋은 것들은 <달>로 운송되었다. <지표>에서 사용하지 않는 것들만이 <지하>에 전달되었다. <지하>에서 먹고 살고 일한다는 건 그런 거였다. 남들이 쓰지 않는 물건, 먹지 않는 음식, 정수기 없이는 마실 수 없는 물로 빚어가는 삶이었다. 사람들은 빚을 져서라도 지독하게 자신을 갈고 닦아 <지표>로 일하러 나갔고 <지표> 외곽이나 자기부상 지역으로라도 이주 할 돈을 모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더 갈아낼 것 없어 말 그대로 뼈와 골수까지 뽑아 맞바꾼 돈으로는 <지표>로 진출하기 위해 빚을 낸 교육비를 갚는 것만으로 벅찼다. 대부분의 일자리는 <지표>에 있었고 자격증이 없으면 <지표>에서 고용되지 않았다. 가끔 그 자격증 발행료와 응시료들로 <지표>가 먹고 사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교육은 <지표>가 생산하는 것들 중에 가장 비쌌다.<지하>에서 <지표>로 통하는 몇 가지 길 중에 우리는 가장 가깝고 익숙한 남편의 출근길로 향했다. 도착해보니 위에서부터 무너진 80층짜리 건물이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다리처럼 통로를 가로 막고 있었다.“다른 쪽으로 가보자.”우리는 발길을 돌렸다. 어디선가 썩은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합성고기와 비슷했지만 날카로운 비린내가 달랐다. <지하>에서 숱하게 맡았던 시체 냄새, 죽음의 냄새였다. 통로 한쪽에 사람이 지나다닐만한 수리와 보수용 문이 있었다. 평소에는 닫혀있을 문이 지금은 활짝 열려 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불길해 보였다. 미끼가 놓인 덫처럼. “거기는 가지 말자.”내가 남편의 걸음을 만류했다. 남편은 아이를 보고 문을 보고 방향을 바꿨다. 그때 피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몰라서 다행이었다고 우리는 나중에 말했다.우리는 길을 비틀어 터널 철로를 따라 걸었다. <지표>에는 자기 부상체가 다녔지만 <지하>에는 여전히 철로가 남아 있었다. <지표>에 내린 비가 누수되어 벽을 타고 흐른 검은 자국이 보였다. <지표>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개인 접속 채널들은 한동안 유효했지만 정보는 철저히 통재되어 오락물의 재방송만 검색되다가 곧 완전히 끊어졌다. 가끔 테피스트리와 글라스북에 스쳐가는 메아리 같은 잔상이 한밤중에 깔깔대면 이질감에 소름이 끼쳤다.이만큼 <지표>와 가깝다면 지상의 소음들이 전달될 법도 하건만 모든 것이 얼음처럼 고요했다. 마침내 우리는 자기 부상 열차들이 모인 기지국에 도착했다. 빈 열차 안에는 한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챌 수 있는 어떤 흔적이나 힌트라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모든 물건들이 조금 어지러진 채, 당장 누군가 그 위로 얼굴을 내밀 것처럼 각자 쓰이던 자리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기지국 바깥은 많은 사람들이 스쳐 간 흔적이 있었다. 아직 <지표>에서 내려오는 빛이 있을 때 누군가가 열차 벽에 긴 글귀를 적어 놓았다. 그림도 있었다. <지하>라서 결코 환해지지 않는 아침에 남편은 뭔지 보려고 잠깐 등을 켰다가 얼른 껐다.“뭐였어?”나는 미처 다 보지 못했다.“그냥 낙서야. 감상적이고 어리석은 싯귀들. 빛이 아까워서 껐어.”아이는 어슴프레한 선의 음영 모서리를 더듬었다. 내 눈엔 보이지 않지만 아이의 눈엔 글자들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한동안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던 우리는 결국 짐을 뒤져 먹을 것과 필요한 소모품을 몇 가지 챙겼다. 방부제로 썩지 않는 음식도 몇 가지 골라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다. 아이는 남겨진 짐 속에서 귀는 토끼고 몸은 곰이고 전제적으로는 올빼미처럼 생긴 회색가방을 찾아냈다. 가슴에는 흐려진 v무늬가 여러 개 있었다. “다른 아이도 있었을까?”“있었다면 가방을 가져갔겠지.”그래. 아이가 있었다면 인형 가방을 놓지 않았겠지. 지금 내 아이처럼.“그거 놔. 더러워. 병에 걸린다고.”우리 부부가 아무리 어르고 야단쳐도 아이는 인형 가방을 놓지 않았다. 아이에겐 장난감이 없었다. 그런 걸 챙겨올 여유도 없었다. “그래, 애들은 장난감이 필요하지.” 짓눌릴 것 같은 내 삶을 견디는데 고양이가 필요했던 것처럼 아이에게도 인형이 필요했다. 우리는 결국 남는 천으로 가방에 쌓인 마른 먼지를 닦아 아이에게 주었다. 인형 가방은 너무 작고 끈도 약해서 가방으로서의 쓸모는 거의 없었지만 인형으로 갖고 다니기는 수월했다. 나는 가방을 매주며 이 쓸모없고 사랑스러운 물건이 아이의 마음을 위로하고 지켜줄 수 있기를 몰래 기도했다.“우리가 이 애를 잘 기를 수 있을까?”나는 아이를 길러보기는커녕 구경한 적도 없었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테피스트리와 개인 통신만으로 육아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나마 출산 전 막연한 것들이었고 출산 후엔 <재앙> 때문에 새로운 정보를 구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가진 정보를 짬짬이 외우다 시피 훑었다. 진짜 육아에 돌입하자 그나마도 절반은 카더라였고 반의 반은 내 아이에겐 맞지 않았고 나머지를 시도해서 반의 반의 반의 반만 정말로 효과가 있었다. “우리도 다 아이였어. 기억해내기만 하면 되.”남편이 말했다. 귀퉁이를 밝힌 좁은 방이 떠올랐다. 딱딱한 상자에 담아 고이 간직했던 구겨진 pvc접기와 플라스틱 인형, 털 인형, 노래하는 상자, 게임 패드와 가짜 악기들. 물려받은 낡은 자전거, 아름다운 그림이 든 낡은 슬라이드 칩, 짝이 안 맞는 말판놀이, 울퉁불퉁한 퍼즐 모서리가 기억났다. 어른이 아니어서 마주하던 무력감과 가질 수 없어서 서러웠던 시간들도 함께 따라왔다.“아이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라. 우리가 지키고 돕기만 하면 되.”남편 말이 맞다. 장난감이 있건 없건 아이는 자란다. 질이 좋지 않아도 필수적인 영양소가 채워지고 사고와 질병을 피한다면 아이는 자라서 어른이 될 것이다. 물론 그냥 나이만 먹는 것과 어른이 되는 것은 전혀 달랐다. 살아남는 것이 전부인 세상에서 아이가 제대로 된 어른이 되길 바라는 건 사치였지만, 그럼에도 우리 부부는 그러길 바랐다. 내일도 모르는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건 너무 멀고 벅찬 이야기란 것도 잘 알았다.우리는 한동안 기지국에서 지냈다. 번갈아 주변을 경계하고 남은 것들을 탐색해 취하면서 글씨가 보이면 수시로 아이를 가르쳤다. 접속 채널도 글라스 북도 음악도 책도 없는 텅 빈 시간은 철철 넘쳐 흘렀고 가르침과 배움은 우리 가족의 유일한 놀이였다. 아이는 지도를 볼 수 있었고 이름을 쓸 수 있게 되었다. 숫자를 익히고 일기를 썼다. 우리는 떠나온 곳부터 지도를 그리고 있었다. 출발점이 우리집이라서 어수룩하게 만든 보물지도 같았다. 남편은 나중에 물품이 필요해지면 가지러 갈 수 있게, 중간중간 보급품들이 숨긴 곳도 표시했다. 만약에 우리가 아무데도 갈 곳이 없다면 돌아갈 길이었다. 나는 애들 낙서같은 지도를 보면서 푹푹 꺼지는 것 같은 앞길에서 출발점으로 달아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거기엔 미래가 없었다. 아이는 미래로 가야했다. 나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품안의 아이를 꽉 끌어안았다. 아이는 처음에는 걷는 것이 힘들다고 칭얼대고, 낯선 길들이 무서워서 울었다. 이젠 여행이 생활이 되었다. 놀잇감이 없다고 징징대지도 않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없어도 신기하고 재밌는 것을 잘도 찾아냈다. 아이에겐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놀이였다. 아이는 배운 것들로 철로 안쪽 격벽에 자음과 모음이 떨어져나간 싯귀들을 고쳐 썼다. 시들은 아이더러 고치라고 일부러 틀려 있던 거 같았다. 남편은 아이가 빠트린 글자를 일깨우고 다시 가르쳤다. 좋은 시절에 누군가 그걸 보고 말했었다. 이런 멍청하고 소비적인 생각을 누가 한 걸까. 아무도 보지 않을텐데.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너무 질이 떨어지고, 관심 없는 사람에겐 읽히지도 않을 거고. 정말로 읽을 사람들은 따로 파일을 살텐데 라고. 나는 햇살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글자 모서리들을 눈으로 훑었다. 어디에 있는지 어디서부터 온 건지, 도대체 어디로 갈지도 모르는 우리처럼 엉망으로 엉킨 글자 속에 상념들이 떠다녔다. 어설프게 쓰인 시처럼 우리는 목적지에 다다를 수도 있고, 이르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시의 완성이란 뭘까. 삶의 여정에서 도착이란 어떤 것일까. 마침내, 우리는 기지국 전체를 탐색해냈다. 아이는 통로에서 좀 어긋난 곳에 서서 우리를 손짓해 불렀다. 천정은 여전히 높고 어두웠지만 공기 중에 어슴프레 하게 빛이 있었다. 그곳에 서자 멀리 서광처럼 비치는 빛 줄기가 보였다. “아빠, 저쪽.”아이가 손으로 가리키며 옷을 당기자 남편은 고개 저었다.“안돼. 우린 오늘 다른 통로를 찾을거야.”남편은 <지표>로 나가길 두려워했다. 매일매일의 출근길에 무거워진 발이 습관처럼 <지표>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그냥, 가 보자. 어차피 오늘 가던 내일 가던 마찬가지잖아. 약속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고.”출근해야 할 곳도 없고 월급을 줄 곳도 없었다. 농사를 지을 수도 없고 음식물을 저장할 수도 없고 돈을 저축할 수도 없었다. 우리는 한달을 더 살지 1년을 더 살지 몰랐다. 시간은 저축할 수 없다. 삶은 저장할 수 없었다. 삶과 시간을 아끼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더 열심히 쓰는 거였다.깡충깡충 앞선 아이의 손끝을 따라가자 <지표>로 난 유리 천정이 나왔다. <지하>에 일조광을 투과하는 용도로 쓰이는 채광창은 여러 가지 조형 예술과 사회 투자의 의미로 군데군데 만들어졌다. <지하>에서 인공 조명이 화단이라면 채광창은 공원이나 광장에 비유할 수 있었다. 두꺼운 유리를 투과한 햇볕이 따갑고 상쾌했다. 아이는 처음 보는 밝은 빛에 눈시려하면서도 까르륵 웃으며 찰박찰박 햇빛과 그림자를 밟고 놀았다. 빛이 분수처럼 쏟아져 아이의 신발 밑에 그림자로 고였다. 아이의 얼굴과 남편의 얼굴이 너무 선명해서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우리는 뼈와 면역력 증강을 위해서 햇볕에 맨살을 내 놓았다. 오랫동안 볕을 받지 못한 하얀 피부는 타기도 전에 빨갛게 익었다. 나는 남편과 아이가 화상을 입지 않도록 노출을 세심하게 조절했다. 저녁 무렵에 아이는 노릇노릇 익어 있었다. 따가워서 칭얼댈 법도 한데 노느라 피곤했는지 다행히 금방 곯아 떨어졌다. 내가 잠든 아이를 안은 동안 남편은 채광창 근처로 짐을 옮겨왔다. 침구를 펼치고 제대로 자리에 눕자 허리의 통증이 밀려왔다. 나는 습관처럼 숨을 고르며 채광창으로 눈을 돌렸다. 가장 맑은 곳으로 두 개의 하현달이 보였다. “어느 게 진짜 달일까?”“내일 밤이 되면 알겠지. 달은 변하고 <달>은 안 변할테니까.”내일 밤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곧 알게 되었다. 쪽배처럼 생긴 아름다운 형태는 대낮에도 허공에 매달려 있었고 그 주위로 늘어진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선들에 아이 머리카락에 붙은 서캐처럼 작고 말라비틀어진 물체가 달린 게 보였다. <방주>였다. 한참 올려다보는데 <달>에 연결된 실하나가 끊기더니 서캐 하나가 급속도로 지상으로 추락했다. 먼 거리였지만 우리는 반사적으로 아이를 감싸고 그 자리에 웅크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충격의 잔영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우릉우릉 흔들리는 주변에서 부서질 것이 부서지고 떨어질 것이 떨어져 진정되길 기다렸다가 우리는 방주가 떨어진 방향으로 걸었다. 한나절을 꼬박 걸어서 무너진 천정과 벽 사이에 낀 <방주>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기도 불길도 없었지만 문이 열리지 않았다. 불이 나거나 폭발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이 들자 남편이 <방주>로 접근했다. “누구 있어요?”<방주> 외벽을 두들기자 안에서 쿵쿵 문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고장 난 모양이었다. 남편은 튼튼한 파이프를 찾아와 지렛대 삼아서 비틀린 문틈에 끼웠다. 처음에는 박자가 맞지 않았지만 곧 안팎에서 합세해서 문을 열 수 있었다. 다큐멘터리에서 본 엄마 닭과 알 속에 있는 병아리가 서로 합심해 알 껍질을 두드려 알을 깨는 모습 같았다.“괜찮아요?”남편은 일상어와 <지표> 공용어를 섞어서 연거푸 말했다. 안에서 나온 사람들은 남편과 우리를 보고 몇 번이고 눈을 껌벅였다.“<지표>에 사람이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요. 다들 <방주>에 탔거든요.”남편의 키에 겁먹은 눈빛으로 금발 여자가 말했다. “우리는 <지하>에 있었어요.”내가 말했다. 여자는 우리 사이의 아이를 보고는 눈이 빛났다.“세상에! 진짜 아이에요? 너무 귀여워요!”나는 여자가 호감과 호들갑으로 과장한 칼날같은 번뜩임을 분명히 봤다. 불안이 엄습했다.“이거 좀 도와줘요.”<방주>에서 나온 다른 사람이 여자를 불렀다. 나는 그 여자가 가버려서 안도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을지 궁금했지만 어울림은 두려웠다.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 게 가장 무서운 일인 것처럼, 천적인지 동료인지 알 수 없이 똑같은 거죽을 입은 채 언제든 변할 수 있는 사람이 가장 무섭다. 나는 가능한 눈에 띄지 않게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개미집에서 나오는 개미처럼 <방주>에서 기어나온 사람들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고장 난 곳을 수리하며 법석을 떠는 곳으로 남편이 휩쓸려 가는 통에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가능한 그곳에서 멀찍이, 남편을 찾을 수 있을만한 곳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아이에게 두 세번 요깃거리를 준 거 같았다. 밝았던 하늘이 다시 컴컴해졌을 때 쯤 <방주>의 소요가 잠잠해졌다. 나직한 발소리에 남편이 왔구나, 어서 가자고 해야겠다 하고 몸을 일으키는데 조용한 손이 내 입을 막았다. 약품 냄새가 났다. 불안이 차게 등골을 달렸다. “쉬, 나예요.”어슴프레한 속에서 나는 그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내 조산사였다.“그냥 듣기만 해요.”그는 천천히 손을 떼었다.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지만 아이가 있어서 함부로 소란을 떨 순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내 배가 부푸는 것을 지켜보고 출산을 도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21시간 동안 죽음과 삶의 예리한 칼날 위에서 겪는 출산의 고통을 함께 견뎠다. 경험으로 생긴 신뢰는 쉽게 희석되지 않았다.“아이가 위험해요.”그 말만 하고 조산사는 사라졌다. 뒤이어 10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의 남편이 나타났다. 나는 말없이 그에게 아이를 넘기고 짐을 걸머멨다. ‘왜?; 남편이 눈으로 물었다. 나는 입에 손을 얹고 고개를 저었다. 심장이 늑대 떼를 마주친 토끼처럼 뛰어!뛰어!뛰어! 하고 소리쳤다. 아이가 칭얼댔다. 남편이 <방주>를 떠나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지하>의 복잡한 통로에 몸을 숨길 때까지 우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허리가 불로 지지는 것 같다가 완전히 감각이 사라졌다. 따라오는 남편이 힘들어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속도만 조절했다. 아빠에게 매단 아기띠 속에서 칭얼거리던 아이는 규칙적인 발걸음의 진동에 세상 무서운 것 없이 잠들어 있었다. 나는 무서운 괴물들이 우리를 따라오진 않는지 몇 번이고 뒤를 확인하다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을만큼 지치고 아무것도 따라 붙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자 비로소 무너졌다. 내장이 뒤틀리는 것 같고 허리 아래로 감각이 없었다. “아이를 노리고 있었어.”내가 간신히 말했다. 아이가 듣고 있진 않은지 곁눈질 하면서.“내 태반 값 기억나?”우리 부부는 그 돈으로 아기를 길렀다. 육아는 어마어마하게 돈이 들었다. 꼭 필요한 것만 산다고 해도 남편의 외벌이 수입으로는 감당하기가 벅찼다. 아기는 아주 작았고, 작은 생물들이 그렇듯이 약하고 자주 아팠다. 열만 나도 큰일이었다. 아기는 빨리 자라고 빨리 변했다. 수시로 새로운 모르는 것들이 끊임없이 필요해졌다. 나는 조산사가 했던 다른 제안은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조산사는 아이가 부담 되더라도 낳아보라고, 결과가 어떻든 분명히 이득이 될 거라고 했다. 그 이득의 구체적인 경로와 방법에 대해선 함구했지만 우리 둘 다 그게 무슨 말인지 아주 잘 알았다.“아이는 돈이 되, 내장, 세포, 혈액, 골수, 머리카락 한 올까지. <달>에서 노화방지와 세포 이식에 쓴대. 임신부의 부산물보다 훨씬 비싸게 팔려. 아이는 성장하니까 살려둔 채로 계속 착취할 수 있거든. 말라 죽을 때까지 따먹다 땔감으로 쓰는 과실수처럼.”남편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면 안돼. 늙어 죽어야할 것들이 태어나 자라지도 않은 걸 잡아먹어선 안돼.”“오래전부터 그래왔어. 늙고 권력을 가진 자들이 어리고 약한 것들을 착취해왔지. 공룡처럼 쌓아둔 자본으로 노동력을 후려치고 좋은 먹거리에 세금을 매기고 땅값을 올려서 떠돌게 하고 이젠 진짜 사람 몸뚱아리를 원해.”더 말할 힘이 없었다. 우리는 웅크려 쉰 자리에서 제대로 자리도 잡지 않고 잠들었다. 나는 아파서 예민해 진 터라 깜박 졸기만 했다. 짧은 꿈속에 지금껏 단 한번도 초대받아 본적 없는 아름답고 훌륭한 만찬장이 나왔다. 식탁보는 눈처럼 희고 가장 자리에 손으로 뜬 자수를 둘렀으며 식기들은 모두 은과 진짜 나무세공품이었다. 식탁 한가운데는 오래전에 멸종된 이름 모를 뿔 짐승과 이빨 짐승과 날개 짐승이 얼음으로 조각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조각품 바로 옆 큰 쟁반에는 아기가 놓여 있었다. 분홍색 살점이 마디마다 드러난 팔다리는 한번만 비틀면 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잘려있었고 쟁반 아래엔 크리스탈 잔이 놓여서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기름을 따로 모아 담게 되어 있었다. 신처럼 빛나는 아름다운 남자가 크리스털 잔을 빼 들었다. 식탁에 둘러선 모든 사람들이 하나씩 잔을 들었다. 잔에 담긴 피와 기름은 밝은 분홍색으로 그들의 입술에 흘러들어 갈 때마다 루비처럼 빛났다. 남자는 손잡이가 정교하게 세공된 달처럼 휜 칼을 들어 아기의 가슴을 갈랐다. 그리고 끄집어낸 장기를 하나씩 작은 접시에 담아 심장은 가장 아름다운 여자에게 간은 가장 강해보이는 남자에게 폐와 다른 장기도 각각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그들은 따뜻한 장기를 후루룩 마시다시피 삼켰다. 아기 내장 회는 너무 연해서 씹을 필요도 없어 보였다. 다음으로는 근사한 옷을 차려 입은 솜씨 좋은 요리사가 등장해 부드러운 아이의 살점을 얇게 저며 모두에게 한점씩 맛보도록 돌렸다. 사람들의 입안에서 싱싱한 생명력과 연하도록 다져진 시간들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한 생명의 미래가 세련된 예절로 포장된 식사과정을 거쳐 모두의 위장 속으로 사라진 후 다르게 조리된 아이가 식탁에 올랐다. 바삭바삭 구워진 햇볕 냄새가 근사했다. 길고 마른 작은 팔다리가 낯이 익다. 요리된 아이의 얼굴을 보기 전에 꿈에서 깼다. 심장이 북처럼 뛰고 팔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어둠에 익숙한 눈으로 잠든 남편과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이 작은 얼굴은 무얼 보고 어떻게 느낄까. 아이는 걱정해야할게 너무 많았다. 조심해야할 것도 너무 많았다. 아이가 눈부시게 웃은 적이 있던가? 그래 채광창 아래서 한 번, 인형 가방이 생겼을 때 또 한 번. 아이에게 주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아이에게서 보고 싶은 것들도 떠올랐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지표>도 <달>도 아니라 바로 아이의 얼굴 위에 있었다. 하지만 살아 있어야만 존재하는 목적지였다. 삶이 없으면 아이를 볼 수도, 아이에게 보여줄 수도 없다. 아이가 가야할 길들이 눈앞에 선연히 떠올랐다. 그 길이 너무 좁고 길고 힘겨울까봐 벌써 마음이 저렸다. 그래도 함께니까 때론 팔이 되주고 때론 다리가 되 줄 수도 있겠지. 언젠가 그 길이 너무 좁아져서 우리는 뒤에 남고 아이 혼자 갈 수 밖에 없는 순간도 올 것이다. 나는 깊은 한숨으로 통증을 삭였다. 그때까지 남편과 내가 튼튼한 다리와 통로가 될 수 있을까? 할 수 있을까 내가 이 몸으로?“일어나.”남편이 나를 깨웠다. 어느새 정말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조금 먹고 짐을 살피고 다시 침묵 속을 걸었다. 기지국 쪽으로는 가지 않았다. <방주>에서 탐색을 시작하면 가장 눈에 띌 곳이었다. 우리 뿐일 때는 무섭지는 않았다.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몰랐지만 지금처럼 매시간 매순간 쫓기는 기분은 아니었다. 우리는 한 동안 사람들의 흔적을 피해 다녔다. 가끔 숨겨둔 물건을 찾으러가기도 했다. 둘 다 <지표>나 <방주>는 입에 올리지 않았다.며칠 째인지 모를 아침 몸이 일으켜지지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너무 아파서 제대로 설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다. 간신히 모로 몸을 돌려 숨만 쉬었다. 고통과 절망감이 가슴을 옥죄었다. 남편은 걱정스럽게 옆에 앉았다가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 남편과 나는 점점 적게 먹었다. 아이도 가끔 배가 고파 칭얼댔다. 그런 때만 우리는 비상 식량을 꺼내 먹였다. 불침번은 늘 내가 섰다. 어차피 아파서 잘 수가 없었고 남편은 아이를 돌보고 먹을 것을 구하는 것 만으로도 벅찼다. 내가 짐이 되어선 안됐다. 무력했던 시간들이 되돌아와서 숨을 조였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먼저 가. 따라갈게.”두고 가라고 말하면 갈 수 없을 거란 걸 알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남편은 말의 껍질을 벗기고 진실을 알아들었다.“안돼.”남편은 고개 저었다.“나아질 거야. 늘 그랬잖아. 괜찮아 질거야.”괜찮아지지 않을 것이다. 나도 남편도 알았다.“두고 가야 돼. 살아남으려면.”결국 내가 말했다. 남편은 말할 수 없을테니까.“해야 해. 살면서도 계속 경쟁해왔잖아. <지표>의 대학에 가려고 경쟁하고 취직하려고 경쟁하고, 뒤에 항상 낙오된 사람들을 두고 왔잖아. 다르지 않아. 할 수 있어. 금방 잊을 거야.”나는 계속 말했다.“아이는 살아야해. 우리는 살아봤지만 아이는 아니잖아. 아이만 생각해. 중요한 것만 생각해.”그 말을 하면서도 나는 아이가 살기를 바라는 것이 내 이기심이 아니기를 빌었다. 아이에게 비루한 삶을 주어서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을 고통스럽게 삼켰다.“아니야. 나는.”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남편의 목소리에 물기가 있었다. 배고픈 아이가 기운없이 늘어진 채로 눈만 껌벅였다. 비상식을 조금 떼어 먹이자 한입에 먹고 제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내 입에 대주었다. 나는 마른 웃음을 터트리며 아이의 손바닥을 핥았다. 이젠 짜지도 않고 먼지 맛만 났다. 남편은 잠든 아이의 몸이 식지 않게 내 품에 넣어주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 어쩌면 내가 식지 말라고 넣어준 것인지도 몰랐다. 잠든 아이는 참 따뜻했다.“엄마, 달이 뭐야?”그날 밤, 웅크리고 잠든 남편 옆에서 아이가 깨어 물었다. 나는 아이가 그렇게 길게 완전한 문장으로 말하는 걸 처음 들었다. 아이는 사실 성장 자료에서 제시된 기준보다 언어 발달이 굉장히 더뎠다. “하늘에서 빛나는 커다란 등불이야.”내가 대답했다. 남편이 깨어서 아이가 말하는 걸 들었으면 싶었지만 깨울 힘이 없어서 너무 아쉬웠다. “우리도 거기서 살거야?”나도 몰랐다. 그래서 아이에게 물었다.“거기서 살고 싶니?”아이의 크고 빛나는 눈은 어둠 너머 땅속을 지나 지표를 넘고 먼 하늘의 달까지 뚫어져라 보는 것 같았다.“응.”나는 아이를 끌어안고 목에 몸을 묻었다. 아이는 간지럽다며 웃었다. 목소리가 좀 기운이 있어서 마음이 놓였다. 아이 웃음소리는 잘강이는 냇물 같았다. 아이는 <달>로 갈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른 방법은 찾아내지 못하면. <달>에 가서 실험체로 치명적이지 않은 세포를 좀 팔아서 삶을 연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태반을 판 것처럼. 자연 임신과 출산을 겪은 천연 아이는 희귀하니까. 남편이 아이를 지켜준다면 아이는 제가 가진 것들로 <지하>에서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도 있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디에 가든 네가 원하는 삶이기를 바래.”아이가 내 말을 이해할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따뜻함 만은 기억하기를 바랐다. 그날 밤 꿈에서 나는 빨래를 개켰다. 옆에는 회색 줄무늬 고양이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 회색 고양이는 잘 마른 빨래와 세제 냄새를 좋아해서 빨래를 개면 꼭 무릎에 올라오곤 했다.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이라서 그럴 때면 나도 잠시 일손을 놓았다. 아무리 바빠도 한가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창밖엔 햇살이 비추고, 아니 햇살 따윈 아무데도 없지. 아이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남편이 부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 목소리가 그저 무사해서 나는 기뻤다.
“숲 너머에 누가 사는지 혹시 압니까? 멀리서 골조가 보이던데.” 샤워 후 뜨거운 밀크티를 홀짝이자 온몸이 다 노곤해졌다. 연희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 저었다. “난 몰라요. 검색해보든지요.” 검색한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뭔가 있더라도 아무도 살지 않을 거예요. 거긴 이미 오래전에 버려진 구시가지인걸요. 왜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떤 담대한 꼬맹이가-어른일 리는 없겠지-그 숲을 쏘다니는 걸까? 플랜의 위험에 대해 충분히 알려지지 않은 걸까? “직업 정신 발휘 중인 거예요? 근방에서 플랜이 발견된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집중 분포 지역과도 꽤 떨어져 있구요. 여기 숲은 별로 깊지가 않아서 자생할 수도 없을걸요?” 어깨 너머로 화면에 뜬 지도를 보고 연희가 말했다. 그녀는 아마 최근에 정원석을 넘어가 본 적이 없는 모양이다. 그곳은 이상 기후로 인해 밀림이라고 해도 어울릴 정도가 되어 있었다. 작년 연말 데이터만 해도 숲의 너비는 무척 미미했다. 이곳을 기준으로 했다면 택시는 나를 잘못 내려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정부에 대고 시비를 걸기는 힘들겠군. “창 전화예요~. 회선 전환해줄게요!” 연희는 어제 바로 택배로 도착한 내 하드 컴퓨터로 회선을 전환했다. 어지간한 용건이라면 휴대 전화로 걸 텐데 누구지? 라며 귓바퀴에 이어쉘(도청 방지용 화상통화 기구)을 장착하자 3차원 모니터에서 강의 초췌한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난 깜짝 놀랐지만 그녀의 형형한 눈을 보고 잠시 걱정의 말을 접어 넣었다. 나는 물처럼 쏟아지는 강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채로 더듬더듬 답했다. “글쎄요…… 저희도 목숨 걸고 잡느라 바빠서요. 사냥이 끝나면 남는 건 광선총에 탄화 흔적뿐이거든요. 워낙에 생명력이 강해서 잿더미 속에서도 일부라도 남아 있으면 재생하기 때문에 짓밟느라 바쁘지 일일이 확인할 틈은 없습니다.” 나는 약간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들으니까 더 그런 거 같은데…… 수컷형은 본적이 없는 것 같군요. 만디가 기준이라면 말입니다.” 나는 복잡해진 미간 주름을 주물렀다. “그나저나, 좀 실망인데요.” 강은 빙긋 웃었다. “그건 또 무슨 깨는 소립니까?” “잠깐만요, 강.” 그러나 회선은 이미 끊겨 있었다. “일이에요?” 연희가 의자 등에 달라붙었다. “아뇨. 그냥 친굽니다.” “꽤 어려운 얘길 하는 거 같던데요?” “연희 씨는 일반인이니까요. 저도 당신이 노래 얘기하면서 하는 통화는 전혀 못 알아듣습니다. 중간에 말없이 노래만 하는 건 더 그렇구요.” 연희는 ‘흐응’ 하고 콧소리를 냈다. 나는 그게 그녀가 복잡하지만 별로 중요치 않은 설명을 피할 때의 버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플랜이라는 거, 정말 그렇게 위험한가요? 사진을 봤는데, 꽤 매혹적으로 보이던데요? 마치 과거의 환영을 현실로 불러들인 것 같았어요. 까마득한 전설 속 괴물이 부활한 거 같기도 하고, 화석에 살을 붙여놓은 것처럼 원시적이면서도 직관적이고.” 나는 그녀의 표현이 과히 틀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 놀랐다. 흙에서 태어난, 사람을 빼닮은 생물. 그들이 먹는 건 현세 인간이고, 그들을 키운 건 까마득한 과거를 묻어온 퇴적층, 그 대지 위다. “직접 만나면 그런 생각은 들지 않을 겁니다. 동영상 없이 사진만 떠다니는 건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거죠. 유혹할 때야 근사하지만 잡아먹으려 들 때는 악몽이 따로 없습니다. 매번 내가 왜 이 짓에 나섰나 후회막급이죠. 인간을 주식으로 한다는 점만으로도 플랜은 인간에게 충분히 위험한 존잽니다. 거기다 플랜에게 먹힌 사람은 재생할 수도 없습니다. 그건 진짜 치명적이죠. 그리고 더 중요한 건, 먹이 피라미드의 꼭대기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겁니다. 먹이 피라미드는 미시적 관점으로는 단지 먹이 관계에 불과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는 종(種) 간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줄줄이 흘러나온 내 말에 스스로 놀랐다. 그제야, 내 안에 자리 잡았던 불안의 정체를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지구의 새로운 지배자가 아닐까 하는 불안. 역사적으로 가장 결정적인 진화는 언제나 전(前) 세대에 치명적인 충격을 수반했다. 공룡에서 네안데르탈인, 그리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와 신인류 모두. 아니, 망상이 지나쳤다. 강에게 옮았군. 연희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끝까지 듣고 나서 불쑥 말했다. “창, 과연 플랜만 사람을 먹을까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나는 얼얼하게 충격이 가시려는 머리에 다시 몽둥이가 다가와 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느낌을 받았다. 연희는 마치 미스터리 영화의 주인공처럼 말에 뜸을 들였다. “글쎄요, 방금 스쳐 간 생각인데…… 제대로 말하려면 좀 정리해야 할 거 같아요.” “그래서요?” “에? 정리가 필요하다니까요?” “아직 안 됐습니까?” 연희는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꽤 예민해져 있던 나는 그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충격을 받았다. “창, 생각보다 성질 급하네요. 난 과학자가 아녜요. 이렇게 금방은 안 돼요. 시간이 필요하다구요. 우선 오늘 밤은 자야겠어요. 내일 일찍 K시로 떠야 하니까. 먼저 잘게요.” “…… 잘 자요.” 나는 떨떠름히 인사했다. 연희는 수면 시간이 정확했다. 자기 관리도 있겠지만 곧 노화에 들어가므로-외모 상으로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심한 듯 했다. 물론 그녀 정도의 부와 명성이라면 다음 재생 따위는 별로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아쉽다면 이번 생에서 번식체를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는 것 정도일까? 나는 그녀가 몇 번째 재생체인지 모르기 때문에 짝짓기에 얼마나 부담을 갖고 있는지도 잘 모른다. 오늘 낮엔 케이크를 갖고 그 애와 헤어진 장소에 갔었다. 낮의 숲은 얌전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했다. 밤의 흥분과 위협, 광란에 찬 포효는 나무껍질 밑이나 덤불 속에 던져놓고 멍청하게 졸고 있는 맹수처럼. 나는 버석 마른 바위에 주저앉아 휴대용 종이 아이스박스의 케이크가 녹아 버릴 때까지-케이크는 끝까지 녹지 않았다- 그 애를 기다렸다. 아무도 오지 않았다. 저녁엔 연희와 있어야 하므로 저택으로 되돌아와야 했다. 우리의 생체반응 거리가 50센티 이하가 아니라면 ‘돔’의 잔소리 로봇이 객쩍은 소리를 하러 올 테니 말이다. 연희와 나는 그 이후로는 짝짓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내가 도무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차라리 아침에 샤워와 함께 배출하는 편이 훨씬 기분이 깔끔했다. “자요?” 간신히 청한 잠에 들려는데 어둠 속에서 연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낮게 ‘끙’ 소리를 내고 스탠드 등을 켰다. “깼습니다. 얘기하세요.” 연희는 잘강거리는 술잔을 들고 내 침대 옆에 걸터앉았다. 내 잔도 있었다. 내가 이미 마셨다고 하자 연희는 ‘흐음……’ 하는 그녀 특유의 모호한 콧소리를 내고 가까운 탁자에 잔을 내려놓았다. “저번에 그 얘기 말이에요. 아무도 죽지 않는데 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하냐는 거……”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거 역으로 생각하니까 무척 간단해지던데요? 물론, 당신이 바란 게 이런 종류의 대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계속하라고 손짓했다. “오리지널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이 어디인지 생각 해봐요.” “사회죠.” “당신 바보예요? 물론 오리지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선전하는 건 사회죠. 각 분야에 새로운 혁신이 필요하다면서요. 하지만 그게 아니란 건 당신도 나도 알죠.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그걸 포기했어요. 그런 척만 하고 있을 뿐이죠. 아니면 사람들이 지독히 혼란스러워 할 테니까. 아무도 그런 건 원하지 않죠.” “그럼 대체……” “유전자 돔이에요.” 갑자기 세게 얻어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가장 중요한 걸 놓치고 있던 거였다. “새로운 오리지널은 새로운 외부 자극에 대한 자연 항체를 갖고 있죠. 재생체랑 다른 점은 그거 하나에요. 우리는 재생할 때마다 그걸 옵션으로 첨부하죠. 그런데, 과연 그 옵션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나는 그런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하는 그녀가 두려워졌다. “이건 아까 낮에 말하던 건데요. 플랜만이 포식자가 아녜요. 오리지널을 먹고 있는 건 우리에요. 그들은 우리 먹이가 되기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거라구요.” “너무, 극단적인 생각 아닙니까?” “글쎄요.” 연희는 두툼한 어깨를 으쓱했다. 그녀는 자신이 한 말의 무게를 제대로 모르는 거 같았다. 등에 진땀이 흘렀다. 나는, 굉장히 훌륭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남에게 폐를 끼치거나 부당한 일은 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긍지를 갖고 살아왔다. 그런데 세상에 존재하는 자체로 내 모든 것이 이미 죄악 덩어리였다. 어떻게 내가 플랜을 식인귀라고 욕할 수 있었을까? 나도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는데. “창? 괜찮아요?” “……연희 씨는 괜찮습니까?” “뭐가요?” “그런 생각을 하고도 기분 안 나빠집니까?” “좀, 나쁘기야 하죠.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걸요. 난 살아 있고, 계속 살 생각이니까.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하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아무도 정말로 죽지 않잖아요. 좋은 게 좋은 거죠.” 연희의 말은 옳았다. 그럼에도 나는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 겁니까?” 연희는 코웃음 쳤다. “그럼 죽을래요? 당신도 죽고 싶지 않으니까, 재생할 돈이 필요하니까 그렇게 위험한 직업을 선택한 거잖아요.” 나는 연희에게 플랜 헌터를 택한 모순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곤란해할 거 없어요, 창. 누구나 살고 싶어요. 지금 가진 걸 하나도 잃지 않고, 더더욱 많은 부와, 명성과,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인 환희를 맛보며. 어떤 시대에도 이런 일이 가능했던 적은 없어요. 우린 지금 산 채로 신의 영역으로 가고 있는 거예요.” 연희의 얼굴은 빛나고 있었다. 그건 어떤 깨달음-그것이 어떤 종류 건 간에-에 닿은 종류의 사람에게서 나는 빛이었다. “그럼 말이 나온 김에 오리지널을 만들지 않을래요? 정부에선 내가 짝짓기를 해내지 못하면 내 활동 범위를 제한하겠대요. 그건 나한테 굶어 죽으란 소리죠. 그거 알아요? 최근 오십 년 간 한 명도 태어나지 않았다는 거. 당신이랑 나랑 오리지널을 만들면 ‘돔’에서 꽤나 반가워할 거예요. 나도 당신도 다른 때보다 더 많은 특혜를 받을 거라구요.” 그녀의 혀는 뜨거웠고, 비벼 오는 가슴은 천근처럼 무거웠다. 나는 거칠게 움켜쥐는 손길에 숨을 삼켰다. “아니야, 이건 아닙니다…….” “잘난 척하지 말아요. 우린 모두 공범이에요.” 나는 연희를 뿌리쳤다. 연희는 붙잡지 않았다. 다만 그녀는 차갑게 벼려진 말을 던졌다. “그렇게 혼자 순결한 척 할 거면 차라리 죽어 버려요. 그게 제일 깨끗할 테니까.” 연희의 마지막 말은 내 속을 너무 깊게 찔러서 피를 흘릴 틈도 없이 숨부터 막혔다. 어느새 나는 공중전화에 매달려 강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깨워서 미안합니다, 강. 하지만……” 꼴불견이란 걸 알지만 울먹임이 새어나오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강, 우리는 왜 사는 겁니까? 미래를 잡아먹어가면서까지 여기 살아 있는 이유가 뭐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잠시 화면이 영화처럼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잠깐 사이에 강은 한결 산뜻해진 얼굴이었다. 나는 연희와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주었다. 강은 가끔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가로 젓고, 또 여러 번 한숨을 쉬며 끝까지 들었다.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할 수 있는 겁니까? 여자들은 다 그런 건가요? 아무런 죄책감이나 두려움 같은 거 안 듭니까?” “욕망이죠. 더 많은 돈, 명예, 쾌락…… 그런 끔찍한 탐욕들, 그리고 죽음에 관한 공포. 더 뭐 있습니까? 희생, 박애? 얼어 죽으라고 하십쇼.” 강은 쓰게 웃었다. “그건, 누군가 우리가 계속 삶을 갈구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겁니까?” 입안이 바싹 말랐다. 나는 강이 하는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너무 복잡했고 충격적이었다. “강, 난 총이나 쏘고 플랜이나 때려잡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강은 혀를 찼다. 인구가 줄면 없어지리라 예상했던 기아도 여전히 강력해. 먹을 사람도 줄었지만 일할 사람도 똑같이 줄었기 때문이야. ‘돔’안에선 일거리가 없다고 난리지만 ‘돔’만 나가면 그런 일투성이라고. 인류는 그렇게 종의 마지막을 향해 걷고 있어. 지금 오리지널 어쩌고 하는 건 내 눈엔 어리석은 발악으로 보여.> “왜…… 왜 그렇게 된 겁니까?” 나는 흥분과 충격으로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다. 원치 않았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제길, 자기 전에 술을 마신 탓이다. 그래, 그 탓이야. “대체 누가 우리를 개체로 정의하며 효용성을 따지는 겁니까? 신? 우주? 그런 게 존재하는 거였습니까?” 그때 나는 낮은 허밍 소리를 들었다. 극도로 몰려 있는 내 신경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투명하고 엷은 음색이었다. 나는 수화기를 떨어트리고 그리로 달려갔다. 뒤에서 강의 목소리가 내 발목에 걸렸다가 힘없이 스러졌다. 나는 그게 강과의 마지막 통화가 되리란 걸 몰랐다. 그때 내 머리 속엔 온통 그 애 생각뿐이었다. 작고 투명한 사랑스런 손가락, 아직 세상 어떤 더러움도 모르는 순결한 미소, 웃음소리, 지친 마음을 위로하는 나직한 노래…… 사생아라도 좋다. 그 애가 무엇이라도 좋았다. 지금 그 작은 몸을 내 몸으로 품을 수 있다면. 나는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의 선로에서 머뭇거리던 열차가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한 걸 느꼈다. 내 심장이 놈의 엔진이었다. 열차는 그 애를 찾아 달렸고, 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을 가늠할 틈도 없이 목적지에 다다라 있었다. “안녕?” 나는 어색하게 인사하고 그게 멋쩍다고 느낄 틈도 없이 작은 팔 안에 안겼다. 그 애는 내 어깨에 달라붙어 조그만 손으로 내 머리를 감쌌다. 숲의, 태고의, 그 오래고 신비로운 향이 가슴으로 스며들며 날뛰는 숨을 안정시켰다. 어떻게, 그 애가 있는 곳을 찾아냈는지 모른다. 어떻게 그 애가 나를 찾아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그 애의 향기를 가슴 깊이 빨아들이는 것만으로 천국에 다다른 기분이었다. 그 애는 천천히 나에게 입을 맞췄다. 그 애의 입술은 체리 셔벗보다도 달고 부드럽고 시원했다. 내 몸을 더듬어 확인하는 손가락들도 싫지 않았다. 이미 단단히 발기된 내 성기는 어떤 거리낌도 죄책감도 없이 그 애를 원하고 있었다. 그 애는 내 몸에 달라붙은 채로 천천히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를, 내 모든 것의 원자의 뿌리까지 받아들였다. 나는 나른한 충족감에 휩싸여 눈을 감았다. ж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술이 깬 후 감각이 더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몽환향에서 깨자 모골이 송연했다. 시야는 뭔가에 붙들린 채 고정되어 있었지만 주변에 울리는 처덕 소리와 기이하게 움직이는 덩굴의 사각거림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나는 지금 플랜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 꼼짝도 할 수 없이. “이런.” 내 눈앞의 천진한 얼굴은 그대로였다. 나는 녀석의 낮은 허밍 소리를 들었다. 플랜이 노래한다는 건 본적도 들은 적도 없다. 놈들의 성대는 그만큼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웃음소리도 목과 머리의 연결점인 연수부분-인간으로 설명하자면-의 개공구에서 간신히 나오는 거였다. 게다가 분명히 녀석에겐 다리가 있었다! [안녕. 창. 당신이. 내게. 준다고. 했어요.] 그 애의 뺨이 내 뺨에 닿았다. 몽환향이 덜 깬 걸까? 나는 마치 그녀의 노래가 사람 말소리처럼 들렸다. 발음도 부정확하고, 어떤 말을 사용하는지도 구분할 수 없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만은 뚜렷했다. [안녕. 창. 당신이. 내게. 준다고. 했어요.] “무슨 소리야?” [안녕. 창. 당신이. 내게. 준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애는 내 귀에 키스하고 천천히 물어뜯었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그 애는 제 입과 배를 가리키고 나를 가리켰었다. 그건 케이크에 대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아니……야…….” 나는 그 애의 얼굴이 천천히 아주 낯익은 형태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죽기 직전의 환영처럼 강이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푸근한 입매와 밤샘 덕에 까칠해진 피부,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이는 버릇, 모든 것이 강 그대로였다. 그러나 어딘가가 어색했다. 눈이었다. 무지개 빛으로 난반사 되는 눈동자, 그건 강의 연구실에 있는 플랜의 눈이었다. 순간 환영은 최고의 악몽으로 탈바꿈했다. 강의 얼굴과 플랜의 눈을 한 그 애의 빨간 입안에서 내 귀였던 고깃덩이가 쩍쩍 씹히고 있었다. “……안 돼…….” 충격과 공포는 몽환향에 가로 막혀 꼭 닫힌 창 밖의 바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때 갑자기 날카로운 소음이 심장을 꿰뚫었다. 나는 까마득한 심연, 검의 무의식의 바다가 물결치는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죽었다는 걸 알았다. 모든 것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ж 믿을 수 없게도 내가 다시 눈을 뜬것은 연구소였다. 엷게 바랜 천장 색과 낯익은 인테리어로 나는 이곳이 강의 개인 연구실임을 알았다. 내 곁에는 미완이 서 있었다. 연희도 함께였다. “어떻게 된 거지? 나 플랜한테 먹히지 않았나?” 내 심장은 아직 생생한 죽음의 충격으로 떨고 있었다. “아, 음……. 다행히 맛보기 시작할 때 뺏었어요. 방법이 좀 거칠었지만.” 미완은 빈 손가락으로 총 쏘는 흉내를 낸 다음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에…… 저…… 플랜이 전부 먹어 치우기 전에 그냥 둘 다 쏠 수밖에 없었어요. 이해하세요. 도저히 떼어낼 수가 없었거든요.” 나는 미완의 목소리가 묘하게 엇나가는 걸 느꼈다. 미완 탓이 아니라 내 귀 탓이었다. 오른쪽 귀가 없었다. “음…… 그러니까…… 녀석이 당신의 귀를 물어뜯더군요. 그쪽엔 이미 플랜의 독이 퍼져서 재생하더라도 몸이랑 따로 놀 거라서……. 아…… 음…… 그래서 지금 인공형의 본을 뜨고 있어요. 곧 평소랑 똑같아질 거예요.” “어떻게 된 건지 누가 설명 좀 해보시죠.” 나는 그런 설명에는 강이 제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쩐지 그녀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대신 미완이 답했다. “에…… 그게……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일단 제가 당신을 구했어요. 어떻게 제가 거기 있었냐면…… 음…… 연희의 전 짝짓기 상대가 저였거든요. 저는 그전부터 이미 연희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에 정말 기뻐했는데, 실패로 끝나자 또 만날 길이 막막해졌죠. 흠…… 제 월급으론 연희가 있는 곳까지의 편도 요금 밖에 안 됐어요. 그래도 있는 돈을 다 끌어 모아서 그녀의 모든 공연과 스케줄을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죠. 에…… 저는 정말로 그녀를 사랑하니까…….” 나는 사랑이란 건 믿지 않지만 적어도 미완이 어떤 기분으로 그 일들을 했을 지는 조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날 강의 온실에서 그렇게 나를 노려본 거였군. “음…… 아무튼…… 당신은 운이 좋았어요. 당신이 숲으로 사라져 버렸을 때 마침 강이 근처에 있는 저를 불렀어요. 진짜…… 타이밍이 좋았어요.” 나는 그때 이야기는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강은 어딨습니까?” “그게…….” 미완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나는 속으로 차분히 최악의 일들을 상상했다. 이렇게 하면 어떤 일을 마주하건 간에 꽤 완충제 역할이 됐다. “에…… 창이 일어날 수 있게 되면 녹화 칩을 보여 드릴 생각이에요. 저도 제 눈을 믿기 어렵지만…….” 나는 연희를 넘겨다보았다. “당신은 봤습니까?” 연희는 고개 저었다. “전 일반인인걸요.”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지금 봅시다.” “잠깐, 창은 좀 더 쉬셔야…….” “괜찮습니다.” 지금의 내 신경으로서는 이 불길한 긴장을 버텨 내는 것만으로 녹초가 될 지경이다. 매를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먼저 맞는 편이 나았다. 미완은 나를 부축해 영상실로 인도했다. 영상실은 곤충 눈의 내부에서 밖을 보는 것처럼 한번에 마흔 여덟 개의 각도에서 자료를 살펴 볼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저…… 미리 말씀드리지만…… 녹화 상태가 조악해요. 전파 장애라도 있었는지 중간에 3분 정도 노이즈만 나올 거예요. 다른 카메라를 확인해 봤는데 연구동 전부, 아니 돔 전체가 시스템 다운을 일으켰더군요.” 나는 미완의 설명을 제대로 들으려 노력했지만, 미간에 땀만 맺힐 뿐이었다. “흠…… 혼자 계시는 게 나을 거 같네요.” 그는 컴퓨터에 필름 칩을 투입하고 문을 닫고 나갔다. 잠시 후 나는 온실에 서 있는 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잠옷인지 작업복인지 구분 불가능한 구깃구깃한 흰옷은 분명 내가 통신기를 집어던지고 숲으로 달려간 그날 밤의 것이었다. 나는 화면 하단에 뜨는 녹화 시간으로 그게 강이 나와의 통화를 끊은 직후라는 걸 알았다. 혼자 있는 강은, 마치 사람에게 하는 듯이 플랜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눈을 감고 하늘거리며 플랜은 물 밖에 나온 붕어처럼 입을 뻐끔댔다. 성대가 없어서 입을 움직인다는 건 별 의미가 없었지만 놈들은 일부러 인간 흉내를 내고 있었다. 나는 묘한 동정심과 함께 찜찜함을 느꼈다. 그렇게까지 해서 놈들이 얻고자 하는 게 무얼까? 그들은 왜 우리와 소통하려 하는 걸까? 강의 말처럼 놈들이 우리를 닮은 건 단순한 사냥의 미끼 차원이 아니라, 그러지 않으면 안 될 어떤 이유가 있는 거였을까? 네안데르탈인과 호모사피엔스사피엔스가 원숭이와 고릴라만큼 유전적 구조가 다름에도 비슷한 형태를 가지고 어느 한 접점에서 서로 소통했던 것처럼-그게 대립이건 친화건 간에-. 나는 숨을 죽였다. 만약에 그렇다면 대체 왜, 어떤 이유인지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화면밖에 남지 않았다. 화면 속의 강은 홀린 듯이 플랜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화면에서 이명 같은 것이 들렸다. 나는 스피커 볼륨을 높였다. 노이즈가 심했지만 이명이 아니라 분명 노랫소리였다. 놈이, 플랜이 노래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음조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강은 플랜에게 가까이, 위험할 정도로 가까이 다가갔다. 놈은 강을 현혹하고 있었다. 분명했다. “들으면 안 돼요, 강. 들으면 녀석이 당신을…….” 나는 숨을 삼켰다. 놈이 강을 잡아먹을 거라는 예상은 다행히 빗나갔다. 강은 흔들리면서 천천히 플랜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플랜에게 다가갔다. 강은 팔을 펼쳤고, 플랜은 그녀를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거기서부터는 카메라 밖이라서 보이지 않지만 희미하게 쥐어뜯기는 소리와 화면 안으로 툭툭 떨어지는 고깃덩이-이전에 강이었던 조각-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눈을 감았다. 강을 먹으면서도 플랜은 노래하고 있었다. 그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놈의 몸 전체, 연구실, 건물 외관, 돔, 그 주변을 둘러싼 모든 숲, 그 아래 지저 속 원시 대지가 부르는 노래였다. 그 순간, 내가 놈에게 귀를 깨물리던 순간 강은 놈에게 먹히고 있었고 온 세상이 플랜의 노랫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어떤 소리도 그걸 꿰뚫고 들어올 순 없었다. 다른 어떤 소리도 그보다 더 강력하게 세상을 지배할 수는 없었다. 화면은 꺼졌다. 미완이 말한 3분간의 공백 부분이었다. 화면은 없지만 나는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었다. 이제 강은 어디에도 없다. 마취에서 덜 깬 심장에 뻐근한 상실감이 전해져 왔다. “그게…… 흠…… 우리가 너무 방심했던 거예요. 우린 우습게도 저 놈이 강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어요. 강도 그랬죠. 그녀는 플랜과 소통한다는 착란에 빠져 있었어요.” 어느새 미완이 곁에 서 있었다. 나는 콧물을 훔쳤다. 미완은 굳이 내 쪽을 보지 않았다. “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가 발견했을 때, 저 플랜은 말라죽어 있었어요. 미라처럼 바싹. 내부엔 식물과 똑같은 물관만 즐비하더군요. 그건 약간 예상외였지만요. 창이 궁금하시다면 나중에 연구실에서 보실 수 있도록 조처해둘게요. 대신 한 가지 굉장한 걸 발견했죠.” 나는 그가 내미는 사진을 보았다. “소름끼치게도 놈들은 땅 밑에 거미줄처럼 얽힌 균사로 그들만의 통화 수단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유선 전화망처럼요. 아니 유기적인 형태와 정교함에선 놈들이 앞서요. 놈들은 균사를 통해 서로 양분을 교환한 흔적도 있었어요.” 나는 미완의 말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우리는 당신이 재생하는 동안 균사의 행방을 쫓았어요. 연구실 벽에는 거대한 유기체 지도가 펼쳐졌죠. 그게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아세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숲입니까?” “바로 맞아요. 연희 씨 댁이었죠.” 미완과 연희는 서로 마주 보았다. “우리는 놈들이 미리 눈치 채고 숨지 못하게 신중하게 헌터를 배치하고 균사 마디에 동시 다발적으로 산성액을 부었어요. 그야말로 전면전이었죠. 창이 그 광경을 보지 못해 무척 아쉬워요. 땅을 온통 파헤친 덕분에 송전관까지 건드려서 반나절간 ‘돔’의 기능이 정지했지만, 완벽한 안전에 비한다면 작은 대가죠.” “과연, 완벽할까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맞지 않기를 빌었지만 뇌가 지끈지끈한 이런 종류의 예감은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놈들은, 양분 말고 다른 것도 이동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놈들은 영양분뿐 아니라 몸 전체를 이동했어요. 식물 주제에 어떻게 그렇게 신출귀몰 할 수 있었는지 이제 알았습니다. 연구실의 플랜은 말라죽은 게 아니라 여길 떠난 겁니다. 놈들은 분명히 사람을 씹어서 양분화하죠. 그건 기타 소화 기관이 있어야 마땅하다는 뜻도 됩니다. 그냥 물관뿐이란 건 말이 안 되죠.” “믿을 수 없어요! 그런 건 말도 안 돼요! 그럼 놈은 왜 일부러 여기에 잡혀 있었던 거지요? 언제든 나갈 수 있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미완은 플랜에게 농락당한 분통을 나에게 터트렸다. “당신은 거짓말을 하는 거예요! 강에게 상상병이라도 옮은 건가요?” “강이 옳았습니다. 놈에겐 상식보다는 상상력을 적용시키는 편이 낫습니다. 낡은 껍질은 버려두고 중요한 알맹이만 분해해서 균사를 통해 이동 후 재조합한다면 발이 없어도 무척 안전하고 효율적인 이동이 됐겠죠. 게다가 제가 최근에 만난 놈은 본체와의 분리도 가능했습니다. 물론 장시간은 아니었지만.” 그 애가 나무 사이를 건너뛸 때 분명히 식물 부분은 없었다. 그러나 놈이 나를 먹을 땐 분명히 플랜이었다. “저를 쏜 전자총 지금 갖고 있나요?” 미완은 주저하며 총을 내주었다. 나는 총신에 저장된 최근 사용 기록을 불러내고 녹음 칩의 나머지 부분을 재생했다. 강을 잡아먹고 무거운 연기처럼 바닥으로 살포시 내려앉은 플랜은 천천히, 천천히 말라 가고 있었다. 나는 화면 아래의 시간을 확인하고 총신의 사용기록과 대조했다. 역시 녀석이 나를 잡아먹던 시간과 겹쳐졌다. “후…….” 절로 한숨이 났다. 나는 강으로 변하는 녀석의 얼굴과 난반사 되는 눈동자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를 잡아먹는 순간 놈의 모습이 변했습니다. 천천히 여기 연구실에 있던 플랜의 모습으로.” 나는 놈의 외관이 강을 빼다 박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도 미친 소리를 더 신빙성 없게 만들 수 있는 어떤 말도 보태선 안 됐다. 미완은 여우에 홀린 듯한 표정이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직접 거기 가보면 알게 될 겁니다.” 나는 ‘끙’하고 몸을 일으켰다. 미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안 됩니다. 창은 아직 몸이…….” “지금 몸 운운할 때가 아닙니다. 이건 인류 전체의 존망이 걸린 문젭니다.” “이번엔 당신이 너무 확대 해석하는 거 아녜요?” 내내 잠자코 있던 연희가 항의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환자복을 갈아입었다. 새 육체는 새 옷처럼 뻣뻣했지만 활력이 넘쳤다. 숲은 거의 초토화 상태였다. 곳곳에 플랜을 사냥하느라 태운 자국이 역력했지만 주변에 흩어진 흙더미로 보아 진짜 플랜을 잡은 게 아니라 균사를 처리하고 남은 흔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내가 그 애-혹은 그것-를 만난 자리를 찾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주변에 격자무늬로 난사 된 광선총의 흔적을 찾아낼 수 있었다. “뒤처리는 제가 했어요. 방법은 대강 알고 있으니까요.” 뒤쫓아 온 미완이 말했다. 그는 나름 해냈다는 것에 뿌듯한 얼굴이었다. 나는 허리를 굽혀 흙을 움켜쥐었다. 버석하고 달큰한 냄새가 났다. 플랜이 사는 냄새였다. “놈을 잡은 즉시 불태웠습니까?” “예? 물론이죠. 아, 잠깐…… 태우기 전에 당신 뇌부터 척출했어요.” 어째 재생 시간이 지나치게 짧더라니. 미완은 내게 감사의 인사를 원하는 듯 했지만 난 전혀 고맙지 않았다. “미숙한 플랜 헌터가 어떻게 당하는지 압니까?” “네?” “사냥에 만족하고 잠깐 방심한 틈에 남은 찌꺼기에서 재생한 놈에게 당하는 사례가 가장 많죠. 놈들의 생명력은 그만큼 강력합니다.” 나는 신발 끝으로 주변의 흙을 헤쳤다. 놈은 분명히 남아 있었다. 헌터도 아닌 비전문가가 놈들을 뿌리 끝까지 제대로 처리했을 리 만무하다. 그럼 놈은 미완이 내 뇌를 꺼내는 틈에 재생해 우리를 공격했어야 옳았다. 그러나 놈은 그러지 않았다. 그럼 분명히 뭔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거다. 모든 생물에게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최우선시 하는 일. 아마도 번식이겠지. 젠장. 범죄 현장으로 돌아온 범죄자가 이런 기분일까? “역시.” 내 발 앞에는 설치류가 저장해 둔 도토리같은 것들이 잔뜩 드러나 있었다. 완벽한 원은 아니지만 거의 원에 가깝고 뾰족한 돌기 때문에 씨앗처럼 보이는 그것들은 은색으로 보얗게 반짝였다. 그 애의 머리색과 겹쳐 보이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미완이 허리를 굽혔다. “이게 뭐죠? 알? 씨앗?” “뭐든 간에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어떤 종류의 것도 아닐 겁니다. 놈들은 지금 이 순간도 진화하고 있습니다. 처음 갓난애 모습에서 성체로 진화했듯이.” 나는 견본으로 하나를 굴려내 파삭 밟았다. 끽 소리와 함께 끈적한 진액과 엷은 초록빛의 물풀 같은 것이 터져 나왔다. “뭐든 간에, 냄새 한번 지독하네요.” 따라온 연희는 코를 싸쥐고 물러났다. 미완과 내 눈이 마주쳤다. 미완이 먼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건 정액 냄새였다. “그럼 이게 플랜의 종자란 말입니까?” 뒤늦게 도착한 연구진은 씨앗을 보자 뛰지도 않고 숨을 헐떡였다. 나는 그들을 내버려두고 땅을 해쳐 플랜의 씨앗을 모두 파냈다. 그리고 출력을 높인 광선총을 그 위에 난사했다. 하얀 연기와 붉은 섬광이 지면에 넘실댔다. “지금까지 놈들의 번식 방법을 알아내지 못한 건 우리가 멍청했던 게 아니라 놈들에게 ‘번식법’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존재하죠.” “어떻게 이런…….” 미완은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고개 저었다. 밤잠을 설쳐 가며 강 옆에서 함께 플랜의 생식을 관찰하던 게 그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깐, 견본을 좀 놔두지 그랬소. 연구소에 가져가면…….” 연구진의 멍청한 소리에 나는 턱을 꽉 물고 무뚝뚝하게 답했다. “두 번 다시 위험한 장난질은 안 됩니다. 이미 그쪽도 피를 볼만큼 봤잖습니까?” “당신은 일개 헌터요. 우리가 당신 말에 따라야 할 필요는 없소.” “저도 그쪽 말에 따라야 할 필요 없습니다. 제 임무는 플랜 말살이니까요.” 하얗게 타버린 씨앗 더미 앞에서 망연자실한 미완과 연구진을 두고 난 헌터 회선 전체를 열어서 동료 플랜 헌터들에게 씨앗에 관한 새로운 정보를 전했다. 연구진의 플랜말살이라는 위대한 성과에 실직을 우려하고 있던 모두는 예상한 만큼의 경악과 환호-무엇에 관한?-로 나에게 답신했다. “이 숲은 우리가 처리하도록 하죠. 아직 수백 개는 더 있을 겁니다.” 정액에 들어 있는 정충의 수가 정확히 얼만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몇 만 마리다. 분명 씨앗은 그만큼 존재할 테고, 지금 태운 씨앗은 고작 100여 개에 불과했다. 나머지 씨앗은 균사망(菌絲網)의 유기통로가 태워지기 전에 이미 사방으로 퍼져 나갔으리라. “창, 어째서……?” 미완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불안하면서도 의아한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피했다. 나로선 대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시 사항을 나눈 30분 뒤, 그냥도 무너진 철골 구조물처럼 흉측하던 숲은 아무것도 남지 않을 정도로 참혹하게 유린되었다. 숲이 없으면 ‘돔’이 죽고 숲이 있으면 플랜이 산다. 나는 헌터들 사이의 농담을 떠올리고 착잡해졌다. 왠지 스스로의 숨통을 조이는 어리석은 싸움을 시작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결코 기권할 수는 없었다. 새벽녘에 지친 몸으로 다시 연구실로 돌아온 나는 병상으로 가야 한다는 미완의 만류를 뿌리치고 영상실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전날에 보았던 녹음 칩을 재생했다. 낮은 노래 소리, 노이즈, 찌걱찌걱 씹는 소리와 피가 사방에 흥건하고…… “어?” 나는 잠깐 재생을 멈추고 2, 3초간을 되돌렸다. 강은 팔을 펼쳤고, 플랜은 그녀를 허공으로 안아 올렸다. 강이 플랜에게 안기기 직전 카메라 쪽을 보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을 읽었다. 갑자기 우주 밖으로 튕겨진 듯한 무시무시한 막막함이 온몸을 휩쓸었다. 노이즈처럼 미세하게 시작된 플랜의 노래가 어느새 거대한 합창이 되어 사방에 울리고 있었다. 나는 지구 한 구석에서 작은 씨앗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고 잎을 살랑이며 사람처럼 춤추는 것을 보았다. 놈들의 출현으로 인류가 공들인 지표 포장은 속절없이 뒤집히고, 타르 찌꺼기 밑에서 창백하게 썩어 가던 대지는 발가벗고 햇살과 입을 맞추었다. 댐에 가로 막혀 있던 강은 유쾌하게 바다를 향해 내달리고 멸종했던 열대 나비가 날아올랐다. 창 너머 세상은 플랜의 눈처럼 아프도록 오색 찬란한 빛으로 가득했다. 아직 미완성이었지만 나는 그게 다음에 올 새로운 지구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거기 핀, 지상 전체를 뒤덮은 새로운 지배 종은 우리 인간이 아니라 사람의 상체와 식물의 하체를 가진 꽃들이었다. 뚜- 재생이 끝나고 태고의 밤처럼 새카만 어둠이 화면을 물들였다. 나는 어느새 연구실 구석에서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웅크린 채 귀를 막고 있었다. 강이 필요했다. 이런 이야기쯤은 ‘상상력이 조야하다’며 가볍게 비웃어 넘겨줄 그녀의 유쾌한 목소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강은 어디에도 없다. 강,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뭔가 절대로 알고 싶지 않은 두려운 현실이 살금살금 내 등을 덮쳐 오는 것만 같다. 그때 불쑥 생체컴퓨터의 저장 메시지 신호가 새빨갛게 번뜩였다. 나를 흠칫 놀랐다. 동료 헌터였다. 나는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다. 과연 내일의 나는 무엇과 싸우게 되는 걸까. ※¹환상진화가는 네안데르탈인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가 유전적 구조가 다르다는 학설을 바탕으로 씌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온몸에 ‘플랜(plant)’의 뿌리 덩굴이 감겨 있었다. 시꺼멓고 축축한 데다 끈끈하기까지 해서 그냥도 떼어내기가 번거로운데 하나를 떼면 두 개가 더 얽혀 들어서 어설피 건드렸다간 숨도 쉴 수 없게 될 게 분명했다. 명색이 플랜 헌터(Plant hunter)인데 이런 꼴이라니 어이가 없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걸까? 활짝 핀 꽃잎에서 피어오르는 몽환향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가 무척 힘들다. 뇌를 꺼내 버터에 버무린 다음 싸구려 술에 푹 절여 다시 되는 대로 쑤셔 넣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그래도 나는 생각해야만 했다. 안개처럼 부연 밤을 청명하게 흩트리는 웃음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소름끼치게 듣기 좋은 플랜의 웃음소리였다. 덕분에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던 머릿속이 굳어지며, 뒤엉켜 있던 기억의 실타래가 느리게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등에 미지근한 수액이 흐르는 보드라운 플랜의 팔이 느껴졌다. 예쁘고 하얀 작은 발은 벌거벗은 채로 내 허벅지에 감겨 있었다. 쓸모없는, 근육도 없이 모양뿐인 발이지만 효과는 탁월했다. 헌터를 속여 넘겼으니 말이다. 놈들은 원래 발이 없다. 외양적으로 인간의 어린아이와 놈들을 구분하는 방법은 그것뿐이다. 놈들이 처음 나타난 건 유성우가 쏟아지던 밤이었다. 별들의 축제처럼 밤하늘이 야단스럽던 날 놈들은 <돔> 외곽의 숲 속에서 처음 싹을 틔웠다. 놈들은 갓 태어난 어린애 모양을 하고 작고 말갛고 투명하게 빛났다. 땅에 떨어진 별처럼. 온화하고 요상스런 광채와 무력한 모습은 유성우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요정이 버린 아기라고 생각했을 테고, 혹자는 아기 예수의 재림이 아닐까 가슴을 울렁였으며, 대부분은 숲에 갓난애가 버려져 있는 것에 두려움과 동정을 느꼈을 것이다. 공통적인 건 그들 모두 예외 없이 아기를 안아 들었고, 여지없이 플랜의 첫 먹이가 되었다는 거다. 그 뒤로 숲에서는 가끔씩 아름다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부딪는 것처럼 청명하고 흔들리는 수면처럼 잘강대는 웃음은 조용하면서도 멀리까지 퍼져나가서 사람들을 유혹했다. ‘돔’을 떠난 여행자들과 새로운 소식에 느린 외곽 거주자들이 플랜의 주 사냥감이었다. 한밤중에 들리는 웃음소리에 “거기 누구요? 누가 있소? 도움이 필요하오?” 물으며 전등을 들고 나선 사람들은 수풀 속에 숨은 두어 살짜리 어린애를 마주하고 놀랐다. 한밤중에 혼자 숲에 버려진 아이는 조금도 두렵거나 슬픈 기색도 없이 오랫동안 계획한 나쁜 장난이 성공한 것처럼 방울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들은 천진하게 웃는 아이가 내미는 손을 무심결에 마주 잡았다. 그러면 곧장 수풀 아래 숨겨져 있던 덩굴손이 사냥감을 그물처럼 옭아매고 난폭하게 먹어치웠다. 식충 식물처럼. 그게 지금 내가 빠진 상황이다. 거미줄처럼 얽긴 덩굴 틈으로 간신히 손가락을 움직여 벨트를 더듬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광선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제야 흐릿한 기억이 돌아왔다. 휴가 기간이라 무기는 반납 상태였다. 제길. 플랜에게 잡히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행동요령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지만 공백뿐이다. 나는 지푸라기 하나 없는 늪에 빠진 듯한 절망에 헐떡였다. 놈은 내 몸부림에 아랑곳없이 부드러운 뺨을 내 뺨에 마주 대며 내 귀에 키스하고 천천히 물어뜯었다. ж “또 그렇게 지독히 재미없는 얼굴을 하고 있군.” 나는 강(江)의 온실에 서 있었다. 플랜 헌터의 초대 멤버이자 창시자인 강은 이제 은퇴해서 늙은이처럼 온실이나 가꾸며 지내는 중이었다. “강이야말로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겁니까?” 나는 수분과 이온을 조작해 온실 안에 저절로 비가 내리게 하는 전자동 스프링쿨러 대신 손수 물뿌리개를 쥔 강을 쳐다보았다. 박물관에나 있을 법한 물건이었다. 내가 불편하지 않느냐고 묻자 강은 어떤 편리한 것보다도 익숙한 게 가장 편하다고 대꾸했다. “나야 이 빌어먹을 미친 세상이 언제나 즐겁지.” 강의 입술에 매끄러운 웃음이 떠올랐다. 크림치즈에 얹힌 체리 셔벗처럼 부드럽고 산뜻한 입술이다. 처음 저 입술에 정신을 빼앗겼던 순간이 떠오른다. 나는 진심으로 강이 내 짝짓기 상대가 되어주길 바랐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때의 내가 놀랍지만, 그때 나를 놀라게 한 건 강의 대답이었다. “기분 좋은 말이지만, 사양할게. 난 이미 번식 의무를 다했어.” “말도 안 돼요. 이렇게 젊어 뵈는데?” “난 아홉 번째 재생체야.” 그 말은 아직 첫 성장체에 불과했던 내겐 상당한 충격이었다. 서너 번이야 이제 꽤 보편화됐지만 아홉 번째 재생이라니, 기적에 가까운 숫자였다. 나는 우리 사이에 걸린 시간의 간극 앞에 눈이 핑핑 돌았다. “정말로, 아홉 번이나 재생했어요? 저를 거절하려는 핑계가 아니구요?” 강은 귀 뒤에 미세하게 박힌 재생증명칩을 보여주었다. 반짝이는 나선형 장식 안쪽에 아홉 개의 홈이 있었다. “이제 됐어?” 강은 내게서 몸을 뗐다. 나는 아쉬움을 느끼며 내 귀를 더듬었다. 아직 보송보송한 솜털뿐이었다. “어떻게 아홉 번이나 재생했어요? 초기만 해도 진짜 불안정했다던데.” “글쎄. 어쩌다 보니.” 그 말은 이후로 내가 강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세기를 넘나드는 동안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덤덤히 기억하기에 그보다 더 적절한 말이 없으리라. “아무튼 희귀하디 희귀한 첫 성장체의 짝짓기 신청이라니 영광이야. 하지만 난 짝짓기 행위도, 새로운 오리지널 창조에도 관심 없어.” “……의외네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아쉬운 손바닥을 비볐다. 오래 긴장했는지 꽤 축축했다. 물론 지금 강과 마주한 내 손은 바싹 말라 있다. “뭐가?” “여자들은 모두 오리지널을 만들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나를 만든 여자는 언제나 짝짓기만 생각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건 늘 수태와 번식과 그것이 가지는 신성함에 대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강은 내게 더욱 신선한 사람이었고 맺어지지 못한 게 아쉬웠다. “그런데 왜 그렇게 씁쓸하게 웃는 겁니까?” “내가? 그래 보여? 설마. 그냥 자네 기분이 씁쓸해서 그래 뵈는 거 아냐? 난 이 녀석을 만난 뒤로 세상이 즐거운걸.” 나는 강이 가리킨 쪽을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거기엔 강의 발 앞에 웅크린 채 떨어지는 물방울을 기분 좋게 맞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나는 ‘놈’의 흠뻑 젖은 옷 위로 드러나는 관능적인 곡선들이 무척 낯설고 보기 불편했다. 놈에겐 과거 수컷을 유혹하기 위해 처음으로 육체를 활용했던 암컷의 농밀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신선하고 달콤하고 톡 쏘는 듯한 향내와 획을 꺾을 곳을 찾기 곤란한 섬세한 곡선들. 지금의 여자들에게는 그런 특징이 사라진 지 오래다. 그들의 메마른 자궁과 불안한 난자, 그리고 활동이 용이하도록 발달된 필수 근육과 그걸 보호하기 위해 살짝 덮인 최소한의 지방층이 전부였다. 힘들여 임신하거나 출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정에 성공한 수정체는 나팔관에서 자궁까지의 사치스런 여행을 즐길 틈도 없이 사출되어 즉시 ‘돔’의 인공자궁으로 옮겨졌다. 23세기 말에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극심한 다이어트 열풍 때문에 가슴과 엉덩이의 지방층이 사라져 임신 기능이 저하된 탓도 있고,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증진함에 따라 과도한 스트레스가 수태 확률을 떨어뜨렸기 때문도 있고, 인공자궁이라는 의학적인 발명 때문에 임신의 소용성이 사라진 탓도 있는, 닭인지 달걀인지 알 수 없는 모든 사건들이 폭발적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결국 외양만으론 여자는 비쩍 마른 남자와 별반 다를 게 없게 되었다. “뭐야, 자네. 설마 만디가 마음에 들었어? 이건 플랜이야, 인간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허벅지부터 뻗어나가는 어지러운 덩굴은 분명 플랜의 것이다. 약간 몽롱하면서도 천진한 웃음도 유성우 떨어지는 밤이 그대로 각인된 오색반사 되는 눈동자도 플랜의 것이었다. “가만 보면 자네 취향 참 고루해. 난 가끔 자네가 나와 동시대 사람이라고 착각하곤 한다니까. 나야 녀석을 보면 옛 생각이 나서 즐겁지만 자네 사는 데는 별로 안 즐거울 거 같은데, 다음 재생 때는 취향이 바뀌도록 옵션을 달지 그래? 그럼 세상 살기 좀 편할 텐데.” 나는 빙긋 웃으며 고개 저었다. “아무리 재생이 발달해도 그런 옵션은 절대 무릴 겁니다.” 재생 옵션은 병이나 바이러스, 정신병적 이상 호르몬 수치에만 관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과학의 발달은 정신 조작이나 두뇌 활용에도 간섭할 수 있었지만, 너무나 세심한 작업이었고, 잘 조율된 뇌일수록 더 빨리 마모되거나 미쳐 버릴 확률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기획 자체가 폐기되었다. 게다가 그런 뇌는 두 번 다시 재생할 수 없었다. “가능하면 더 곤란하지. 우리는 모두 초인이 될 테고, 그럼 세상에 아무도 필요 없어질 테니까.” 강의 목소리엔 웃음이 섞여 있었지만 난 따라 웃지 않았다. 강은 머쓱하게 턱을 문질렀다. “자네는 이상해. 나야 23세기에 난 사람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자네는 천 년은 더 뒤에 태어난 주제에 나랑 비슷한 냄새가 난단 말이야? 여자 취향도 그렇고. 이런 구식 스타일이 어디가 좋다고 꼬셨던 건지.” 강은 스스럼없이 자신의 불룩한 가슴과 처지기 시작한 뱃살을 주욱 당겨 보였다. 나는 웃으며 얼굴을 붉혔다. 누군가 ‘사람은 태어난 때와는 관계없이 제각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했다. 몸은 두고 머릿속만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30세기에 태어나 살고 있는 사람이라도 관념이나 행동 패턴 등은 20세기나 르네상스 시대 사람과 같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정확히 어떤 걸 말하고자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막연한 느낌으로 내가, 지금, 여기서 느끼는 부적합함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놈한테 이름까지 지어준 겁니까? 만디?” 하늘거리는 플랜을 가리키자 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맨드레이크(mandrake). 흰독말풀. 전설 속에선 기적의 만병통치약이자 비명 소리로 사람을 죽이는 걸로 유명했지. 뭐 실제의 흰독말풀은 진통제 수준이지만. 어딘지 닮았잖아? 몽환을 유도하는 점이나 웃음‘소리’로 사람을 살해하는 점이나.” 나는 지나치게 로맨틱한 거 아니냐고 투덜댔다. “녀석들은 식인귀라구요.” “그거야 그렇지. 뭐 이름쯤이야 아무려면 어때? 그나저나, 자네처럼 어수룩한 사람이 플랜 사냥꾼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단 말씀이야. 난 자네가 살아 돌아오지 못할 줄 알았어. 처음 헌터들과 내보냈을 때 내가 뒤에서 저장 세포랑 재생허가서를 쥐고 얼마나 쫄았는지 모르지?” 강은 과장되게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바닥 아래 불룩한 곡선이 기분 좋게 달라붙었다. 나는 그때는 워낙 정신이 없어서 기억 저장소에도 등록해두지 않았다는 건 말하지 않았다. 기억 저장 없이 재생해봤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할 테니까 강이 아는 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든 난 살아 돌아왔기 때문에 그걸 말할 일은 없었지만. 게다가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만약에 모든 게 준비되었다 해도 플랜에게 당했다면 ‘나’는 여기 있을 수 없었다. 플랜에게 당한 자들은 재생되지 않았다. 영혼 끝까지 양분이 되어 잡아먹힌 것처럼 아무리 육체를 배양해도 유기수조 속에서 썩어버리거나, 설사 세포 활성화에 성공해도 열린 동공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번개 맞기 직전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처럼. 처음에는 재생 세포나 기억저장 장치의 결함으로 치부되었는데 근간에야 플랜이 원인임이 밝혀져 사람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 뒤로 플랜의 별명은 ‘밤의 웃음소리’에서 ‘영혼까지 먹어치우는 탐식자’로 바뀌었다. “달리 할 일이 없잖습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 일자리 얻기가 어디 쉬워야죠. 저를 만든 교미쌍이나 제 퍼스트나 별반 모아놓은 게 없어서 이번 재생 비용을 갚으려면 아직 까마득합니다.” 아무리 탄생률이 저조해도 새로 태어난 자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일자리는 한정되어 있고 아무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계 수단을 나누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은 곧 재생이고 죽어도 죽지 않는 힘이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첫 성장체들은 서둘러 재생 비용을 모으기 위해 가장 위험하고 어려운 일로 빠지기 일쑤였다. 기이하게도 재생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후부터 세상은 어쩐지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사람이 바뀌지 않으니 세상도 달라지지 않는 것일까? 이건 과학 분야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직 발전(있던 것을 계속 더 탐구해 가는 것) 외에 수평 발전(아무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것을 연구, 발견하는 것)은 거의 퇴화하다시피 했다. 100년만 더 살았으면 더 굉장한 발전과 번영을 가져왔을 것이라 짐작되었던 위대한 사람들도 어쩐지 오리지널이 이룩한 것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물론 그들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결과물들을 선보였지만 오리지널의 변형이나 패러디에 불과할 뿐 완벽하게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고인 물이 되었다. “돈이 없어? 어째서? 자네는 최고의 헌터잖아? 올해 최고 기록 갱신자 명단에서 자넬 봤어. 작년에도, 재재작년에도 그랬던 거 같은데? 자네 오리지널도 플랜 헌터였잖아? 상금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게다가 플랜 헌터의 위험수당은 또 어떻고? 그 많은 돈을 대체 다 어디다 썼는데?”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요, 어쩐지…… 쓰자고 보니 없던데요. 돈이란 게 원래 그런 거잖습니까.” 강은 한숨을 푹 쉬었다. “내 아들 같으면 엉덩이를 펑펑 때려주고 뱅크 메모리 칩을 거머쥐겠건만.” “강의 자식이었다면 교미신청에서 그렇게 매정하게 거절당하지도 않고 최우선 교미 후보에 올랐을 겁니다.” 나는 웃었다. 아들이란 말은 지금은 개념조차 사라진 말이었지만 강과 오래 알아 온 터라 어렵잖게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재생이 거듭되다 보니 자식, 부모, 가족의 개념이 희미해졌다. 개인은 개인으로서만 완전했다. 굳이 가족을 얽자면 누구의 부모의 몇 번째 재생체와 그 자식의 몇 번째 재생체인데, 대게 직접적인 관계를 가졌던 개체에서 두세 번씩 재생한 상태라서 연관성은 이미 사라졌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터라 일부러 교류를 갖지 않는 한 얼굴 한 번 제대로 마주칠 일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리 이동수단이 발달해도 사람들은 서로를 방문하기엔 너무나 바빴다. 재생에 재생을 걸쳐 이렇게 지독히 긴 시간을 가지게 됐는데도 오히려 필요한 일들을 뒷전으로 미뤄두는 지루한 여유만 늘었을 뿐, 정말로 중요한 일들을 하기에 시간은 지나치게 길었다. 더운 여름날, 도저히 어찌 할 수 없이 늘어진 엿가락처럼. “또, 또, 엄한 소리한다. 요즘 좀 여유가 생겼나 보지?” 강은 질색했다. “다른 건 몰라도 생식에 관해선 강이 살던 세기의 도덕관념은 적용되지 않습니다.” 나는 등 뒤의 등걸나무에 느슨하게 몸을 기대며 최대한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돔>에서는 건강한 오리지널만 얻을 수 있다면 어떤 짝과 교미하던 상관치 않죠. 어차피 퍼스트도 아니고 대부분 재생체의 재생체니까, 같은 사람인 동시에 다른 사람이잖습니까. 설사 강이 저를 만들었대도 상관없죠. 직접 자궁에서 키워낸 것도 아니니까요. 게다가 워낙에 낮은 수정 성공률에 또 건강하게 성장시키기도 힘드니까, 건강하게 성장했다는 건 다음 대도 그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지고 그런 짝들이 만난다면 확률은 두 배로 높아진다는 소리니 적극 권장할 만하겠죠.” 두 배라는 건 과장이다. 유전적 돌연변이가 나올 ‘만약’을 배재할 수 없으니까. 아내가 있고 남편이 있는 혼인제도는-그게 일부일처제든 일부다처체든 일처다부제든 간에- 벌써 10세기 전에 사라져버렸다. 20세기 이후로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한 생식력이 불완전한 혼인제도 안에서 더욱 희박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지구 연합정부인 <돔>은 ‘혼인제도’를 폐지하고 ‘짝짓기 정책’을 폈다. 남녀 한 쌍이 오직 다음 세대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서로에게서 다음 세대를 얻지 못하면 교미 짝이 바뀌었다. 같은 행위는 ‘번식의무(각각 오리지널을 최소한 넷 이상 만들 의무)’가 완료될 때까지 전 재생체에 걸쳐 계속됐다. “그거 참 편리하네. 마치 어제의 죄를 지은 나와 오늘 회개한 나는 전혀 다르다는 과거 모 종교의 회유책 같잖아? 피 묻은 옷을 갈아입었으니 저지른 살인 자체도 없던 게 된다? 말도 안 되지. 아무리 새 옷을 갈아입어도 그 속의 때투성이 자신은 별로 달라지지 않아. 난 그럴 수 없어.” 나는 이럴 때 새삼 강이 구시대 사람이란 걸 깨닫는다. “강은 너무 많은 걸 기억하는군요. 설마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전부 기억하는 건 아니겠지요?” “왜 아니야?” 강은 눈을 똥그랗게 떴다. 나는 ‘역시’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래요, 설마 강이 기억을 지우거나 했을 리 없죠. 보통들은 해마다 기념처럼 기억 사출소에 가서 쓸데없는 기억을 처리하거나 재생 때마다 자동 기억 삭제를 옵션으로 선택하는데, 강만큼은 절대 그럴 리가 없는 사람이었죠. 제가 잠시 착각했나 봅니다.” 자동 기억 삭제는 한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눈을 뜨면 당신 앞에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당신은 순백의 어린애처럼 깨끗하고 세상은 흥미와 호기심으로 넘칠 것입니다”라는 게 광고 카피였다. 고착된 일상에 물려버린 사람들에게 그야말로 획기적인 상품이었고, 만약의 경우에는 기억저장소에서 이전 기억을 다시 다운 받으면 되니까 안정성도 있었다. 그러나 고착 상태는 개인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걸친 문제였으므로 대부분이 이 옵션을 반품했다. 아무리 자기가 변하려 해도 그간 자기를 보아왔던 주변의 눈들이 바뀌지 않는 이상 절대로 완전히 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좀 더 세밀화된 부분 선택 기억 삭제로 보편화되었다. 언젠가는 ‘완전한 기억력, 치매도 실수도 없다. 생체컴퓨터(생체 에너지로 작동하는 진화형 개인보조 탑재 컴퓨터) 없이 당신의 일과를 좀 더 손쉽게!’라는 기억 강화 옵션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신경증과 강박증 수치가 네 배로 늘어난 바람에 결국 <돔>에서 제재했다. “나는 그냥 자연스러운 게 좋아.” 이미 조금도 자연스럽지 않은 세상인데 새삼 뭐가 더 자연스럽고 덜 자연스럽다는 걸까. “이번 재생휴가 때 뭐 계획해두신 거 있습니까?” 나는 화제를 바꿨다. “글세, 별로.” 강의 목소리는 평이했지만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그녀는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강이 재생 휴가를 꽤 오래 미뤄왔다는 걸 상기했다. 그녀는 어쩌면 다시는 재생하지 않을 생각인지도 모른다. “강?” 강이 갑자기 꺼져가는 촛불처럼 위태해 보여서 난 몸을 내밀어 그녀를 잡았다. 갑자기 오리지널 때의 두근거림이, 아니 그때의 향수가 아주 잠깐 내 심장을 두드렸으나 금방 사그라졌다. 강은 웃으면서 몸을 뺐다. “왜 그래 갑자기? 잠 덜 깬 사람처럼.” 나는 멋쩍게 손을 놓았다. 강은 물뿌리개를 치웠다. 플랜은 아쉬운 듯 눈을 감고 하늘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낮잠에라도 든 거 같은 모습이었다. 물론 단순한 의태 반응이지만. “흠. 강, 저 플랜 말입니다. 돔의 연구실에 있던 거죠? 어쩌다 떠맡게 된 겁니까?” 나는 플랜의 난(亂)반사되는 눈이 감긴 것에 안도했다. 놈의 눈은 지나치게 매혹적이어서 영혼에 치명적인 상처를 남겼다. 아무리 단련되어 있더라도 보호경 없이 계속 보다 보면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녀석은 나를 잡아먹으려는 의도가 없었기 때문에 시선은 미미한 호기심에서 그쳤지만 아니라면 아무리 나라도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돔의 연구실에 사는 플랜은 산채로 사로잡힌 최초의 플랜으로 유명하고 연구자들을 족족 잡아먹은 걸로도 유명했다. 한 달 이상 놈과 지내고도 잡아먹히지 않은 유일한 인간은 강뿐이었다. 그래서 강에게로 오게 된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놈이 강에게 손대지 않는 건 가장 처음 조우한 것이 강이기 때문에 알에서 깬 오리처럼 따르는 것이고-말도 안 된다. 플랜의 번식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으나 확실한 식물체이므로 그럴 리가 없다-, 또 다른 소문에는 놈이 강의 첫 교미 짝을 잡아먹었기 때문에 강과 막역한-대체 어떤?-관계에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강은 어떤 풍문에도 진지하게 응수하지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어이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놈들의 첫 출현 시기가 강이 퍼스트로 살았던 시기와 미묘하게 겹치기 때문에 그런 소문이 생긴 모양이었다. “운석에서 나왔다든대…… 어디서 온 건지 알아냈습니까?” 이렇게 안심하고 가까이에서 살아 있는 플랜을 관찰할 기회는 많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놈의 하늘거리는 은빛 이파리나 끈적이는 가시가 촘촘히 박힌 촉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마취 독을 듬뿍 품은 보라색 가시 촉수는 아주 얌전히 큰 이파리 밑에 말려 있었다. 플랜을 사냥하고 여러 가지 훈련을 받기는 했지만, 플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거의 없었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제대로 알려진 게 없었다. 간신히 손에 넣은 자료도 대개 전설이나 풍문에 빗댄 쓸모없는 가십뿐이었다. “그건 그냥 학계의 추론 발표일 뿐이야.” “그럼 강의 생각은 다르단 겁니까?” “그거 알아? 식물도 지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어. 소리도 지르지. 다만 우리가 인지할 수 없을 뿐이야. 플랜은 그것의 극명한 형태가 아닐까? 식물이 드디어 어리석은 인간들을 위해 직접 커뮤니케이션에 나서준 거지.” 강은 순간 현실 밖에 있었다. “또 그 상상병 도졌군요? 그래서, 잡아먹는 게 대체 얼마나 커뮤니케이션이 된다는 겁니까? 어차피 위장에 들어갈 거라면 그쪽에 커뮤니케이터를 설치해주는 편이 나을 텐데요?” 내 비꼼에 강은 콧방귀도 안 뀌고 말을 이었다. “좋아. 상상이 많이 가미되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플랜은 우리가 지금껏 발견하지 못한 지상의 생물일 가능성이 충분해. 유성우와 함께 갑작스레 출현한, 아니 그때 출현하리라고 예정되어 있던 생물. 우리 인류가 그랬듯이. 외 우주에서 왔다고 하기에는 녀석들은 우리를 지나치게 의태했어. 이건 카멜레온이 색깔을 바꾸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놈들은 우리를 잡아먹기 위해 불현듯 둔갑한 게 아니라 이 모습이 되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진화해왔다고.” 나는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간단히 말하면, 인간에게 드디어 절대적인 포식자가 출현했다는 말이지. 사실 그렇잖아. 게다가 한 끼로 사람 하나를 삼키는 대단한 탐식가지.”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순식간에 눈앞에 떠오른 먹이 피라미드 꼭대기에 조그만 씨앗이 떨어지더니 하늘거리며 꽃을 피웠다. 플랜이었다. 파급효과를 계산하지 않은 단순한 상상에 불과한데도 나는 그 씨앗이 너무나 불길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건 먹이에 관한 문제가 아니었다. “기껏 인간 하나 먹자고 지나치게 복잡한 진화를 감수했군요. 환경 호르몬이나 유전조작이나 그런 상황은 다 고려된 겁니까?” 내가 투덜대자 강은 웃었다. “물론이지. 일시적 변화라면 지역적으로 한정적이고 불규칙적이어야 하는데 플랜은 돔 외곽의 전 구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출현했어. 형태도 일정했고. 게다가 유혹만큼 간편하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사냥법은 별로 없지. 나름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쩌면 꼭 그것만이 목적은 아닐 수도 있고.” “그럼 뭐가 또 있단 겁니까?” 강은 신중하게 고개 저었다. “나도 몰라. 자네 말처럼 인간을 잡아먹기 위한 목적만으로는 지나치게 복잡한 진화였다고 생각 중일 뿐이야. 그나저나 자네 짝짓기 때가 되지 않았나? 선은 봤어?” 강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듯 손부채질을 했다. “율가(家)의 여자라고 들었습니다. 그 유명한 가수 집안요. 아직 못 만나봤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강의 질문이 불편할 때가 있다. 아직도 강은 내게 ‘그런’ 느낌인 것이다. “율가의 처녀라면 연희(聯喜)겠군. 착하고 순한 처녀지. 그 집안 여자들이 대게 다 그래. 짝짓기 상대로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하고. 근데 아쉽게도 한 번도 제대로 성공 못했어. 아직 제짝을 못 만난 탓이겠지. 성공하길 빌어. 자네의 첫 오리지널이라면 과연 어떨지 무척 기대되는걸.” 나는 강이 어떻게 내 짝짓기 상대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알고 있는지 의아했지만 미처 묻지 못했다. 그때 내 머리엔 열대의 환락 같은 기묘한 열기와 땀과 쏘는 듯이 매스꺼운 생식기 냄새가 뒤범벅되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짝짓기는 대단히 불쾌한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그 행위를 멈출 수 없는, 순간의 본능적 욕구라는 것은 소름이 끼쳤다. 마치 내가 나 자신의 의지가 아닌 외부의, 인간이라는 종의 씨를 뿌리기 위한 단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창(窓)? 왜 그래? 창백해?” 강이 일깨운 순간, 나는 짝짓기 때와 비슷한 냄새를 맡았다. 플랜의 향기였다. 속이 꿀럭 뒤집히는 것 같았다. “아…… 음…… 강, 거기 계세요?” 그때 미적지근한 온실에 신선한 바람이 섞여 들었다. 강의 네 번째 번식체인 미완이 강을 찾고 있었다. 나는 아직 성장기를 채 끝내지 못한 낭랑하고 불안정한 목소리에 기묘한 이질감을 느끼며 외부의 건물들에서 밀려들어온 메마른 향을 깊게 심호흡했다. 아직 해는 밝았고 온실 밖에는 열락의 어지러운 기억 따윈 단박에 날려버릴 날카롭고 빡빡한 현실이 악어처럼 어슬렁대고 있었다. “여기 있다, 미완(未完). 창이 왔어. 전에 인사했지?” “에…… 아, 안녕하세요, 창. 유명세는 여전하시던데요.” 강이 혼자 있을 것이라 예상했는지 나를 대하는 그의 낯빛이 불편해 보였다. 아니 지금 잠깐 스친 눈엔 증오까지 떠올라 있었다. 내가 그에게 그렇게 밉보일 짓을 했던가? 어리둥절해 하는데 강이 먼저 말했다. “뜸들이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아, 저…… 그게…… 손님 앞인데요. 나중에…… 음…… 다시 하죠.” “언제는 창이 손님이었나 뭐. 그냥 해.” 강은 미완이 입을 열기도 전에 그의 용건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도 알았다. 강이 부르지 않는 한 미완이 이렇게 급하게 강을 찾는 용건은 하나다. “저…… 그럼, 음…… 돈이 좀 필요해서요.” 역시. “월급은 열흘 전에 이미 가져간 걸로 아는데? 보너스도 어김없이 지급되었고. 내가 더 이상 네게 돈을 지불해야 할 의무는 없어.” 번식체라고는 하지만 엄연한 성인이고, 서로 재생을 거친 이상 유전적 공유점 외엔 다른 연관성을 강조하기란 어려웠다. 그러나 미완은 몇 번을 재생해도 강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밑에서 자잘한 일을 도왔다. 그건 그가 강에게 애정이 많아서라기보다는 사회적 구조상 오리지널이 자리 잡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에 덧붙여, 그가 무능력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미완은 피터 팬이었다. 재생 시 원하는 나이에서 멈추는 옵션을 달면 다음 재생 전까지는 쭉 그 나이대의 외모를 유지할 수 있는데-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외모만이다. 연령대를 지날수록 체력 저하와 신체 손상이 극심했다-, 보통 20~40대를 선호하지만 미완은 언제나 너무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열네 살이었다. “다음 달 월급과 이번 연구실 관리비용을 미리 지급해주지. 그쯤이면 돼?” “에……그게…… 음…… 석 달치 정도, 어떻게 안 될까요?” 장난감 매대의 값비싼 로봇이 갖고 싶어 죽겠는 걸까? “알았어.” 강은 이동식 테이블 컴퓨터로 계좌를 불러내 성문으로 지급했다. 그녀는 생체 컴퓨터를 사용하지 않았다. 과거에 손목시계도 귀찮아서 걸지 않았다던 사람이기에 그런 건 이상하지도 않았다. “고마워요, 강.” 진행 내내 옆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미완은 손등에 달린 얇은 금속판 같은 생체컴퓨터에 입금액이 확인되자 희희낙락하며 잽싸게 온실을 떠났다. 모든 게 너무 잠깐 사이에 일어나서 내 쪽이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석 달 치는 심하지 않습니까? 어디다 쓴다는 말도 없는데.” “외모만 그렇지 그도 성인이니까. 게다가 나름 성실해.” “성실이 사고랑 동의어란 건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내가 알기만도 미완은 이번 생에서만 벌써 세 번이나 사고를 쳤다. 한번은 유전자 돔에 끌려가는 걸 직전에 빼냈고-재생증명칩만 재대로 끼고 다녀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한번은 항성계에서 발견된 신물질 다단계 유통에서 끌어냈으며-다단계는 과거나 지금이나 골치 아프기 마찬가지다. 인간의 발전도에 따라 다단계 시스템도 교묘하게 변형 발전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다단계는 다단계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접근하지 않는 편이 이득이란 걸 모르지 않건만 매번 걸리는 인간이 있고, 덕분에 인간은 어떻게 발전하건 간에 과오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은 생물이라는 걸 영원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또 한번은 짝짓기 상대를 죽게 해서 3년간 구금된 적도 있었다. 어찌된 사정인지 모르지만 그 상대는 재생조차 하지 않았다. “미완이 좀 순진하잖아. 그리고 돈으로 수습할 수 있는 사고는 별거 아냐.” 그 정도면 순진함을 넘어서 모자란 수준이다. 문득 강이 미완을 두둔하는 게 마지막 번식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지낸 때문인지 궁금해져 물어보려는 찰나, 내 생체컴퓨터의 스케줄러가 빨간 경고등을 깜박였다. 아무리 미뤄도 오늘까지는 반드시 해야 하는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강에게 인사했다. “아쉽지만 가봐야겠습니다.” “그래. 바쁜 사람 오래 붙잡은 거 같아 미안하네, 종종 놀러 와.” 그녀가 내 뺨에 키스해주었다. 그것만으로 오늘 해야 할 일의 우울함이 좀 덜어지는 기분이 든다. 내가 연구소에 딸린 강의 별채를 나왔을 때, 정문 앞에 이미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부른 적도 없지만, 지시표에 선명하게 재생체 식별 번호와 내 이름이 깜박이고 있었다. 거기다 경망스럽고 거치적대는 리본과 꽃장식이란! 나는 따질 기운을 잃고 뒷자리에 털썩 올라탔다. 두말 할 거 없이 나를 마중 나온 허니문 카였다. 허니문이란 말도 결혼 제도가 사라진 뒤부터는 전혀 쓸모없는 단어가 되었지만, 과거에 향수를 느끼는 노땅들의 악취미란 어떻게 말리래도 말릴 수가 없는 모양이다. 나는 냉장고의 메뉴를 확인하고 달걀처럼 생긴 캡슐 욕조에 앉아 분무되는 차가운 물로 샤워를 했다. 짝짓기를 위한 목적이라는 것만 빼면 억만장자 부럽지 않을 만큼 나무랄 데 없는 서비스다. 짝짓기 성공률이 지나치게 낮고, 직업이나 상황 때문에 지역과 도시를 넘나들어야 했으므로 사람들은 서로 만나는 것만으로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돈이 들었다. 국가에서는 짝짓기를 장려-내가 보기엔 강압-하기 위해 여러 가지 서비스를 만들어냈다. 허니문 카도 그중 하나다. 나는 준비된 턱시도-뭐냐 대체, 이런 구식 옷을 입고 작업을 걸라고? 성공할 것도 안 되겠다-는 거들떠보지 않고 분자 분리 방식을 사용하는 초소형 즉석 세탁기에 옷을 넣으며 툴툴댔다. 분자 분리 방식 세탁기는 옷마다 달려 있는 고유의 형태와 구성 분석표를 기준으로 옷을 일시적으로 분해해 고유 성분 외의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다시 재구성하여 내보내는데, 세제도 물도 필요 없이 새 옷이나 다름없어지므로 대단히 각광받았지만 나처럼 편하게 낡아지는 느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젬병이었다. 아마 강도 이 물건을 쓰지 않으리라. 샤워 캡슐 옆 선반엔 남성용 화장품은 물론 향수도 여러 가지 구비되어 있었는데 연희라는 여자의 취향이라고 일부러 추천된 것도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뿌리지 않았다. 플랜 헌터는 냄새가 없어야 한다. 나는 식별 코드를 확인하고 받겠다는 사인을 했다. 그러자 얌전한 중년 여자의 옷을 입은 정(情)이 내 곁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30대의 세련된 직장 여성의 우아함과 섹시함을 고루 갖춘 그녀는 나를 만든 교미쌍의 네 번째 재생체다. 나는 그녀가 왜 전화를 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차가 중앙에서 우회로로 빠지더니 좁은 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창이 열리고 작은 상자와 수령증이 문틈으로 디밀어졌다. 상자 안에는 탐욕스럽도록 빨간 케이크가 들어 있었다. 이게 그녀의 ‘친절 방식’이었다. 제멋대로 줘놓고, 요구하지도 않은 친절에 대한 대가를 받아 간다. 매번 당하는 내가 멍청한 거겠지만. “누구 맘대로.” 실컷 투덜댔지만 이미 그녀는 자기 이야기에 푹 빠져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지리멸렬한 그녀의 잔소리가 이어지건 말건 간에 시트를 당겨 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한결 나았다. 정은 이미 오래전에 난자가 고갈됐다. 그녀가 수태한 여덟 번째 번식체는 재생부적격체로 성장체까지만 간신히 버티고 폐기되었다. 정에겐 그게 마지막 수태였다. 그러나 번식에 대한 그녀의 야심은 끝이 없어서 자신이 불가능해지자 번식체들의 수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도대체 왜 그녀가 그렇게 번식에 연연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죽음은 사라졌다. 영원한 소멸도, 이별도 없다. 굳이 불안정한 다음 개체에 자신의 일부를 저장하지 않아도 훨씬 더 완벽하고 효율적으로 자신을 존속시킬 수 있다. 사람들은 넘치는 인생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바빴고 목숨을 걸었던 모든 위험한 일들은 최고의 스릴 이상 어떤 의미도 갖지 않게 되었다-헌터를 제외하고-. 그게 32세기다. 정의 안색이 굳어졌다. 머릿속에 뛰어다니던 질문이 결국 입 밖으로 뛰어나간 모양이다. “왜 그렇게 번식에 집착하냐구요. 당신이 우리를 만들었지만 우리가 당신 소유물은 아니잖습니까.” “그게 아닐 겁니다. 유명한 의학자, 교수, 사법관, 과학자, 플랜헌터, 그래요, 거기에 딱 하나만 더 넣으면 완벽하겠지요. 유명한 연예인. 그거 압니까? 그들이 없으면, 당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평범한 여자일 뿐이니까.” 갑자기 정의 홀로그래피가 쑥 사라졌다. 기분은 찜찜했지만 마음은 훨씬 가벼웠다. 나는 내 공격에 정이 해야 할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깨닫기 전에 알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리고 백 번 재생하더라도 그녀는 결코 답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다. 너무나 완벽해서 껄끄러운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어느새 깜박 잠이 들었나 보다. 택시에서 내리자 컴컴한 숲과 습윤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돔의 쾌적한 공기를 위해 조성된 인공 숲이었다. 이 정도면 플랜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인공 숲이 없으면 돔이 죽고, 인공 숲이 있으면 플랜이 산다, 이게 딜레마였다. 나는 경계심을 곧추 세웠다가 갑자기 피식 새어나온 웃음 때문에 긴장이 달아났다. 짝짓기 휴가 기간이라 광선총은 반납 상태인 데다가 한 손에 쪼그만 케이크 상자를 들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헌터라니, 맛있게 잡아먹혀도 웃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곧 웃음기가 싹 가셔버렸다. “어디가 직선거리냐!” 어이없게도 멍청한 기계 뇌가 가운데 숲을 계산에 넣지 않고 직선 측정으로 나를 내려준 것이다. 기가 막혔다. 주변엔 희미한 미등 외엔 인적도 없었다. 택시는 이미 부유 도로를 타버렸고, 길이 없는 숲을 지나갈 차가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할 수 있는 욕이란 욕은 다 하면서 숲길을 헤치고 들어갔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터라 생체컴퓨터로 다른 택시를 부를 생각은 나지도 않았다. 가뜩이나 싫은 일을 하러 가는데 이렇게 수고로워야 하다니, 짝짓기가 끝나면 <돔>에 대고 화끈하게 풀어줄 테다. 아니, 넷으로 운송 회사를 걸고넘어지면 회사 측에서 알아서 돔을 물고 늘어져주겠지. 개인이 상대하는 것보다 그 편이 낫겠다. 그리고 또…… 그때 뭔가가 휙 내 손에서 케이크 상자를 낚아채 갔다.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누구냐?” ‘히힛’ 하는 웃음소리와 함께 ‘사사삭’ 풀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지만 이쪽은 헌터라고. “거기 못 서!” 손끝에 잡힐 듯하던 조그만 것이 나무 위로 훌쩍 뛰어 올랐다. 그리고 뭔가 툭 머리 위로 떨어졌다. 빈 케이크 상자였다. 위를 올려다보자 하얗게 흔들리는 작은 발이 보였다. 은색 단발머리를 한 조그만 계집애가 손과 입가에 온통 벌건 칠을 한 채로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그 해맑은 미소에 갑자기 힘이 쭉 빠져버렸다. “뭐냐, 너? 율가의 꼬마냐?” 계집애는 대꾸 없이 원숭이처럼 뛰어내려 온몸으로 내 뺨에 처덕 달라붙었다가 또 잽싸게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향기처럼 흥얼대는 허밍 소리가 꽤 오랫동안 귓전에 남았다. “쳇. 대대로 가수 집안이라더니.”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거울이 없이도 내 꼴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 수 있었고, 수건 하나로는 수복할 수 없었다. “창…… 이세요? 안녕하시냐고 묻고 싶지만, 별로 그래 보이지 않네요.” 천신만고 끝에 숲을 가로질러 율가의 뒷문에 다다른 나를 본 연희의 첫 인사는 이랬다. “오다가 말썽이 있었습니다.” 나는 케이크 시럽으로 끈적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정도론 어림도 없겠어요. 욕실을 안내해줄게요.” 연희가 걸걸하게 웃자 큰 몸이 웃음을 따라 출렁였다. 그녀는 남자보다 더 남자 같은 여자였다. 유일하게 여성스런 점이라면 구슬처럼 크고 까만 눈이었는데,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아서 무척 독특하고 순해 보였다. “이쪽이에요.” 나는 널따란 욕조가 놓인 호사스런 샤워실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12세기에나 유행했을 법한 대리석 물건이었다. 나는 그 욕조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욕조 목욕까지 했다. 나와 보니 새 셔츠와 바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창 건 아직 세탁 중이에요. 얼룩이 잘 지지 않더라구요. 못 입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괜찮습니다.” 옷에는 희미하게 연꽃 향기가 배여 있었다. 좋아한다는 게 이런 종륜가? 취향이 나쁘진 않군. 연희는 나에게 편안한 자리와 술을 권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꽤 기분이 좋아져 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거슬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내게 키스해 왔고 둔중한 다리가 내 허리에 감겨들었다. 나는 눈을 감고 본능에게 이성의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나 도무지 행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난 반쯤 벌거벗은 상태에서 연희를 밀어내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난…… 난 못하겠어요.” “내가, 너무 서둘렀나요?” “그런 게 아닙니다.” 나는 고개 저었다. 연희는 몸을 떼고 어깨를 으쓱했다. “역시 내가 좀 별로죠? 괜찮아요, 솔직히 말해도.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녀의 표정은 덤덤했지만 난 많이 미안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내 문제예요. 그러니까,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이 얼마나 웃길지 알지만, 난 짝짓기에 찬성할 수가 없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비이성적이고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만 하는 겁니까? 인공수정을 하는 편이 훨씬 편리하고 깔끔할 텐데.” 연희는 잠깐 생각한 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요. 세균이 묻을까 봐 악수를 할 때도 항균 장갑을 애용하는데 생판 모르는 사람들끼리 살을 맞대라니 경악할 만하군요. 하지만 짝짓기가 인공수정보다 수태율이 15배가 높대요. 기형아도 방지할 수 있구요. 인공수정의 미세한 충격과 온도 변화만으로도 수정체는 심각한 손상을 입으니까요.” “아닙니다 연희 씨, 내가 궁금해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다시 말을 잇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아무도 죽지 않는데 왜 새로운 인간이 필요한 겁니까?” 연희는 또 오래 생각했다. 난 약간 놀랐다. 강 외에 나의 정리되지 않은 생각에 진지하게 대꾸해주는 사람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다행이네요, 적어도 내가 싫었던 건 아니군요. 솔직히 유명세만 빼면 나 자신으로서는 별 볼일 없는 여자거든요. 물론, 자기 비하는 아녜요. 난 나로서 충분하니까. 단지, 매력적인 짝짓기 상대는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에요. 아, 왜 외모를 옵션으로 안 했냐는 얼굴이네요. 직업적인 이유예요. 가수는 눈에 띄어야 하는데 지나치게 보편적인 미모만 좇다가 오히려 몰개성해질 수도 있거든요. 그건 뚱뚱한 거보다 더 나쁘죠. 아무튼, 당신이 말한 문제에 관해서는 난 별로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좀 더 생각해보고 나중에 대답해줄게요. 그때까지도 듣고 싶다면.” 사이 띄기가 결코 없는 그녀의 말을 그래도 제대로 알아들은 건 순전히 정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정은 결코 중간에 말을 쉬는 법이 없었다. “듣고 싶을 거 같습니다만.” “그럼 여기 좀 있을래요? 빈집 관리인이 휴가를 냈거든요. 어차피 짝짓기 기간이 끝날 때까지는 돔이 눈에 불을 켜고 감시 중일 테고 난 주말 동안은 공연 때문에 비울 테니까요. 지내기 불편하지는 않을 거예요.” “좋습니다.” 연희는 필요한 걸 주문할 수 있도록 하드 컴퓨터를 빌려주었다. 이쪽이 생체컴퓨터보다 화면이 커서 쇼핑에 용이했다. 나는 간단한 옷 몇 벌과 세면도구, 기호품을 주문하고 별로 급하지 않은 메일 함을 어슬렁거렸다. 그때, 디링 소리와 함께 화상통화 연결창이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사생활을 침해하게 된 나는 약간 당혹스런 기분을 느끼며 연희를 불렀다. “연희 씨 전홥니다.” 막 욕실에서 나오던 연희는 느긋하게 머리를 말아 올렸다. “내비둬요. 별로 중요한 건 아닐 테니까. 필요한 건 다 했어요?” “예. 산책 좀 다녀올까 하는데, 괜찮습니까?” “물론이죠. 아, 정원석 너머로는 가지 말세요. 돌본 지가 한참이라 엉망이거든요.” 나는 이미 한 번 거쳤다고 대꾸해주었다. “아참, 당신 직업이 헌터랬죠? 김에 순찰이라도 돌아줄래요?” 통화 버튼을 누르면서 연희가 말했다. 난 씩 웃었다. “그럼 내게 노래해줄 겁니까?” 우리는 눈이 마주쳤고, 동시에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좋은 여자였다. 짝짓기를 빼고 생각한다면 더없이 즐거울 인연이다. 물론 짝짓기가 아니라면 절대 스칠 일도 없는 별천지의 사람이지만. “생각해보죠.” 나는 문을 닫았다. 문득 문틈으로 보인 화상 화면이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몇백 년을 살았는데 한 번도 보지 못한 얼굴이 몇이나 있으랴 하면서. 케이크 시럽을 닦아낸 뺨에 닿는 숲의 공기는 충분히 쾌적했다. 나는 발밑에 버석대는 흙을 킁킁대고 약간 맛보았다. 플랜이 사는 흔적은 없었다. 놈들은 사람을 주양분으로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주변의 토양에 독특한 성분들이 결핍되거나 과밀하기 마련이었다. 노련한 헌터들은 플랜이 사는 흙이 늙은 사과처럼 달고 퍼석퍼석하다는 걸 안다. 이 흙은 촉촉하고 짙고 썼다. 톡…… 그때 갑자기 눈바람이 휘몰아쳤다. 나는 영문을 몰라 눈을 껌벅였다. 8월에 눈이라니, 아무리 세기말의 기후 대격변이 있었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 사사사 쏴…… 나는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무리진 달은 휘영청 밝고 하늘은 바다 속처럼 깊고 파랬다. 눈은 마치 물속에 뿜어진 산호 알처럼 허공에서 반짝였다. 휘날린 눈이 뺨에도 입에도 달라붙어서 손바닥으로 쓸어내자, 어느새 잘게 찢은 종이 조각으로 변했다. 나는 굵은 조각 하나에서 내가 잃어버린 케이크 상자의 상표 일부를 발견했다. 얼굴을 들자 그 애가 보였다. 나무 등걸에 걸터앉은 그 애는 달처럼 동그란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또 휙 사라져버렸다. 나는 장난끼가 동했다. 잠깐 몸이나 풀까 하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전에 이미 두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숲을 유쾌하게 내달렸다. 어둠을 볼 수 있도록 미세하게 조작된 시신경 채널을 살짝 바꾸자 밤은 우물 속처럼 어두운 초록색으로, 모든 나무와 사물은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그 애는 날다람쥐처럼 나무에서 나무로 건너뛰며 이동했는데 어찌나 몸이 가볍고 재빠르던지 포대처럼 허술한 상의 끝자락만 간신히 쫓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이번 나무에서 다음 나무까지는 뛰기에는 무리가 있다. 저기쯤이겠군. “얍!” ‘여기다’라고 예상했던 곳에서 막 그 애의 옷자락을 잡으려는 찰나 발이 미끄러지고 말았다. ‘쿠당’ 하는 느낌과 함께 황금 먼지가 사방에 피어올랐고 눈앞에 별이 번쩍였다. 나는 대(大)자로 뻗어버렸다. 잠시 후, 정교한 사슬 목걸이가 스치는 것처럼 잘강거리는 웃음소리와 작은 숨결이 뺨에 닿았다. 그 애는 땀 냄새와 숲 향기가 뒤엉킨 묘하게 자극적이면서도 싱그러운 냄새를 풍겼다. 난 정신이 있었지만 그냥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조그맣고 새털처럼 부드러운 손가락이 나를 만졌다. 이마에서 뺨으로, 코를 한번 비틀어 쥐었다가 놓고 삐죽 튀어나온 턱 언저리를 지나 목젖에서 또 잠시 그릉대는가 싶더니 마침내 쇄골과 가슴팍 사이에 다다르자 한참 동안 떠나지 않았다. 내 가슴이 거칠게 오르내리는 진동을 즐기듯이. 나는 갑자기 와락 그 애를 끌어안았다. 그 애는 깜짝 놀라는 듯 했지만 금방 조용해졌다. 너무 조용해서 이상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그 애는 내 절반도 숨 가빠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기분에 슬그머니 팔에서 힘을 빼자 그 애는 물거품처럼, 요정처럼 순식간에 내 품을 빠져나갔다. 그러나 멀리 가진 않고 두어 걸음 물러난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멋쩍게 웃었다. 그 애는 말없이 나를 보다가 손을 흔들며 자기 입과 배를 가리키고 나를 가리켰다. 입 주변엔 아직 케이크 시럽이 묻어 있었다. 뭘 요구하는지는 뻔했다. 이런 시대에도 말을 못하는 사람이 있나 싶다가 문득 사생아가 생각났다. 정식 등록되지 않은 짝짓기는 난소가 검열되지 않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수정체가 그대로 체내에 남게 되는 일이 종종 있는데, 그럴 경우 신고도 곤란하고 사출도 어려워서 미숙한 자궁에서 그냥 자라게 된다고 했다. 대부분이 적은 돈으로 뒷골목에서 제거됐지만 간혹 성공적(?)으로 성장체의 삶을 얻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식으로 돔 밖에 버려진 체로 자란 기형체의 기사가 종종 넷에 오르곤 했다. 나는 짐승에 가까운 그들의 외설스런 외모에 혐오를 느끼기보다, 어림할 수도 없는 그들의 숫자가 플랜의 확산에 얼마나 기여를 하고 있을지가 두려웠다. 다행히 이 애는 지나치게 가벼워서 사라져버릴 것 같은 느낌 외엔 외관상으로 큰 문제는 없어 뵌다. 근처에 수용시설이 있는 걸까? “알았어.” 말하지 못하면 대개 듣지도 못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나서 나는 목을 크게 끄덕이는 동작도 해보였다. 그 애는 안심한 얼굴로 숲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언제 한번 혼자 생각해봤습니다. 상상은 누가 더 많이 하는지. 예술가인지 과학자인지. 혹시 SF 작가들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이제, 상상하지 않는 집단이나 개인이 어디 있겠는가 하고 생각을 바꿔봅니다. 다들 열심히 상상하되 다 다른 상상을 하는 것이겠지요. 문제는 상상의 방향이겠습니다. 치열성이겠지요. 질이겠습니다. 문학의 위기는 상상력의 위기와도 관련됩니다. 최근 활기를 띠며 작지 않은 성과를 낸 한국 SF의 상상력은 주목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 그에 걸맞은, 대표성을 갖춘 작가나 작품을 가려내 성과를 확인하고 의미를 되새겨보는 것도 좋겠지요.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나간 상상을 따라가며 현장을 느껴보는 것도 의미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017년 1월부터 10월까지 《크로스로드》에 발표된 SF 작품들을 살펴봤습니다. 곧 인공지능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요즘 주위에서 ‘4차 산업혁명’과 자주 마주칩니다. 대학에 관련 교양과목이 개설되고, 나 같은 사람도 한 꼭지 맡아 떠들었습니다. 그랬더니 강의를 마무리하는 의미에서 진행하는 토크콘서트에 부르더군요. 패널이라고 불리며 다른 몇 사람과 함께 또 잠깐 이야기했습니다. 아주 작은 콘서트여서 각자 파악한 바와 그에 대한 문제의식만 끄집어내는 정도였습니다.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생각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SF의 탐구 대상이던 것이 일상 속으로 다가왔구나. 아, 이렇게 세상이 변했구나. 초지능과 초연결과 초융합으로 흔히 이야기되는 이 혁명에서 단연 주목받는 것은 인공지능이었습니다. 한국 대중에겐 알파고 이벤트를 통해 혁명이 현실감을 얻게 됐으니까요. 당연하다면 당연하지요. 인공지능이 얼굴마담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기껏 얼굴마담을 두고 여기저기서 그렇게 열띤 논쟁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인공지능을 강(强) AI와 약(弱) AI로 나누며, 인류 문명의 새로운 국면이나 종말적 상황까지 이야기할 리가 있겠습니까. 열심히 자율주행 자동차를 개발하고 있는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는 의외이게도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더군요.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이 “온전한 인공지능의 개발은 인류의 종말을 불러올 수 있다”고 한 것은 웬만한 사람은 다 압니다. 그동안의 여러 우려와 경고를 들어보면 인공지능을 슈퍼 울트라 컴퓨터로 이해해서는 안 될 듯합니다. 인간을 위해 엄청난 계산기 기능을 해주는 정도가 아니라는 것. 체스나 바둑에서 인간을 깜짝 놀라게 할 인공 배우 정도로 만족하지 않으리라는 것. 스티븐 호킹이 말한 ‘온전한 인공지능’이란 무엇일까요? 신체와 자의식(감정)을 가진 인공지능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금방은 지능형 로봇 같은 게 떠오르는데요, 그런 존재가 인간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무언의 애매한 메시지에 순종하며 늘 선한 결과물만 가져올 리는 없겠다 싶습니다. 전장의 군인을 대신할 킬러 로봇이 자율적으로 행동할 능력을 갖춘 것이라면? 어떤 상황에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자의식까지 갖춘 로봇이라면 더더구나 그렇겠습니다. 미래가 완전히 그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이라는 경고. 나올 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 2030년 예순여섯의 김동민 씨. 그는 ‘지하철 자동 IOT 노약자석 모니터링 및 홍보요원’ 아르바이트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50대 이후 복지정책형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던 그에게는 꽤 괜찮아 보이는 자리였나 봅니다. 그는 면접장에서 마치 요즘의 자율주행 자동차가 시험 운행 과정에서 받아드는 것과 같은 난도 높은 문제에, 한순간 현기증이 일지만 자신감 갖고 강하게 치고 나가며 답해 합격한 것이었습니다. 좌석에 앉을 우선순위에 맞게 승객들을 안내하고, 승객 서로가 자리를 내주고 차지하는 과정의 분쟁을 줄여주는 일이니 좋은 일 같습니다. 예순여섯의 나이여서 온몸이 아프며, 쉬이 잠들고 또 쉬이 깨어나는 김동민 씨 또한 좌석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그때마다 자신의 지나온 일을 꿈으로 꾸며 일을 합니다. 스마트폰에 눈을 두고 다른 사람의 일에 신경을 꺼두는 승객들이 대부분인 지하철에서 IOT 시스템은 한시도 쉼 없이 작동합니다. 사람들을 일으키고 앉힙니다. 민망하게도 엉덩이가 부르르 떨려, 모른 척 계속 앉아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은 두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기에도 감정적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군요. 이때 김동민 씨 같은 아르바이트 요원이 나서나 봅니다. ‘IOT 무법 노인단’의 행패에도 대처하는군요. 노인무임승차권을 걸고 내기까지 하는 이들을 단속하며 불법임을 지적하는 김동민 씨는 어쨌든 분쟁을 해결했습니다. 그러자 문자가 뜨는군요. 왕년에 IT 업계에서 밥을 먹은 김동민 씨는 곧 깨닫습니다. 이 데이터가 더 철저한 자동화 시스템 구축을 위해 누적되고 분석될 데이터임을. 그는 자동화 시스템이 결국 자신의 아르바이트 자리를 뺏어갈 날을 예감합니다. 그날이 오면 그의 엉덩이는 전에 없이 강한 진동을 느끼고 자리를 비워줘야 합니다. 「엉덩이 수난 시대」(이덕래, 1월호)에서 주인공의 진짜 수난은 그래도 미래의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현실의 일일 수도 있습니다. 누구도 탈주할 수 없게 모든 것이 연결된 시스템에서 데이터를 축적하고 분석하는 존재는 무엇인가요? 이제는 인공지능이라고 답해도 좋겠습니다.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국가(정부)라고 답해도 좋겠습니다. 「로봇이라서 다행이야」(임태운, 4-5월호)는 지능형 로봇이 일상 속에 우리의 친구로 와 있는 세상을 그리고 있군요. 우리 반의 왕따 최동필이 대청소 날에 일진인 은찬과 그 일당의 드론을 활용한 물벼락을 맞습니다. 함께 청소해야 할 최동필을 찾아 나섰던 나(황준서)는 물벼락 맞은 최동필이 제 머리를 몸에서 뽑아내고는 물기를 터는 것을 목격합니다. 기절할 일이지요. 최동필은 정체를 밝히라는 주인공(나)에게 “미안. 사실 난 로봇이야”라고 고백합니다. 최동필은 우리 반에서 왕따 역할을 하기 위해 투입된 로봇이었습니다. 희생자의 역할을 떠맡은 것이지요. 2년 전 왕따였던 나는 최동필과 마음이 통해 우정을 쌓게 됩니다. 로봇 최동필은 불법 개조 로봇들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나를 구해주기도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애완 로봇인 초롱이까지도 그동안 나의 감정을 읽으며 행동해 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고, “아주 작은 마음의 변화만으로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도 이뤄낼 수 있는 그게 로봇과는 다른 인간이 가진 위대함이라고 현자 같은 소리까지 해준 최동필. 그런 친구를 내가 때려야 하는 위기가 찾아오네요. 그래도 최동필은 우리 반 모두의 생명을 구합니다. 이 일을 마지막으로 불타는 버스 안에서 작별의 인사를 하고는 사라집니다. 20년 뒤 나는 달 개척지에서 죽은 줄 알았던 최동필과 재회합니다. 여기서 나는 은찬의 협박에 몰려 최동필의 뺨을 때려야 했던 일을 마침내 사과합니다. 그동안 나는 인간이 로봇에게 넣어준 감정을 무시하는 건 인간 자신의 아픔까지 무시하는 것이라는 소신으로 살아왔습니다. ‘로봇권 옹호 운동’을 벌이는 로봇 공학자로 살아왔습니다. 인간과 로봇이 서로 돕고 공감하는 미래. 분명 가능한 미래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며 좀 안도해봅니다. 그런데 감정과 자의식의 문제와 진지하게 마주해보면 안도감은 곧 흔들리게 되지 않나 싶습니다. 「AI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박지혜, 8월호)도 로봇이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10년 전만 해도 혁신적이었다는 여성형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군요 ‘대중 소셜로봇’으로도 언급되는 이 안드로이드를 입양해 자신의 보호자이자 연인, 친구이자 매니저로 삼아 함께 산 사람은 미술가 S입니다. 현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S이겠지요. 연애에서 실패하면서 인간관계에 질리고 더는 시간과 열정을 쏟지 않기로 한 그녀는 안드로이드인 현과 함께하면서 국제전에서 상을 받기도 하고 매스컴을 타고 대중에게 알려지는 등 나름의 성공을 거둡니다. 둘 사이 균열이 생기는 것은 S보다 다섯 살 작은 신인 미술 평론가가 끼어들면서입니다. S가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자 현은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기계이니 고장이라고 해야 할 증세가 나타나자 사랑하는 두 사람은 다투게 됩니다. 현의 문제로 급기야 결별하는 사태에 이르지요. 남자와 결별한 뒤 S는 내내 울기만 하고, 이를 지켜보던 현은 시설로 가겠다고 자청합니다. 자신이 파트너라 부르던 S와 헤어진 뒤 현은 유기로봇센터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지냅니다. 현은 S와 함께 자주 왔던 메모리얼 카페에 사회단체에서 지급하는 보조금으로 매주 목요일이면 들릅니다. 카페를 인수한 새로운 주인인 나는 그렇게 해서 현의 사랑 이야기를 알게 되지요. 단골을 잃고 약혼녀도 떠나보낸 상황의 나는 현과 가까워지면서(그녀의 커피 맛에 대한 냉정한 비평을 들은 것도 한 계기가 되어) 노력 끝에 단골을 되찾습니다. 그런데 현이 더는 카페를 찾지 않습니다. 몇 주째 오지 않자 나는 유기로봇센터에 연락해 현을 수소문하고 강변유기로봇센터에서 재회합니다. 교통사고를 당해 처참하게 망가진 채 방치됐던 현. 전기와 연결되자 안드로이드 현은 카페에 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신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고요하지만 화사한 웃음”을 띤 마지막 순간의 현. 그녀는 S와의 추억을 생각하는 듯도 하고 나에게 마음이 움직인 듯도 합니다. 앞서 현에 연정을 품었던 나는 오열하지요. 로봇으로 불리든 안드로이드로 불리든 이러한 인공지능은 문명의 종말을 불러오거나 인간 위에 군림할 기계의 징후를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면모를 통해 인간(성)을 성찰하게 합니다. 이는 이제는 제법 익숙한 에토스이겠지요. 「로봇이라서 다행이야」의 인공지능이 소년소설에 어울리는 캐릭터라는 점, 「AI는 에스프레소를 마신다」의 인공지능이 연애소설의 ‘영원한 사랑’이라는 테마를 환기하는 캐릭터라는 점이 다분히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합니다. 암흑물질을 내세워 일종의 우주 괴담 분위기를 내는 「기묘한 전설」(이재호, 2월)과 인간 기억의 복제 문제를 다룬 「내가 기억하는 것」(이한음, 3월호)과 남성이 사라지고 클론이 자리잡은 세계에서의 「Y의 고백」(사지용, 6-7월) 그리고 삶의 거주지와 계층이 ‘달’과 ‘지표’와 ‘지하’로 나눠진 세계를 그린 「동굴가족」(은림, 9월호)과 함께 인공지능의 문제를 마주한다면 우리는 꽤 어둡고 착잡한 장면을 목격할 것입니다. 인공지능의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는 말입니다. SF의 탐구 대상이던 것이 일상의 것이 되었다면 이제 SF의 행보는 어떠해야 할까요? 어떤 작가는 훨씬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양상을 포착하는 쪽으로 나아가겠지요. 어떤 작가는 훨씬 더 멀리 내다보고 포착한 장면을 제시하는 쪽으로 나아가겠지요. * 앞에서 줄거리 중심으로 살핀 세 작품은 모두 어쨌든 멀리 내다본 상상이었습니다. 그 상상을 이제 잠시 불러들일 것을 제안합니다. 인공지능이 불러일으키는 상상을 지금 여기 작가의 삶에도, 글쓰기의 방식에도 초점이 맞춰지도록 해보았으면 합니다. 문명의 진로를 내다보며 인류를 종말의 위기에서 구해낼 선지자 역할을 은연중 염두에 둔 SF 작가라면 상상을 지금 여기로 불러들이라는 말은 뜨악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요. 인공지능에 관한 통이 큰 상상을 하는 작가에게 글쓰기가 사라질 직업군의 하나인지 아닌지 따져보라는, 밥그릇이 어디로 가지 않는지 잘 지켜보라는, 그래서 작가를 좀팽이 같은 존재로 끌어내리겠다는 수작 같아 의아해질 수도 있겠습니다. 게다가 글쓰기 방식을 생각해보자는 말이 무슨 기교를 설교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면 불쾌할 수도 있겠습니다. 글쓰기는 인류사의 변화와 발전 과정 가운데 생겨난 커뮤니케이션의 한 방식입니다. 글쓰기의 운명도 과학기술의 향방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인쇄술과 한 몸인 근대적 글쓰기는 당대의 첨단 테크놀로지와 첨단 미디어의 산물이었습니다. 문학의 위기는 인쇄 테크놀로지 및 인쇄 미디어의 위기이기도 하지요. 빌렘 플루서는 1980년대 후반에 이미 “선형에서 비선형으로, 행에서 점(네트)으로, 논리규칙에서 수학규칙으로, 알파벳에서 디지털코드로” 글쓰기가 변해가리라 내다봤다고 합니다(빌렘 플루서, 윤종석 역,『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엑스북스). 나 같은 사람도 2000년대 초에 문학이 문화의 전면에 당당히 서던 상황에서 문화 전반의 배후로 물러나 일종의 시나리오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습니다. 인터넷과 마주하며 내린 결론이었지요. 디지털 시대의 소설 형식을 생각해보면서 얻은 답이었습니다. 문학이 문화의 배후로 물러나 시나리오 역할을 한다는, 플루서에 의하자면 영상의 스크립트 같은 것으로나 존재한다는 예측은 누군가에게는 (근대)문학의 종언입니다. 장르문학이던 한국의 SF가 이제 당당히 문학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이 좋은 흐름이 1950~60년대 황금기와 1980~90년대 펑크시대를 훌쩍 지나 예술과 담론으로서의 주도성이 많이 약화된 상태에서 찾아온 뒤늦은 성과라는 점이 만시지탄의 아쉬움을 준다”고 조성면(문학평론가) 씨는 《크로스로드》 6월호 ‘SF Review’에서 말했습니다(「장르문학에서 문학으로 ― 오늘의 한국 SF」). 동의하고 공감합니다. 그런데 뒤쫓아 따라잡은 문학이 허명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종언에 이른 문학을 덥석 영광의 모뉴망으로 받아들이겠다고요? 문학과 글쓰기의 위기는 상상력의 문제이고 테크놀로지의 문제이고 미디어의 문제입니다. 인공지능이 출현해 육체를 갖추고 감정(자의식)까지 갖추리라 내다보는 시대에 문학 글쓰기만은 변할 수 없는 무엇으로 상정하는 것은 상상력을 작동 정지하겠다는 말이지요. 나는 SF 같은 장르문학도 당연히 문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SF가 문학이 되느니 차라리 콘텐츠가 되는 게 좋겠습니다. 새로운 문학이 아니라면 문학이 되려 하지 말고 콘텐츠든 뭐든 다른 무엇이 되는 길을 가는 게 좋겠습니다. 어쩌면 그 길이 새로운 문학이 되는 길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새로운 문학이란 그 정도로 큰 변화를 이뤄내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그동안 인류사에서 도구는 인간의 확장이었습니다. 인공지능도 인간의 확장이라고 해버리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버릴 게 아닌 듯합니다. 『미디어의 이해』 이후 도구가 인간의 확장이라는 주장은 공론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마셜 맥루한의 주장을 이어받자면 인공지능은 인간 뇌의 확장입니다. 그런데 이 초지능은 초연결 및 초융합과 삼위일체처럼 작동하는 세상에서는 차원을 달리하는 무엇으로 느껴집니다. 인공지능이 다른 인공지능과 연결되고 인간과도 연결되는 순간을 상상해보십시오. 인공지능이 육체를 가지는 순간도 상상해보십시오. 자의식을 가진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인간의 확장이 아니라 새로운 인류의 출현이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강(强) AI와 관련한 종말론적 상상은 쓸데없는 걱정이 아니라 보입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으면 걱정도 없겠네”라고 중얼거리며 떨쳐낼 걱정거리 정도가 아닌 게 분명합니다. 사피엔스로서 인간 뇌는 그동안 엄청난 일을 해낸 한편 인류의 소수를 빼놓고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못한 채 문제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인공지능이 인간 뇌의 확장이되 차원을 달리하는 ‘문제의 확장’이라면 두렵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인공지능을 인류의 종말과 연결하기보다 그 가능성에 주목하는 사람입니다. 악마 같은 파괴력을 상상했다면 우리가 적어도 그것을 제어할 노력을 할 것이라는 점만은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판도라의 상자를 황급히 다시 닫는다고 해서 풀려나간 기술이 소환될 리 없으니 이제는 해야 할 일을 제대로 찾아서 해야겠지요. 4차 산업혁명 토크콘서트에서도 인문학 관련자로서 내가 한 이야기는 인공지능을 디자인하는 데 인문학이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성에 대한 재개념화는 물론 인공지능과 함께 일하는 방식과 인간 간의 다양한 협업 및 공생 방식을 탐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문학의 종언이 아니라 문학의 새로운 모험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모험은 독자와의 썸 수준이 절대 아닙니다. 롤러코스터 정도일 수도 없습니다. 전면적인 갱신입니다. 그러니 죽음입니다. 그러니 부활입니다. 빌렘 플루서는 유치원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글쓰기를 배워야 할 것이라고 했다지요. 우리의 모험은 그런 의미에 가까워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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