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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후’는 과학문화의 ‘뉴 웨이브’를 꿈꾼다

과학을 즐기는 새로운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의 활동

2025년 5월 통권 236호

 한국 사회에서 과학은 문화가 될 수 있을까? 그 전에, 문화란 무엇일까?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 Tylor)는 문화를 “지식, 믿음, 기술, 도덕, 법, 관습,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간이 습득한 다른 모든 능력과 습관을 포함한 복합적 전체’로 정의한다. 여기에 포함되는 가치와 신념, 생활양식에 과학의 자리는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가장 잘 정착한 종교가 종교 행위라는 의식 없이 사람들의 생활 속에 하나의 습관처럼 스며드는 것과 같이 가장 잘 정착한 문화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과학이 문화가 된다는 것도 아마 그런 의미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 과학은 우리가 최소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한다. 사실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들이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을 넘어 함께 즐길 수 있는 장을 만드는 데에 있을 것이다. ‘과학을 알리겠다’와 같은 어떤 사명감에 하는 일이 아니라 준비하는 사람도, 참여하는 사람도 모두 ‘즐겁기 때문에’ 하는 것 중 하나에 자연스럽게 과학이 연상되도록 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미 수도 없이 많은 강연과 책, 교양 프로그램을 접했지만 기존 콘텐츠의 가장 큰 문제는 ‘볼 사람만 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A를 좋아하는 사람 3명과 B를 좋아하는 사람 5명, C를 좋아하는 사람 4명을 모았더니 다 합해서 8명이 되는 식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이런 때에는 가볍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존재가 절실해진다.


 그래서 소위 ‘MZ한’ 과학커뮤니케이터들은 조금 다른 전략을 택하고 있다. 과학자를 소재로 한 연극을 만들거나 버스킹을 하고, 옛날 과학송 시절의 경계를 넘는 과학 노래를 만들고 있다. 코펜하겐 해석을 둘러싼 물리학자들의 고뇌를 다룬 외계공작소의 연극 <양자전쟁>, DNA의 X선 회절 사진을 찍은 과학자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삶을 다룬 아트앤사이언스의 뮤지컬 <다크레이디X프랭클린> 등이 그 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런 콘텐츠들의 핵심은 ‘과학을 많은 사람에게 알리겠다’는 일종의 사명보다는 ‘재미있는 것을 하겠다’는 생각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모름지기 하는 사람도 재미있어야 보는 사람도 재미있는 법이다.


 ‘덕질문화’ 혹은 ‘팬덤문화’는 이런 점에서 좋은 수단이다. 특정 가수, 작품, 장르의 팬덤이나 이들을 좋아하는 마니아를 의미하는 ‘오타쿠’, 혹은 ‘덕후’라고 불리는 이들의 문화는 십여 년 전부터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고, 요즘에는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배우, 캐릭터, 작품을 테마로 카페를 대관해 행사를 열거나 전광판에 광고를 올리는 일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중에서도 해당 캐릭터나 배우 등의 생일에 맞춰 테마 카페를 준비할 때, 이를 ‘생일카페’라고 부른다. 우선 카페라는 장소의 특성 상 지나가다 가볍게 방문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생일카페에서는 정말 파티처럼 알파벳 풍선이나 브로마이드를 벽에 붙이고, ‘협력진’이라 불리는 일부 팬들은 행사에 사용되는 포스터나 브로마이드 혹은 엽서의 그림, 소책자에 실리는 글 등을 기한에 맞추어 편집하고 홍보물로 출력해 카페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주로 카페에서 개최되기 때문에 카페에 있는 메뉴를 세트로 묶고 스티커 같은 작은 굿즈를 ‘특전’이라는 이름으로 끼워 판매하기도 한다. 생일카페가 한 번 열리면 수많은 팬들이 인증과 특전을 위해 전국 곳곳에서 모여들기 때문에 카페 매출에도 도움이 된다. 자영업자와도 상부상조하는 행사인 셈이다.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는 대신, 생일카페는 대부분이 운영진들의 사비와 열정만으로 만들어지기에 생일카페를 준비하는 운영진들은 자발적인 열정페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처음부터 수 십만원에서 수 백만원의 적자를 당연히 감수하고 남는 것은 사랑뿐인 행사인 셈이다.


 2023년의 크리스마스 전, 서울 삼청동의 과학책방 갈다에서 “2023 아이작 뉴턴 생일카페: Vain are the Thousand Creeds(이하 ‘뉴턴생카’)”가 열렸다. 최초 제안자는 소셜네크워크서비스 엑스(X·옛 트위터)에서 ‘헤오바’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온라인 지인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처음 들었던 “저랑 뉴턴 생일카페 해보지 않으실래요?”라는 제안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오랜 시간동안 아이작 뉴턴과 관련한 고서와 상품 등을 모으던 지인의 제안은 강연과 저술, 학습만화 등을 위주로 하던 과학문화의 장에 새로운 물결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감이 좋았다. 심지어 한창 서양 근대과학사에 관심이 있던 때였다. 흔쾌히 제안을 수락하고 ‘뉴턴주의가 당대 여성 및 여성 과학자에게 미친 영향’을 주제로 글도 협력하고 강연도 하겠노라 약속했다. 어느 정도 행사의 틀이 만들어지자 과학굿즈를 디자인하시는 헤일메리 작가님과 ‘나는 윤리가 싫어요’ 등의 웹툰을 그리시는 전구 작가님을 비롯해 스무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글, 그림, 캘리그라피 등을 협력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마침 제안을 받은 나는 몇 년간 과학커뮤니케이터로 활동했기에 알고 있는 곳과 사람들이 있었다. 급히 과학책방 갈다에 연락해 장소를 선점하고 평소 안면이 있던 교수님들과 과학커뮤니케이터분들께 연락을 돌려 화제가 될 만한 축전도 여럿 받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경희대학교 물리학과의 김상욱 교수님, 성균관대학교 물리학과의 김범준 교수님, 하리하라 이은희 선생님, 과학책방 갈다의 대표이신 이명현 박사님, 전북대학교 김태호 교수님, 과학커뮤니케이터 궤도님, 과학커뮤니케이터 지구님, 그 외에도 많은 선생님들께서 흔쾌히 보내주신 축하 인사는 인터넷에서 꽤 큰 화제가 되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게시글을 공유했고 예약을 위한 구글폼이 열린 날에는 예약자가 몰려 서버가 마비되기도 했다. 예약자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분리해 다시 정리하고, 인원 제한에 대한 문의에 응대하고, 예약 확인 메일을 보내느라 나와 다른 스텝 한 분이 하룻밤을 꼬박 샜던 것은 덤이다. 행사 당일에는 여러 언론과 잡지에서 주최자인 지인을 인터뷰하기 위해 몇 군데의 언론에서 방문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뉴턴생카는 절찬리에 끝났다.


 우리의 뉴턴생카 이후로 생일카페 문화에도 새로운 장이 열린 것 같았다. 비슷한 시기에 우리를 뒤이어 열렸던(마찬가지로 내가 글 협력으로 참여한) 동로마 제국의 황녀인 안나 콤니니 생일카페, 서강대학교의 마르크스 생일카페, 국립중앙과학관의 아인슈타인 생일카페, 해당 인물을 소재로 뮤지컬을 만든 회사의 아가사 크리스티 생일카페까지 이전에는 덕후들의 문화에만 머물러있던 생일카페 문화는 이제 과학커뮤니케이션을 넘어 마케팅 수단으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다만 덕후들이 여는 생일카페를 그대로 기관이나 기업이 열게 되면 그 내용이 달라진다. 기관이나 기업에서 여는 행사는 ‘생카’라기보다는 기획전시나 쇼룸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생일카페의 본질인 ‘함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의 정신은 처음부터 흐려지게 된다. 내가 생각하는 또 다른 이유는 광기에 있다. 모름지기 생일카페의 재미란 자리에 없는 생일파티의 주인공을 미화하거나 비판할 때 나오는 약간의 광기에 있는 법인데, 그 광기는 아무래도 기관이나 기업이 수행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관이나 기업에서 진행하는 행사에 여우 머리에 얼굴 대신 홍조를 그려 넣은 근엄한 과학자의 사진이 들어간 인형 같은,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하겠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다소 경악스러운 소품을 둘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생일카페를 넘어 아이돌의 생일이나 데뷔일을 전후로 지하철에서 종종 찾아볼 수 있는 전광판 광고라던가 특정 장르의 2차 창작물을 전시하거나 판매하는 행사인 온리전에도 과학이 하나의 장르로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 물론 생일카페 외의 다른 방법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뾰족한 답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하는 사람이 즐거우면 보는 사람도 즐거우리라는 사실이다. 장르나 인물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이런 행사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사랑으로 만들고, 사랑으로 모이는 시간. 아마 게임 체인지의 키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남는 것이라고는 텅 빈 지갑과 사랑뿐일지라도 덕후는 과학문화의 뉴 웨이브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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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지
서울대학교 과학학과/과학커뮤니케이터 플라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