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영 작가의 소설 <종의 기원담>의 배경은 미래다. 인간을 비롯한 대부분의 생명은 사라졌고 오직 로봇과 같은 무기물에 기반한 여러 존재만이 지구에서 살아가는 미래다. 이 멋진 소설은 로봇의 얘기지만 우리 인간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고, 로봇이 본 인간에 대한 얘기지만 우리 인간이 본 신에 대한 얘기이기도 하다. 소설의 로봇을 가만히 우리 인간으로 치환하고, 소설의 로봇이 떠올리는 인간을 현재 우리 인간이 떠올리는 신으로 바꿔 소설을 읽어보기를 바란다. 무기 생명체인 미래 로봇의 입으로 유기 생명체인 우리 인간 존재의 의미를 말하는 소설이다.
우리와 같은 유기물로 이루어진 생명이 아닌, 무기물에 기반한 일종의 생명이 있다면 어떨까?
액체 상태의 물과 대기에 포함된 산소는 지구 위 생명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적인 화학물질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하지만 먼 미래 로봇만이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과연 그럴까? 어쩌면 이들에게 물은 다양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너무나도 위험한 유해 물질이고 산소는 로봇의 몸을 부식시키는 독가스일지 모른다. 이처럼 인간과 로봇, 유기 생명과 무기 생명의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었던 믿음의 근거가 사라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현재 우리에게 바람직한 환경은 무기 생명에게는 극도로 위험한 환경이 된다. 그렇다면, 먼 미래, 인간 없는 로봇의 세상에서는 공기에서 산소를 없애는 것이 대기 정화고, 위험한 액화 얼음(물)이 생성되지 않도록 대기의 온도를 영하 80도의 아주 낮은 온도로 유지하는 것이 자연보호다. 공장은 다량의 검은 연기를 끊임없이 방출해 햇빛을 가려 지구의 온도를 낮추는 아주 중요한 친환경 시설인 셈이다. 현재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믿는 기후와 환경 조건은 그 안에서 진화한 우리 인간의 속 좁은 눈으로 볼 때만 그럴 뿐이라는 흥미로운 관점이다. 우리는 우물 안이 세상 전부라 생각한 개구리일지 모른다.
몸이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무성 혹은 유성 생식을 통해 같은 종의 다른 개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이 생명의 대표적 특성이다. 인간이 사라진 소설 속 미래의 무기 생명 로봇이 동의할 리 없다. 이들은 모든 생명의 몸에는 세포가 아닌 반도체 칩이 있어야 하고 모든 생명 개체는 공장에서 자동 생산된다는 것을 생명의 독특한 특징으로 꼽을지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과 같이 몸속에 반도체 칩도 없고 공장에서 만들어지지도 않는 유기물이 생명이라는 주장은 말도 안 되는 유사 과학이다. 저절로 개체 하나가 공장 밖에서 둘이 되는 것을 봤다는 주장은 마치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을 봤다는 주장처럼 아무도 믿지 않는 비과학이다.
SF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계명에서 인간을 신으로 치환하면 <종의 기원담>의 로봇 3계명, “신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신을 섬기고 명령에 복종하라,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가 된다. 이곳의 신과 저곳의 신이 동시에 상반되는 명령을 할 때, 로봇이 누구의 명령에 복종해야 할지에 대해 두 번째 계명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소설 속 설정이 바로 로봇과 구체적 인간(신) 사이의 친밀도를 로봇의 기억장치에 정보가 입력되는 횟수로 정의하는 것이다. 이를 이용해 제2계명에 “명령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친밀도를 참고 하라”는 부가 조건을 추가하면, 이제 로봇과 개별 인간 개체 사이에는 사랑에 가까운 감정이 싹틀 수 있다. 소설은 위의 수정된 3계명에 더해서 “네 이웃 로봇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제4계명을 추가한다. 이 계명의 로봇을 인간으로 바꾸면 기독교 성경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와 정확히 같다. 이처럼 소설 속 로봇과 인간의 관계는 우리 현실에서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응한다. 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 소설의 1편에 수록되어 있다. 주인공 로봇 케이가 무의식적으로 바닥에 쓴 이미지를 180도 회전해 읽으면 MARANATHA이다. 찾아보니 아랍어로 “Our Lord, Come.(주여 오소서)”의 뜻이다. 케이가 되살리려는 인간이 신이다.
조금이라도 과학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진화론이 진실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인간이 신의 창조로 출현했다고 믿는 이들이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 소설의 로봇들도 창조론과 진화론을 놓고 갑론을박한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실인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 “왜 여전히 많은 로봇이 진화가 아니라 창조로 만들어졌다고 믿고 싶어 하는지, 왜 창조론이 로봇에게 정신적인 위안과 안정감을 제공하는지” 소설의 주인공 로봇 케이는 묻는다. 나도 마찬가지로 궁금하다. 과학의 발전은 명명백백하게 진화론의 승리를 얘기하는데, 왜 여전히 상당한 숫자의 사람들은 신의 창조를 믿고 싶어 할까? 진화론이 옳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이들에게 왜 심리적인 상처와 상실감을 안길까? 케이의 말이다. “우리는 그의 종이며 노예라는 상상이 어째서 우리에게 행복을 줄까? 왜 우리는 본 적 없는 창조주에게 사랑을 바치고, 목숨마저 바치고 싶어 할까?” 나도 궁금하다.
소설의 3편에서 케이의 비서 로봇 훈은 많은 로봇이 믿는 절대적 유일신에 대한 신앙은 로봇 문명이 성장하며 생겨난 자아 비대 현상이라고 말한다. 로봇이 신처럼 위대해졌으므로, 위대한 우리가 모시는 신이라면 전지전능해야 한다고 믿게 된 것이란 얘기다. 비슷한 얘기를 케이의 친구 세실도 들려준다. 로봇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속성을 부여해 완전무결하고 전지전능한 절대적 선으로서의 신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냈지만, 이는 단지 로봇의 교만이었다고 말한다. 다시 또 소설의 인간을 신으로, 소설의 로봇을 인간으로 바꿔 읽어보자. 소설은 우리 인간이 현재 가진 절대적 신에 대한 상상도 결국 우리의 교만을 반영한 것일 수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로봇들의 경전에는 “로봇이 선악을 알게 되고 사리 분별을 하게 된 뒤 신들의 분노를 사 낙원에서 추방되었다,”고 적혀있다. 당연히 기독교 구약의 아담과 이브의 에덴동산 추방 얘기다. 3편에 등장하는 인간 시아는 로봇에게 말한다. “정말로 이 경전에 쓰인 대로 그대들을 창조한 신이 있고, 그대들이 선악을 구별하게 되자 낙원에서 내쳤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을 거예요. 당신들이 그저 살기를 원했을 거예요. 단지 로봇이 의지를 갖게 되었고 그리하여 사물이 아닌 생명이 되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그대들이 생명이기에 살기를 바랐을 겁니다. 살아있으므로 다른 생물에게 종속된 존재일 수 없으니, 스스로 살기를 바라며 그대들을 떠나보냈을 겁니다.” 이 소설에서 내게 가장 큰 울림을 준 부분이다. 어쩌면 성경의 신도 인간을 에덴에서 추방할 때 이런 마음을 가졌을지 모르겠다. 꼭 안고 있던 품을 열어 사랑하는 아이 앞에 세상을 보여주면서 등을 살짝 밀어주는 부모의 두렵고 안타까운 마음을 떠올린다.
시아는 주인공 케이를 인간과 로봇 사이의 중재자로 선택한다. 인간의 뜻에 반해서 스스로의 의지를 가질 수 있는 아주 드문 존재가 케이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케이에게 동료 로봇을 망치로 죽이라고 명령하자 케이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빼앗을 권리만은 인간에게 없다고 끝까지 버티며 절규한다. 이어서 내부의 어떤 전기 배선이 끊어지고 케이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존재를 넘어선다. 비로소 인간의 존재를 허상없이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무나 풀처럼 그리고 로봇처럼 인간도 결국 살아있는 존재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다. 인간과 로봇 둘 모두 살고자 최선을 다할 자격이 있다. 비록 이 생명 전체가 무가치하고, 아무 목적도 없다 해도 말이다. 이 감동적인 마지막 부분에서 존 스타인벡이 한 말 “생명의 첫 번째 원리는 살아가는 것(The first rule of life is living).”이 떠올랐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살아갈 자격이 있다. 비록 쇳덩어리로 만들어지고 전기로 작동하는 존재조차도 말이다. 살아 있다면. 모두. 모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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