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2217년 8월 19일- 서울 I*C 삼성동 구 코엑스
구 코엑스의 밀레니엄 광장 쪽에서 낯선 사내 30명가량이 몰려오고 있었다. 사냥용 엽총과 수제 권총으로 무장한 사내들은 구 코엑스의 입구를 지키는 십여 명의 자경단원들에게 다가갔다. 입구를 지키는 자경단원에게는 k-2 대신 사내들과 같은 사냥용 엽총이 지급되어 있었다. 자경단원들은 안쪽으로 재빨리 소식을 전하고는 짐짓 태연한 척 사내들에게 물었다.
“무슨 용건입니까? 지난 번 얘기는 답변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내 중에 코가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말했다. 갖춘 장비나 행동거지로 보아 무리의 우두머리로 보였다.
“너는 됐으니깐, 안에서 파파나 불러.”
“파파는 이런 사소한 일에 나서지 않으십니다.”
자경단원의 말에 사내는 으르렁 거리며 말했다.
“뭐!? 사소한 일? 강북구 지하철의 지배자인 나 변한수에게 이런 식이며 곤란한데, 잡소리 말고 새로운 조건이 있다고 파파에게 전해.”
“글쎄요. 파파는 당신이 어떤 조건을 내걸어도 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변한수는 눈을 부릅뜨며 자경단원의 멱살을 잡고는 머리에 시커먼 권총을 겨누었다. 순간, 사내들과 자경단원들이 동시에 총을 서로에게 겨누었다.
“너 이 새끼! 자꾸 혓바닥 휘두르면 확 오려버리는 수가 있어! 이게 뭔 줄 알어? 이게 너희들 것처럼 시시한 수제권총인 줄 알면 오산이야! 무려 데저트 이글이라는 시대를 풍미한 명품이라고, 파파를 불러!”
자경단원과 사내들은 서로에게 총을 겨눈 채 노려보았고, 숨 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방아쇠에 걸린 손가락이 점차 떨려올 무렵, 밀레니엄 광장으로 일단의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그만! 다들 겨눈 총을 치워라!”
파파였다. 사내들과 자경단원들은 서로에 대한 적대심을 감추지 않은 채 천천히 총을 내렸고, 변한수는 자경단원의 멱살을 놓으며 파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시오. 파파. 날이 갈수록 파파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모습이 되시는 거 같구려. 크크”
“들어와. 변한수,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으니 총은 치우고.”
“역시 파파, 통이 큰 사람들은 통하기 마련이지.”
변한수는 자신을 막았던 자경단원을 조롱하고는 파파의 무리를 따라 구 코엑스 안으로 들어갔다. 무리들은 ‘산마루 길(Summit walk)'라고 불리는 아케이드에 들어섰다. 차가운 푸른색의 조명과 색을 맞춘 대리석이 마치 얼음 속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무리들은 외부에서 사람들이 올 때 사용되곤 하던 낡은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파파의 수행원 스무 명과 변한수의 무리 서른 명이 들어오자 레스토랑 안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찼다. 변한수는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말했다.
“저번에 가면서 생각해보니, 확실히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 같소. 5퍼센트라니 너무 쩨쩨했지. 나 변한수! 원래 그렇게 쩨쩨한 사람이 아닌데 말이야. 7퍼센트! 순익의 7퍼센트를 파파에게 드리리다. 거기에 지하철 통로 보호세는 과감하게 안 받기로 하고 말이야. 어떻소. 파파?”
파파는 아무 말없이 변한수를 지켜보고 있었고, 변한수는 파파의 표정을 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거, 욕심이 과하시구랴, 파파. 좋소! 뭐 한번 쓰기로 한 마당이니, 조금 더 쓰기로 합시다. 10퍼센트! 10퍼센트 어떻소? 이 정도면 이 코엑스 식구들 먹여 살리는 거 어렵지 않을 거외다.”
파파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변한수는 머리를 딱 치며 말했다.
“캬! 파파 그렇게 안 봤는데, 정 그렇다면 내가 좀 손해를 보기로 합시다. 20퍼센트 어떻소!? 이 이상을 바라는 건 도둑놈이요.”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파파가 입을 열었다.
“변한수, 네가 널 부른 건 그 지저분한 장사얘기를 다시 하자는 게 아니야. 그 이야기는 저번에 완전히 끝났어. 이 코엑스 내에서는 그 어떤 조직도 약 같은 거 팔수 없어. 알았나? 자네가 10퍼센트를 부르던 200퍼센트를 부르던 정커들의 돈 따위는 받지 않아.”
변한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파파를 노려보았다. 파파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갔다.
“앉아, 변한수. 얘기 안 끝났다. 우선 네 거래는 거부를 했지만, 네 녀석이 들여올 마약의 양을 생각하니 코엑스 거주지만 보호해서 끝날 문제가 아니겠더군.”
“그래서?!”
변한수의 눈에서 불똥이 튈 듯했다.
“내 밑으로 들어와라. 변한수, 정당하게 벌이는 사업이라면 얼마든지 도와 줄 테니.”
파파의 말이 끝나자마자 변한수의 손이 품속으로 들어갔고 다시 나왔을 때에는 또다시 시커먼 총이 들려 있었다. 변한수는 눈에 핏발을 잔뜩 세운 채 파파의 머리에 총을 겨누었다.
“조까지 마! 좀 큰 거주지를 관리한다고 눈에 뵈는 게 없나보지!? 이게 너희들 것처럼 시시한 수제권총인 줄 알면 오산이야! 무려 데저트 이글이라……,”
변한수는 숨을 들이키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수십의 자경단원들이 그와 그의 부하들을 향해 시커먼 장총을 들이대고 있었다. 변한수의 무리들도 총을 겨누긴 했지만, 자경단원들이 일제히 총의 레버를 반자동으로 돌리자 눈에 띄게 기세가 줄어들었다.
“총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변한수? 그렇다면 굳이 이 총이 무엇이지 설명할 것도 없겠군. 오늘은 돌아가. 긍정적인 대답을 기다리지.”
변한수가 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돌아설 때, 긴장된 공기 속으로 격렬한 기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변한수가 뒤를 돌아보자 허리를 굽힌 채 기침을 하는 파파를 자경단원이 보필하는 것이 보였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기침 소리가 끝나고 파파가 입을 막았던 손을 떼자 핏덩이가 손 사이로 주르륵 흘러나왔다. 곁눈질로 파파의 상세를 살피던 변한수가 입 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요새 몸이 좀 안 좋으신 모양이구려. 몸 관리 잘하셔야지요. 파파. 그래야 오래오래 코엑스의 양떼들을 살피실 것 아닙니까. 크크크,”
10.
내셔날 지오그래픽 2080년 11월 호 표제: 무기체가 몰려온다.
담당 취재원: 키요시키 아나벨
“반갑습니다. 키요시키 아나벨이라고 합니다. 생각보다 많이 어리, 아니 젊으시군요. 질문지는 이미 받으셨을 테고, 그것만으로는 좀 취재기사가 딱딱하니깐, 듀갈 박사님의 가정사를 좀, 아! 죄송합니다. 기분 상하셨나보군요. 원하시지 않는 질문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다시 앉아주세요. 올려다보기에는 꽤 키가 크시네요.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죠. 박사님은 애초에 철학박사로서 유명세를 떨치신 바가 있는데요. 그때의 논문, 그 연속적 신체와 불연속적 신체…, 아니, 연속적 정신과, 아아, 알고 있었습니다. ‘비연속적 인격과 연속적 신체에 대한 인식 오류 및 연속적 인격과 비연속적 신체에 대한 인식 오류’ 네네, 정말 길군요. 하여튼, 그 논문을 발표하실 때, 일각에서는 안타까운 사고를 당하셨던 부모님에 대한, 잠깐! 잠깐만요. 네, 알겠어요. 가정사에 관련된 얘기는 절대 안하도록 하죠. 좋아요. 유도심문도 하지 않겠어요. 이게 당신이 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 하도록 할께요.
그럼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도록 하죠. 박사님이 이번에 강원택 박사님과 합작하여 발표한 규소생명체라는 것은 정확히 무엇이죠? 음…, 그러니깐 무기물의 특성과 유기물의 특성을 함께 가진 무엇이라는 말씀인데. 과연 그것이 생명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네? 저요? 생명체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요? 뭐 DNA를 통해 자기 닮은 새끼도 낳고, 먹은 거 똥 만들어 내보내고 뭐 대충 그런 거 아닌가요? 오, 의왼데요. 웃는 모습 아주 보기 좋아요. 아, 조용하도록 하죠. 여하튼 그 웃음은 틀렸다는 뜻으로 알도록 하겠습니다.
생명이란 ‘파동을 이루어내는 순환체’라, 뭔가 어려운 개념인데요. 좀 풀어서 설명해 주실 수 없을까요?
지금의 태양이 6만년 전에 양치식물을 키워낸 태양과 같다고 생각하냐고요? 아니란 말씀이군요. 으음, 그거 흥미로운데요. 박사님의 철학 박사 논문에 나왔던 얘기라고요? 아, 물론 읽어봤습니다만, 270페이지를 외우는 데에는 무리가 있지요.
그러니깐 정리하자면 내부는 끊임없이 핵분열하며 물리적으로 다른 존재가 될지라도, 빛을 내 뿜고 있다는 일관된 모습을 통해서 태양이라는 정체가 확립될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그럼 태양도 생명이란 뜻인가요? 그건 생명의 의미를 너무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것 아닐까요? 아뇨, 흥미로운 얘기였어요. 박사님의 연구 이면을 알 수 있었으니 크게 벗어난 논의는 아닐 거 같군요. 그러니깐 박사님이 실리콘, 즉 규소를 이용하여 만들어낸 그 생명체는 ‘파동을 이루어내는 순환체’라는 박사님의 생명체에 대한 정의에 들어맞는다는 말씀이군요. 아, 제 말도 맞다고요?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박사님의 규소 생명체도 뭔가를 섭취하고 섭취한 것을 에너지원으로 삼으며 소화작용을 통해 배변…활동이라고 할 만한 것을 한다는 뜻인가요? 좀 더 고등수준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요? 그럼 박사님이 이 규소생명체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이죠?
……
놀랍군요! 박사님의 소망이 조속한 시일 내에 이루어지길 기도하겠습니다. 하지만……,
11.
2217년 8월 15일 - 서울아산생명연구원(구 서울아산병원)
지난밤까지 몰아치던 비바람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조용한 아침이었다. 밤새 요란한 굉음에 몸을 움츠렸던 사람들은 비가 그치자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국기를 계양하고 있었다. 진석은 말끔해진 거리를 거닐고 싶은 마음에 생명연구원에 도착하기 전에 레일로드에서 내렸다. 도로변에는 지하로부터 햇빛을 찾아 올라온 나무들이 인도의 바닥을 뚫고 무성한 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구멍 아래에 있는 서울의 구도심으로부터 희미한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아마도 화석연료를 쓰는 구세대의 차량들이 내뿜는 배기음일 터였다.
진석은 고개를 들어 끝없이 자기증식 하는 거대한 불사의 도시를 바라보았다. 세계 13대 불사자의 도시 중 하나인 서울은 기존의 도심을 덮어 세워졌기에 도시 전체가 복층의 구조를 이르고 있었다. 자연히 서울의 지하층, 즉, 구도심은 의체로 몸을 갱신할 수도 없고,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이동할 여력도 없는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 살게 되었다. 법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그곳은 치기어린 젊은 부자들이 가끔 값비싼 화석연료의 구세대 차량으로 거친 드라이브를 하는 난잡한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불멸자들은 필멸자들이 사는 서울의 지하를 범죄의 온상쯤으로 이해했고, 시장들은 나올 때마다 서울의 지하층을 말끔히 일소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특히나 올해 당선된 시장은 유난히 의욕적이었고, 서울시청 기록실을 뒤져가며 지하도시에 대한 지도를 만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연구원의 거대한 하얀 건물이 보였다. 한쪽 벽면에는 ‘서울아산생명연구원’이라는 생명연구원의 이름과 댑 연구소와의 제휴를 상징하는 'DAB' 마크가 거창하게 붙어 있었다. 진석은 병원으로 들어서기 전에 우뚝 서서 자신의 몸을 바라보았다. 시선은 들어 올린 손을 거쳐 다리로 발로 이동했다. 오래 신은 구두에도 애착을 보이는 게 사람일진데, 아무리 불사라 하더라도 자신의 몸을 바꾸는 게 달가울 리 없었다. 이제 생명연구원에 들어서서 32일 간의 긴 잠을 자고 나면 그의 몸은 마치 아이의 몸처럼 깨끗해질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릇이었다. 잠시 자신이 좋아하는 비온 뒤의 거리 풍경을 바라본 진석은 마음을 굳힌 듯 병원으로 들어섰다.
12.
2217년 8월 22일 - 서울 I*C(immortal city) 강원택 박사의 저택
강원택 박사의 방으로 통하는 복도를 한 노인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노인의 거친 걸음에 붉은 카펫의 보푸라기가 햇빛을 받으며 뽀얗게 일어났다. 노인은 방문을 열고는 들어갔다. 강원택 박사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는 안경을 벗었다.
“우린 2개월에 한 번씩 만나기로 하지 않았나?”
“당신이 정한 약속을 꼭 존중할 필요는 없지?”
“당신이라니, 조부에 대한 호칭으로는 부적절하군. 그래 무슨 일인가?”
노인은 아무 말 없이 침대 위로 작은 디스크를 던졌다. 강원택은 디스크를 갈무리해 침대 옆에 마련된 소형디스플레이를 통해 읽어 들였다. 곧이어 천장에서 내려온 액정스크린에 사람의 장기 모양이 국부적으로 드러났다. 강원택 박사는 안경을 집어 들고는 화면을 살폈다. 그리고는 짧게 신음을 흘렸다. 장기의 대부분에, 특히나 뇌 부분에 변형 분열된 세포들이 잠식하고 있었다.
“2개월, 그게 내 남은 목숨이야. 그래, 69세면 나름대로 살만큼 살기도 했지. 하지만 나에게는 아직 지켜야 될 사람들이 있어. 이렇게 죽기에는 어깨에 짊어진 짐들이 너무 많지.”
강원택 박사의 심장박동이 마구 올라갔다. 노인의 입에서 나올 수많은 말들이 머릿속에서 회오리 쳤고, 그 대부분은 강원택 박사에게 치명적인 발언들이었다.
“난 당신이 폐기창고에서 날 건져준 그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살아있던 적이 없었어. 명백하게 살아있는 인간일 뿐 아니라, 명백하게 죽어 있는 인간이었지. 법적으로도 실제로도 말이야. 내가 왜 그래야 했는지 설명해 주겠나?”
강원택 박사는 오른손으로 심장을 지그시 누르면서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한두 번 들어온 물음이 아니지만, 들을 때마다 그는 당혹스러웠다.
“알고 있지 않나, 그때에는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그래, 그건 지금도 이해해. 당신한테 많이 고마워하고 있어, 어쨌거나 나의 생명을 구해 준 거니깐. 그렇지만 선택의 순간이 그때 만이어야 할 이유는 없겠지.”
“무슨 말을….”
“지금부터라도 내 삶을 다시 돌려받겠다는 거야. 나를 위해, 그리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말인가? 너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야. 유령과 같은 존재라고!”
“많은 방법 생각할 필요 없다는 거 알고 있지 않나? 그걸 하겠다는 거야. 당신이 지금까지 해온 일.”
강원택 박사는 절벽으로 끝없이 떨어지는 듯한 아득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 봤자 자신은 그대로 남아. 그것은 모순이야! 명백한 모순!”
“알아. 나도 그것 때문에 많은 고민을 했지. 하지만 난 결론에 도달했어.
살인범을 사형시키며 피해자의 유족들이 느끼는 것,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를 때 느끼는 것, 그것이면 족해. 그리고 '나‘는 그들을 계속 지켜갈 수 있게 될 테니깐.”
강원택 박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말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어지고 강원택은 자신의 과거를 원망했다. 마치 타인처럼 말이다.
13.
2217년 8월 15일 - 서울아산생명연구원(구 서울아산병원)
그가 실려 간 방에는 두개의 욕조가 있었다. 씻는 용도가 아닌 물건을 욕조라고 하는 것에는 어폐가 있겠지만, 그 모습은 욕조라는 말 외에는 다른 말이 생각이 안 날 정도로 욕조를 꼭 닮아 있었다. 이동식 침대에 누운 그의 근처에 있던 욕조에는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너머에 있던 욕조에는 누군가가 물 속에 몸을 푹 담그고 누워있었다. 욕조에 누운 인물의 얼굴은 불투명한 실리콘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그는 그 얼굴을 보고 싶은 욕구를 느꼈지만, 그 욕구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가 저 실리콘 마스크를 벗기면 그는 마치 거울을 본 듯한 착각을 느끼게 될 것이다.
아직 마취제가 투여된 것도 아닌데, 오감은 끊임없이 둔감해지기 시작했다. 소리는 먹먹했고, 사물은 명확히 보였지만, 명확히 인지되지는 못했다. 새하얀 위생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의 주변을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 중 한명이 그에게 다가와 그와 눈을 마주쳤다. 마치 보호색처럼 주변의 하얀색과 동화된 그 모습은 마치 눈만 둥둥 떠다니는 듯이 느끼게 했다. 위생복을 입은 사내의 마스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는 동시에 웅성거림이 아닌 명확한 소리들이 그의 귀를 파고 들었다.
“하나아, 두울, 세엣, 네엣, 다서엇……여서…엇, 일고……,”
사위(四圍)는 잦아들었다.
그는 시간을 관통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시간을 관통한다고 느끼고 있었다. 머리에 담아두고 있기에는 그를 스쳐가는 시간의 압력이 거세어서 뒤로 물러났던 기억들이 휘저어버린 진흙탕처럼 표면으로 뭉글거리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떠오른 기억들은 기포가 되어 수면에서 터지고, 표면에 작은 파문을 그리며 그를 자극했다. 아, 아, 그의 입에서는 탄성이 나오고 있었다. 잊혀진 기억의 재발견이란 것은 그의 자의식을 두개로 분리시키고 있었다. ‘현재’로서 인식되던 자신과 재 확장된 ‘과거’로 인식된 자신은 많은 면에서 달랐고, 그는 분화되고 있는 또 다른 자신을 생소하게 여겼다. 그 느낌은 그리 길지는 않았다. 현재의 자신과 유사해 보이는 수많은 존재들이 마치 비눗방울처럼 그의 주변을 떠돌다가 이내 명멸해버리고 있었다. 모든 기억이 명멸하고 남은 것은 언제나 쉽게 느낄 수 있었던 현재의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 또한 그리 길지 않았다. 그의 밑이 하나하나씩 분화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는 점차로 위축되고 작아지는 자신을 느끼며 분화를 막아보려 했지만, 한번 시작된 분화는 그 기세가 멈출 줄 몰랐다. 아, 아, 그의 입에서 다시 탄성이 나왔지만,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탄성이었다. 과거로 확장되던 자신은 현재라는 보이지 않는 점으로 끊임없이 수렴되다가, 이윽고 그 자신조차 보이지 않게 되어버렸다. 아…,
그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14.
한국이 통일 된 이후 경의선과 경부선이 연결된 부의선이 신의주를 넘어 북경까지 연결됨에 따라 1939년의 부산 발 북경 행 열차가 근 100여년 만에 부활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약 10년의 공기를 거쳐 유럽방면으로는 리스본까지, 그리고 아프리카 방면으로는 케이프타운까지 철로가 연결되었고, 그로 인해 통일한국은 동북아물류허브(hub)로서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다. 총 연장 16317킬로미터에 달하는 또 다른 ‘철의 동맥’의 중요역 중 하나가 된 서울역은 예전의 모습은 찾아 볼 수도 없을 만큼 급속한 성장을 거듭했다. 서울국제역 구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의 60퍼센트 이상을 들어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역의 발전과 무관하게 노숙자들은 여전히 서울 역 이곳저곳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성찬 또한 노숙자들 사이에 섞여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서울역의 전면에 배치된 거대한 스크린에서는 새로 선출된 서울 시장이 기자회견을 하는 장면과 함께 아나운서의 내레이션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상두 서울시장은 금일 이후 이주일을 지하거주민 자진 신고 기간으로 정하고 이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공상두 서울 시장은 선거공약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범죄의 온상이 되는 서울시의 지하 거주지역을 최대한 건전하고 인도주의적인 방식으로 처리하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번에 시행된 조치 또한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인도주의 좋아하시네.”
이성찬은 화면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느새 바뀐 화면에는 수도방위사령부의 대령 한명이 나와 서울시의 지하거주지역이 국가 이미지에 얼마나 악영향인가에 대해 열변을 통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설명이 없더라도 그들이 인도주의적이고 건전하다고 말하는 자진신고기간이 끝난 후에 어떤 조치가 있을 것이지 분명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성찬은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계절에 맞지 않는 더러운 보온 자켓을 입고 있었지만 그 속에는 여전히 새까만 위장복을 걸치고 있었다. 이성찬은 핸드폰을 꺼내 수신함을 확인했다. 10일 전에 받은 짧은 메시지 하나가 마지막으로 받은 메시지였다.
‘돌아오지 마 이성찬, 이미 이곳엔 자네에 대한 사살 명령이 내려져 있어. -김기준-’
그 메시지를 마지막으로 아침이 되자 그의 핸드폰은 먹통이 되었다. 이성찬은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 오랜 일이 아닌데, 성상두가 죽기 전에 비가 내렸는지 죽고 난 뒤에 비가 내렸는지 기억이 가물거렸다. 비가 내렸다고 생각하면 총알에 몸이 꿰뚫리는 성상두의 뒤로 비가 내리는 장면과 수면에 번지는 핏물이 생각났고,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면 성상두가 쓰러지며 먼지가 피어오르는 게 생각났다. 조금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8월 13일 이성찬은 폐기되기 전의 의체가 살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애초에 전신일괄대체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단지 ‘몸’만을 바꿔준다는 점 때문이었다. 인간의 기억소체인 해마 기관을 통째로 이식함에 따라 해마에 있는 장기기억은 물론, 전하의 형태로 머릿속을 유영하는 중 단기 기억도 해마강화를 통해 장기기억으로 발전시켜 기억의 손실 없이 몸을 이동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었다. 기억은 단지 복제되고 있을 뿐이었다. 그에 따른 기술이 무엇인지는 이성찬도 알 수 없었지만, 이미 3차례의 갱신을 한 그에게 이는 만만찮은 충격이었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자신은 기절한 채 죽어갔던 것이다. 그것도 3차례나 말이다. 그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자신이 너무나 큰 비밀을 알아버린 것도 알 수 있었다.
충격에 휩싸인 둘이 자리를 이탈하려 한 순간 강렬한 서치라이터가 물류창고의 높은 창을 통해 들어왔다. 자이로 헬기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다수의 군화발 소리가 내부로 진입했다. 그리고 시가전을 위한 쥐색군복을 착용한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그 무엇도 묻지 않고 대인용 레일건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강력한 전자기장의 반발로 튀어나온 지름 0.01미리의 열화우라늄 탄이 탄착하자 작은 크기에도 불구하고 관통 하지 않고 조그만 폭탄이 터지 듯 물건들이 터져나갔다. 대단한 저지력이었다. 성상두가 다급하게 회피하며 서울대검찰청 강력부 강력과 검찰과 그 시보라는 사실을 알렸지만, 레일건은 멈추지 않고 날아들었다. 이성찬은 레일건을 피하면서 레일건을 대인용으로 만든 게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짓인지를 깨달았다. k-2로 맞던 산탄으로 맞던 체기능이 보전되더라도 순간의 쇼크로 죽을 수 있는 게 사람일진데 레일건은 맞는 곳마다 사람 머리 하나는 충분히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었다. 물론 개조된 의체를 이용한 범죄를 방비하기 위한 것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당해보니 그 말도 그다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
밖으로 나온 둘은 그들의 목적이 살인멸구라는 것을 깨닫고 아무런 말없이 뛰기 시작했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굵직한 빗방울이 얼굴을 세차게 때려왔다.
슬렌더 타입인 성상두에 비해 이성찬은 일반인과 똑같은 노멀 타입이었기에 둘의 사이는 금세 벌어졌다. 레일건이 사방에서 터지자 파면으로 온 몸이 긁혀나갔다. 별안간 미쳐 말릴 틈도 없이 성상두가 반대반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야! 성상두!”
“검사님이 가세요! 어차피 둘 다 나가긴 글렀습니다.”
성상두는 뛰면서 어깨에 장착되어 있던 주사를 몸에 주사했다. 그러자 순간 성상두의 몸이 거짓말처럼 높게 뛰어올랐다. 군인들은 갑작스레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성상두를 보고는 황급히 레일건을 위로 치켜 올렸다. 그때까지 머뭇거리던 이성찬에게 물류창고의 벽면을 박차며 군인에게 쇄도한 성상두가 다시 외쳤다.
“가세요!”
그제야 이성찬은 뛰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신마저 죽는다면 그건 개죽음일 것이다. 성상두는 속도가 강조된 슬렌더 타입답게 군인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며 군인들을 때려눕혔다. 군인들은 혼전 속에서 레일건을 차마 쓰지 못하고 보조 무기인 권총을 꺼내 성상두를 겨누었다. 한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왔다. 체중이 35키로 내외인 슬렌더 타입의 주먹으로 단단히 장비한 군인들을 무장해제시킨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노릇이었다. 약기운은 점차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고, 입에서 단내가 나기 시작했다. 몇 발의 총알이 정강이를 스쳐지나가고 출혈이 일어나자 성상두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리고 순간 멈춰선 성상두를 향해 그간 간헐적으로 터져 나오던 총성이 막힌 둑이 뚫리듯 터져 나왔다.
이성찬은 귀를 막은 채 그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뛰었다. 사위가 조용해지고 추격의 고삐가 풀린 후에도 이성찬은 멈추지 않았다. 달리지 않으면 그 순간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서울의 지하 거주지의 일부인 롯데월드의 아케이드에 있었다.
이성찬은 그 뒤로 노숙자들 틈에 섞여서 물류창고의 습격에 쓰인 k-2와 복제된 14개의 콘택트렌즈의 주인에 대해 조사했다.
이성찬은 서울국제역 광장에 있는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12시 58분이었다. 약속 시간을 2분 남기고 이성찬은 담배를 땅바닥에 비벼 끄고는 장소를 이동했다. 서울국제역의 화장실에 들어간 이성찬은 우측에서 네 번째에 있는 소변기를 사용했다. 오줌은 나오지 않았지만, 누군가 그의 옆에 있는 소변기를 사용하면서 물었다.
“아유, 작으시네요.”
이성찬은 구호가 조금 난감했지만, 조용히 대답했다.
“소변 볼 때 클 필요는 없지요.”
“그렇죠? 그래서 누구 원하는 사람은 있으시고?”
렌즈거래상을 확인한 이성찬은 되물었다.
“아니 그건 됐고,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렌즈거래상은 무언가 눈치를 챘는지 재빠르게 도망을 치려했지만, 이성찬은 순식간에 렌즈거래상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하진석은 렌즈거래상을 좌변기에 끌어 앉힌 뒤에 멱살을 바짝 틀어쥐고는 물었다.
“어이, 뭐가 그렇게 급해. 하나만 묻자는데…, 하진석 콘택트 렌즈 부탁한 작자가 누구야?”
렌즈거래상은 격하게 몸부림쳤다.
“젠장! 뭐야? 짭새야?”
이성찬은 뒤춤에서 권총을 꺼내들어 렌즈거래상의 입 속에 쑤셔 박으며 말했다.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옷 벗었어. 사는데 욕심 없으면 끝까지 입 다물어도 좋아. 그게 아니라 내일도 해 뜨는 거 보고 그 빌어먹을 암구어 묻고 싶으면 묻는 데로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렌즈거래상은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이성찬은 입에서 총구를 빼들었다. 렌즈거래상을 목을 부여잡고는 격렬하게 기침했다.
“좋아. 이제 대화할 자세가 된 거 같군.”
15.
결혼을 한 이후 존 듀갈은 많은 면에서 달라졌다. 그는 아내가 믿는 종교에 귀의했다. 그가 두 손을 모은 채 성체를 받아먹는 모습을 보고 그가 평소에 얼마나 종교를 멸시했는지를 아는 사람들은 사람이 변하는 것에는 한계가 없다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유물론이 지적으로는 탁월했을지 모르나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고 말했고, 철학적으로 가장 많은 공박을 당해온 이원론 역시 재평가 될 여지가 있다고 얘기했다.
이 시기에 존 듀갈은 인간적으로는 그 누구보다 행복했지만, 과학자로서는 여전히 유능하되, 예전의 천재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듀갈은 동료 학자들의 불평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규소 생명체를 이용한 인체의 대용품은 애초의 예견과 달리 무한정 미뤄지기 시작했다.
듀갈은 사람의 내적인 완성을 믿기 시작했다.
듀갈은 초월자의 존재와 그가 안배하는 사람의 운명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듀갈은 사랑이나 우정 그리고 믿음 같은 상투적인 단어들 속에 있는 의미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바로 그의 아내, ‘키요시키 아나벨’이 듀갈을 바꿔놓았다.
16.
2217년 9월 16일 - 서울 I*C 서울아산생명연구원
햇살이 들어오는 병실, 가볍게 나풀거리는 환자복을 입고 있는 하진석은 잠들어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진석이 일어나자마자 느낀 것은 코의 점막을 누르듯이 자극하는 알코올 냄새였다. 병원, 진석은 어렵지 않게 자신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진석은 자신의 팔을 들어보았다. 어깨 그리고 팔꿈치가 자연스럽게 연동되며 손이 그의 눈앞으로 다가왔다. 진석의 손목에는 종이 라벨이 메어져 있었고, 그 끝에 ‘ab age 58- age 69- sex male- name 하진석(Ha Jin-seok)’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진석은 손가락을 연차적으로 움직이려고 시도해보았다. 소지가 움찔거리다가 약간의 떨림과 함께 손바닥을 향해 굽어 들어갔지만, 약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런 약지와 상관없이 중지와 검지가 차례로 손바닥을 향해 굽어 들어갔다가, 손볼을 살짝 스치고 다시 펴졌다. 진석은 약지를 노려보다가 손을 탈탈 털고는 다시 움직였다. 소지, 약지, 중지, 검지, 그리고 엄지까지. 손가락들은 차례로 손바닥을 향해 굽었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석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그의 옆으로 머리를 뒤로 묶어 망으로 감싼 여자 간호사가 다가왔다. 의체원의 간호사들은 병원의 간호사들과 달리 검정색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간호사는 진석의 침대 옆에 놓인 기기들의 수치를 포터블컴퓨터에 펜으로 기입하고는 진석을 향해 물었다. 발랄한 말투와 어울리지 않게 간호사가 다가오자 과산화수소 냄새가 물씬 풍겼다.
“거부감은 없으세요? 어지러움은? 구토를 느끼거나 하지는 않으시죠?”
진석은 질문을 쏟아내는 간호사가 도대체 어떤 질문에 먼저 대답하기를 원하는지 알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다 괜찮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간호사는 포터블컴퓨터와 플라스틱 막대를 내밀었다.
“퇴원수속이니까, 여기다가 서명하시고요. 여기 작은 네모에 엄지로 지문인식해주세요.”
진석은 가볍게 손을 내밀다가 포터블컴퓨터에 표시된 블랭크 위에서 잠시 막대를 멈췄다. ‘무슨 망설임이지?’ 진석의 생각이 미처 완료되기 전에 진석의 손은 이미 블랭크 위에 ‘하진석’이라는 글자를 익숙한 필치로 적고 있었다. 진석은 얼떨떨한 느낌으로 지문인식도 함께 마쳤고, 간호사는 잠시 진석의 서명을 확인하고는 병원의 총괄서버로 진석의 퇴원자료를 전송했다. 그러자 병실에 놓인 레이져 프린터에서 진석의 퇴원서류와 의체약정서가 바로 나왔다. 간호사는 나온 자료를 철해서 의체품질보증서와 함께 진석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입원비와 의체갱신료는 72개월 분할납부해주시면 되고요. 병실은 오후 2시까지 비워주시면 되요. 이번에 바뀐 의체에 관한 자료는 거기 의체품질보증서를 보시면 되고요.”
진석은 별다른 성의 없이 품질 보증서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품질보증서의 제일 앞면에는 의체의 최초 개발자인, ‘존 듀갈’박사가 쓴 속칭 ‘불사(不死)의 변(辯)’이라 불리는 서문이 적혀있었다.
‘(전략)많은 이들이 나의 연구인 ’전신일괄대체재‘에 관해서 우려를 가지고 있음을 나는 모르지 않는다. 나도 또한 그 우려의 상당부분을 공감하고 있을 뿐 아니라, 키를 쥐게 된 자로서 책임감 또한 통감하고 있다. 그러나 나의 결론은 여러 번 표명한 바와 같다. 나의 연구는 단지 죽음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부정적인 동기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의 발전성을 좀 더 가속화하고자 하는 지극히 긍정적인 동기에 근거하고 있다. 인류는 이미 단일 생명체 이상의 일관성으로 수 만년을 존속해왔다. 우리 인류는 어떠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꾸준한 전진을 거듭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행착오와 낭비를 겪어야만 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낭비란, 세대의 교체에 따른 일관성 훼손에 대한 복구를 말하며, 시행착오란, 그 일관성의 훼손 복구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 생긴 많은 문제를 말한다.(중략) 때문에 나는 세대교체에 따른 인류사의 훼손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바, 인류 전체가 지향하는 불사성을 좀 더 목표에 적합하게 전향하는 차원에서 이 전신일괄대체재(全身一括代替材)를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다.’
듀갈 박사가 2119년 실리카 루시(silica lucy)라고 명명된 ‘전신일괄대체재’, 즉 ‘의체’를 내놓았을 때, 세상의 반응은 다양했다. 종교계는 분노했으며, 석학들은 비웃었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2119년 당시, 이미 세상 인구의 70퍼센트 이상이 전신의 어느 한곳 이상은 생명공학으로 만들어진 ‘인체대체재’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기형으로 태어났을 때, 굳이 그 결과가 불확실한 치료에 매달리기 보다는 기존의 자신의 육신보다 외형이나 기능면에서 월등한 ‘인체대체재’로 신체를 교체하는 쪽을 선호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전신일괄대체재’를 그저 기존에 있었던 ‘인체대체재’를 좀 더 편리하게 세트로 묶은 정도로만 생각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편리함에 환호하였고, 석학들은 기존 연구의 짜깁기라고 비웃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와 달랐다. 기존의 인체대체재가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인체와 연결됨에 따라, 무기질의 상태에서 생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과 달리, 전신일괄대체재는 처음부터 생명을 간직하고 있었다.
듀갈 박사가 설립한 DAB연구소(Dugal artificiality body research company)는 수많은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2128년 첫 시판을 시작하였다. 발표 후 약 6년간 쌓인 주문이 총 67만 명이었으나 초도물량의 한계로 1111명만이 ‘전신의체인’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주목했다. ‘전신의체’ 1세대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생활을 시작했고, 그들이 하루하루를 쌓아감에 따라 세상은 들끓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이 1년을 넘겼을 때, 주문은 폭주하여 2129년에는 주문 수만 1억에 육박했다. 댑 연구소는 마치 20세기 말의 마이크로 소프트처럼 경이로운 확장을 거듭했고, 2130년 ‘전신의체인’은 4천7백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 해, 듀갈 박사는 자택에서 자신의 입 속에 리볼버를 갈겼다.
조금은 장황한 듀갈 박사의 글 밑으로 의체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기재되어 있었다. 따로 표기된 제일 위쪽의 항목에는 -보장유효기간 7년-이라고 적혀있었다. 의체의 수명은 참으로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기본적으로는 7년을 보장하지만, 대체로 15년을 쓰면 오래 쓴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의체의 수명은 물론 의체의 주인이 관리를 어떻게 했는냐도 중요한 수명결정요인이 되었지만, 실제로는 관리와 상관없이 동일 모델끼리도 그 수명의 차이가 심했다. 심한 경우에는 1년 쓰고 의체의 수명이 다해서 재이식을 받기도 하지만, 기네스북에 오른 어떤 이는 하나의 의체를 66년 째 쓰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진석도 17년을 하나의 의체만 썼으니, 꽤 오래 쓴 편에 속했다.
보장유효기간의 아래에는 의체에 관한 수치가 적혀있었다.
-전고 178센티미터
-기본중량 33.6킬로그램
-추가중량 32킬로그램(실리콘, 수은)
-전체중량 65.6킬로그램
의체는 그 무게가 실제의 인체보다 훨씬 가벼움에도 불구하고 통상적인 인간의 운동능력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기에 지나치게 가벼운 상태로는 일상적인 신체 감각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의체는 일종의 추 역할로 실리콘 등을 몸의 곳곳에 넣게 되어있었다.
그는 감정이 채 갈무리 되지 않는 자신을 느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말로 자신을 다잡았다. 이로써 여섯 번째의 의체갱신이었다. 마지막 갱신이 17년 전이었으니, 그 느낌을 잊을 만도 하지만, 의체를 갱신한 직후에는 기억력만이 유난히 도드라지기 때문에 그 느낌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기억력이 광범위하고 강력해진다는 것과, 감정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 의체갱신 직후의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기쁨, 슬픔, 분노나 괴로움 등의 감정들은 구체화되지 못하고, 오로지 혼돈스러운 ‘기분’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각자 개인차가 심한 증상이긴 하지만, 그는 대체로 한 달 전후에 정상적인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그는 의체원을 겸하고 있는 서울아산생명연구원을 나서며, 무인택시에 올라탔다. 무인택시는 그가 목적지를 입력하자 마치 배가 출항을 하듯이 뒤쪽의 서스펜션을 살짝 출렁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무인택시는 순식간에 시속 180키로까지 가속했고, 그 상태에서 조금의 감속도 없이 커브를 돌아나갔다.
무인택시가 다닐 수 있는 레일로드(rail road)는 서울 전역으로 펼쳐져 있었지만, 진석의 집은 레일로드에서 좀 떨어져 있었기에 진석은 중간에 수소자동차로 갈아타야만했다. 화석연료를 쓰는 자동차보다는 한결 나았지만, 수소자동차 역시 폭발과 배기를 번갈아 하는 동일한 엔진구조를 사용하고 있었기에 귀에 거슬리는 소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얼마 가지 않아 상암 쪽에 위치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집으로 들어서자 누군가가 왈칵 그에게 안겨들었다.
날렵한 몸매와 어딘가 초식 동물을 연상케 하는 새까만 눈동자의 여자였다. 그녀는 진석의 시민 동반자(civil partner)인 ‘이경아’였다. 그녀는 의체를 2번 밖에 갱신하지 않은 정신적으로 많이 어린 사람이었다. 진석은 경아를 가볍게 안아주고는 집안으로 발을 옮겼다.
진석은 경아의 분위기가 어딘가 우울한 것을 느꼈다. 그녀의 눈가는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고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오기 전까지 울고 있었던 듯 했다. 진석은 경아의 눈가를 매만지면서 물었다.
“왜? 무슨 일 있던 거야?”
“아니, 아니에요. 그냥 마음이 힘들어서.”
경아는 무언가를 감추려 했지만, 진석은 이미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보았다. 서류의 위쪽에는 ‘출산 순위 결과 공지’라는 활자가 진하게 박혀 있었다. 진석은 테이블 위에 놓인 서류를 주워들었다. 서류에는 하진석과 이경아로 이루어진 시민동반자 가정이 출산 순위에서 떨어졌음을 애석하게 생각한다는 내용이 장황한 수식어와 함께 적혀 있었다. 경아는 서류를 보자 다시 감정이 북받치는지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왜 우리에게는 아이가 허락되지 않는 거죠?”
물론 이유야 많았다. 1년에 100명이 채 죽지 않는 서울시에서 무한정 아이를 낳는 것을 허용했다면 서울시는 진즉에 인구 과포화상태에 도달했을 것이다. 게다가 의체로 갱신한 자들은 모두들 20대에서 30대 사이의 체기능을 유지하고 있지 않던가. 그리고 아이를 가지기 위해서는 서류심사와 면접을 통과해야만 했다. 경아와 진석은 부모의 인성을 보는 면접에서는 큰 무리 없이 통과할 수 있었지만, 구체적인 사회공헌이 부족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사실은 경아도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아이마저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게 억울하게만 느껴졌다. 진석은 딱히 별다른 위안을 하지 않고 경아를 꼭 안아주었다.
진석은 경아의 젖어든 눈을 보면서, 갱신의 후유증이 조금씩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진석은 별다른 말없이 경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경아는 갑작스런 진석의 행동에 자연스레 입을 벌리며 응해주었다. 잠시 후 입술을 뗀 진석은 경아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서두르지 말자 아이는 금방 가질 수 있을 거야?”
경아는 거실에 있는 소파로 진석의 몸을 이끌었다. 진석의 손이 경아의 셔츠 위를 바쁘게 오가며 단추를 하나씩 끌러냈다. 진석의 익숙한 손놀림에 경아는 금세 알몸이 됐다. 진석은 경아의 호흡이 점차로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진석은 자연스레 경아의 작은 가슴 위에 손을 얹고는 유두를 매만졌다. 오랜 시간 남편과 함께 하지 못했던 경아는 금방 달아올랐다. 경아는 진석을 더 깊숙이 받아들이기 위해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때 행위에 몰두하던 경아는 뭔가에 놀랐는지 진석을 갑작스레 밀쳐냈다. 진석은 당황해서 물었다.
“왜 그래?”
경아는 눈을 둥그렇게 뜬 채, 진석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니,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봐요……, 갑자기 낯설어서”
경아는 말을 흐렸다. 그때 둘 사이의 어색한 정적을 깨고 차임벨소리와 함께 나지막한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편지입니다. 음성으로 전해드릴까요?’
“아니, 직접 보지.”
진석은 다시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경아는 미안한 듯 진석의 손을 잡았고, 진석은 어색하게 경아를 향해 웃어주었다.
거실의 한쪽에 놓인 LCD에 검은 휘장 장식과 함께 딱딱해 보이는 고딕체의 글씨가 서서히 올라갔다. 글씨는 무심하게 흘러갔지만, 진석은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조금 자리를 잡은 듯했던 감정이 다시 흔들리고 있었다.
“아….”
진석의 뒤로 다가온 경아는 화면의 글을 보고, 신음과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외할아버님이….”
그랬다. 그것은 부고였다. 진석의 외할아버지인 강원택 박사가 노환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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