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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속말과 자성

2024년 9월 통권 228호

귓속말과 자성 


귓속말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가까운 친구들끼리 소통하는 방법의 하나였다. 수업 시간에 친구들과 떠든 것이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 시절에는 왜 그렇게 몰래 짝꿍에게 귓속말로 정보를 전달하는 게 재미있었는지 모르겠다. 귓속말을 통해 유통되는 정보는 친구 중 누군가 맛있는 간식을 가져왔다거나. 재미있는 만화책을 들고 왔다거나. 혹은 누가 누굴 좋아하는 것 같다는 등의 별로 영양가 없는 소식이었지만 정보의 전달 그 자체에 재미가 있기에 짝꿍과 정보를 나누었다. 그리고 이 정보는 항상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교실 전체에 빠르게 퍼졌다.


교실의 사회학에서 귓속말을 통한 정보의 전달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수업 시간에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 귓속말이 전달된다고 할 때, 이웃하는 친구에게만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특수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이는 앞에서 수업하는 선생님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주위 몇몇 친구들과 소리 높여 대화하는 방식과는 비교해 제약이 큼에도 불구하고 귓속으로 속삭여진 정보는 여전히 교실 전체로 퍼져나갈 수 있다. 어떨 때는 중앙에서 퍼져나가는 선생님의 수업보다 효과적이다.


원자의 사회학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고체 물질의 성질을 설명하는 물리학은 사회학과 관련이 깊다. 집단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은 사람 한 명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집단만의 고유한 특성이다.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인간의 행동과 특징은 수천 년 동안 크게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개인이 모여 만들어진 진단의 문명과 문화는 변화를 거듭해 왔다는 점에서 집단행동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물론 개인의 특성을 단순히 더한다고 해서 집단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집단이 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 있다. 바로 개인 간의 소통 혹은 상호작용이다. 전혀 상호작용하지 않는 개인의 모임은 사회라 부를 수 없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단순 합’에서는 흥미로운 현상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단체 행동을 위해서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개인들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어야 한다.


물질에서도 많은 단체 행동이 존재한다. 물이 끓고 어는 물질의 상태 변화도 물 분자들의 단체 행동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다룰 자기 현상도 원자 자석의 단체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원자 혼자 있을 때 사용하던 이론과는 다른 원자의 사회학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때 핵심적인 요소도 마찬가지로 원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물리학에서 상호작용이라 하면 접촉이 없이 먼 거리에서 전달되는 힘에 대해서 많이 다룬다. 별들 사이에 작용하는 중력이라던가, 전하를 띤 입자들 사이에 작용하는 전자기력이 그렇다. 중고등학교에서 물리학 문제를 풀어본 사람은 열심히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쿨롱의 법칙을 이용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들 사이의 힘을 계산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자들이 잔뜩 모여 있는 물질에서는 모종의 이유로 이런 원격 상호작용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특히 고체에서는 내 바로 옆에 있는 원자 혹은 그것보다 한 다리 더 건넌 원자와의 상호작용이 가장 중요하다.


고체 안에서 원자는 바로 옆에 있는 녀석과만 상호작용 할 수 있지만, 이 단거리 상호작용은 물질 전체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 이 상호작용을 통해 물질 전체의 원자가 한 방향으로 정렬될 수 있는 것이다. 1023개 수준의 원자가 동시에 정렬되는 이 현상은 그저 놀랍다고 밖에 할 수 없다. 우리 인간들처럼 모든 원자가 SNS를 통해서 소통하는 것도 아니고 중앙에서 모든 원자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 모든 것이 귓속말의 힘이다.


짝이 없는 전자


개인이 없다면 단체도 없다. 그러니 원자 자석이 한 방향으로 정렬되거나, 지그재그 형태로 정렬되는 등 단체 행동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일단 개인에 해당하는 원자 자석이 필요하다. 원자 자석을 찾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다. 따로 떨어져 있는 원자만을 본다면 원자 자석이 많지만, 대부분의 물질은 여러 원자가 결합을 이루며 화합물을 만든다. 이렇게 원자들이 화합물을 이루면 전자들이 둘씩 짝을 지어 원자 자석으로서 역할을 할 수 없게 된다. 자세한 예는 지난 글에서 다루었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결론적으로 원자 자석을 품고 있는 물질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며, 따라서 우리 주변에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물질은 대부분 자성을 갖지 않는 물질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물질이 자기적 성질을 가질 수 있을까?


자성을 갖는 물질에는 여러 종류가 있지만, 여기에서 다룰 대표적인 물질 중 하나로는 전이 금속 화합물이 있다. 여기에서 전이 금속은 주기율표에서 특정 위치를 차지하는 원소들이다. 위 그림에 있는 주기율표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다양한 원소 기호들이 적혀있는 이 도표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원소를 적어놓은 표이다. 나는 이 표를 보면 독일이 고향인 닥스훈트라는 개가 생각난다. 이 개는 허리가 특히 길어서 소시지 개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동네를 산책하다 보면 정말로 독일 사람들이 닥스훈트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기율표를 보면 오른편에는 강아지의 머리가, 왼편에는 짧은 꼬리가, 그리고 가운데에는 기다란 허리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귀여운 체형에 빗대자면 전이 금속은 허리에 해당하는 곳에 있다.


특히 흥미로운 자성을 보이는 것은 허리에 해당하는 부분에서도 가장 위에 있는 닥스훈트의 등 쪽에 있는 원소들이다. 이 원소들을 4주기 전이 금속이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 Fe, 니켈 Ni, 구리 Cu, 크롬 Cr, 망간 Mn, 코발트 Co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리고 이 4주기 전이 금속들이 산소 O, 황 S, 불소 F, 염소 Cl 등의 원소와 결합해서 만들어진 전이 금속 화합물에서는 전이 금속 원자들에 짝을 짓지 못한 전자들이 있기에 이 원자들은 지난 글에 소개한 원자 자석으로 행동한다.


전이 금속 화합물의 대표적인 예로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자석인 자철석 (Fe3O4)이 있다. 자철석 외에도 많이 연구된 물질로는 산화니켈 (NiO), 산화 망간 (MnO), 산화 크롬 (CrO2) 등이 있는데, 이 모든 물질에서 전이 금속 원소들은 모두 짝을 짓지 못한 전자들이 있어 원자 자석으로 행동할 수 있다.


원자 자석의 귓속말 


전이 금속 화합물에서 원자 자석들이 소통하는 방식을 생각해보자. 우선은 한 자석이 다른 자석과 상호작용 할 수 있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은 자기장을 통해서이다. 자석 주위에 철가루를 뿌리면 그 주위에 철가루가 자기장을 따라서 배열된다. 보이지는 않지만 철가루는 자석의 자기장에 의해 원격 힘을 받기 때문이다. 원자 자석도 이처럼 주변에 있는 원자 자석들과 자기장을 통해서 상호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 크기를 계산해 보면 너무 작아서 실제 물질의 성질을 설명할 때에는 쓸모가 없다. 우리는 더 강력한 원자 자석 간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 


원자 자석 간의 상호작용은 고전적인 자기력보다는 원자 사이를 움직이는 혹은 가상의 움직임을 갖는 전자에 의해 매개된다. 가상의 움직임이라니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좀 더 자세한 얘기는 다음 편에서 하도록 하겠다. 물리학자들은 원자 자석 사이에서 전자가 하는 일을 뭉뚱그려서 교환 상호작용 (exchange interaction) 이라 부른다. 그리고 교환 상호작용은 전자의 움직임을 동반하기 때문에 전자가 자유롭지 못한 고체에서는 아주 짧은 거리에서만 유효하다.


어느 정도로 짧은 거리냐면 보통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원자 자석과 이야기하는 것이 한계이다. 그렇기에 교환 상호작용은 마치 귓속말처럼 바로 옆에 있는 녀석과 공유하는 것이 전부이다. 그렇다면 이 귓속말을 이용해서 모든 원자 자석이 한쪽으로 정렬된 강력한 강자성체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너와 내가 같은 방향을 가리키자’라는 합의면 충분하다. 중앙에서 제어하지 않아도 바로 옆에 있는 원자와만 같은 방향을 갖는다면 물질 전체에 있는 수많은 원자 자석이 모두 같은 방향으로 정렬될 수 있다.


위의 그림처럼 원자 자석이 위아래를 반복하며 정렬되는 반강자성체의 경우는 ‘너와 내가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자’라는 귓속말이면 된다. 이렇게 되면 물질 전체의 자기 모멘트의 합은 0인 상태의 반강자성체가 된다. 그리고 딱히 서로 귓속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 물질은 자기 정렬이 되지 않은 상자성체 상태가 된다.


그러면 한 가지의 의문이 남는다. 원자 자석 간의 이런 합의는 어떻게 결정이 되는 것일까? 왜 어떤 물질에서는 원자 자석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로 귓속말을 하고, 어떤 물질에서는 딱히 서로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일까?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전자의 행동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히 전자의 고전적인 움직임이 아니라 양자 역학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다음 글에서는 전자의 행동에 기반해서 원자 자석 사이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더욱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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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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