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페크에 대해 재질문하기
SF가 장르로서 정체성을 명확하게 하는데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은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좋은 사고실험을 위해서는 어떠한 질문을 던지는가가 중요하다. SF의 경이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세계의 다양한 지점들에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과학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실험하면서 구체화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SF에서 어떠한 이야기를 다루는가, 어떠한 세계를 그리는가를 파악하는데 작가가 그 세계에 던지고 있는 질문이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것은 유의미한 독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박해울의 SF 소설들이 던지는 질문들은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이었던 『기파』(허블, 2019)에서부터 일관된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박해울의 작품들에서 가장 많이 발견할 수 있는 질문들은 진짜 혹은 정답에 대한 질문들이다. 진짜란 무엇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정답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란 무엇인가, 그것들이 언제나 진짜라는 것에 머물러 있고 정답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 맞는가와 같은 질문들이 반복적으로 제기된다. 『세 개의 적』에서도 역시 기존의 인식에 대한 재질문이 이뤄지는데, 가장 큰 단위의 질문은 바로 ‘공존’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공존의 문제는 단순히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가치로 여겨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공존의 필요를 역설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의 차이와 공존의 어려움을 확인하고 있다. 소설도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인간과 로봇은 공존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인간과 인간은 공존할 수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인간과 로봇의 공존 가능성에 대한 질문은 SF라는 장르에서 로봇(robot)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로숨의 유니버셜 로봇(Rosumovi Univerzální Roboti)』(1920)에서부터 존재하던 것이다. 그리고 『세 개의 적』에서 등장하는 질문들 역시 그것들로부터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우선은 작품이 배경이 되는 채굴 행성이 이름인 ‘차페크’이다. 로봇이라는 단어를 처음 조합했던 작가의 이름과 같은 행성인 이곳에서 인간과 로봇에 대한 이야기들이 중심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차페크의 희곡에서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은 자신들의 권리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인간과 반목하게 되고, 결국 지구상의 인간들이 종말을 맞이하고 로봇만 남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된다.
차페크의 희곡을 보면 인간과 로봇 간의 공존의 문제는 결국 이뤄질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이후 로봇이 등장하는 SF에서 고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세 개의 적』은 그러한 로봇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 놓은 차페크의 희곡에 대해 재질문을 하고 있다. 이는 행성의 이름뿐 아니라 작품의 다양한 곳에서 차페크의 희곡 요소들을 차용하고 있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행성의 관리 본부장인 도민이라는 이름은 차페크의 희곡에서 로숨 로봇 공장의 주인의 이름이다. 주인공인 서영하는 차페크의 희곡에서의 로숨과 같이 로봇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기도 하면서, 로봇들과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지만 현실적인 대안에는 이르지 못하고 문제를 발생시키는 헬레나와도 닮았다. 차페크의 희곡에서 인간이 모두 멸종하고 로봇들만 남은 것처럼 『세 계의 적에서도 종국엔 인간들이 멸종하고 EL들만 남게 된다. 하지만 『세 개의 적』은 차페크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세계에 대해 재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사고실험을 진행한다.
우리의 적은 어디에 있는가
『세 개의 적』의 이야기에 들어서게 되면서 마주하게 되는 질문들이 있는데 바로 제목에서 언급된 ‘세 개의 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1, 2, 3부의 제목으로 제시된 ‘이샨 누카’, ‘EL’,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1부의 이샨 누카는 차페크 행성으로 이주해 온 소수 민족 노동자의 이름이고, 2장의 EL은 서영하의 주도로 만들어진 ‘Electric Labor’ 즉, 로봇을 지칭하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3장의 인간은 이주민도, 로봇도 아닌 선택받은 기득권층의 관리자들을 뜻하기도 하지만 그들을 포함한 인간 모두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마지막 3부까지 읽고 나면 이들을 모두 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질문할 수밖에 없다. 특히 1부와 2부의 존재들은 적으로 여겨질 수 있을 만한 사건들이 대개 오해나 편견들로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사실 그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어떠한 대상에게 적으로 간주되는지도 모호하다. 관리자들이 이주 노동자들에게 불만을 토로하고, 그들로 인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지적하지만 그들이 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명백한 사실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EL인 C9의 경우 인간을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본래의 목적과 다르게 인간을 죽였다는 오해를 받고 차페크로 왔지만 C9은 결국 인간을 해치지 않았고, 모든 것은 오해와 음모였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게다가 C9은 EL의 근본적인 시스템을 거부하면서까지 인간을 지켜내기 위한 행위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있는데, 결국 이 세계의 모든 문제들은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 본질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인간은 명백한 적이라고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이야기에서 하나의 적을 특정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 그 자체일 것이다. 하지만 『세 개의 적』은 굳이 인간이라는 대상을 적으로 특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생각들을 최대한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면서 ‘그들이 과연 적일까, 그들을 적으로 인식하고 해결하게 되면 모든 문제는 사라질까’라는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적은 대체 무엇일까? 그것에 가장 가까운 것은 서로를 적으로 만드는, 소설의 메시지 대로라면 사랑이 결여된 메마르고 차디찬 인식들이다. 이야기 속에서 적(enemy)이라고 여길 수 있는 것은 어떠한 존재가 아니라 대상에게 향하고 있는 우리들의 인식(cognition)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들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결국 공존의 가능성은 어렵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소설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세 개의 적들(three enemies)에 대해 우리가 인식하고 그것을 해결한다면 모든 문제와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들어 놓은 거대한 인식이라는 세계의 적들(enemies of world)을 발견하고 그것에 저항할 수 있을 때 새로운 가능성들이 발생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저항을 위해서는 우선 대상에 대한 공감과 이해,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관계맺기와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이러한 방법들은 이야기 속에서 소수 민족 이주 노동자가 열악한 환경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인간과 로봇이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배려하고 공존하기 위한 과감한 선택을 하면서, 정해진 구조와 법칙에서 벗어나는 공존이라는 가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저항이라는 모양으로 행해지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이어졌을 때 비로소 이 세계에 존재했던 세 개의 적에 대한 막연한 공포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공존의 가능성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 같지만 이러한 모습들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필요한 것임을 『세 개의 적』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미 전 지구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론적이고 기술적인 접근 외에도 인식의 전환을 통한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가 제시되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멸망하는 세계의 공존법
『세 개의 적』에서는 이러한 노력들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모두 멸종하는 세계가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세계가 인간들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는 당연한 사실을 보여준다. 보통 인간이 멸종하게 된다고 하면 이야기에서는 아포칼립스 서사로 분류되어 절망적이고 공포스러운 세계가 그려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 개의 적』에서 그리는 인간의 멸종은 오히려 인간이 가장 존재론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인간들의 세계가 멸망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게 된 인간들은 그제서야 이 세계의 적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있는 무엇인가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선 각자의 방법으로 종말을 준비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의 공포들이 서술되곤 하지만 오히려 진지한 의식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남아있는 인간들이 EL들과 함께 이 세계의 데이터들을 수집하여 기록하고, 종국에 멸망을 맞이하는 모습들은 비극적으로 느껴지진 않는다.
EL들 역시 자신들이 명령을 이행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어떻게 될지 불안해하지만, 영하를 비롯한 인간들과 관계 맺고 소통했던 C9과 D1을 중심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들이 이 세계에서 존재할 모습들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들이 『세 개의 적』에서 이야기하는 공존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유한한 존재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로 한정해 보았을 때도 영원히 존속되는 종은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종들은 멸종을 맞이했고, 인간이라고 그러한 상황을 맞이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개인의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의 차원에서도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법들에 대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기술의 발달을 통해서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세계의 적들을 극복하는 이상적인 방법이라는 보장은 없다. 또한 인식에 대한 전회를 이루고, 공존을 통해 다양한 가능성들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영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이 이 지구상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멸종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주변에 만들어 놓은 수많은 적들과 공존하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애석하게도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적들을 만들어 반목하며 싸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적이라고 인식되고 있는 이들과 반드시 함께하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시대는 오히려 더 많은 적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세대별로 생물학적인 성별에 의해서, 정치적인 지향성에 따라, 빈부에 따라, 문화와 국적에 따라, 인종에 따라, 혹은 종교에 따라 서로가 서로의 다름을 인지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는 시대를 지나고 있다. 하지만 박해울의 『세 개의 적』은 우리가 결국 서로에 대해서 존재에 대한 이해와 공존의 가능성들이 여전히 있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멸망하는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멸망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인간으로 이 지구에 살아가면서 지향해야 하는, 어쩌면 인간다움이라는 막연하고 모호한 개념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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