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멜론, 웜홀 그리고 철학자 <2부>

2026년 4월 통권 247호

<2부>


6    


데카르트는 첫 번째 꿈을 꾸고 깨어난 뒤, 다시 잠이 들었다.

두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날카롭고 커다란 소리를 들었다.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었다. 데카르트는 깜짝 놀라 눈을 떴다.


7


교수는 학생들에게 잠시 쉬는 시간을 주었다. 학생들은 방 안 여기저기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쉬거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학생은 몸이 뻐근한지 벽에 기대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나는 박 선생에게 통신을 걸었다. 박 선생은 브레인을 봉합할 수 있는 기기를 가지고 584호 웜홀로 오겠다고 했다. 585호 웜홀은 폐기하고, 584호 웜홀은 어떻게든 이어 붙이면 될 것 같다는 판단이었다. 브레인이 찢어지는 일은 흔치 않았지만, 덤덤한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괜찮은 건가요?”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온 교수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었다.


“아, 예. 걱정 마십시오. 다른 관리자가 브레인 봉합 기기를 가지고 오기로 했습니다.”


“그럼 견학을 계속해도 되나요? 아직 남은 내용이 좀 있는데요.”


나는 잠시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요. 괜찮을 겁니다.”


내 대답에 교수는 골똘한 표정이었다.

그때, 주변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이 느껴졌다. 학생들이 담소를 멈춘 채, 일제히 침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교수의 어깨너머로 누워 있던 남자가 눈을 뜨고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 사람. 눈 떴어요.” 나는 교수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황급히 말했다. 


남자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학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빤히 훑어보았다. 마치 우리가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모두 숨을 죽인 채 그의 시선을 따라 움직였다.


“우리가 보이는 거야?” 김 반장이 들릴락 말락 하게 내 귀에 속삭였다.


“모르겠어.”


“아까 내 작업복 때문에 아직 중력 간섭이 남아 있는 걸까.”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렇다 해도, 그렇게까지 영향이 클 리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순간, 남자의 시선이 정확히 내 얼굴에 멈췄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 남자는 마치 어떤 결론에 도달한 사람처럼, 서서히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뭔가 안심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천천히 몸을 눕혔다.

곧 그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8


눈을 떴을 때, 데카르트는 가슴이 빠르게 뛰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왜 깨어났는지도 알지 못한 채,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방안은 여전히 어두웠다. 난로 쪽에서만 희미한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밖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전히 고요하게 눈이 내리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심장 위에 손을 얹고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분명 나쁜 꿈을 꾼 것이리라.

그때 방문 쪽에서 무언가 반짝거리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상체를 일으켜 그곳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헛것을 봤나 보군.’


하지만 곧이어 오른쪽 마룻바닥에서도 반짝거림이 느껴졌다. 그는 재빨리 시선을 옮겼지만, 이미 그것은 사라진 뒤였다. 방 안 곳곳에서 작은 불씨들이 살아 있는 듯 튀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눈썹을 찌푸린 채 그 움직임을 쫓았다. 그러나 시선을 옮길 때마다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데카르트는 한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은 채 반짝거림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그의 뇌는, 이 납득할 수 없는 현상을 설명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마침내 그는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깨어 있을 때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적이 있었던 듯했다. 아마도 난로에 남은 불씨가 타오르며 빛이 난 것이리라. 방 안 곳곳에 보이던 반짝거림은 착시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난로 속 빛이 새어 나와 일렁였을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방 안의 불꽃은 사라지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잠시 후 다시 떴다. 이제 불꽃은 완전히 보이지 않았다. 벽과 천장은 그대로였고, 다른 물건들 역시 변함없이 제자리에 있었다.


‘인간의 감각은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데카르트는 그렇게 자신을 설득하며 조금 전의 현상이 과장된 것이었음을 받아들였다. 몸의 긴장이 서서히 풀렸고, 다시 잠이 밀려왔다. 그는 몸을 눕히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고요하고 평온한 어둠이 다시 몰려왔다.


9


남자가 잠들자, 교수는 손에 쥐고 있던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그것은 웜홀이 건설될 당시 함께 제작된 장치로, 우리가 경험하고자 하는 브레인의 현상 모드를 전환할 수 있었다. 즉 특정 주파수만을 수신하는 라디오 수신기처럼, 브레인의 특정한 현상만을 선택해 보여 주는 장치였다.

꿈 현상 모드로 전환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자의 방안에 서 있었다. 다만 방은 이제 환하게 밝혀졌고 남자는 벽 쪽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커다랗고 두꺼운 책이 두세 권 놓여 있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하나둘 책상 주위로 모여들었다. 나와 김 반장도 그들 뒤를 따라 책상 옆에 섰다.


“맨 위에 있는 책은 백과사전이야. 이건 뭘 의미할까?” 교수가 물었다.


한 학생이 대답했다. “지식이요?”


“정답.” 교수는 미소를 지었다.


그때, 교수의 머리 위에서 무언가 아른거렸다. 오로라처럼 휘황찬란하게 움직이는 빛이었다. 빛은 내 팔뚝만 한 길이었다. 문제는 그것이 북극권 하늘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방 안에서 보인다는 점이었다. 나는 그 빛을 예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굉음이 들렸을 때, 그러니까 브레인이 찢어졌었을 때. 내가 현장에서 죽을 뻔했을 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나는 즉시 박 선생에게 연락했다. “박 선생, 언제 와요?”


“거의 다 와 가요. 왜요?” 박 선생이 대답했다.


“브레인 균열이 생겼어. 아까 찢어졌던 것의 여파인 것 같아요.”


“네? 벌써요? 빨리 갈게요. 일단 어떻게든 막아 봐요.”


“알겠어요.”


브레인이 찢어진다는 것은 호수에 돌을 던지는 것과 같다. 잔잔하던 수면이 돌에 맞아 깨진 뒤 그 여파가 물결처럼 퍼져 나가듯, 브레인 역시 한 번의 균열 이후 그 영향이 번져 간다. 지금 내 눈앞에 떠 있는 형형색색의 빛은, 한 번의 큰 찢어짐 후, 얕게 찢어지고 있는 브레인이 만들어내는 현상이었다.


나는 저걸 막을 만한 걸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떡하지?”


“왜 그래?” 김 반장이 물었다.


“저거 보여?” 나는 교수의 머리 위에서 일렁이는 빛을 가리켰다.


“저게 뭔데?”


“브레인 균열이야.”


“뭐라고?” 김 반장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핏기가 사라졌다.


“어떻게든 막아야 해.”


김 반장은 주변을 훑어보다가 책상 위에 놓인 사전을 들어 올렸다. “이건 어때?”


“오케이.” 


김 반장이 사전을 받치고 있는 동안, 나는 사전을 펼쳐 종이를 좍좍 찢어 나갔다. 학생들과 교수는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헉.”


“데카르트의 사전을!” 한 학생이 소리쳤다.


“미안해요. 어쩔 수 없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찢은 종이를 빛 쪽으로 가져갔다. 마치 자석이 끌어당기듯, 종이는 빛의 둘레로 달라붙었다. 하나의 균열을 처리한 후, 나는 다음 균열을 찾아 방안을 헤맸다.

그렇게 방 안에서 찾아낸 두세 개의 브레인 균열을 처리하고 있을 때였다. 방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박 선생이 들어왔다. 한 손에는 소지품이 든 주머니를, 다른 손에는 빗자루만 한 봉합 기기를 움켜쥔 채였다.


“저 왔어요!”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여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교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아, 큰일은 아닙니다. 곧 정리될 거예요.” 나는 그녀가 진정할 수 있게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바로 봉합할게요.” 박 선생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박 선생은 소지품이 든 주머니를 책상 위에 대충 올려놓고 봉합 기기의 전원을 켰다. 기기가 낮고 거친 울음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금속이 갈리며 뒤틀리는 듯한 소음이 방안을 채우고 바닥이 미세하게 떨렸다. 귀 안쪽까지 파고드는 진동 때문에 나는 이를 악물었다.

기기의 끝이 허공에 둥둥 떠 있던 종이 뭉치를 향했다. 종이 뭉치와 그 안에 갇혀 있던 빛이 한꺼번에 빨려 들어갔다. 방 안 곳곳에 남아 있던 다른 균열들도 마치 소용돌이에 휘말리듯 기계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밖에도 처리하고 올게요!” 박 선생은 기기를 들고 뛰쳐나갔다.


방안은 어수선했다. 교수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학생들은 눈을 크게 뜬 채 놀라 호들갑을 떨며 떠들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고요! 왜 아무도 설명을 안 해주세요?” 교수는 화난 듯 보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이미 처리됐습니다. 더는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사소한 문제’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양심의 가책이 살짝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매뉴얼에 명시된 원칙이었다. 처리될 수 있는 문제는 축소할 것. 그것 역시 관리자의 역할이었다.

교수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밖에서 다시 한번 크고 둔탁한 소음이 울렸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조용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소리에 오히려 안도했다. 박 선생이 근본적인 균열을 봉합하고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었다.

정적 속에서, 갑자기 느릿한 저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게 누구의 글인지 아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책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 책은 박 선생의 것이었다. 언제 꺼냈는지, 그는 책상 위에 놓인 주머니에서 박 선생의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남자가 펼친 페이지에는 짧은 두세 줄의 문장이 적혀 있었고, 그 여백에는 박 선생의 필체로 메모가 남아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아래에는 ‘이대로 계속?’이라는 문장이, 그리고 그 밑에는 양쪽 밑으로 ‘Yes’와 ‘No’라는 선택지가 적혀 있었다. 주변으로 여러 단어가 이어져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읽지 못했다. 남자가 다시 말을 걸었다. 


“나는 이런 시를 알고 있습니다. 로마의 시인이었던 아우소니우스가 쓴 것이지요. 그 시와 비교해 보고 싶은데 말입니다….”


그는 말을 이어 가며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그러자 책 사이에 끼워져 있던 박 선생의 증명사진 두세 장이 드러났다.

그 순간, 문이 벌컥 열리며 박 선생이 방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그녀는 그가 들고 있던 책을 홱 낚아챘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못 본 척했다.


“다 봉합했어요.” 그녀는 책을 다시 주머니 안에 넣으며 말했다.


“수고했어요.”


“안 선생님 작업복 팔꿈치도 찢어져 있는데요.” 박 선생이 봉합 기기의 끝을 내 팔에 댔다. 살짝 찢어져 있던 작업복이 곧바로 봉합되었다.


“아, 고마워요. 어쩐지 나한테 말을 걸더군.”


남자는 손에 쥐고 있던 책도, 눈앞에 서 있던 나도 순식간에 사라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다 됐으니 이제 돌아가시죠.” 박 선생이 말했다. 


나는 학생들과 교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공손하게 말했다. 웃는 얼굴에 설마 침을 뱉으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저 즐기시길 바랍니다.”


그러고는 얼떨떨하게 서 있는 김 반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김 반장, 돌아갑시다.”


김 반장은 찢어진 사전을 든 채 다가왔다.


“그건 여기 두고.”


“아차.” 김 반장은 사전을 덮어 남자의 책상 위에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교수가 다시 말을 꺼내기 전에 우리는 서둘러 방을 빠져나왔다. 

문을 닫기 직전, 문틈 사이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자신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쓰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10


세 번째 꿈.

데카르트는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보았다. 그는 그것이 사전임을 알아보고, 자신의 연구에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손이 닿기도 전에 사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시집 한 권이 나타났다. 

그는 그 시집을 들어 아무 페이지나 펼쳤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하는 시가 실려 있었다.

‘Quod vitae sectabor iter? (나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는 이것이 로마의 시인 아우소니우스의 시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어서 시집 속에서 “Yes(예)”와 “No(아니요)”로 시작되는 또 다른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그의 눈앞에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가 나타났다. 데카르트는 그에게 아우소니우스의 시를 보여 주려 했지만, 손에 들린 시집에는 그런 시가 없었다. 대신 몇 장의 작은 초상화들만이 책 사이에 끼워져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시집과 남자는 동시에 사라졌고, 탁자 위에는 다시 사전이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더는 그가 알고 있던 사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11


“나는 팀장님께 보고하러 가야겠어.” 사무실로 돌아온 뒤, 김 반장이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585호 웜홀은 폐기하고 다시 작업해야 하네.”


“내 업보지, 뭐.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야.” 김 반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사무실을 떠났다.


나는 자리를 비운 사이 별다른 이상이 없는지 확인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박 선생은 다시 조용히 책을 읽기 시작했고, 나는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 멜론 통을 열었다.

멜론을 먹으며 나는 584호 웜홀에서 본 남자가 문득 궁금해졌다. 데카르트. 익숙한 이름이었다. 은하 네트워크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보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문장이 가장 먼저 떴다. 많이 들어 본 말이었다. 뭘 했던 사람이길래 사학과에서 웜홀까지 만들며 견학을 하는 걸까. 나는 그의 생애에 관한 항목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삶과 학문에 관해 다 읽어갈 때쯤, 박 선생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멜론, 맛있어요?”


“아, 응. 하나 먹어 볼래요?”


“네. 감사합니다.”


박 선생은 내가 이쑤시개에 찍어 건넨 멜론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박 선생의 책에서 본 내용이 자꾸 머릿속에 맴돌고 있었다.


“박 선생. 혹시 이직해요?”


박 선생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었다. “역시 아까 보셨죠?”


“아, 미안해요. 그 데카르트라는 작자가 하필 그 페이지를 펼쳐서 보여 주는 바람에.”


“괜찮아요.” 박 선생이 말했다. “아직 이직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고요. 그냥 더 늦기 전에 새로운 도전을 해 보고 싶어서요.”


“새로운 도전?”


“공부를 좀 더 해볼까 하고요.”


“공부요? 박사 과정?”


박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물었다. “안 선생님은요. 여길 떠나는 거 생각해 본 적 없으세요?”


그 말에 나는 지난 수십 년의 직장 생활을 되짚어 보았다. 이곳에 입사한 지도 어느덧 삼십 년이 넘었다. 웜홀 현장 작업자로 일한 시간이 20년, 관리자로 일한 지가 10여 년. 웜홀을 건설하다가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퇴사를 고민해 본 적은 없었다. 박 선생이 입사한 뒤, 그녀의 높은 학력에 잠시 주눅 들어 사이버 대학이라도 다녀볼까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보내기에도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사이버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더라면? 만약 관리자 제안을 거절하고 현장 작업자로 남았더라면? 브레인이 크게 찢어졌던 그 날, 내가 크게 다쳤더라면? 이 모든 ‘만약’은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삶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여러 일이 있긴 했지만, 현실적으로 여길 떠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네. 나이도 있고, 원래 이런 성향이기도 하고.” 나는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하지만 박 선생은 나와는 다르잖아요. 그리고 오늘 584호에서 본 남자 있죠. 그 사람도 전직했더군.”


“데카르트요?”


“맞아요. 아는 사람이에요?”


“엄청 유명한 철학자잖아요.”


“방금 찾아봤는데, 원래는 군인이었다더군요.” 나는 보고 있던 디스플레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요?” 박 선생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똑똑.

그 순간,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12


데카르트는 침대 속에서 밝은 아침을 맞이했다.

그는 기지개를 켜면서, 자신이 여전히 건강한 몸으로 따뜻한 방 안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함을 느꼈다. 창밖을 보니 밤새 내리던 눈은 이미 그쳤고, 쌓인 눈 위로 아침 햇살이 내려앉아 반짝이고 있었다. 그제야 그의 머릿속에 지난밤 꾸었던 꿈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꿈속에서 그는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거센 바람은 금방이라도 자신을 삼켜 버릴 듯했고, 옆구리를 찌르던 통증은 아직도 생생했다. 그는 이 방에 갇혀 교회에 가지 못했던 자신을 스스로 꾸짖었다. 신앙이 약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그 꿈들은 악마가 마음의 틈을 파고들어 자신을 흔들기 위해 꾸민 계략이었을 것이다. 천둥처럼 울려 퍼졌던 그 소리 역시, 신이 번개로 내린 경고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눈앞에, 눈앞에 어른거리던 그 반짝임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착시라면, 그것 또한 악마가 부린 환영이었을까? 만약 악마가 자신의 눈을 속일 수 있다면 지금까지 보아 온 것들, 그리고 앞으로 보게 될 모든 것들 또한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지 않는가. 데카르트는 점점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데카르트는 마지막 꿈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는 것은 그의 일상이었으므로, 꿈속의 장면은 현실과 거의 구분되지 못했다. 책상 위의 사전은 지금까지의 인류의 지식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은 사라졌다가 찢어진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까? 지금까지 쌓아 온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새로이 세우라는 뜻인가?

이어 데카르트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시집에서 보았던 한 문장이었다. 그 제목은 유난히도 그의 마음을 붙잡았다.


‘나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해야 하는가?’


그 아래에 적혀 있던 “Yes(예)”와 “No(아니요)”라는 선택지를 보며, 그는 아우소니우스의 시 “Est et Non(‘그렇다’와 ‘아니다’)”를 떠올렸다. 그 시는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인 피타고라스에 관한 시였다. 그렇다면 피타고라스의 삶에 어떤 단서가 있는 걸까?


데카르트는 눈을 감은 채 몇 시간을 고민했다. 꿈속의 사전과 시집, 찢어진 종이와 선택의 문장들이 머릿속에서 반복해서 겹쳐졌다. 기나긴 사색 끝에, 그는 마침내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이 세 번의 꿈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같은 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그에게 건네고 있었다.


‘의심하라. 그리고 진리를 쫓아라.’


데카르트는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 또렷한 한 문장을 생각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리고 그 생각에 전율하고 있는 자신만큼은 의심할 여지 없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다.

창밖에는 새로운 태양과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아래,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13


문을 열자 584호 웜홀에서 보았던 교수가 서 있었다.


“들어오시죠.” 나는 상냥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시죠?”


“보험 관련해서 여쭤보려고 왔습니다. 입구 관리자에게 물으니, 이곳으로 가면 된다고 해서요.” 교수에게서는 약간의 격양과 걱정이 함께 느껴졌다.


“맞습니다. 앉으시죠.” 


나는 그녀를 사무실 한가운데 놓인 둥근 테이블로 안내했다.


“웜홀에 들어가기 전에 가입했던 보험 약관을 살펴보니, 사고 발생 시 배상을 해준다는 조항이 있더군요.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그렇고 학생들도 많이 놀랐습니다. 관련해서 설명을 듣고, 받을 수 있는 보상이 있다면 받고 싶은데요.”


보험 관련 문의는 경험이 좀 더 많은 내 담당이었다. 박 선생은 아직 이쪽 방면으로는 나를 보고 배우는 중이었다.


“네, 물론입니다.” 나는 박 선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 선생, 보험 약관 파일 좀 가져와 주시겠어요?”


박 선생이 파일을 찾으러 간 사이, 나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대응할지 빠르게 정리했다. 아까 네트워크에서 데카르트에 대해 읽은 것이 도움이 되었다.


“먼저, 경미한 이상 현상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585호 웜홀 작업자가 찢어진 작업복을 입고 웜홀에 들어가는 바람에 중력 간섭이 발생했거든요. 그 여파가 584호 웜홀까지 미쳤습니다. 다만 저와 박 선생이 즉시 조치했고 추가적인 문제는 없었습니다.”


“어쨌든 사고가 맞는 것 아닌가요?” 교수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약관에서 규정하는 ‘사고’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보험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왜죠?” 교수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나는 박 선생이 내 앞에 내려놓은 파일을 펼쳐 마지막 장으로 향했다. 맨 뒤 페이지에, ‘예외 사항’이라고 적힌 제목이 보였다. 나는 그 밑의 한 문장을 찾아 가리켰다.


“여기 보시면, ‘자기일관성 원리에 해당하는 사건은 사고로 취급하지 않으며, 보험 적용 대상에서 제외한다’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교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뜻이죠?”


“보험 배상은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대상으로 합니다. 하지만 오늘 584호 웜홀에서 일어났던 일은 자기 인과 구조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즉,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가 김 반장을 보았던 일, 데카르트가 제가 들고 간 멜론을 보고 떠올린 생각, 그리고 브레인이 찢어지며 그가 잠에서 깨어났던 경험을 떠올려 보시죠. 그 사건들로 인해 그는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전과 박 선생의 시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을 꿈으로 꿨기 때문에 그는 군인의 길을 버리고 학문을 택했죠. 이후의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그가 근대 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사실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 뒤는 교수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교수는 입을 다물었다. 내 말을 곱씹는 듯한 표정이었다.


박 선생이 거들었다. “근대 철학은 뉴턴에게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 결과 뉴턴 역학이 탄생했고, 그걸 토대로 과학이 계속 발전해 웜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웜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고요.”


교수는 여전히 고민하고 있었다.


“오늘 일은 사고라기보다는 현상입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이죠.” 나는 쐐기를 박았다.


잠시 후 교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더 할 말이 없군요.”


나는 그녀가 순순히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에 속으로 안도했다. 규정이 있어도, 아무리 설명해도 납득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겐 오히려 좋은 견학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수는 오늘 있었던 일이 데카르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감명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공손히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휴, 다행이에요.” 박 선생이 말했다. “오늘 일이 자기일관성 원리에 해당해서요. 그나저나 대단하세요. 어떻게 그렇게 대처를 잘하세요?”


“그러게 말이야.” 나는 씩 웃었다. “어쨌든 같이 처리하느라고 수고 많았어요.”


“감사합니다.” 


박 선생은 자리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안 선생님. 제가 퇴사 고민하고 있다는 거,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장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요. 다들 저를 곧 나갈 사람으로 취급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는 않으니까요. 안 선생님께는 이미 들켜 버렸지만. 만약 퇴사하게 되면 안 선생님께 가장 먼저 말씀드릴게요.”


“알겠어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 선생을 이해한다. 그녀는 아직 너무 젊었다. 데카르트처럼.


“그런데요.”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번 사고도 자기일관성 원리에 해당됐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러고 보니 회사에서 보험 보상을 해 준 걸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회사로선 운이 좋았던 거지.”


“하늘에 감사해야겠네요.” 그녀는 다시 책을 펼쳤다.


나는 디스플레이 위에 떠 있는 데카르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맑고 빛났다. 그 시선을 마주하자 괜히 찔렸다.

회사가 나를 관리자 자리에 앉힌 이유는, 내가 회사의 비밀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현장에서 웜홀 건설 작업을 할 때, 나는 찢긴 브레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당시의 베테랑 웜홀 관리자가 간신히 나를 끌어냈고, 덕분에 나는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사무실로 쳐들어가 역정을 내며 관리자에게 보험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관리자는 오늘 내가 교수에게 했던 말과 똑같이 말했다. 그 사건은 ‘자기일관성 원리’에 해당하며 반드시 일어나야 했던 일이라고. 나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정말로, 브레인 어딘가로 실종될 뻔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계속 화를 내자 관리자는 나를 달래기 위해 술을 사주었다. 그런데 그가 먼저 만취해버리고 말았다. 술김에 그가 털어놓은 사실은 이것이었다. 모든 웜홀은 설계될 때 일반상대성이론을 사용하는데, 그 수학적 해 중 CTC(Closed Timelike Curve, 닫힌 시간 꼴 곡선)만을 골라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CTC는 웜홀에 들어간 사람의 이동 경로가 결국 자기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구조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웜홀에서의 모든 일은 애초에 ‘자기일관성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웜홀 사업 초창기에 사람들은 웜홀에 뛰어드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때의 사람들은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웜홀을 이용하려 하지 않았다. 결국, 회사는 문제가 생기면 금전적으로 보상하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점차 보험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보험 가입비가 쏠쏠했던 탓인지, 아니면 진실을 밝힐 시점을 놓쳐버린 건지.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회사는 아직도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회사에서도 고위 임원과 나를 포함한 극소수뿐이다. 나를 구했던 베테랑 관리자의 은퇴를 앞두고 후임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나는 그에게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상부에 보고했고, 상부에서는 내 입을 막기 위해 나를 관리자 자리에 앉혀 주었다.


덕분에 나는 지금 편안히 앉아 일하고 있다. 웜홀에 대한 학위도, 특별한 지식도 없지만, 모든 사고가 자기일관성 원리에 해당한다는 사실만 알고 있으면 말은 얼마든지 맞춰낼 수 있다.

나는 정년까지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웜홀 덕분에 인류는 수많은 이득을 누리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제법 괜찮은 일자리가 주어졌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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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