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박해울 작가와 유토피아의 이면

2024년 9월 통권 228호


박해울 작가의 첫 단편집 『요람 행성』은 사실 ‘죽음과 멸망 단편집’이라 해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표제작 「요람 행성」부터 마지막 작품인 「지구의 날」까지 아홉 편 모두 기후 위기로 인한 지구의 죽음과 인류의 멸망부터 개인의 멸망이나 죽음까지 여러 규모와 여러 관점에서 종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멸망과 종말이 다가오기 때문에 국가나 행성 단위에서 사람들은 생존의 희망에 절박하게 매달린다. 혹은 과학과 기술의 이름으로 전 행성적, 전 인류적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을 듯한 환상에 스스로 매료되기도 한다. 「요람 행성」 도입부의 묘사는 작품집 안의 모든 세계 속에서 위기에 처한 사회와 국가가 일반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유혹적인 희망, 유토피아적 허상의 매혹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살아 있는 생명이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은 한동안 넋을 놓고 볼 만큼 아름다웠다. 이곳이 약속의 땅처럼 여겨졌다. 지구 이후에 인류가 살아가야 할 이곳, 요람 행성이라는 것을 의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는 동생과 딸이 구김 없는 하얀 옷을 입고 초록 들판에서 춤을 추는 상상을 했다. (박해울, 「요람 행성」, 『요람 행성』 17-18쪽)


특이한 점은 단편집 『요람 행성』에 실린 작품 중에 새롭고 완벽한 세계의 허상을 깨는 이야기뿐 아니라 그러한 허상을 제시하는 사람, 완벽해 보이는 인물, 성자나 심지어 신의 이면을 발견하는 이야기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겉보기에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인물은 꼭 종교적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 과학자일 수도 있고 (「지구의 날」), 과학기술의 힘을 빌어 젊은이의 몸을 뒤집어쓴 범죄자 일당일 수도 있다 (「토르말린 클럽」).

그리고 이렇게 완벽한 세상과 완벽한 인물의 이면에 대한 폭로는 제 3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대상 수상작 『기파』의 중심 내용과도 연결되므로 박해울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미 한참 전에 2020년에도 크로스로드에 『기파』를 찬양하는 리뷰를 쓴 적이 있다. 그렇다. 나는 박해울 작가를 몹시 좋아하는 열혈 팬이다. 혹시라도 아직까지 『기파』를 읽지 않으신 분들은 어서 빨리 읽으시기 바란다. 아직 안 읽으신 독자를 위해서 『기파』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고 작품에 제시된 인공적인 유토피아인 최고급 우주 유람선 ‘오르카’ 호의 광고문구만 보여드리면 아래와 같다.


인류 최고의 과학 시설을 즐기세요.

그리고 사람의 온기를 느끼세요.

완벽한 인간 승무원이 당신의 여행을 책임집니다.

(박해울, 『기파』 15쪽)


물론 오르카 호는 소행성을 맞닥뜨려 파괴되고, 안에 타고 있던 사회 최상층의 부유한 고객들은 부상과 질병의 아수라장 속에서 조난당하고 만다. 이들을 구조하는 ‘오르카 호의 성자’ 기파는 사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성자가 아니라 고뇌하는 실존적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그의 정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밝혀진다. 

이러한 전반적인 특징들은 『요람 행성』에 수록된 「안개 숲 순례자」나 「수호성자의 몰락」 등 여러 작품에 유사하게 나타난다. 「안개 숲 순례자」에서 주인공 노이는 모도 신에 매료되며, 모도 교의 경전에 “세계가 어떻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사람이 왜 태어나서 죽는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쓰여 있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제로’와 함께 여행하는 과정에서 노이는 모도 교의 실체는 물론 신으로 추앙받던 ‘모도’의 정체까지 발견하게 된다. 

「수호성자의 몰락」에서 작품 속 세계를 지배하는 로아나 교는 갑자기 나타나 죽음과 질병을 가져오는 ‘틈’의 존재를 해석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이며 주인공 니나 하스밀로는 ‘틈병에 걸렸으나 간절한 뉘우침과 기도와 찬양으로 속죄하면 다시 신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종교적 가치관을 정립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니나는 삶의 여러 경험을 통해 거대한 권력을 누리는 이익집단이 되어버린 로아나 교가 왜곡하는 진실을 차근차근 발견하고 자신이 알아낸 사실들을 글로 써서 남긴다.


나는 이곳에 붙어 있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악마라고 규정당한 수많은 자들에게 가해지는 폭행을 묵인했음을 고백한다. 그들을 외면한 대가로 지금까지 사제의 신분으로 살아왔다. [...]

나는 이 순간을 위해 살아왔을지도 모른다. 나는 로아나 신을 배반하고 있다. 그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박해울, 「수호성자의 몰락」, 『요람 행성』, 286쪽)


이 때문에 니나는 이후 성녀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악마와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으며 로아나 교의 교리에서 지워진다. 위에 언급한 「안개 숲 순례자」에서 주인공 노이가 사는 세상에서 신으로 추앙받던 모도는 죽는다. 신만 죽는 건 아니다. 「요람 행성」에서 테라포밍이라는 유토피아의 허상을 깨달은 리진은 선동과 거짓으로 뒤덮인 폭력적 가짜 유토피아에 저항하며 자신을 희생한다. 「지구의 날」에서 우주 개발에 앞장선 전설적인 과학자 마틴 덴버를 존경하던 주인공 젠가는 핍박받는 동물을 해방시켜준 뒤 모든 신념을 잃고 해고는 물론 ‘조용히 입막음’까지 당할 운명에 처한다. 

다시 말해 박해울의 여러 작품에서 위기에 처한 세상에 진실을 알리려는 인물들은 많은 경우 죽거나 파멸한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유지를 물려받은 후속 세대의 인물들이 입증된 사실과 현실적인 계획에 기반을 둔, 불완전하지만 진정한 유토피아를 향해 나아간다. 


또한 틈을 닫는다 해도 지상 낙원이 도래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틈이 닫히거나 말거나 지상의 분쟁과 범죄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틈을 닫기로 했다. 

(박해울, 「수호성자의 몰락」, 『요람 행성』, 309쪽)


서사의 구조라는 측면에서 박해울 작품의 이러한 특성은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말하는 유토피아와 닮아있다. 유대교 신비주의에서 지상낙원은 세상의 종말과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데, ‘종말’은 세계의 파국이나 인류의 죽음 등 물리적인 의미뿐 아니라 도덕적인 파멸이나 질병, 재난 등의 위기도 포함한다. 이렇게 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한 세상에 종말을 알리는 작은 예언자가 등장하는데, 작은 예언자는 재난과 위기의 상황에서 진실을 알리기만 하고 죽는다. 그리고 그 뒤에 진짜 구세주가 나타나서 종말의 끝에 낙원을 건설한다고 한다. 주인공이 둘이 나오니까 대표적으로 유대교 신비주의를 예로 들었는데 사실 이런 서사 구조는 주인공 1과 그 옆의 주인공 2급 조역이 같이 붙어 다니는 헐리우드 영화부터 심지어 소련 시절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설까지 여러 영웅담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방식이다. 

박해울의 여러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진실의 추구이다. 허구적이고 대부분 종교적인 서사의 후광을 입어 완벽하고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다운 듯 보이는 거짓 유토피아는 위기에 처한 세상을 속이는 거짓 선동일 뿐이다. 서사 속 서사의 액자형 주인공은 이러한 거짓을 발견하고 저항하며 분투하다 희생된다. 이러한 액자형 주인공의 유지를 이어받는 제 2의 주인공은 「요람 행성」처럼 주인공의 딸일 수도 있고 「지구의 날」처럼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첫 번째 주인공이 가짜 유토피아의 진실을 밝히고 희생되면 두 번째 주인공이 그 뒤를 이어 진짜 유토피아를 향한 실질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첫 번째 주인공이 남긴 기록이나 증언은 두 번째 주인공이 독자와 함께 작품 속 세상의 진실이라는 목적지를 가리키는 중요한 지표 혹은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장치를 활용하면서 박해울은 여러 작품에서 과거의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 혹은 추리물의 형식을 응용하며 이러한 장르적 구조는 작품에 흡인력을 더하는 굉장한 매력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계의 진실이란 바로 인간은 다면적인 존재이며 세상은 복잡다단하다는 것이다. 가짜 유토피아의 선동은 언제나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을 칼같이 나누고 그 사이의 회색지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주인공은 그 이분법 뒷면에서 자기 자신의 약함과 불완전함을 포함하여 세상의 여러 들쑥날쑥하고 불균일한 표면과 그 표면에 반사되는 수많은 색깔들을 보게 된다. 그 모든 다양함, 거칠거칠함, 울퉁불퉁함, 북슬북슬함이 다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박해울 작가의 진짜 유토피아다. 혹은 그 모든 다채로움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 불완전한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주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위해 분투한 첫 번째 주인공의 희생도, 매끄럽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세상을 받아들이는 두 번째 주인공의 노력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때, 수현은 똑똑히 들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울음과 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그는 중얼거렸다. 

“어떻게 헛된 일을 했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박해울, 「요람 행성」, 『요람 행성』,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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