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도도나무와 사라지는 돌들 < 2부>

2024년 4월 통권 223호

(일러스트레이터 : 박재령)


<2부>


다음 날도 여운은 테라스에 놓인 의자에 앉아 돌을 닦았다.

 "내가 듣기로는 아르카디인에게 '만게'가 어떤 징표라던데, 다들 어디 가고 다른 사람들이 닦고 있는 거야?"

 전날, 말로린은 아르카디인의 언어에는 존댓말이 없다고 했다. 그러니 반말을 섞어 쓰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했다. 여운은 이참에 말을 놓는 편이 낫겠다고 했다.

 "일종의 외주야."

 말로린은 잠시 말을 멈추고서 생각했다. 이 문화의 긴 역사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가름하였다. 

 "돌을 닦는 문화는 우리 종족에게는 통과의례 같은 걸 상징하는 건데, 만게가 깨어날 때까지 반려종과 함께 직접 추위와 고통을 겪어봐야 어른이 된다는 의식 같은 거야. 그 뜻을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다른 사람한테 대신 맡기면 안 되지만, 모두가 책임감이 투철하진 않으니까."

 "그리고 너는 본인의 돌을 직접 닦는 책임감을 보이는 중이고?"

 여운이 말로린을 향해 웃어 보였다. 말로린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그저 따라 웃었다.

 해가 그들 머리 위로 떠올랐다. 그들의 그림자가 짧아지다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햇빛에 데워진 우주복이 쉭쉭 소리를 냈다.


 "어제 했던 이야기 말이야."

 우주복이 잠잠해지자 여운이 다시 말했다. 

 "어제는 너무 많이 말했는걸?"

 "만게 말고 사라졌다는 종들.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었어."

 여운은 지구에서 사라진 많은 종들을 열거했다. 말로린은 깃털 달린 뱀이 더위를 못 이기고 어떻게 사라졌는지 말해주었다.

 "지구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있었어. 도도라는 새였는데, 날지도 못하고 도망도 가지 않아서 사람들이 하나씩 잡다가 멸종됐어."

 "왜 사람들이 그 새를 잡았는데? 배가 고파서?"

 여운은 흥미롭게 듣는 말로린을 보며 셰퍼와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셰퍼를 바라보던 내 눈빛이 저랬을까, 하고 벌써 머나먼 과거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러나 셰퍼와는 달리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고상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할 수도, 상대방에게 사소한 호의도 베풀 수도 없었다. 앞으로 나아질 거라는 작은 기대를 간직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과거의 실수와 잘못들이 앗아가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그는 희망에서 멀리 떨어져 문제투성이의 현재에 무력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재미로."

 상대방이 실망할 것을 알면서도 그는 사실대로 말했다. 

 "재미로?"

 말로린의 눈빛이 바뀌었다는 걸 그는 알아차렸다. 처음 만났던 때처럼 의심이 많은 눈빛이었다.

 "응. 재미로."

 그 이상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는 체념한 채 종족의 과오를 실토하였다.

 "나는 지구에서 태어나지 않았지만 이런 걸 항상 배워."

 오해를 풀고 싶었지만, 그는 과거에 벌어진 일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미 일어난 일을 받아들이고 반성하는 태도에서 변화는 일어난다고 오랫동안 배워왔으니까.

 말로린이 경계를 풀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가 그는 마저 말했다.

 "그리고 도도가 씨앗을 먹어야지만 발아하던 나무도 있었어. 그래서 이름이 도도나무야. 도도 가 멸종하면서 그 나무도 멸종할 뻔했지만, 다행히 다른 새가 대신 씨앗을 먹어서 발아시킬 수 있었어. 츠츠인이 대신 만게를 살려낸 것처럼 말이야."

 그는 조심스럽게 돌을 매만졌다. 마치 아기를 품은 사람처럼.

 "그 새는 씨앗을 품는 동안 고통스러웠을까?"

 말로린이 자신의 돌을 주의 깊게 바라보며 물었다.

  "글쎄, 새들만이 알고 있겠지."

  "이 돌도 우리의 마음을 알까?"

 말로린은 혼잣말처럼 나지막이 말했다. 마치 돌에도 귀가 있는 것처럼.

 둘은 한동안 말없이 아직 만게가 되지 않은 돌멩이를 쓰다듬기만 했다. 긴 침묵 끝에 여운이 말했다.

 "어쩐지 없어지고서야 관심이 생기는 것 같아."

 "그러게 말이야."

 잃어버린 것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왜 이렇게 외로운 마음이 드는지, 내 것이었던 적도 없고 내 것이 될 수도 없는 것에서 왜 이리 슬픈 감정이 배어 나오는지 둘은 알 길이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 대부분은 이쯤에서 무언가 알 것 같다는 표정을 짓곤 한다. 그렇지만 여운은 그 반응에 곧장 반박했다.

 "제가 도도나무를 품는 새처럼 되고 싶어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절반만 맞았어요. 그렇게 단순한 이유였다면 제가 이리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겠죠."

 의구심을 드러내는 상대방의 시선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그는 길 잃은 이야기를 다잡으며 말했다.

 "제가 부이를 알아본 건 말로린과 그런 내용의 대화를 주고받을 때쯤이었어요. 아니, 어쩌면 전후 관계가 뒤바뀌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여운은 돌을 닦는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착륙장에서부터 자신을 안내했던 츠츠인을 발견했다. 그에게 다가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안내해주셨던 분이죠? 저는 여운입니다. 덕분에 저도 여기서 일하게 됐어요. 반갑습니다."

 츠츠인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응답했다. 

 "부이. (여운은 이렇게 들었으나 어쩌면 '부히'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운은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상대방은 그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그게 저 사람의 이름이야."

 말로린이 끼어들었다. 츠츠인이 말로린을 쳐다보았다. 말로린과 부이는 츠츠인의 언어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너랑 대화하면 안 된대. 그게 규정이래. 일에만 집중해야 한대."

 여운은 테라스에 있는 다른 츠츠인들을 쳐다보았다. 애써 모른 척하며 고개 숙인 채 돌을 닦고 있었지만, 그들 모두가 여운의 말과 행동을 예의 주시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건물 밖에서 본 천막 속 시선처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전날부터 츠츠인들 대다수가 그를 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친절한 소장만 빼고.


 "다행이야. 너랑은 마음껏 말할 수 있어서."

 여운이 말로린에게 말했다.

 "나는 츠츠인이 아니니까. 나는 그저 내 돌을 닦으러 왔을 뿐이니까 상관없는 일이지."

 그때 여운은 그 말이 그저 돈을 벌려고 일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견해차 정도를 드러낼 뿐이라고 생각했다.


*


 여운은 여느 때처럼 바구니에서 자신의 돌을 꺼내 들었다. 손에 잡히는 감각만으로 단숨에 찾아냈다. 그는 이제 자신의 돌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돌의 무게와 손에 닿는 질감, 표면의 명암처럼 세세한 부분까지도 지각할 수 있었다. 마스크를 끼지 않았더라면 냄새까지도 구별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저 잿빛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다소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분별할 수 있어서 마치 어떤 무늬를 보는 것처럼 돌 위에서 여러 가지 모양을 찾아낼 수 있었다. 돌을 닦다 말고 물끄러미 바라보면 그 위로 물방울이 보이기도 하고, 때때로 도도나무처럼 보이는 가지들이 뻗어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도도의 모습도 숨어있을 수 있겠다고 여운은 생각했다.

 한동안 자주 방문하던 소장도 이제 뜸하게 나타났다. 그 때문인지 테라스 분위기는 예전보다 가벼워진 것 같았다. 츠츠인들은 서로 조금씩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여운은 자신의 돌을 말로린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좀 커진 것 같지 않아? 이렇게 만게가 깨어나는 건가?"

 말로린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

 "만게는 커지지 않아."

 "그러면 만게가 깨어났을 때 어떻게 변하는데?"

 "무늬가 생겨. 닦은 사람만 알아볼 수 있는 무늬가."

 그때부터 여운은 자주 돌을 들어 햇빛에 비춰보았다. 언뜻 무늬가 생겨난 것 같다가도 그것이 진짜인지, 마음의 반영에 불과한지 알 수 없었다. 만게가 깨어났을 때 생겨나는 무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는 말로린의 말에도 그는 자꾸만 돌을 들여다보았다.


*


 그날은 평소와 다르게 테라스가 소란스러웠다. 여운이 테라스에 들어섰을 때도 츠츠인들의 대화가 끊이지 않았다. 고개만 숙이고 돌을 닦던 사람들이 그날따라 그를 빤히 쳐다보기까지 했다. 눈도 마주치지 않던 부이가 곁눈질로 그를 살펴보고는 다른 사람들과 소곤댔다. 말로린이 올 때까지 여운은 주눅이 든 채로 그들의 눈치를 살폈다.

 말로린은 오자마자 급변한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진상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츠츠인들과 간단한 대화를 나누고는 여운에게 돌아와 그 내용을 알려주었다.

 "돌이 사라졌대. 그리고 너를 의심하고 있어."

 비로소 츠츠인들의 시선이 이해됐다. 문득 여운은 천막 속에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이제 그들이 천막에서 나와 그에게 추궁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돌을 꽉 움켜쥐었다. 

 "나는 아무 잘못 없어." 

 당황한 그에게 말로린이 속삭였다.

 "만게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여태까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도 말을 아꼈는데, 이제는 확실해졌어. 너는 감찰관이 아니지?"

 멀뚱히 바라보기만 하는 여운의 반응에 말로린이 말을 이었다.

 "피크닉 행성에는 주기적으로 감찰관이 와. 돌을 맡긴 아르카디인들이 감시하려고 보낸 거야. 돌을 잘 닦고 있는지, 다른 문제는 없는지 확인하지. 정체를 숨긴 채로 말이야. 그러니까 저 사람들은 너를 감찰관이라고 의심하고 있어."

 이제야 여운은 소장의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한 태도, 자신을 멀리하는 원주민들의 행태가 이해됐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내가 일부러 이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나 나처럼 직접 돌을 닦겠다고 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 맡겨놓고 바로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까."

 "너는? 왜 나만 감찰관이야?"

 "처음에 소장은 나도 끄나풀인 줄 알고서 자꾸 의심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소장에게 말했어. 내가 아르카디인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미 감시하는 눈 하나가 더 생겼다는 뜻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감찰관이든 아니든 중요하지 않다고."

 여운은 말로린의 말을 듣고서 지금껏 당당하며 고상하다고 생각했던 아르카디인의 태도가 사실은 오만함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비로운 듯 보였으나 그 관대함은 권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매사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깔보며,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여운은 말로린을 경멸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말로린은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곧 소장이 올 거야. 그에게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말로린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소장이 나타났다. 소장은 다짜고짜 여운에게 말했다.

 "이런 식의 시험은 곤란합니다, 여운님."

 "뭔가 오해하고 계세요."

 여운은 말로린의 눈치를 살폈다.

 "저는 감찰관이 아니에요. 그저 일자리를 소개받았을 뿐이에요."

 그는 소장에게 셰퍼와의 첫 만남부터 털어놓기 시작했다.


 "셰퍼가 감찰관이었을까요?"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여운에게 셰퍼의 정체를 묻곤 했다.

 "글쎄요. 그 이후로 셰퍼를 만난 적이 없으니 직접 물어볼 수도 없네요.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호기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대를 향해 여운은 덧붙였다. 

 "만약 감찰관이었다면, 그는 두 번 시험을 한 셈이네요. 원주민들은 자신들이 감시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저 또한 그들한테 감시당하고 있었으니까요."


*


 전날의 소동 때문이었을까. 그날 여운은 테라스에 들어서기 전부터 이미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걸 눈치챘다. 직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원주민의 시선에서 적의를 보았다. 그 눈빛은 피크닉 행성으로 오기 전 그의 것과 닮아있었다. 마침내 그는 천막 속 사람들의 눈빛을 잊지 못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바구니에 들어있던 나머지 돌들까지 모두 사라졌다. 소장은 바구니 옆에 서서 여운에게 말했다.

 "망케를 찾아주실 수 있나요? 부탁입니다, 여운씨."

 여운은 자신의 돌이 사라진 걸 알고서 여태 일해서 번 돈까지 받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느꼈다. 그래서 왜 소장이 직접 돌을 찾으러 가지 않았는지 의심할 겨를도 없었다. 함께 눈밭을 걸어가며 말로린은 곧 '진짜' 감찰관이 올 예정이라 소장은 초조해진 거라고 알려주었다.


 이 부분에서, 최고조에 다다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던 상대방에게 여운은 찬물을 끼얹었다.

 "증거를 찾고 범인을 잡아서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기대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감찰관도 아니고 탐정도 아니었으니까요. 저는 그저 이방인이었어요. 이방인의 눈에는 모든 게 낯설게 보여서 눈에 띄는 단서를 찾을 수가 없는 법이죠. 반대로 원주민들, 제가 오기 전부터 돌을 닦던 사람들, 예년 겨울에도, 그 이전에도 그곳에 있던 사람들만이 금세 달라진 점을 찾을 수 있었어요. 말하자면, 그들은 언제나 증거를 모으는 중이었어요. 이제 용의자 중 한 명이 제외되었으니 그들은 금방 범인을 알 수 있었죠."


 소장은 부이를 향해 말했다.

 "이 사람이 킨치 (여운은 이렇게 들었으나 어쩌면 그의 진짜 이름은 ‘킹치’였을지도 모르겠다)를 찾도록 도와줄 겁니다."

 부이는 잔뜩 위축된 채로 여운에게 다가와 말했다.

 "킨치네 집부터 찾아갈 생각입니다. 이리 오세요."

 옆에 있던 말로린이 말했다.

 "나도 따라가겠어요. 어차피 나는 여기서 일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말로린은 소장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여운과 부이를 따라갔다.

 

 건물 출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가며 부이가 말했다.

 "나도 이런 짓을 저지른 킨치가 밉지만, 만약 내 망케를 빼앗겼다면 나도 똑같이 했을 거예요.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당혹감을 이겨낼 분노가 필요할 테니까요."


 건물 밖으로 나온 그들은 눈밭을 걷기 시작했다. 건물 맞은편에는 여전히 천막이 처져 있었다. 여운은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며 걸었다.

 부이가 마저 말했다.

 "외부인이 보기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모두 다 안락하게 지내지만은 않는다는 걸 아셨으면 해요. 모두 다 굴속에서 따뜻하게 지낼 수 없다는 말이에요. 누군가는 그 굴을 파냈을 테고, 굴 바깥에서 헐벗고 자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부이가 여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지구인이라고 했죠? 지구인은 이렇게 긴 겨울을 몇 번 겪을 수 있나요? 우리는 기껏해봐야 두세 번 겪을 뿐이에요. 그러니까 돌을 닦는 계절이 돌아오면 제 인생의 절반이 가 있는 겁니다."

 여운은 묵묵히 걸었다. 무슨 말을 해도 그에게 실례가 될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눈길 끝에 허술하게 지은 돌집이 보였다. 부이는 잠시 멈춰 서서 여운과 말로린에게 말했다.

 "그러니 킨치를 너무 미워하지 마요. 그저 안락함을, 그리고 삶의 절반을 지키고 싶을 뿐이었는데, 그걸 배반당했으니까요."


 그들을 발견한 킨치가 츠츠인의 언어로 소리쳤다. 나중에 말로린이 얘기하기로는, 대강 이런 뜻이었다. (앞으로 나오는 대화의 내용 모두는 말로린이 기억을 토대로 나중에야 여운에게 전해준 것이다.)

 "너도 감찰관 놈한테 붙어먹기로 한 거야? 저놈을 데려왔을 때부터 알아봤어. 애초에 그럴 작정이었던 거야. 그렇지?"

 그 말에 부이도 킨치를 향해 소리쳤다. 무언가를 부정하는 듯한 태도로 응답했다. 아마도 이 상황을 해명하고 있으리라, 여운은 생각했다. 

 말로린도 거들었다.

 "모두 오해예요. 소장이 잘못 알고 있었어요. 이 사람은 감찰관이 아니에요."

 "역시 소장이 보낸 거였어. 저놈한테 내 망케를 줘야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인제 와서 딴소리야."

 그럼에도 킨치는 화가 식지 않았는지 계속해서 무어라 소리쳤다. 그 당시에 여운이 알아들을 수 있었던 건 중간중간 나오는 '망케'라는 단어뿐이었다.

 둘을 상대하는 게 힘에 부쳤는지 킨치의 어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는 포기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모든 걸 앗아갔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여운은 킨치가 차분해진 틈을 타서 그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여운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킨치를 달랠 생각이었으나, 상대방에게는 권력자의 위협으로 느껴졌다. 킨치는 옆에 있던 막대기 같은 도구를 여운에게 던졌다. 갑자기 날아든 물건이 여운의 손등에 맞았다. 막대 끝에 달린 칼날이 두꺼운 우주복을 찢고 상처를 냈다. 여운은 피가 나는 손을 움켜쥐고 주저앉아서 무어라 중얼거렸다. 후에 말로린이 전해주길, 그가 아르카디인의 언어가 아닌 낯선 언어로 말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도 모르게 지구인의 언어로 말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로린은 추측했다. (그래서 오히려 진심이 느껴졌다고, 말로린은 말했다.)

 당황한 킨치도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모두가 침묵했고, 여운은 고통도 잊은 채 상황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말로린이 정적을 깨고 말했다.

 "내 거를 가지세요. 차라리 제 돌을 닦아요. 제가 맡길게요."

 킨치는 말로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희 종족은 언제나 그런 식이야. 뭐라도 손에 쥐여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잖아. 너네는 이해 못 해. 내가 닦던 망케가 아니면 소용이 없어. 다른 건 나한테 그냥 돌멩이에 불과해."

 말로린과 여운은 당황하여 킨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의 옆으로 온 부이가 그를 달랬다.

 "이제 그만하자고. 저 사람들한테 잘못이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우리 모두 그저 오해를 풀기 위해 찾아왔을 뿐이야. 그러니까 저 사람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야."

 킨치는 울먹이며 말했다.

 "너는 알고 있잖아. 나는 이번 겨울을 통째로 잃었어."

 "알지. 하지만 이렇게 화풀이한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

 부이는 여운과 말로린을 돌아보며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

 "그래도 돌은 돌려줘. 네 말처럼 다른 건 돌멩이에 불과하잖아. 다른 사람의 망케까지 망칠 필요는 없잖아."

 킨치의 어깨가 여러 차례 들썩거렸다.

 "그건, 저기에 그대로 있어."

 킨치가 가리킨 방향에 불룩해진 자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여운과 말로린은 얼른 자루를 열어보았다. 사라진 돌들은 모두 거기 있었다. 부이는 여운과 말로린에게 돌아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들은 자루를 들고서 눈밭을 걸었다.


 테라스로 돌아가는 길에 여운은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는 킨치한테서 돌을 훔친 적이 없지만, 마치 훔친 것만 같았다. 정작 돌을 빼앗은 사람은 소장이었으나 그는 감찰관에게 잘 보여야만 했다. 그게 원주민 모두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죄를 저지른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힐 수는 없으나 희생양은 너무나 분명했다. 그리고 모두가 그를 모르는 체했다. 아르카디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돌을 맡기며 오히려 츠츠인의 경제를 돕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케를 살려낸 것처럼, 도태된 종족을 자신들의 손으로 살려냈다고 착각했다. 그러나 만케를 살려낸 건 아르카디인이 아니라 츠츠인 (이제 여운은 이 명칭에서 업신여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피크닉 행성의 원주민들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들만이 돌을 품어주었으니까.


 말로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까 나는 진심이었어. 나는 정말로 억울한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어. 나한테 소중한 것을 내주면서까지 말이야."

 여운은 아래만 보며 걸어갔다. 그는 도저히 천막 속 사람들을 볼 자신이 없었다. 


*


 여운이 손을 치료하는 동안 그를 대신해서 말로린이 돌을 닦아주었다. 그동안 얻은 임금의 일부는 킨치에게 주기로 여운은 소장과 합의하였다. 아르카디인을 태운 셔틀이 피크닉 행성을 몇 차례 오갔지만, 감찰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진짜 감찰관이 올 거라는 소문은 그 진원지조차 밝혀지지 않은 채 잊혔다. 어쩌면 그저 소장의 눈을 피하기 위한 말로린의 잔꾀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손이 다 나아서 다시 테라스로 나온 여운은 습관처럼 돌을 쓰다듬었다. 여운의 손길은 어느새 원주민의 그것과 비슷해져서 부드럽게, 아이를 달래듯이 돌을 어루만졌다.

 여운은 쥐고 있던 돌, 아니, 그와 킨치, 그리고 말로린의 '망케'를 바라보았다. 그는 거기서 미래를 보았다. 기나긴 겨울이 끝나면 돌 위로 선명하게 드러날 무늬가 보였다. 테라스에 비치는 햇살처럼 서서히 퍼져나가는 동심원들. 그 돌을 처음 손에 쥔 순간부터 되찾은 순간까지 여운의 손길이 빚어낸 세월의 자취. 그리고 그의 손이 닿기 전, 킨치의 정성 어린 손길이 새겨놓았을 선과 고리. 여운을 걱정하며 돌을 닦아낸 말로린의 흔적. 모든 시간이 무늬에 담겨 있었다. 운명처럼 벌어진 그 모든 것들을 품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부터 망케였다. 망케는 어느 시점에 깨어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뛰어넘어서 그들 앞에 놓여 있었다.

 문득 여운은 자기 가슴 속에도 비슷한 무늬가, 이를테면, 생장선 같은 것이 생겨났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선은 사라지지 않도록 아로새겨졌다. 그의 손등에 생긴 상처가 흉터로 남아 오랜 시간 이 일을 상기시키듯이.


*


 여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여운은 말을 마치고 상대방에게 묻곤 했다. 

 "그때 저는 그 일을 부끄럽게 느꼈을까요?"

 유실물 보관소는 고요했다.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 몇몇 손님들은 피크닉 행성과 그곳의 원주민에 대하여 더욱 많은 것을 알아보려 했다. 그러나 은하정거장에서 피크닉 행성으로 가는 셔틀이 더는 운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만게를 키우는 풍습 또한 이미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고, 그 사이 아르카디인은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낡은 문화의 자리를 새로운 것들로 채워 넣었다. 어떤 사람들은 어쩌면 여운이 이 모든 걸 지어냈을지도 모른다고, 빛바랜 이야기를 기막힌 농담처럼 꾸며내어 재밌게 들려주었을 뿐이라고 의심하였으나, 모두가 이 이야기를 잊지 못했다.

댓글 0
  • There is no comment.

댓글을 작성하기 위해 로그인을 해주세요

registrant
지동섭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