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대전 대덕연구단지 어느 연구기관에서 글쓰기 워크숍을 진행한 적이 있다. ‘연구원을 위한 미디어 트레이닝’이란 타이틀이었다. 워크숍에 참여하는 연구원들에게 자신의 연구 분야를 주제로 A4 용지 두 장 분량의 아티클을 사전에 제출하게 했다. 워크숍은 연구원들이 미리 제출한 글을 차례로 발표하고 나와 다른 참석자의 코멘트를 듣는 방식이었다.
첫 번째 글부터 꽉 막혔다. ‘통신용 주파수 대역’에 대한 글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평소에 과학책을 즐겨 읽고 어지간한 내용은 검색의 도움을 받으면 어렵지 않게 이해하는 정도의 과학지식은 갖췄다고 자부하는 나였지만 부분으로서도, 전체로서도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어떤 메시지를 주려고 하는지 요량이 서지 않았다.
이 글을 이해하지 않고는 워크숍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이럴 때 방법은 하나였다. 내가 글쓴이에게 모든 의문점을 하나하나 아이처럼 해맑게 묻는 것이다. 질문을 받은 연구원은 처음엔 당황한 표정이더니 이내 평정을 찾고 자신이 글 속에서 그려내고 싶은 바를 장황하게 설명했다. 그 설명을 들은 나는 “그렇다면 이러저러한 내용으로 쓰고 싶었겠군요.”, 그의 말을 간추린 글의 형태로 되돌려줬다. “맞아요. 그렇게 쓰고 싶었는데…” 연구원은 자신의 마음을 내가 알아맞힌 것처럼 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쓰기의 영역으로 본다면 대부분 과학자는 일반적인 사람들보다 어느 측면은 절대 유리하고 어느 측면은 절대 불리하다. 과학자마다 제가끔 글로 풀어낼 확실한 분야와 콘텐츠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점은 유리하다. 그러나 흔히 ‘peer’라 부르는 동료 연구 집단 밖에까지 그 내용을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어내기엔 너무 지난한 일이기 때문에 이 점은 불리하다.
오늘도 많은 과학자가 이 딜레마 속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크게 세 가지 점을 강조하고 싶다. 독자 중심, 표현 전략, 구성이 그것이다.
첫째, 독자 중심이다. 글을 써본 경험이 많지 않은 과학자가 독자 중심의 관점을 확고하게 갖는 경우는 드물다. 과학적 연구 성과는 동료 과학자, 학계 권위자, 저널 등 소수의 평가만 받아도 그 가치와 의미가 인정된다. 굳이 많은 사람의 공감과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 성과 자체가 중요하지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해선 무신경하거나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거나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연구 성과일수록 그런 경향은 더욱 강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연구는 과연 앞으로도 지속 가능할까? 최근의 연구는 갈수록 다양한 인력과 막대한 재원을 끌어들여야 착수 자체가 가능하다. 정부와 기업의 R&D 예산을 지원받아야 하고 우수한 실력의 연구자를 파트너로 맞아야 한다. 동료 연구자를 끌어들이는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자신의 연구 작업을 스페셜리스트가 아닌 제너럴리스트, 즉 지원 여부를 판단하는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해야 하는 과제가 관건이다. 이들 연구 거버넌스를 설득하는 제안서를 작성하는 것과 한 편의 대중용 아티클을 쓰는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작업이라 할 수 있다.
독자 중심의 글쓰기를 하기 위해선 너무 당연하게도 독자를 만나는 일에 열정을 내야 한다. 다양한 매체와 SNS에 자신의 연구 분야에 대한 이런저런 글을 올리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 꼭 연구 분야에 국한해 글을 쓸 필요는 없다. 신변잡기에서부터 영화나 책 리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꾸준히 써서 올리면 독자의 반응을 만나게 된다. 갓 데뷔한 연예인들이 처음엔 어설퍼 보이지만 브라운관에 한 해 정도 얼굴을 비추다 보면 놀라우리만치 세련된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이를 ‘카메라 마사지’ 효과라 부르는데 연구자들도 부지런히 글을 써서 매체에 올리다 보면 그런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둘째, 표현 전략이다. 과학자, 기술자의 글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로우 머티리얼(raw matirial)’이다. 통계, 수식, 도표, 원리 등 ‘날 것’의 정보를 그대로 나열하는 방식의 글을 쓴다. 이를 읽는 독자는 난수표를 읽는 기분이 들 것이다. 독자는 한 편의 글을 읽으면서 내용의 덩어리와 연결 속에서 메시지와 맥락을 찾아내려고 애쓴다. 그러나 로우 머티리얼의 조각들은 너무 생소할 뿐만 아니라 연결된 의미를 찾아내기엔 지나치게 분절적이다.
아마도 동료 연구자와는 로우 머티리얼만으로도 어렵지 않게 소통했을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일반 독자는 동료 연구자만큼 배경지식이나 맥락적 이해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이렇게 ‘내가 아는 만큼 상대도 알 것’이라는 ‘지식의 저주’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분야가 바로 과학계가 아닌가 싶다. 어느 대기업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엔지니어들끼리는 코딩만으로도 아주 수월하게 소통이 되는데 임원이나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없다. 결국 중간 간부들이 통역을 거쳐야만 정상적인 의사결정이 가능하다.
연구자는 자신이 글 속에서 전하려는 주제가 무엇인지,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더 많은 모색이 필요하다. 주제는 논리적 구조를 통해 드러난다. 논리적 구조는 복잡하게 설명하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간명하게 말하면 글을 통해 전하려고 하는 용건(주장, 결론)과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나눈다. 용건은 독자의 판단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려는 내용이다. 근거는 독자가 용건을 공감하고 동의하도록 만드는 다양한 내용들이다. 실험 결과 등 경험, 사실, 사례, 통계, 인용, 비유 등이 거기에 해당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할수록 용건을 설득하는 근거의 힘은 세진다.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는 “Show, Don`t Tell”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글을 쓸 때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는 말이다. 독자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져야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추상적인 의견보다는 경험, 사례, 통계 등 구체적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 보편적인 내용일지라도 개별적 케이스로 예시를 들어야 한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논리성을 갖추면서 부분적으로 수용성을 높이는 것이 표현 전략의 요체다.
셋째, 구성이다. 앞서 강조한 글의 요점은 목적과 취지에 맞게 내용을 선택하고 배열하는 것이다. 이 선택과 배열의 전략을 합쳐놓은 것이 구성이다. 어떻게 제목을 달 것인지, 어떻게 글을 시작하고 어떻게 중간을 이어가고 어떻게 마무리 할 것인지 다양한 구성 전략을 알아보자.
먼저 제목이다. 우리는 신문 기사를 보거나 책을 구매할 때 제목에 따라 결정한다. 이렇게 제목은 이 글을 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좌우한다.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제목의 최고 조건이다. 제목의 전략은 두 가지다. 광고 카피 같은 표현, 이를테면 비유적 표현을 쓰거나 말의 라임과 리듬을 살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독자 입장에서 어떤 의문점에서 이 글이 비롯됐는지, 독자에게 어떤 생각의 변화를 주려고 하는지 등 내용의 핵심을 요약해 제목을 표현할 수 있다.
시작 부분도 제목과 마찬가지로 독자의 관심과 흥미를 불러일으켜야 한다. 시작은 독자에게 강한 임팩트를 느낄 수 있는 내용이어야 한다. 신문을 볼 때 어떤 기사는 끝까지 읽고 어떤 기사는 읽다가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있다. 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 바로 임팩트다.
독자가 중요하거나 필요하다고 판단할 내용, 혹은 독자의 흥미와 관심을 끌어낼 내용이 시작으로 적절하다. 독자가 생소하게 느끼는 주제, 개념, 사실이라면 이것이 왜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먼저 강조하는 전자가 좋다. 독자가 익숙한 주제, 개념, 사실이라면 독자가 이미 알고 있어도 더 흥미롭고 관심이 가는 사실이 더 있다는 점을 부각하는 후자가 좋다.
중간 부분에선 시작에서 제기했던 관심과 흥미에 합당한 이유와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글의 신뢰성, 공감과 동의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중간은 대략 서너 개의 내용 단락으로 나눈다. 경험은 진정성을 높인다. 사실, 사례는 공감도를, 비유는 수용성을 높인다. 인용은 내용의 권위를, 논리 설명 통계 숫자는 신뢰성을 높인다. 글의 목적과 취지, 시작의 특성에 맞게 중간의 요소를 선택할 수 있다.
마무리 부분은 독자에게 생각의 변화, 행동의 변화를 줄 수 있는 메시지로 끝내는 것이 좋다. 제목, 시작, 중간, 마무리는 스키 점프와 비슷하다. 출발 신호가 울리면 스키는 급경사면을 따라 쏜살같이 활강한다. 순식간에 도약대를 통과한다. 여기가 제목과 시작이다. 도약대를 통과해 공중으로 날아올라 활공하는 것이 중간이다. 두 발의 스키 날이 눈밭에 닿으며 부드럽게 미끄러진다. 이 착지의 순간은 전광석화처럼 짧지만 가장 중요하다. 이 착지가 바로 마무리다. 착지를 잘해야 좋은 점수를 받는 것처럼 마무리를 잘해야 좋은 글이 된다. 독자에게 좋은 글로 기억된다. 마무리에서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한마디를 던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메시지다.
백승권 : ㈜커뮤니케이션컨설팅앤클리닉 대표, 글쓰기 강사, tvN ‘유퀴즈온더블럭’ 문서의 신 출연, 전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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