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선장은 우주선으로 나를 때려 죽였다.
뭔가 날짜에 관련된 문제가 있다는 건 처음부터 짐작할 수 있었다. 선장은 지구 로컬을 계산해 본 직후 갑자기 눈을 홱 뒤집더니 손에 잡히는 걸 내게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 무차별적인 투척은 곧 주먹질과 발길질로 바뀌었고, 가장 가까운 의사가 26광년 저편에 있는 처지에 골절이라도 입으면 겪게 될 문제들을 선장이 떠올린 후 행성인들은 상상하기 힘든 살해 방식으로 바뀌었다. 우주선으로 사람 때려 죽이기. 주인공이 벽을 향해 달리면 잠시 후 벽에 주인공 모양의 구멍이 생기는 세계가 떠오르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카툰 같은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인류에겐 행성으로 사람을 타격하는 격투술도 있다. 대표적으로 유도가 그러하다. 유도가의 무기는 지구이며, 그 적수를 다치게 하는 건 유도가의 힘이 아니라 지구 중력이다. 그 사실을 이해한다면 선장의 우주선 살법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유도의 경우와 달리 우주선엔 중력이 없지만 가속도가 중력을 대신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유도가가 쓰는 것도 중력 가속도니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선장은 자기 몸을 잘 고정한 다음 나를 붙잡고는 우주선의 벽과 바닥에 마구 패대기쳤다. 무게가 없는 환경이니 성인 남자를 붙잡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바닥에 내려치는 카툰 같은 짓도 가능하다. 물론 무게가 없을 뿐 질량은 그대로이니 선장의 팔목이 부러지거나 인대가 파열되거나 극심한 탈구가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선장은 관록 있는 우주인답게 관성과 반작용을 실로 노련하게 다루었다. 내 몸을 으깨어 놓으면서도 자기 뼈나 관절은 다치지 않았다.
세 시간 뒤 내 시체를 치우며 선장은 사정을 설명했다.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란다. 선장은 그 정보로 내가 모든 사정을 이해하고 동시에 깊은 인상도 받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무런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어정쩡하게 선장을 쳐다보다가 내 시체 치우는 것이나 거들었다.
2개월 만에 느낀 희망 때문에 어차피 선장의 말에 집중하기도 어려웠지만.
우주선으로 나를 때리는 선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갑자기 온몸에 전율이 좍 흐르는 것을 느꼈다. 신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켜야 했다. 나를 갑작스러운 긴장으로 몰아간 건 느닷없이 떠오른 질문과 그 대답이었다. 질문은 이러하다. 우주선을 무기로 쓰는 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체로 무기를 만들 수 있을까?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단련해서 치명적인 무기로 만든다’ 같은 소리가 아니라 정말로 인체 조직을 가지고 쓸 만한 병기를 만드는 경우를 말한다. 답은 이러하다. 충분히 가능하다. 골절이 일어났을 때 부러진 뼈는 종종 살을 뚫고 튀어나온다. 선장이 우주선으로 나를 때려죽일 때 내 뼈가 바로 그런 식으로 내 살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 살을 뚫고 나온 뼈가 남의 살을 뚫고 들어가지 못할 리 없다.
예리하게 부러진 대퇴골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12번 늑골 같은 거라도 입수할 수 있다면 내겐 100G 미사일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제3세탁실로 내 시체를 옮기며 선장 몰래 내 으깨진 살을 주물럭거린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쓸 만한 뼈는 있었다. 사실 여러 개 찾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방금 죽은 시체 속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질긴 근육들에 튼튼한 건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들이었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뼈다귀를 아서 팬드래건의 검에 비유하는 건 도통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사정은 똑같았다. 정말 쓸 만한 칼이 바위에 꽂혀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분노 속에서 겨우 발골이 전문 기술이라는 기억을 떠올렸다. 피를 빼고 다루기 좋게 해체한 도축육에서 뼈를 분리하는 것도 전문가가 아니면 힘들다. 아직 온기도 가시지 않은 시체에서 비전문가가 맨손으로 뼈를 꺼내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낙담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시체를 탱크에 밀어 넣고 재처리를 시작한 후에야 나서야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깨달았다. 하마터면 재처리 탱크에 손을 집어넣을 뻔했다.
내장도 고려해봤어야 하는데. 그걸로 교살용 줄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거운 자기혐오에 짓눌린 채 한참을 버둥거린 후에야 겨우 자신을 위안할 사실 두 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사실 1. 내장으로 교살을 시도하는 건 훌륭한 볼거리겠지만 현실적으로는 실행이 불가능하다. 선장은 나를 위해 특별히 운동 스케줄을 짜주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 내 골밀도는 형편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목을 조르려 했다간 내 팔이 부러질지도 모른다. 더욱 중요한 사실 2. 어쨌든 내 시체가 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
시체라는 사실 때문에, 그것도 내 시체라는 사실 때문에 지금껏 그걸 한시라도 빨리 재처리 탱크에 밀어 넣고 잊어야 하는 혐오 대상으로밖에 여기지 못했다. 그리고 난 공포와 좌절 때문에 정신이 거의 나간 상태였다. 사실 조금도 미치지 않았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 상태다. 그래. 분명히 변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2개월 만에 그 사실을 떠올렸다는 건 역시 용서하기 힘들다. 시체라는 건 인간의 몸이고 인간의 몸은 수십억 년의 진화가 만들어낸 걸작이다. 조건만 잘 맞으면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자기 모습을 유지해 나가는 기막힌 물건인 것이다. 그 안엔 온갖 쓸 만한 것들이 들어있을 것이다.
당장 몇 가지 활용 방안이 떠오르긴 했지만 역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제일 괜찮았다. 예리하게 부러진 뼈. 별다른 가공이 필요 없이 단순하고 성능은 확실하다. 목표를 뼈로 한정한다면 제대로 된 문제 접근 방식은 ‘어떻게 하면 체내의 뼈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방식으로 내가 죽느냐’일 것이다. 그러고 싶진 않지만 지금껏 선장이 나를 죽여온 방식들을 돌이켜보았다. 속이 뒤집어지는 느낌을 참으며 생각해보자 내가 아쉬운 기회를 여럿 놓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특히 아까운 건 소사에 속하는 몇 가지 예다. 구운 고기에서 뼈를 발라내는 건 도축도 조리도 아닌 식사에 해당한다. 거의 노동으로 취급되지도 않는 간단한 일인 것이다.
선장이 같은 살해법을 반복하길 꺼려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선장은 언제나 다른 방법으로 나를 죽인다. 애초에 이 광기를 추력으로 삼는 여행이 시작된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두 달 전 선장이 지쳐 쓰러질 정도로 고민하고 있던 것은 나를 죽일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나를 한 번밖에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것인지 말 것인지 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선장은 그 자연 법칙을 용납하지 않기로 했다. 선장은 단 한 번, 단 한 가지 방법으로 나를 죽인다는 것을 절대로 참을 수 없었고, 그래서 이 여행을 시작한 후로 스무 번 넘게, 스무 가지가 넘는 방법으로 나를 죽였다.
나는 선장의 아들을 딱 한 번, 딱 한 가지 방법으로 죽였는데.
“위탄인에겐 생일이 없지.”
“웍, 어웍.”
“후라셈? 태어난 날짜와 관련된 기념일이라서 생일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후라셈은 생일하고는 달라. 위탄인들은 태어난 후 삼백일에 한 번씩 후라셈을 치르지. 위탄의 공전 주기인 412일이 아니라 위탄인 신생아에게서 태각이 사라지는 시간인 300일이야. 300일에 1후라셈, 600일에 2후라셈, 900일에 3후라셈 하는 식이지. 그리고 10후라셈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3,000일이 되었을 땐 후라세몬이라는 걸 치르고. 후라세몬은 큰 후라셈 정도로 이해하면 돼. 삼천 일에 1후라세몬, 육천 일에 2후라세몬 하는 식이지. 위탄인들은 그런 후라세몬을 인생의 중요한 통과 지점이나 전환기 같은 걸로 여겨. 가상의 위탄 문학을 인용해 본다면 ‘얼마 전 네 번째 후라세몬을 치른 원숙한 위탄인답지 않게 아직도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는 모모는…… 운운’ 하는 식인 거지. 이야기가 잠시 엉뚱한 곳으로 샜군. 다시 돌아가서, 어쨌든 후라셈은 생일과 달리 행성의 공전과 관련이 없어.”
“아욱, 훗.”
“단위가 다를 뿐 일정한 간격을 두고 기념하는 거니까 역시 생일과 같은 것 아니냐고? 아냐. 단위가 다르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달라져. 지구인들은 자기가 태어난 날을 축하하는 거지만 위탄인들의 경우엔 자기가 산 기간을 축하하는 거니까.”
“헤, 우, 웍?”
“내가 좀 비약했군. 미안해. 그러니까 말이야. 지구인은 생일을 맞았을 때 ‘저번 생일 이후로 365일, 혹은 366일을 살았다’고 말하진 않는다는 거지. 그 대신 ‘생일이 돌아왔다’고 말해. 하지만 위탄의 후라셈은 돌아오는 것이 아니야. 2후라셈은 돌아온 1후라셈이 아니니까. 알겠어? 그래. 맞아. 지구의 생일은 순환적이고 위탄의 후라셈은 직선적이야. 왜 그런 차이가 생길까? 지구의 생일은 달력을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지. 지구인도, 음, 예를 들어 ‘제 몸을 스스로 뒤집을 수 있게 되어 그럭저럭 동물이라고 자칭할 수 있게 되는 시간’ 같은 걸 단위로 삼았다면 위탄인과 비슷한 체계를 가졌을지도 몰라. 그랬다면 생일이 ‘돌아온다’는 소린 안 했을 테고. 하지만 지구인은 달력을 이용했고 달력은 순환하는 거니까 생일도 순환하는 것이 되었지.”
“아익. 훕, 어.”
“오. 똑똑한 걸? 그래. 지구를 벗어나게 되면서 우리는 시간이 순환한다는 선조들의 생각에 좀 어리둥절해하게 되었지. 우주에 나와 보면 우리가 조그맣고 파란 해시계 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순환을 당연하게 여겼다는 것을 깨닫게 되거든. 우주에는 주야도 없고 계절도 없어. 여기서 시간은 도는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갈 뿐이야. 그리고 그게 맞아. 시간은 원래 순환선이 아니라 직선이니까. 재는 땔감으로 돌아가지 않고, 잡동사니들은 다시 구좌 속의 돈이 되지 않고, 아무리 나잇값 하길 거부해도 청춘은 돌아오지 않지. 엔트로피는 오직 점증할 뿐.”
“아이이, 아, 와.”
“시간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면 생일 같은 유치한 자기기만은 이제 그만둬도 되는 것 아닐까? 엄밀히 말해 생일이라는 건 365일만큼 죽음에 더 가까워졌다는 의미지. 좋아할 일이 아냐. 하지만 지구인은 그걸 달력과 연관 지음으로써 따분하고 가엾은 착각을 만들어내지. 생일 파티는 탄생을 의식적으로 반복함으로써 반복되는 탄생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의례야. 재생의 꿈. 맞아. 불사.”
“하훕?”
“아아, 그래. 정말 나와 이야기하는 건 유익하기 짝이 없군. 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 정말 아쉬운데. 슬슬 선장이 나를 죽일 시간이거든. 짜이찌엔, 아디오스, 다스비다냐, 사요나라, 오르부와, 집보다 좋은 곳은 없다.”
내가 웃었다.
숨이 멎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껏 나들은 나를 선장과 동등하게 대했다. 경원시하고 경계했다. 내가 나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건 의미가 없다. 태어난 후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게 뭔가. 자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상대가 자기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겠는가. 자기 모습을 모르는 나들은 내 모습에서 아무런 친밀감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내 목소리에도. 지금껏 내가 전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던 건 개에게 말을 거는 견주의 그것과 비슷한 동기에서지만, 내가 내 목소리를 알아들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 모습은 보지 못했어도 제 목소리는 들었을 테니까. 가당찮은 바람이었다. 녹음된 자기 음성을 여러 번 들어 그게 자기 목소리라는 걸 기억하기라도 한다면 모를까,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은 자기 목소리를 잘 모른다. 거기에 덧붙여 나들은 자바 원인 수준의 달변가들이다. 나들이 나들의 신음과 내 언어 사이의 공통점을 느낀다는 건 불가능하다.
그 모든 사정들로 인해, 지금껏 그 어떤 나도 내게 애정을 보인 적이 없다. 애정은 무슨. 희미한 호감이라고 할 만한 것도 못 봤다. 너무하지 않은가. 나들은 나를 동정하고 사랑해야 한다. 내가 바로 나니까. 하지만 어떤 나도 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런데 이 내가 나에게 웃었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미소라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어쩌면 이것이 작은 변화를……
그 때 나의 웃음이 일그러졌다. 뭔가 잘못한 건가? 나는 조바심에 상체를 내밀었다.
내가 다가서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성대하게 재채기를 했다.
미소가 아니라 재채기하기 직전의 표정이었다.
침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내며 선장이 오늘 내 각을 뜨길 기원해보았다.
애석하게도 선장은 내 각을 뜨진 않았다. 나와 선장을 낳은 민족에게는 접시 물에 코 박고 죽기라는 문학적 향취 그윽한 속담이 있다. 그저 메타포일 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이 우주 시대엔 꼭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무중력 환경에선 몇 백 밀리리터 가량의 물로 사람을 익사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믿어도 된다. 내가 그렇게 죽었으니까.
인류의 역사는 인권 확대의 역사라는 말이 있다. 인권은 분명히 확대되어 왔다. 동족 성인 시민 남성에게만 있던 것이 다른 인종에게로, 노예에게로, 여성에게로, 아이에게로 양보가 이루어졌고 동물들에게도 상당 부분 양보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인권 그 자체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자신과 같은 대우를 하겠다는 것이 마치 최고의 대우를 하겠다는 말인 양 굴지만 사실 ‘더 나은 대우’도 있다. 그 옛날 신에겐 당신의 목숨이나, 당신 아들의 목숨이나, 다른 신을 믿는 이웃의 목숨을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권리가 상당히 무시된 후에도 당신 소득의 1/10을 자기 에이전트에게 줄 권리나 교과서에 완벽한 헛소리를 실으려 시도할 권리 같은 건 여전히 강경하게 주장되었다고 한다. 분명히 신권은 인권에 우선한다. 비교 대상이 생기면 인권도 가치 판단을 당할 수 있다.
그리고, 보라. 이제 우리 인류에겐 외계인 친구가 있다. 아무도 드러내어 말하고 싶어 하지는 않지만 인간은 이제 ‘오직 하나뿐인 것’이 아니라 ‘여럿 중의 하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하나뿐인 것은 가치 판단이 불가능하지만 여럿이라면 비교가 가능하다. “다 싱싱합니다, 고갱님. 그렇게 뒤적거리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갱님. 이 표정 말씀입니까, 고갱님? 저는 절대로 고갱님 머리채를 잡고 ‘야, 이 년아. 그거 진열하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또 뒤집어엎니?’ 라고 외치는 상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갱님.” 그래도 우리는 직원에게 반 고흐가 된 기분을 선사하며 제일 좋은 상품을 찾아 진열대를 뒤엎는다. (그래서 우리가 고갱님이라고 불리는 거다.) 인간은 언제나 비교한다. 그러면서 인권과 위탄권은 비교하면 안 된다고 말할 건가? 그거야말로 인간성에 대한 부정이다. 인간인 내가 위탄인 수학자와 지구인 꼬맹이를 비교한 다음 전자를 살려야겠다고 판단한 것이 비인간적이라고 말하는 건 넌센스란 말이다.
야, 이 미친 새끼야. 사람이 사람을 구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비인간적이지!
“선장. 내 말 어디로 들었습니까? 인간은 비교하고 가치를 매기는 동물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그런 자기 본능에 따라 인간 자신에게 B등급을 먹이는 건 언제나 있었던 일이고요. 모든 종교인들에겐 신이 있고, 파시스트들에겐 국가와 민족이 있었고, 에코 테러리스트들에겐 환경이 있습니다. 사형제가 없는 법체계에도 정당방위는 대부분 있습니다. 정당함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인간이 인간 대신 다른 것을 선택하는 건 오히려 가장 인간적인 행동입니다.”
그래서 그 위탄놈을 구하려고 내 어린 아들을 죽였다고? 그리고 네가 인간이라고?
“아드님을 안 죽여도 되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였지!
“예. 주머레이 박사를 살려냈습니다.”
내 아들을 죽였어!
“예. 주머레이 박사를 살려냈습니다. 제기랄. 넌 나를 스물여섯 번이나 죽이고도 그 잘난 아들놈을 못 살려냈지. 난 네 빌어먹을 아들놈 딱 한 번 죽여서 박사를 살려냈어. 아무리 봐도 내 재주가 낫지 않아?”
5분 후 나는 스물일곱 번째로 죽었다. 그냥 스물여섯 번째와 스물여덟 번째 사이의 죽음에 불과한 죽음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진 않았다.
총은 민주주의적인 무기다. 총 이전 시기에 전투 기술이란 더 큰 권력을 가진 자가 더 강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검술이든 궁술이든 맨손 격투든 충분한 시간을 소모하지 않고 강해지는 길은 없다. 그리고 시간은 곧 권력이다. 먹거리를 얻기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무기 수련 같은 돈 한 푼 안 나오는 곳에 쓸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권력이니까. 권력은 시간 외에도 힘센 전투마나 튼튼한 갑옷, 값비싼 병기 같은 형태로 나타날 때도 있지만 어쨌든 본질은 똑같다. 귀족이 더 강하다. 호모이오이가 헤일로타이보다 강하다. 하지만 총은? 10분 쯤 훈련받은 마약상이나 소년병은 수백 시간 훈련을 수료한 특수부대원을 순식간에 사살할 수 있다. 총의 세계에는 귀족주의나 계급의식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선장이 내게 총질을 한다면 그 순간 나와 선장은 동등해지는 것이다.
선장은 그런 생각도 떠올리지 못한 채 총 한 자루를 가져왔다. 아마도 살인자가 되기로 했다면 ‘셀렉터를 풀 오토에 놓고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는’ 기분도 맛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른 병기들의 로망을 깡그리 박살낸 총이 스스로 유지하고 있는 마지막 로망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그런 짓 했다간 사람이 블랜더에 갈린 꼴을 보게 된다.(당연하지만 그 모습에 로망 따윈 없다.) 써 본 적이 없어서 선장은 요즘 총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몰랐던 모양이다. 250발 탄창이 비는데는 0.1초도 걸리지 않았고 그 0.1초 동안 나는 육식 동물의 작은창자쯤에서 목격될 만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나는 척골을 손에 넣었다.
처형이 끝나자 단백질 셰이크가 된 내 시체를 치우는 문제가 남았다. 지금껏 선장의 온갖 살해 수법을 잘 견뎌온 마키아벨리 호의 화물실은 총탄 난사에도 끄떡하지 않았지만 오물이 남아서 우주선 내부의 공기를 오염시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내게 총질을 해대기 전에 그걸 생각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선장은 격벽을 봉쇄하고 해당 화물실을 격리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 재처리 탱크에 집어넣을 수 있는 그 많은 유기물을 낭비하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도 거들었지만, 결국 0.1초의 그리 통쾌하지도 않은 시간을 즐긴 대가로 선장은 11시간 가까이 살점을 치우고 피를 훔쳐내야 했다. 내 오른쪽 척골이 없어졌다는 건 눈치 챌 여유도 없었다.
혹심한 노동은 좀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 탈진한 기분 때문에 선장이 만족감 비슷한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아직 뒈지지도 않은 파라오님의 분통 터질 만큼 커다란 돌무덤을 쌓던 이집트 노예들도 하루가 저물고 밤이 되었을 땐 비슷한 충족감을 느꼈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결국 선장은 오랜만에 술병을 꺼냈다.
나를 처음 죽였을 때 선장은 그 충격 때문에 폭음을 저질렀고 거의 스무 시간 가까이 인사불성 상태로 지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살인 뒤에도 폭음을 저질렀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타성에 의해 그러는 것처럼 그저 입만 조금 적셨고, 그러다가 술병을 꺼내지도 않게 되었다. 나는 다시 선장이 머리를 움켜쥔 채 살인자가 된 자신을 비탄하고 저주하는 꼴을 보게 되나 걱정했다. 하지만 이 스물여섯 번째의 살인 뒤 한 잔은 최초의 그것들과는 역시 달랐다. 선장은 정말로 여름날의 진이 빠지는 노동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선술집에 들러 물방울 송송 맺히는 술잔 받아놓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안온한 피로감에 젖어 한 모금 두 모금 술을 마시던 선장이 말했다.
처음 태어났을 때 내 아들, 정말로 못생겼었다.
“……신생아들이야 다 객관적으로 보면 좀 이상하게 생겼죠.”
열 달 동안 물에 퉁퉁 불어 있다가 이제 막 공기 속으로 나온 놈이니까 당연하다고 이해하려고 했지. 하지만 그래도 이건 정말이지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못생겼단 말이야. 조산사가 아빠랑 꼭 닮았다고 말하는데, 당신 나한테 시비 거냐는 말이 여기까지 올라왔어.
“멋진 첫 만남은 아니었나 보군요.”
내가 기대했던 건 그런 것이 아니었어. 내 아들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지고,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이 내 아들에게 전해지고, 그래서 다시 아들이 웃고, 그 모습에 다시 내가 더 행복해지고, 그런 피드백이 계속되는, 그런 환상을 가지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실제로 만난 건 꿈틀거리는 고깃덩어리였어. 움찔할 수밖에 없었고, 내가 움찔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들고, 그런 죄책감을 들게 만든 그 녀석에게 다시 언짢음을 느꼈지. 물론 그런 언짢음을 느꼈다는 사실에 다시 당황했고.
“그랬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진 않았어. 나아지긴. 더 끔찍해졌지. 정말 미친 듯이 우는 거야. 애를 달래다 달래다 못해 따라 우는 아내 모습을 보고 있을 땐 이게 사람 도는 것이구나 싶은 기분이 들더군. 아내를 달래고 있자니 애가 숨넘어갈 것처럼 울고, 애를 달래자니 아내는 자기 무시한다고 꽥꽥거리고. 난 애 못 기른다. 준비 안 됐다. 애 입양 보내자. 내가 미쳤나 보다. 아니다.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냐. 나는 나쁜 여자가 아니다. 나는 나쁜 여자다…… 밤새 눈 한 번 제대로 못 붙이고 그런 미치광이 같은 소리에 장단 맞추는 날이 며칠씩 계속됐지.
선장이 헐떡헐떡 웃었다. 예전의 일인데도 다시 떠돌려 보니 기가 막히는 모양이다.
4년이나 연애한 후에 결혼한, 그래서 속속들이 잘 안다고 믿었던 내 아내의 신경이 그렇게 가늘다는 걸 알게 된 건 정말 놀라웠지. 배신감마저 느꼈어. 난 보통 남편이야. 아내의 실수나 실언을 가지고 몇 년 정도 놀리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하지만 그 시절의 그 모습 가지고 아내를 놀린 적은 없어. 지금껏 입 밖으로 꺼낸 적도 없지.
계속해서 선장은 자기 아들이 파괴한 것들을 주워섬겼다. 그래서 약간 유치한 자아상의 일부나 아내에 대한 호의적 심상 약간, 그리고 수면 시간 등을 잃은 건 평범한 시작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선장이 13년째 길렀고 그 마지막을 보게 될 거라 확신하던 늙은 개가 선장 곁을 떠나야 했다. 친가에 맡겨진 개는 며칠 만에 다른 개에게 물려죽고 말았다. 선장은 개의 죽음을 보지 못한 것을 비통해했지만, 6년 동안 돈을 모아 산 카메라 렌즈의 경우엔 자기 눈앞에서 그것이 박살났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었다. 선장은 아직도 자신을 아마추어 카메라맨이라고 소개하지만 그 렌즈가 박살난 이후 사진이라곤 한 장도 찍지 않았으니 그걸 정확한 자기소개라고 말하긴 어렵다. 하긴 이제 선장이 음악을 듣기 좋아한다거나 영화를 보기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도 정확한 소개가 아니라는 점은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선장이 면 요리를 좋아하는 식성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조차도. 선장의 아들은 글루텐 알레르기였다. 왜 아니겠는가.
나를 이루던 그 모든 것들을 잃은 덕분에 나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가 되었다.
“그랬군요.”
참아라, 견뎌라, 자기를 죽여라 같은 말 밖에 못하는 아버지가 되었다.
“예?”
항의해라, 거부해라, 네 이름을 외쳐라 라고 말하는 아버지는 될 수 없었다.
“왜……?”
아버지가 되는 대신 파괴된 것들이 너무도 많았거든. 그래서 내게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내가 너무도 왜소해졌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는 될 수 없었다.
“……아아.”
원래 가진 것들이 많았다면, 아버지가 되는 대가를 좀 지불하고 나면 거덜이 날 정도로 얕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선장은 눈물에 흠뻑 젖어있던 뺨을 닦아냈다.
이제 참고 살다보면 좋은 날도 온다는 그 비겁한 아빠의 위로도 쓸모없어졌다. 왜 그럴까?
질문이 조잡하기도 하고, 다른 이유들도 있어서,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스물아홉 번째 내가 제3세탁실에서 나왔다.
인간 복제는 물론 불법이다. 하지만 그 어떤 감사 기관도 모든 개척선에는 제2세탁실이 없는 경우에도 제3세탁실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에 관심을 표명하지는 않는다. 초광속 시대 초기부터 우주로 뛰쳐나간 위탄인들과 달리 지구인 중엔 모든 것이 근사하게 돌아가고 있는 지구를 떠나고 싶어 하는 자가 극히 드물었다. 최근에서야 조금씩 나타나고 있는 개척자들은 정말 귀한 존재이고, 그들에게 두 번째 기회도 없이 가혹한 외계 환경에 맞서라고 강요할 만큼 배짱 좋은 개척단장은 없다. 그러니까, 백억 명이 살고 있는 지구에서 장기 기증자를 찾는 일과 행성 전체를 통틀어 백 명이 될까 말까 한 개척 행성에서 장기 기증자를 찾는 일은 같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 복제는 거부 반응도 없는 완벽한 기증자들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다. 따라서 개척 행성에서 복제를 금지하려 하는 건 마약이나 도박을 금지하려는 시도만큼이나 현실적이다. 모든 개척선엔 제3세탁실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음펨바 행성 개척 컨소시엄 소속의 마키아벨리 호에도 제3세탁실은 있었다. 그 제3세탁실이 얼마나 이용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꽤 성공적으로 이용되긴 한 모양이다. 음펨바는 다른 많은 개척 행성이 맞이하는 다양한 파멸들을 용케 피했고 그 개척은 12단계까지 무사히 완료되었다. 일반적으로 행성 개척 13단계가 되면 개척선은 철수하게 된다. 개척선도 개척자만큼 귀하기 때문에 - 그런 특수 목적의 값비싼 우주선을 대량 생산하긴 힘들다. - 여러 번 돌려쓸 수밖에 없다. 마키아벨리 호는 다시 행성 개척에 투입되기 전 필수적인 검사를 받기 위해 음펨바를 떠나 지구로 귀환하게 되었다. 선장은 바로 그 귀환을 책임지고 컨소시엄에 고용되어 마키아벨리 호에 부임했다. 그리고 선장이 음펨바를 떠나기 보름 전 그의 아들이 어떤 위탄인 대신 죽었다.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애초에 귀환 여행이었으므로 마키아벨리 호에는 개척자가 없었고 선원도 거의 없었다. 선장은 딱 한 명을 따돌림으로써 우주선 한 척을 통째로 훔치는데 성공했다. 물론 선장이 한시라도 빨리 아들의 원수를 붙잡으려고 우주선을 훔친 건 아니다. 그런 엄청난 절도를 저지르지 않고도 나를 붙잡을 방법은 많았으니까. 선장이 마키아벨리 호를 훔친 건 제3세탁실 때문이었다. 아들의 원수를 수십, 수백 가지 방법으로 죽일 수 있게 해주는 기적의 장치 말이다.
“아, 아아아? 아.”
그래. 선장은 미쳤다. 자식을 잃은 다른 부모들보다 약간 더.
선장은 내 복제들을 뇌활성 상태로 발현시켰다.
제3세탁실에서 모든 복제인간은 반드시 뇌사 상태로 발현된다. 그래야만이 ‘자기 세포로 복제 인간을 발현시킨 후 필요한 장기를 적출하는 일’을 ‘좀 복잡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투석이나 자가 수혈과 같은 일’로 취급할 수 있게 된다. 한 번도 뇌가 활동한 적이 없고, 그래서 인생 경험이라고 할 것이 없으며, 영원히 그 상태에서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면, 그리고 의학적으론 명백히 시체라면 그걸 사람이라고 강경하게 주장하긴 어려울 것이다. 당신이 꼭 전신 화상을 입어 당장 새 피부 15,000제곱센티미터 가량이 필요한 개척자가 아니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선장이 만든 내 복제들은, 내버려두면, 사람이 될 수 있다.
어차피 죽일 거라면 뇌사 상태로 발현시켜도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니냐고 몇 번이나 지적해보았다. 결과적으로 미친놈에게 미친 놈 취급당하는 가슴 벅찬 경험을 하게 되었다. 죽은 놈을 만들어서 죽이라고? 선장의 지적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원수의 복제를 만들어서 온갖 방법으로 죽이는 지금의 행태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 모순을 더 참기 힘들어서 선장이 하고 있는 일은 그저 영아 살해일 뿐 나에 대한 복수가 아님을 지적해 보았다. ‘그러니까 걔들 죽이지 말고 나 죽여요’ 하고 설득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 말이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스물아홉 번째 나, 그리고 스물여덟 번째로 죽게 될 나를 들것에 눕히고 고정시킨 나는 품속을 뒤졌다. 곧 예리하게 갈고 손잡이 삼아 끈까지 감아둔 척골이 나왔다.
내 척골을 보며 선장 살해를 합리화해보았다. 쉬웠다.
엄연히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뇌 활성 상태의 복제 인간들을 만들어내는 짓과 그들을 학살하는 짓을 멈추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언젠가 선장은 복제를 죽이는 짓에 진력을 느끼고는 원본을 죽이고 모든 것을 끝내자고 결심하게 될 것이다. 대신 죽을 복제만 계속 공급되면 나 자신은 안 죽을 거라 믿는 건 낙관주의도 아니다. 오히려 이만큼이나 여유가 주어진 기적에 감사할 일이다. 살아나려면 반드시 선장을 죽여야 한다.
부자가 모두 내 손에 죽게 된다는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기습은 실패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스물아홉 번째 내가 스트랩으로 고정된 들것을 밀며 화물칸으로 향했다. 무중력 공간이니 들것은 운반 도구라기보다 고정 장치에 가깝다. 운반이야 허공에 뜬 복제 인간을 툭 밀기만 해도 반대편에 닿을 때까지 둥둥 떠가니 아무 도구도 필요 없다. 하지만 발현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손가락 하나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복제 인간이 버둥거리지 않도록 잘 고정해두는 판이 필요하다. 들것은 그것을 위한 물건이다. 들것에 복제 인간을 고정시키고 잘 겨냥해서 그걸 밀면, 역시 반대편에 닿을 때까지 둥둥 떠간다. 행성의 수면을 떠가는 선박처럼.
그리고 그 들것에는 선박이 경험하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무중력 공간에서 각운동량은 온전히 보존된다. 스트랩에 묶여 있는 복제 인간이 행한 약간의 버둥거림도 둥둥 떠가는 들것에 피칭이나 요잉을 일으키긴 충분하다. 물론 롤링도. 화물칸 앞에 도착했을 때 들것은 성대하게 뒤집힌 채 도착했다. 선박과 달리 그렇다고 침몰할 염려야 없다. 하지만 들것 밑에 접착테이프로 붙여둔 내 척골이 선장의 시야에 드러나는 것은 문제가 다르다.
그래. 뭔가의 ‘아래쪽’에 물건을 숨긴다는 건 정말 행성인 같은 발상이다. 나도 잘 안다. 그러니 무중력 공간에선 아래가 언제든 위가 될 수 있는데 그게 언제까지나 아래에 있을 거라고 믿었는가 하는 조롱은 사양한다. 당신은 관찰자 또한 아래위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다른 때라면 선장은 들것이 롤링을 일으키면 자기 몸도 그 각속도에 맞춰 회전시켰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들것의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들것은 벽에 부딪힌 후 똑같은 속도로 반대편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러니 그걸 붙잡아야 하는데, 미리 회전을 일치시켜두지 않으면 빙빙 도는 들것을 붙잡았을 때 몸이 홱 돌아가게 된다. 도킹하려는 두 우주선이 회전을 일치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간만의 음주 때문에 선장은 자기 몸을 돌리기도 귀찮았던 모양이다. 선장은 빙빙 도는 들것을 붙잡는 대신 그냥 발로 툭툭 차서 그 속도를 조절하려고 시도했고, 그래서 그 바닥면을 보게 되었다. 젠장.
끈 감은 척골을 나꿔챈 선장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그걸 살폈다. 잠시 후 선장의 안색이 변했다. 이해가 있었고, 충격이 있은 후, 사악한 즐거움이 나타났다. 선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뼈로 나를 찔러 죽이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을까 생각하는 표정이었다. 관심 없다. 내게 중요한 건 척골에 찔려죽을 내가 몇 번째인 나인가다.
유감스럽게도 스물아홉 번째가 아니었다. 첫 번째였다.
선장은 괴성을 내지르더니 들것에 고정된 나를 내버려둔 채 나를 찌르려 시도했다. 두 번의 공격을 용케 피한 후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왼손을 내밀었다. 기적적으로 그 왼손은 날아오는 선장의 오른쪽 손목을 붙잡았다. 거기서 선장은 참으로 보기 드문 실수를 범했다. 흥분 때문이었을 것이다. 선장은 내 왼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나를 우주선으로 때려죽였던 것을 까먹은 모양이다. 무게가 없는 내 몸은 홱 움직였고 그 관성은 선장도 휘말려들게 만들었다. 결국 선장과 나는 빙빙 돌면서 이쪽저쪽 벽과 바닥에 충돌하며 우주선 안을 떠다니게 되었다. 속도도 줄지 않은 채. 버저 소리와 벨 소리 따위만 울리면 나무랄 데 없는 핀볼 게임이다. 뭐, 그걸 대신할 욕설과 포효와 비명은 충분했다.
그러다가 끔찍한 충격이 다가왔다. 꿍! 하는 듣기 싫은 소리는 조금 후에 울린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 당연히 일어날 일이 일어났음을 깨달았다. 머리를 벽에 박은 것이다. 그렇게 바닥과 벽을 걷어찼으니. 속도가 계속 더해지는 이 무중력 공간에서. 치명적이다. 이제 정신을 잃으면, 다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선장이 나를 깨워서 죽이려고 마음먹지 않는다면. 절대로 기절하면 안 된다. 하지만 힘들다. 이미 의식을 잃은 후라는 기분마저 들었다. 몸 어느 부분이라도 좋으니 한 가지만 움직일 수 있다면. 그러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내 몸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얼마 전 네 번째 후라세몬을 치른 원숙한 위탄인답지 않게 아직도 어린애 같은 구석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 수학자/항법사인 주머레이 박사는 마키아벨리 호의 복도에서 기묘한 물건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주머레이는 정말로 항법사였다. 고래로 우주선 항법은 컴퓨터의 소관이었지만 미지의 우주로 나선 지구인 개척자들은 지성을 가진 존재가 판단해야 할 항법상의 문제가 계속 나타나는 것을 경험하고는 저 전설적인 직업을 부활시켰다. 중요한 건 지성이므로 항법사가 지구인이냐, 위탄인이냐 하는 건 관계가 없었다. 사실 지구인보다 먼저 우주로 나섰기에 경험과 노하우가 더 풍부한 위탄인 쪽이 나은 면들이 많았다.
위탄인이 지구인들의 우주선을 탈 경우 일부 구역을 폐쇄하고 위탄 환경을 조성해야 하므로 환경 제어에 약간의 부담이 더 발생하긴 한다. 하지만 12단계 개척을 끝내고 철수하는 귀환선의 경우엔 그런 부담도 무시할 수 있다. 개척자들이 다 하선해서 공간도 남아돌고 환경 제어에 여유도 풍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구행 개척선에 지구인 선장과 함께 위탄인 항법사가 부임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물론 몇 후라셈 동안 파트너로 활동해 온 선장/항법사 팀이 부임하지 말라는 법은 결코 없다.
실용적으로 생각한다면 위탄인을 귀환선 선장으로 임명해 단독으로 귀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우주선 전체를 그냥 위탄 환경으로 바꾸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인류가 멸망할 때 비로소 같이 사라질 관료주의는 지구인의 개척선엔 지구인 선장이 있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머레이는 언제나 항법사에 머무를 뿐 단독 선장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주머레이는 그 사실에 불만이 없었다. 그의 어린애 같은 성격은 선장의 책임감을 못견뎌했다. 게다가 그의 파트너인 지구인 선장은 괜찮은 우주인이었다. 몇 후라셈 동안 파트너로 지냈으면서도 환경의 차이 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어본 적이 없고 언제나 번역 프로그램을 통해 대화하는 좀 기이한 사이이긴 하지만 주머레이는 선장을 친구로 여겼다. 친구와 함께 우주를 돌아다니는 일이니 사비를 들여서라도 할 만한 일인데 거기에 돈까지 받으니 주머레이는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주머레이는 그들의 파트너십이 항상 대형사고의 요소를 품고 있음을 직시하지 않았다.
틀림없이 어느 개척자의 짓일 것이다. 어차피 마키아벨리 호는 지구로 돌아가서 점검받고 수리 받을 테니 개척 행성에선 구하기 힘든 정밀부품 몇 가지를 뜯어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귀환선은 지구인과 위탄인 페어가 맡기도 한다는 걸 몰랐을 수도 있다.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음펨바에 도착한 주머레이와 선장이 마키아벨리 호의 일부 구역을 폐쇄하고 주머레이를 위한 위탄 환경을 조성한 후 환경 제어 테스트를 해 본 것도 그 때문이다. 주머레이의 거주 구역 기밀이 풀리고 위탄 대기 누출이 일어났을 때 주머레이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의 위탄 우주복으로 급하게 달려가지도 않았다. 선장이 기밀이 풀린 구역 바깥의 격벽들을 닫고 다시 봉쇄해줄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장은 주머레이의 예상대로 행동했다. 늘 있는 일이었다. 그 날이 평소와 달랐던 건 하나뿐이다.
선장에겐 인사 책임자로 하여금 자신의 채용 결정을 후회하게 만드는 재주 하나가 일품인 아들이 있었다. 그 아들이 귀환하는 마키아벨리 호에 수습선원 자격으로 승선한 건 이력서에 써넣을 우주 비행 시간을 늘리기 위해 아버지를 조른 결과였다. 상사가 아버지가 아닐 때도 천하무적의 게으름뱅이였던 작자였다. 그런데 직속상관이자 우주선에서는 I am that I am이라 할 수 있는 선장이 그의 아버지였다. 그는 열심히 환경 제어를 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외계인 파트너를 내버려둔 채 농땡이를 부려도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렇게 했다. 그가 몰래 놀고 있던 곳은 주머레이의 거주 구역 바깥이었고, 선장이 봉쇄한 2차 기밀 구역 안쪽이었다.
위탄의 대기는 그가 마주쳤던 그 어떤 인사책임자보다 빠른 속도로 그를 해고했다.
아들이 사망하고 며칠 후 선장이 그를 따돌리고 마키아벨리 호를 타고 떠났을 때 주머레이는 컨소시엄 수송국에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해서 지구의 별뜨기꾼 한 명에게 우주선을 빌렸다. 별뜨기꾼의 우주선이 흔히 그렇듯이 가운데 격벽이 있고 한쪽은 지구 환경, 다른쪽은 위탄 환경으로 꾸며져 있는 우주선이어서 새로 조정할 필요도 없었다. 주머레이는 별뜨기꾼과 함께 마키아벨리 호를 추적했다. 지구인 별뜨기꾼과 위탄인 항법사가 힘을 합쳤기에 그들은 겨우 2개월 만에 마키아벨리 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몇 시간 동안 통신을 시도했지만 마키아벨리 호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결국 누군가가 건너가야 했다. 별뜨기꾼은 마키아벨리 호 내부는 지구 환경일 테니 자기가 건너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지만 선장이 어떤 상태일지 알 수 없었던 주머레이는 들어가겠다고 고집했다. 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강제 도킹이 완료된 후 주머레이는 위탄 우주복을 입고 마키아벨리 호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곳에서 주머레이는 허공에 떠 있는 지구인의 내장 기관을 보고 이동을 멈췄다.
같은 종족이었다면 커다란 충격을 받았겠지만 주머레이는 그리 큰 충격을 느끼진 않았다. 대신 그는 의아함을 느꼈다. 그 내장 기관은 고리 매듭이 지어져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지구인이 자살에 사용하는 올가미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지구 표면에서 자살할 때 말이다. 무중력의 우주 공간에서 목을 매다는 건 불가능하다. 주머레이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이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었다.
조금 후 주머레이는 그것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지 않게 되었다. 의문이 풀려서 그런 건 아니다. 주머레이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선장이 보였다. 그를 찾으러 우주 공간을 2개월이나 날아왔지만 주머레이는 바로 선장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선장이 둘이었다.
위탄인에게 지구인은 다 비슷해 보인다고들 하지만 주머레이는 파트너인 선장과 다른 지구인들을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 있는 건 분명 두 명의 선장이었다. 멍한 심정으로 두 선장을 보던 주머레이는 가까스로 지구인들이 하는 복제를 떠올렸다. 선장이 자신의 복제를 만든 모양이다. 하지만 왜? 그 영문을 알 수 없는 내장 올가미를 만들려고? 지구인만의 비밀스러운 의식인 건가? 고민하던 주머레이는 선장에게 직접 물어보자고 결심하고는 두 선장을 살폈다. 들것에 묶여 있는 쪽은 정황상 아무래도 복제일 것 같았다. 복제가 원본을 묶는 건 힘들 테니. 주머레이는 그렇게 판단하고는 손에 뭔가를 쥔 채 기절해 있는 쪽으로 다가섰다. 거기서 주머레이는 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았다.
선장은 아무래도 지구인의 골조직처럼 보이는 걸 쥐고 있었다. 그런데 그 모습은 지구인이 두 손으로 뭔가를 쥐는 일반적인 모습이 아니었다. 선장의 오른손은 골조직을 쥐고 있었지만 왼손은 그 오른쪽 손목을 쥐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파지법인지 알 수 없었다. 늘어가는 의혹에 곤혹스러워 하던 주머레이가 선장을 붙잡았다. 그는 위탄인들이 일반적으로 친밀한 접촉에 쓰는 3열 부속지로 선장을 흔들었다.
신음. 그리고 잠시 후 선장이 눈을 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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