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 Street

복잡한 찌직찌직 전기 이야기

2021년 11월 통권 194호

한국과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 칠레. 뜨거운 여름에 크리스마스를 맞아, 그나마 선선해지는 시간에 맞춰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잔뜩 분위기를 잡고 식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별안간 집안이 조용해진다. 분위기를 한껏 흥겹게 해주던 음악 소리가 사라지고, 담장 너머 들려오던 이웃집의 시끌한 파티 음악도 일순간 음소거를 한 것처럼 사라졌다. 

“정전이다!”

전기가 끊기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채로운 일상이 순식간에 공백으로 비워지는 느낌이다. 흥겨운 크리스마스 파티도 전기의 허락이 필요하다. 먹고, 마시고, 이동하고, 우리가 하는 활동의 대부분이 전기로 지탱된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산소가 생명의 필수 요소라면 전기는 문명의 필요조건이다. 식탁에 장식으로 올려놨던 촛불 덕분에 다행히 식사를 마쳤다. 그러나 동네 정전을 넘어 도시 규모의 정전이 발생한다면, 그것은 촛불 몇 개로 수습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일은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 도시 규모, 국가 규모의 대정전은 실제로 지금도 지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사례는 2003년 미국 북동부에서 발생했다. 미국뿐만이 아니라 캐나다 남부지역에 걸쳐 대략 5천5백만 명이 피해를 봤고 산업과 경제에 큰 상처를 남겼다.

<2003년 대정전 발생 전 후의 밤 시간 위성사진>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거대 규모의 정전이 드물어서 대정전의 영향을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전기의 부재는 우리의 모든 일상을 뒤틀어 놓는다. 2003년 8월 14일의 뉴욕으로 돌아가 보자. 도시의 신호등이 켜지지 않아서 도로는 아수라장이다. 지하철이 다니지 않고, 시민들은 출퇴근 시간에 발이 묶였다. 대중교통이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차를 얻어 타려는 사람들과 신호등 없는 도로를 비집고 다니는 차들이 복잡하게 얽혔다.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네온사인을 기대했던 관광객들은 한여름 밤의 열기를 피해 에어컨이 작동하지 않는 호텔 객실에서 밖으로 나와 길바닥에서 잠을 청했다. 더 답답한 것은 상황이 언제 정상화될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나마 소통을 책임지던 휴대전화는 충전할 길이 막막하기 때문이다. 

휴대폰 배터리가 조금밖에 안 남으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배터리 방전 증후군(low battery anxiety)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우리 생활에 밀접한 물건일수록 전기가 없으면 불편해지고 불안해진다. 그런데 아예 도시에 전기가 나간다니! 휴대폰 방전은 보조배터리 하나만 갖고 다녀도 해결된다. 그럼, 대정전을 막으려면 아주 큰 보조배터리를 쓰면 되는 것 아닌가? 기술이 이렇게 발달했는데, 왜 아직도 대정전이 발생하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가지가 문제다. 전기는 물질이 아닌 에너지라는 것. 그리고 우리가 사용하는 전력망은 매우 복잡하다는 것.

보통 전기를 설명할 때 수돗물과 같이 파이프를 타고 공급되는 것에 많이 비유하곤 한다. 이러한 비유가 직관적으로 전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오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물은 물질이지만 전기는 에너지라는 점을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펌프로 물을 부어주다가 갑자기 고장이 나도 어느 정도 수도꼭지에서 물이 더 나오다 끊길 것이다. 수도관 속에는 아직 물이 남아있어서 그 물이 마저 비워질 때까지는 물이 쪼르륵 흐를 것이다. 그러나 전기는 다르다. 전기는 전선에 저장된 물질이 아니라, 전자들의 움직임으로 발생하는 에너지의 한 형태다. 우리가 콘센트를 꼽아서 전자기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발전기에서 방금 막 만들어낸 에너지가 지금 내 앞의 전자기기까지 전해져서 그 힘을 실시간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전기 공급이 차단되면 모든 전자기기는 일시에 셧다운된다.

이런 전기의 특성은 전력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필요한 전기는 실시간으로 만들어 공급해야 하는데, 통상 예상되는 소비량의 10% 정도를 초과 생산해서 셧다운을 방지하지만, 사용하지 못한 전기는 버려지고, 이 갭은 고스란히 매몰 비용이 되기 때문이다. 전기를 무작정 많이 생산할 수도, 딱 맞게 생산할 수도 없는 최적화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력망의 운영을 최적화하려면 두 가지를 잘 알아야 한다. 먼저 전력 수요량을 잘 예측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전력 수요는 시간과 날씨, 계절에 따라 큰 패턴을 그리며 달라지는데, 여기에 다양한 사회문화적 요인도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큰 축구 경기가 있을 때 TV를 켜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평소보다 전력 수요가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수요량을 더 잘 예측하려면, 다양한 정보를 종합적으로 사용해서 과거의 패턴을 기반으로 추산해야 한다. 이것이 최근 AI 등을 활용해 수요량을 예측하려는 연구들이 각광 받는 이유다.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전력망이 어떻게 움찔하는지 이해하는 것이다. 고양이도 아니고 전력망이 움찔한다? 물론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인데, 갑자기 손가락으로 찌르면 순간적으로 움츠러들거나 점프하는 등 예상할 수 없는 반응이 나오는 것처럼, 전력망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상 상황에 전력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갑자기 송전선을 끊을 수도 있고, 전선에 닿아 누전을 유발할 수도 있다. 발전소에 갑작스러운 기능 고장이 발생할 수도 있고, 거대한 공학 시스템인 전력망에 발생할 수 있는 돌발상황은 너무나도 많다. 실제로 이것이 2003년에 발생한 대정전의 이유 중 하나였다1)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전력망은 탄소중립을 위해 신재생에너지를 더 많이 도입하고 있으며, 전기를 만들고 사용하는 양상 자체도 굉장히 다양해지고 있다. 한마디로, 전력망이 너무나 복잡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위에서 언급한, 대정전이 발생하는 두 번째 이유다. 그래서 복잡한 전력망의 상호작용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갖가지 상황을 미리 대비하는 것은 안정적인 전력 시스템 운영에 필수적이다. 

복잡한 전력망을 연구하는데 네트워크 과학을 활용할 수 있다. 네트워크 과학은 복잡계 분석에 유용하게 쓰이는 접근법으로서, 연결 구조로 표현할 수 있는 대상에서 패턴을 분석하거나 동적 특성을 연구하는 등 최근 두뇌의 뉴런 기능 분석부터 DNA와 단백질의 생화학 작용, 사람 사이의 협력 관계, 논문 인용 관계 분석까지 매우 광범위하게 응용되고 있는 연구 분야다. 물론, 전력망의 안정성 연구에도 많이 활용되고 있다. 

네트워크 과학이 전력망 연구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송전선이 불시에 기능이 상실되는 상황을 다시 살펴보자2). 뜨거운 여름에 기온이 높아지면 에어컨 가동을 위한 전력 소비량이 증가하고, 이에 따라 송전량이 늘어난다. 전기가 송전될 때는 열로 손실되는 부분이 있는데, 송전 부하가 증가하면 더 많은 열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금속으로 된 송전선에 과도한 열이 발생하면 전선이 아래로 축 늘어지고, 이전까지는 닿지 않던 나뭇가지도 이제는 충분히 위협적인 높이의 방해물이 된다. 결국 나뭇가지로 인해 누전이 발생할 수도 있고 심지어 송전선이 끊어질 수도 있다. 갑자기 전기를 공급할 경로가 사라지는 것이다. 다행히 전력망의 연결구조는 (뿌리에서 나뭇잎까지 단 하나의 경로만 존재하는) 나무구조가 아니라, 다른 방법으로도 목적지에 찾아갈 대체 경로가 많은 그물망 연결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송전선이 하나쯤 사라져도 다른 송전선으로 우회해서 전기를 공급하는 것이 가능하고, 대게의 경우 전력망은 여전히 살아있을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재분배된 전력 흐름이 특정 송전선에 지나친 부하를 가하게 되면 새로운 문제가 시작된다. 해당 송전선을 과부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송전을 차단하게 되면, 다시 필요한 송전 수요가 우회하게 되고, 더 많은 송전 부하가 또 다른 송전선에 누적해서 가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송전망의 기능 상실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 점점 더 감당할 수 없이 단전 조치가 확산되고 광범위한 지역에 전기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이 연쇄 효과로 인한 대정전 메커니즘 중 하나다. 이런 연쇄효과는 전력망이 어떤 구조로 연결되어 있으며, 구성 요소들이 어떤 스케줄로 운영되고 있는지가 종합적으로 영향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네트워크 분석이 효과적인 분석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전력망의 네트워크 구조 위에서 일어나는 교류 전력망의 동역학 특성을 바탕으로 정격 주파수의 안정성을 해석할 이론적인 기틀을 제공할 수 있으며3), 취약 지역을 판별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를 네트워크 특성에 기반해서 제안할 수도 있다4)

전력망의 복잡성은 비단 구조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소규모 분산 전력 발전이 많아지고 신재생에너지가 도입되면서 불확실성이 전력망의 새로운 부담으로 떠오르고 있다. 전기차의 도입 등으로 부하의 규모가 커지며, 전력 소비 패턴 자체도 이전과 다르게 변하면서 전혀 다른 새로운 전력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네트워크 과학이 유용하기는 하지만, 당연히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미래 전력 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DC전력망과 같은 차세대 전력망의 구성과 운영을 고민해야하고, AI를 활용한 정보 분석도 병행되어야 한다. 전력 시스템은 물리적으로 국토 면적에 해당하는 범위에 퍼져 있는 거대 규모의 공학 시설이다. 이러한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운영하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의 장치와 분석 기법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러한 맥락에서 필자가 속해있는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도 안정적인 차세대 그리드의 구축과 운영, 제어 방안을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보고자 하는 고민 속에서 탄생했다. 

다시 정전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2003년 정전이 그렇게 큰 피해를 남겼다고 했지만, 영향을 받은 인구수 기준으로 두 배 규모의 피해를 준 대정전이 2019년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했으며, 네 배 가까이 되는 피해가 올해 (2021년 1월) 파키스탄에서 발생했다. 아직도 매해 한 번 꼴 이상으로 백만명 이상이 피해를 보는 대정전이 발생하고 있다. 대정전이 아니라 소규모 정전도 누군가에게는 치명적이다. 사회가 급격히 전기화(electrification)되고 있는 시점에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풍요롭게 만들어가려면 안정적인 전력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1) Blackout 2003: Final Report on the August 14, 2003 Blackout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Causes and Recommendations, Office of Electricity, U.S. Department of Energy (2004).
2) 송전망이 실제로 절단되는 경우도 있지만, 운영상의 이유로 의도적으로 송전을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
3) Menck, P. J., Heitzig, J., Kurths, J. & Joachim Schellnhuber, H. How dead ends undermine power grid stability. Nat. Commun. 5, 3969 (2014).
4) Yang, Y., Nishikawa, T. & Motter, A. E. Small vulnerable sets determine large network cascades in power grids. Science 358, eaan3184 (2017).

댓글 0
  • There is no comment.

댓글을 작성하기 위해 로그인을 해주세요

registrant
김희태
한국에너지공과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