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카이와판돔의 번역에 관하여

2005년 12월 통권 3호

'당신의 삶이 당신의 우주에 바치는 경의이길.'

문학 종사자들은 뒤통수를 강타하는 듯한 문장, 심장을 어루만지는 듯한 문장에 대해 이야기한다. 같은 비유법을 쓴다면 내가 악전고투 끝에 번역한 카이와판돔의 첫 번째 문장은 거친 백태클을 당하는 듯한 문장, 레드카드를 꺼내고 싶어지는 문장이다. 보다 사무적으로 말한다면 범은하 문화 교류 촉진 위원회에 항의 서한을 보내고 싶어지는 문장이다. 하지만 그 항의 서한은 어떤 모습일까?

“왜 ‘옛날옛적에’로 시작하지 않는 거죠? 신데렐라는 그랬거든요!”

아마 문교촉위는 왜 카이와판돔과 신데렐라가 같은 방식으로 시작해야 되는가 되물어올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카이와판돔이 신데렐라와 교환된 것이기 때문’이라는 엉성한 것뿐이다. 아무래도 항의 서한은 포기해야 될 듯하다.

사실 문교촉위의 외계인들이 보일 반응보다는 지구인 동포들의 반응이 더 신랄할 것이다. 저 바깥에는 내가 외계인의 문학작품을 번역(같은 일을 맡고 있는 수천 명 중의 한 명일뿐이지만)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작자들이 있고 그 자들 중 일부는 내 짜증을 보면 살의 섞인 분노를 보일 것이다. 심지어 그들 중 모자란 상상력을 고전의 권위로 떼우길 즐기는 자들의 경우엔 이곳이 시나이산이라는, 그리고 내가 취급하고 있는 작품이 석판에 기록되어 있다는 식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신성모독이라는 점은 둘째치더라도 사실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곳은 북악산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카이와판돔은 A4 용지에 인쇄된 것이므로.

보다 매혹적인 기록수단이 아닌 점은 나도 유감스럽기야 하지만, 우주를 가로질러 정보를 보내야 한다면 석판이나 그 비슷한 뭔가를 탑재한 우주선을 발사하는 것보다는 앤시블이 훨씬 경제적이다. 지구에서 문교촉위로 신데렐라를 보낸 방식도 그것이었고 문교촉위에서 지구로 카이와판돔을 보낸 방식도 그것이다. 카이와판돔을 받은 UN 산하의 접촉 전담위에서는 그것을 A4 용지 서른 장에 인쇄한 다음 은하표준어 사전과 함께 내게 넘겨주고는 그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라고 말했다.

따라서 건전한 교양인이라면 비록 A4 용지 더미에 불과한 것이라도 경외감을 품고 이 외계의 문학 작품을 대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손을 뻗어 담배갑을 끌어당기는 쪽을 선택했다. 담배에 불을 붙이자 방 저쪽에 있던 박대위가 입 주위를 꿈틀거렸다.

잠깐 동안 내적 갈등을 보여주는 듯한 표정을 짓던 박대위는 곧 결심을 굳혔다. 그는 우호적이고 동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시작부터 대단한 란문인가 보지요, 리선생님.”

(C) 조경아순진한 인문학부 학생처럼 말하는 특공대원이라니, 끔찍하기까지 하다. 하긴 박대위에게 나는 군인이 민간인을 대하는 표준화된 태도를 포기하게 할 만큼 중요한 사람이다. 하지만 우쭐한 기분은 느낄 수 없었다.

“박대위, 박대위도 어제 내가 떠들었던 말 옆에서 다 들었지? 이건 다 쓸모없는 짓이야. 보나마나 영역본이 채택될 테지.”

박대위는 또다시 군인답지 않게 행동했다. 군이 공들여 키워낸 살인전문가는 ‘나는 모른다’는 태도를 보이는 대신 점잖게 말했다.

“리선생님. 접촉위에서 정짜로 원하는 것은 그 외계의 글을 리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모든 언어로 그 외계 동화를 번역하는 것이고요. 그 동화를 리해할 가능성을 왜 스스로 축소하겠습니까?”

아마 박대위의 말이 맞을 것이다. 따라서 접촉위 사람들은 내가 카이와판돔보다 내 경호원의 말투에 더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면 격분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통일한국의 혼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박대위의 말투가 훨씬 재미있었다.

“대위의 말투를 바꾸도록 강제한 세력이 있었겠지? 물론 직접적으로 ‘너 말투 바꿔.’ 하는 식은 아니었겠지만 책이나 TV를 보기 위해서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도 말투를 바꿀 수밖에 없었을 거야. 그렇지?”

박대위는 싱긋 웃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예, 세가 더 큰 말투를 따라갈 수밖에 없지요.”

“지구상에서는 영어가 그런 횡포를 부리고 있어. 이 사전을 봐. 은하표준어-영어 사전이야. 전담위원들도 결국엔 이해하기 더 쉽다는 이유에서 영역본을 먼저 집어들걸. 그리고 영어 사용자의 사고방식으로 이 동화를 이해할 테고. 이게 동화가 맞는지는 의심스럽지만.”

박대위는 내 주장을 계속 상대하는 것이 별로 이롭지 않다고 판단한 듯했다. 그래서 그는 화제를 살짝 바꿨다.

“동화가 아닙니까? 외계인들은 동화를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박대위의 말에는 오래된 실망의 희미한 흔적 같은 것이 엿보였다. 그 실망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기억하고 있다.

9년 전, 그 숨 막히던 첫 접촉의 순간은 단언컨대 인류가 나무 아래로 내려온 이래 최대의 쇼였다. 명백히 지구 바깥의 기술로 만들어진 우주선은 30AU 거리에서부터 지구의 모든 관측장비에 자신을 소개하며 당당하게 다가왔다. 마치 그곳이 고향이라도 된다는 양 정확한 솜씨로 제1라그랑주 포인트에 자리 잡은 우주선은, 그때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머나먼 외계의 소리를 실시간으로 전하는 중계거점이 되었다. 그 기적적인 통신 방식에 앤시블이라는 이름이 붙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앤시블 중계거점을 미개인에게 던져진 휴대전화에 비유한 당시의 카툰이 떠오른다. 의외로 예리한 비유다. 우리는 그 ‘휴대전화’의 원리를 이해할 수 없고 상대방이 어디서 말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휴대전화를 통해 상대방과 이야기를 할 수는 있다.

그럭저럭 서로의 소통 수단을 익히게 되자 휴대전화를 보낸 우주 저편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범은하 문화 교류 촉진 위원회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그들은 본격적인 교류를 제안했다. 하지만 외계인들이 제시한 교류 대상 품목은 지구인들을 경악시켰다. 그들은 기적과 같은 선진기술도, 초월적인 과학도, 꿈도 꿀 수 없는 고급정보도 아닌 동화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어깨에 별이 잔뜩 달린 자들이나 하얀 옷을 즐겨 입는 자들 중 일부는 이 제안에 공황 상태 비슷한 것을 보이기도 했다. 말 그대로 동화 같은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머나먼 별나라에서 신비한 손님들이 왔습니다. 그 손님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테니 당신들도 그렇게 해달라고 했습니다.’

지금에 와서야 그 제안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저변화되어 있다. 사실 우리는 이미 오래전부터 외계인만큼이나 이질적인 자들의 방문을 경험했다. 그들은 고통과 함께 찾아오며, 도무지 의사가 통하지 않고, 우리의 안정된 생활을 서슴없이 파괴한다. 당신이 재생산 경험이 있다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 것이다. 바로 우리의 자녀들 말이다.

그 불청객들이 어느 정도 지구의 언어를 익히고 나면 우리가 그들에게 건네주는 첫 번째 정보가 무엇인가? 지구에서 태어나는 그 외계인들에게 우리가 주는 것은 말을 할 줄 아는 동물들과 물리법칙을 무시하는 마법, 오래전에 사라진 신분 계급 같은 것들이 등장하는 오류투성이의 정보들이다. 외계인에게 주어야 하는 것은 바로 동화다.

그들은 우리의 아이로 행동하길 원했고, 우리 또한 그들의 아이로 행동해야 했다. 우리의 동화를 들려주고 그들의 동화를 읽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교촉위(9년이 지났지만 지구인은 아직도 이 단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동화를 더 읽고 어른이 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는 외계의 모든 동화를 보내주지는 않았다. 그들의 방식은 우리에게 짝패 하나를 붙여주는 것인 듯했다. 주디스 리치 해리스가 갈파했듯 어린이는 부모의 훈육에 의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부대끼며 성장하는 것이다. 문교촉위는 우리에게 어울릴 친구 하나를 골라 ‘전화를 바꿔줄’ 작정이었다. 만약 그 짝패가 서로의 동화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문교촉위는 뒤로 물러나고 우리는 우주 저편의 파트너와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 수 있을 것이다.

문교촉위가 첫 번째로 고른 우리의 짝은 권티다였다.(역시 그 이름만 알뿐, 우리는 이 자들이 도대체 우주 어느 구석에 있는 어떻게 생겨먹은 자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교촉위가 보내준 권티다인들의 동화는 불미스러운 사고를 일으켰다. 문교촉위는 첫 번째 조합을 포기한 다음 두 번째로 위탄이라는 문화권을 소개해주었다. 다행히 두 번째 선택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지구의 동화들과 위탄인들의 동화들이 순조롭게 교환되었다. 그 중 신데렐라와 교환된 것이 카이와판돔이다.

그리고 카이와판돔은 ‘옛날옛적에’ 대신 종교 경구 같은 말로 시작하여 내 호기심을 냉각시키고 있었다.

“동화냐고? 글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카이와판돔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겠어. 사전에 나오지 않거든. 하긴 위탄에 있는 이름 모를 내 동료도 신데렐라가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했겠지. 흠, 그럼 이것도 주인공 이름인가?”

“그러면 ‘카이와판돔이라는 고운 녀성이 살았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겠군요.”

매몰차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품위 있는 재촉이었다. 군대에서는 내 경호원으로 총을 대신 맞아줄 사람 이상의 사람을 보낸 모양이다. 나는 대위에게 힘 빠진 미소를 지어주고는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눌러 비비고 다시 A4 용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 다음 문장에서도 고운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 문장은 ‘그 오랜 세월 우주는 당신을 기다려왔으니’였다. 그런 문장에도 불구하고 위탄인들에 대한 내 평가는 하락하지 않았다.

이미 바닥이었으니 더 내려갈 수가 없다.

사흘이 더 흘렀고, 나는 그때까지 열두 문장을 번역했다. 청와대의 김실장이 찾아왔을 때 나는 게으름에 대한 질책을 들을 거라 각오했다. 하지만 김실장은 오히려 내 비위를 건드릴까 조심하듯 행동했다. 그저 늙은 여자에 대한 존중을 표시하는 것이 아닌 듯했고, 그래서 나는 슬쩍 넘겨짚었다.

“다른 나라의 진행 상황도 비슷한가 보지?”

“그렇습니다, 선생님. 아무래도 중역인데다 사고방식과 문화가 다르니까요. 상당히 좌절하고 있답니다.”

나는 신이 나서 은하표준어의 문법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떠들어댔다. 그리고 이 경우는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도 모를 위탄어를 은하표준어로 번역한 것이므로 초능력에 가까운 번역 실력이 요구될 정도로 문장이 괴상하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나라의 번역자들이 보였다는 반응에 의아해했다. 조금 후에야 그들과 나의 차이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와 달리 그 불쌍한 친구들은 희망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나 보다. 따라서 그들의 좌절이 클 수밖에 없다.

김실장은 혹시 나도 좌절하고 있을까 봐 응원차 온 모양이다. 나는 적당한 좌절을 보여준 다음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도 조금 보여주었다. 내 반응에 만족한 김실장은 두 번째 용건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두 시간 전에 지구주의자들의 성명서가 웹에 업로드되었습니다.”

24시간 내 곁을 지키고 있는 박대위가 긴장했다. 나는 무관심한 얼굴을 하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무슨 내용인데?”

김실장은 내 컴퓨터 쪽으로 움직였다. 직접 보여줄 모양이다. 나는 그냥 말로 설명하라고 했다.

“그러겠습니다. 성명서의 앞부분은 지금까지와 별로 다르지 않은 내용입니다. 외계의 침략에 맞서 지구인들은 궐기해야 한다는 내용들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권티다의 동화가 문제였지. 그 동화가 산 안드레아스 단층을 감동시켰으니까.”

권티다인들의 동화는 복잡한 화학식이었다. 권티다인들이 어떤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는지는 짐작하기조차 어렵지만 화학물질 문학이라는 것 자체는 그다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지구에도 페로몬 같은 화학물질로 대화하는 생물이 있으니까. 그리고 인간들도 향수라는 이름으로 화학물질을 자기표현에 사용한다. 적당한 수용기만 있다면 화학물질로도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다.

권티다인들에게 그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권해도 될 만큼 안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구에서도 대부분의 경우엔 안전했다. 하지만 JPL에서 이루어진 합성에서 그것은,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인해 산 안드레아스 단층을 전율하게 만든 초고성능 폭발물로 바뀌었다.

당연하게도 파괴된 캘리포니아의 복수를 원하는 자들이 나타났다. 그 자들은 외국인 혐오증 환자, 인간이 신의 유일한 적자임을 믿는 광신도, 우주적 KKK라 부를 수밖에 없는 작자 따위를 규합한 다음 지구주의 운동이라는 것을 선포했다. 거기까지는 꽤나 씩씩하게 진행했지만 그들은 분노의 배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지구인은 권티다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거니와, 설령 알았다 해도 복수를 위한 우주함대를 발진시킬 능력 같은 것은 지구인에게 없다. 앤시블 중계거점이 있기야 하지만 라그랑주 포인트의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는 차고에서 조립할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무기를 가진 정부들은 지구주의자들에게 냉담했다. 그러니 지구주의자들은 문교촉위에 협력하는 다른 지구인들에게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전체 인류의 관점에서 보면 비탄에 잠긴 나머지 자해를 하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복수심이 언제 논리와 친했던 적이 있던가. 내가 일반인들의 접근이 금지된 북악산의 모처에서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외계인의 동화를 번역하고 있는 것도 지구주의자들의 위협 때문이다.

나는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이야기를 왜 김실장이 가져왔는지 궁금했다. 김실장이 몹시 조심스러운 태도로 설명했다.

“성명서의 뒷부분이 문제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자들은 번역가들이 지금 당장 번역을 멈추지 않으면 그들의 가족과 친지, 친구들을 공격하겠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쓴웃음을 짓고 싶었다. 동조자를 상당히 잃을 텐데도 그런 위협을 하고 나선 것을 보니 지구주의자들의 세력이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축소되고 있나 보다.

김실장은 보호하고 싶은 자의 명단을 주면 그들에게 경호를 붙이거나 이곳으로 옮기겠다고 말했다. 나는 관두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누구를 선택하고 누구를 탈락시키는 짓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김실장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내 주장을 반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일단 이인수씨 가족들을 경호 경비 대상에 포함시키겠습니다.”

“우리 오빠가 동의하면 그렇게 해.”

김실장은 내가 번역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것에 안도하며 물러갔다. 그래서 나는 혐연가와 같은 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김실장이 떠나자마자 기쁜 얼굴로 담배를 입으로 가져가는 나를 향해 박대위가 말했다.

“리선생님, 오라버니 가족들이 념려되시지요? 말씀만 하시면 제가 똑똑한 놈들을 보내겠습니다.”

“괜찮아. 경찰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그리고 지구주의자들도 한국어 번역가에겐 별 관심이 없을 거야. 한국인을 제외하면 외계인의 동화가 한국어로 번역될 수 없다는 사실에 애석해할 자가 어디 있겠어?”

내 빙퉁그러진 대답이 박대위 내부의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박대위는 정색하며 말했다.

“리선생님, 접촉 전담위는 지금껏 지구가 경험하지 못했던 미증유의 지성을 이해하기 위해 지구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리해력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유에서 지금 같은 일이 필요한 것이겠지요. 비록 조선말이 세계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작다 해도 변별성이라는 측면에서는 개개로 평가받아야 할 똑같은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리선생님께서 조선말 번역에 성공하지 못하신다면 지구는 그 외계의 동화를 리해할 가능성 하나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조선인의 자존심도 중요합니다. 하나 저는 그것보다 더 중요한 지구를 위해서 리선생님을 지키고 있습니다.”

가슴이 뜨끔할 수밖에 없었다. 내 안전에 목숨을 걸고 있는 사람에게 참 쓸데없는 사람 지키고 있다는 식으로 말했으니 나도 곱게 늙진 못했다. 박대위에 대한 존중 때문에라도 변명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엉뚱한 말이었다.

“박대위, 생년월일이 언제지?”

“예? 2001년 11월 15일입니다.”

“21세기 인간이군. 나는 20세기 인간이야. 1974년 12월 27일 생이지. 혹시 그 날에 대해 아는 것 있어?”

“리선생님의 생일이라는 것 말고 말입니까? 모릅니다. 무슨 날입니까?”

“네드 매드렐이라는 어부가 죽은 날이야.”

“네드 매드렐? 그게 누구지요?”

“잉글랜드 본토와 아일랜드 사이에 길이가 한 50킬로미터 쯤 되는 섬이 하나 있지. 맨(Man)이라고 해. 그곳은 망스라고 하는 별나게 생긴 고양이의 원산지로 알려져 있지. 그리고 맨에서 쓰였던 말도 망스라고 해. 에드워드 매드렐은 맨에서 태어나고 죽은 평범한 어부야. 그 섬 출신이니 당연히 망스를 썼지. 그의 인생은 특별할 것이 없고, 고향의 말을 썼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어. 에드워드 매드렐은 최후의 망스 원어민이었어. 1974년 12월 27일에 그가 죽었을 때 맨 사람들은 모두 영어를 쓰고 있었거든. 따라서 그 날은 맨의 말이 죽은 날이기도 해.”

원하지 않는 사람 앞에서 피우면 호흡기 강간범쯤으로 취급받게 되는 물건을 재떨이에 비벼 껐다. 옛날과 달라진 것이 또 뭐가 있을까.

“박대위 표현대로라면 지구는 맨의 말로 카이와판돔을 이해할 가능성을 오래전에 잃은 거지.”

“조선말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리선생님.”

“박대위가 죽을 때쯤 되면 최소한 문화어 사용자는 사라질 것 같군. 자네 문화어도 지금은 표준어와 뒤범벅되어 있으니.”

박대위의 얼굴에 고통이 떠올랐다. 못된 늙은이는 빨리 죽는 것이 자선사업이다. 젠장.

“미안해, 박대위. 하지만 나는 자네처럼 생각할 수 없어. 외계의 지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지구의 모든 시각을 동원한다? 내 눈엔 반대로 보여.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내재된 위기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이야. 무슨 위기의식이냐고? 그 다양한 시각들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지. 다른 말을 쓰는 자들이 현실에 등장했으니까. 지난 세기에 자본이 그랬고, 이제 외계인이 그렇지. 둘 다 인간의 말이 아닌 다른 말을 써. 자본은 경제학의 언어를 썼고 외계인은 자기네 빌어먹을 말을 쓰지. 다른 말을 쓰는 오랑캐가 나타나면 사람은 단결하고 개성을 살해하는 법이야. 이 최후의 저항이 끝나고 나면 지구의 언어는 급속하게 하나로 통일될 거야. 영어일 가능성이 높지.”

시큰한 무릎을 어루만졌다. 비가 올 모양이다. 나는 창밖의 서울을 바라보았다. 서울을 이 각도에서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청와대 뒷산에 아무나 올라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 각도에서 봐도 별다를 것은 없었다. 흐린 하늘과 스모그 때문에 서울은 낡은 벽지처럼 보였다. 무늬가 있지만 결코 그 무늬가 드러나지는 않는 벽지 말이다.

“내밀한 동기의 측면에서 보면 지구주의자가 하는 짓이나 내가 하는 짓이나 똑같아. 둘 다 개별성의 소멸에 저항하는 거지. 그리고 최종결과도 똑같겠지.”

나는 그 최종결과를 말하지 않았다.

이틀 뒤, 작업이 좀 능숙해진 덕분에 나는 카이와판돔을 스무 문장 정도 더 번역했다. 그리고 그날 밤 공격이 있었다. 뜻밖의 일이었다.

내 짐작대로 지구주의자들도 위탄의 동화가 한국어로 번역된다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공격 효과였다. 한국에는 은하표준어를 나만큼 구사하는 자가 없었다. 따라서 나를 공격하면 한 가지 언어의 번역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지구주의자들은 스위스의 헤르 아무개(레토로망스가 목표였나 보다.)와 아일랜드의 미시즈 아무개(게일어겠지.), 일본의 아무개상(알아보니 일본어가 아니라 아이누어가 목표였단다. 꼼꼼하기도 해라.) 같은 번역가들과 함께 나도 공격 목표에 포함시켰다.

번역가들은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구주의자들은 예고했던 것처럼 번역가의 가족을 목표로 했다. 내 경우엔 인수 오빠와 그 가족이다. 결혼한 적이 없는 할망구의 가족을 찾느라 그 녀석들도 참 짜증이 났을 것이다. 공격이 있고 두 시간 후, 김실장이 인수 오빠와 나에게 비화전화기를 전달한 후에야 나는 오빠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것은 인수 오빠가 아니었다.

“하이, 인혜!”

어리둥절해하던 나는 조금 후에야 상대방이 오빠의 손자인 철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빅브라더의 추적도 차단하는 비화전화기가 꽤나 신기해서 자기가 받아보겠다고 날뛰었던 모양이다. 나는 짜증스럽게 말했다.

“문디 자슥. 여태까지 안 자고 머하노. 느그 할애비 바까바라.”

“왓?”

“할애비 바까라 캤다!”

뭔가 칭얼거리는 소리와 달래는 소리 같은 것이 들리더니 조금 후 오빠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철훈이를 달래느라 띄엄띄엄 말했다. 대비하고 있던 경찰들 덕분에 테러는 무위로 돌아갔고 테러리스트들도 모두 체포되었다는 것을 김실장에게 미리 들었기에 나도 안부만 간단히 물었다.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철훈이 덕을 약간 보았음을 알게 되었다. 경찰들의 체포 작전을 목격한 철훈이가 굉장히 흥분한 덕분에 오빠도 화를 낼 생각이 많이 수그러든 모양이었다. 그 녀석에게 선물이라도 하나 보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내려놓은 손으로 담배를 집자마자 라이터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박대위였다. 이제 내가 언제 담배를 무는지 나보다 더 잘 알게 된 모양이다. 불을 붙여준 박대위가 약간 물러나며 말했다.

“리선생님, 그건 어디 말입니까?”

“내 말? 경상도 사투리.”

“아아, 쌀을 발음할 수 없다는 곳 말입니까?”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평생 동안 경상도 출신이라고 밝히면 쌀을 발음해보라는 말을 들어왔다. 그런데 이젠 구 북한군 특공대원에게까지 그런 질문을 듣다니.

“쌍시옷 발음 못하는 곳은 낙동강 동쪽이야. 나는 서쪽 출신이고. 게다가 그것도 옛날이야기지. 요즘은 낙동강 동쪽이든 서쪽이든 모두 표준어 쓰고 쌍시옷 발음도 잘해. 그러니 혹 경상도에 가더라도 그런 질문은 하지 마. 나나 우리 오빠 같은 늙다리가 서로 이야기할 때나 경상도 사투리 쓰는 거지.”

박대위의 눈에 희미한 우울함이 떠올랐다. 그의 사고 궤적을 추측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오후 내내 한 작업이 담겨 있는 컴퓨터를 흘깃 쳐다보며 말했다.

“이것 한 번 들어볼래, 박대위? 내가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순 없지만 위탄인들은 성(性)이 세 개인 것 같아. 우리 식으로 억지 해석을 하면 여자는 하나인데 남자가 두 종류 있는 거지. 하지만 꼭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 여자가 남자1과 결합하면 남자2가 태어나. 그리고 여자가 남자2와 결합하면 남자1이 태어나고. 여자끼리 결합할 경우 여자가 태어나는 것 같아. 이런 식이라면 결국 여자들만 남게 될 것 같지 않아? 하지만 그렇지 않은가 봐. 뭔가 남자들을 위한 성 보존 체계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지. 어쨌든 이런 동네이다 보니 난 얘들의 갈등 양상을 이해하기 힘들어. 동화에선 사회학적 설명 같은 것은 안 하잖아.”

박대위는 예의 바르게 관심을 표현했다.

“위탄인들도 성별이 두 개밖에 나오지 않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당황할 겁니다.”

“그래. 그 녀석들은 신데렐라가 변태 같은 이야기라고 느낄지도 몰라.”

“리선생님께서 번역을 끝내시면 사회학자들이 그에 대해 론의해볼 수 있을 겁니다. 아, 카이와판돔이 무슨 뜻인지는 알아내셨습니까?”

“아니. 본문에서 그 말은 지금까지 한 번 나왔는데 등장인물의 이름은 아니었어. 아까 말한 성 보존 체계와 무슨 관련이 있는 것 같아. 의식과 관련된 이름일 수도 있고. 위탄의 고유의식이라면 은하표준어 사전엔 없을 수도 있지.”

“그것도 연구할 수 있을 겁니다. 빨리 번역하신다면.”

“연구하기야 하겠지만 내 것이 아닌 영역본으로 할 거야. 그러니 그만 보채라. 피우던 담배는 마저 다 피워야지.”

박대위가 울컥했다. 그는 흥분 때문에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리선생님, 그 일이 그렇게 쓸모없는 짓이라 생각하신다면 우정 그 일을 하시는 리유가 뭡니까?”

그토록 점잖은 사람을 일주일 만에 이렇게 만들었으니 내 승리라고 해야 하나. 나는 그를 외면했다.

“돈 많이 주잖아.”

“돈 때문이라고요? 그건 외계인의 문학인데?”

“그래. 지구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킬 물건이지. 위탄인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만약 위탄말이 조선말 사용자에게 가장 리해하기 쉬운 말임이 밝혀진다면, 그렇다면 어쩌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전담위원들이 리선생님께 방조를 구할지도…….”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직시했다.

“망스가 위탄어에 가장 가까운 말일 수도 있지. 야히어나 카타바가어가 그럴 수도 있고. 지난 세기에 자본이 해치운 언어는 그것 말고도 부지기수야. 그리고 어느 말이 더 적합한가는 아무 문제가 안 돼. 박대위. 자네는 열차 궤도가 왜 아직도 탈선이 걱정되는 간격을 고수하고 있고, 키보드가 왜 불합리한 쿼티를 고집하고 있는 건지 모르나? 자네 말투에서 문화어의 흔적이 점점 사라지는 건 표준어가 더 합리적이기 때문인가?”

박대위는 상기된 얼굴로 씩씩거렸다. 빌어먹을. 어쩌라고? 내 조카손자 놈은 왕고모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영어로 말을 걸어온다고.

“이건 자연법칙이야. 사라지는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특별한지는 중요치 않아. 오직 세력만이 중요하지. 내가 화를 내거나 저항하지 않는 것도 이것이 자연법칙이기 때문이지. 저항이나 혁명 따위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거야. 나는 자연법칙에 저항하는 바보짓으로 여생을 낭비하지는 않아. 돈이나 받아 흥청망청 사는 쪽이 낫지.”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 그 순간 컴퓨터가 딩동 하는 맑은 소리를 냈다.

나와 박대위 모두 약간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컴퓨터 쪽을 바라보았다. 모니터를 보니 메일이 도착했다는 표시가 깜빡거렸다. 발신자는 접촉 전담위였고 수신자는 전 세계의 번역가였다. 나는 메일을 열었다.

갑자기 모니터가 캄캄해졌다. 해킹을 의심하며 고개를 들어보자 당혹스럽게도 주변 또한 캄캄했다. 문제가 생긴 것이 내 늙은 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박대위가 속삭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리선생님.”

“박대위?”

“전기가 끊어졌습니다. 비상 발전기도 작동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가 의도적으로 끊은 겁니다.”

그 순간 먼 곳에서 섬뜩한 총성이 들려왔다.

나는 평생 동안 활극을 동경해본 적이 없고, 이 나이가 되어 새삼스레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날카로운 총성을 듣고 있노라니 내 머릿속엔 온갖 활극 장면이 떠올랐다. 안타깝게도 개와 젊은 여자에겐 친절하지만 경찰과 늙은 여자에겐 매정한 활극의 법칙이 준수되는 장면들이었다. 나는 온갖 방식으로 살해당하는 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검은 옷의 닌자가 철사로 늙은 문학자의 목을 조르는 장면은 내가 생각해도 너무 심했다.) 두려움에 얼어붙은 내게 누군가의 손이 닿았을 때 나는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상상 속의 비명이었던 모양이다.

“접니다.”

무엇인가가 내 얼굴에 씌워졌다. 그가 박대위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상상력은 비닐 봉투에 질식당하는 내 모습을 초사실주의 화법으로 그려냈다. 물론 그것은 비닐 봉투가 아니었다.

“방독면입니다. 벗지 마십시오.”

박대위는 나를 일으켰다. 단속적으로 들려오는 총성 속에서 나는 박대위에게 이끌려 어딘지도 모를 방향으로 걸어갔다. 조금 후 나를 멈추게 한 박대위가 뭐라 중얼거렸다. 나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귀를 기울였지만 박대위는 무전기에 대고 말하고 있었다. 박대위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기에 무전기 저편의 말은 내게 들리지 않았다. 조금 후 박대위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습격당했습니다. 지구주의 반동들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을 공격한 것은 주의를 돌리기 위한 기만전술인 모양입니다.”

대답할 여유는 없었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동조자들을 잃을 것을 각오하고 시도한 공격이 실패하자 지구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소멸할 것을 예감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최후의 발악인 것이다.

희망을 잃은 사람보다 무서운 것은, 희망은 없지만 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지금 저 바깥에 있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나 어릴 적이라면 서울 시내에서 총격전이 벌어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통일 당시의 어수선한 상황 속에서 북한군 일부와 무기 상당수가 지하로 잠적했다. 대부분의 남성이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나라에 전문 군인과 무기가 유출되자 그 반향은 엄청났다. 정부의 결사적인 소탕 시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서울은 다른 나라의 어지간한 갱단은 명함도 내밀지 못할 살벌한 집단이 득시글거리는 도시다.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 없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적인 암시가 잔뜩 담긴 욕설을 내뱉고 나니 박대위가 말했다.

“열 내지 마십시오, 리선생님. 조명을 차단한 것을 보니 반동들은 암시장치를 가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적외선 암시장치는 더울수록 잘 보이지요.”

움찔했다가, 박대위가 농담을 하고 있음을 겨우 깨달았다. 방독면 속에서 억지로 히죽 웃고 나니 박대위가 내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드리겠습니다, 리선생님.”

그런가 하고 박대위를 따라가다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에서라면야 저런 대사는 섹스의 복선에 불과한 상투적인 대사지만 이건 영화가 아니거니와 나와 박대위의 로맨스라는 것도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 혹시 박대위는 사태가 비관적이라고 판단한 것일까? 나는 스스로 놀랄 만큼 차분하게 말했다.

“상황이 어렵나, 박대위?”

박대위는 몇 걸음 더 걸은 후에야 대답했다.

“일없습니다. 리선생님과 저 두 사람이니 행운도 두 배일 테니까요.”

맙소사. 저런 대답이라니. 활극을 줄기차게 방영하던 내 머릿속의 채널이 변경되며 갑자기 교육 방송이 방영되었다. 아마 초등수학인 듯했다. <은하표준어에 관한 알량한 지식을 가진 니코틴 중독 할망구를 X라 하고 품위가 있으며 수명도 훨씬 많이 남은 군인을 Y라 한다. X와 Y 사이에 등호, 혹은 부등호를 표시하시오.> 등호를 넣는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고 부등호의 방향은 명백하다. 제기랄. 이곳에서 누군가가 멍청이들에 의해 멍청한 죽음을 당해야 한다면 그건 부모도, 자식도, 제 꼬리를 잡지 못해 정신분열증에 걸린 강아지 한 마리도 없는 할망구여야 한다. 박대위는 아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박대위를 내가 가져보지 못한 아들로 여기게 됐다고 말하면 웃을 테지?”

“예. 좀 통속적이군요, 리선생님.”

“그래. 나 역시 입이 찢어져도 그렇겐 말 못하겠어. 다만 내 말을 무시하는 것은 못 참아. 지난 일주일 동안 내가 죽어라 떠들어댔던 이야기를 기억하면, 박대위.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를 지켜. 내가 아니라.”

“저는 카이와판돔을 조선말로 옮길 수 없습니다.”

“박대위, 그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내가 말했잖아! 장담하는데 한국인 사회학자들도 내 번역이 아닌 영역본을 연구할걸. 영어 학술지에 영어 논문을 내고 싶을 테니까. 한국어 따위야 내 조카손자가 어른이 될 무렵이면…….”

“리선생님은 조국과 조국의 말을 잃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기나 하십니까?”

얼음 두 덩이로 맷돌을 만들어 돌리면 저런 목소리가 나올 것 같다. 나는 잠깐 동안 숨을 멈췄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박대위?”

“지금은 박대위입니다. 하지만 한때는 조선인민군 상위 박원진이었습니다. 인젠 그 이름이 외려 낯설군요. 하지만 더 이상 그 이름을 쓸 수 없는 립장이 되었을 때의 락심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박대위가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닥에 앉혔다. 일주일이나 생활했던 방이었지만 내가 어디에 앉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세가 약한 것은 사라지고 세가 강한 것만 남는다는 리선생님의 주장은 맞습니다. 제가 직접 겪었습니다. 문화어는 사라지는 말이지요. 한국어도 사라질 겁니다. 언젠가는 지구와 위탄도 사라질 테지요.”

“뭐?”

“문교촉위는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성숙한 상대방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자들은 우리를 교양하는 대신 지구라는 아이와 위탄이라는 아이가 서로 부대끼며 스스로 그런 존재로 자라나길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 존재가 되면 그건 우리가 아는 지구나 위탄은 아니겠지요. 아이와 어른은 다른 존재이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구와 위탄이 사라지는 겁니다.”


(C) 조경아

상상하기도 힘든 장대한 전망에 할말을 잃었다. 암흑과 방독면 때문에 헐떡이고 있으면서도 정신은 저 멀리 우주로 날아가는 것 같았다.

“박대위는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큰 소멸을 말하는군. 그럼 이 짓이 쓸모없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소멸이 아니라 포기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포기해야 도달할 수 있는 곳입니다.”

“소멸이든 포기든 사라진다는 점은 마찬가지야. 쓸모없는 것이라고.”

박대위가 그를 만난 이래 가장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리선생님, 9년 전 문교촉위가 요청한 것이 뭐였습니까?”

신경질적으로 대답하려던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어깨에 별이 달린 자들과 하얀 옷을 입는 자들을 경악하게 한 문교촉위의 교류품목은 뭐였던가? 생물학적, 물리학적, 사회학적 오류로 점철된 정보들.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읽지 않거나 어릴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읽지만, 생존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헛소리들이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이에게 꼬박꼬박 주는 것.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느낌은 부분적으로는 내 머리가 확 짓눌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박대위가 나를 바닥에 밀어붙이자마자 날카로운 총성이 들려왔다. 그리고 눈앞의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박대위도 격렬하게 응사했고, 나는 청각이 파업을 일으킬 것 같은 소음 속에 팽개쳐졌다. 그래서 나는 어둠 속에서 명멸하는 화려한 불꽃들을 바라보았다.

공황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내 눈에 그 불꽃들은 검은 우주를 배경으로 불타오르는 별들처럼 보였다. 우리와 위탄으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우리와 위탄과는 다른 어떤 존재들이 살아갈 미래의 우주를 보는 듯했다…….

억지다. 차라리 화면보호기를 보며 우주의 운명을 읽는 것이 낫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기절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정확한 예감이었다.

3분 뒤 나는 깨어났고, 열흘 뒤에는 병실에 있었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있는 쪽은 아니었다.

박대위의 말대로 두 사람 몫의 행운이 있었는지, 그렇잖으면 박대위가 남쪽 출신 군인들을 물리치고 내 경호를 맡을 만큼 탁월한 군인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두 사람은 습격에서 살아남았다. 구조대가 달려와 습격자들을 모두 진압할 때까지 내가 입은 피해는 찰과상 몇 개뿐이었다. 하지만 박대위는 총상을 몇 개 얻었다. 다행히 치명적이지는 않았고 처치 또한 빨랐기에 생명에 지장은 없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 박대위의 모습은 환자복과 점적주사만 제외하면 환자로 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침대 옆에 앉은 채 퉁명스럽게 말했다.

“멀쩡하네 그래.”

“병문안을 오신 분 말씀이 퍼그나 따사롭군요, 리선생님.”

박대위는 싱긋 웃었다. 나는 가방에서 종이철을 꺼내어 박대위의 가슴에 던졌다.

“초벌 번역 끝났다. 아직 전담위원들도 못 읽은 거지만 자네 한 부 주지.”

“아, 이게 카이와판돔……?”

앞표지를 보던 박대위가 말꼬리를 흐리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내게 묻는 눈길을 보냈다.

“박대위, 공격이 있기 직전에 메일이 왔던 것 기억나?”

“예. 기억납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번역가들도 카이와판돔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어. 그래서 전담위가 문교촉위에 직접 문의했지. 문교촉위 쪽에서 카이와판돔에 대해 조사를 끝내고 답신을 보냈어. 전담위는 그 답신을 번역가들에게 보냈고. 그 메일이 그거였어.”

나는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다가 멈칫했다. 그것을 다시 집어넣으려 할 때 박대위가 서랍장 쪽으로 손을 뻗었다. 조금 후 박대위는 깨끗한 재떨이와 라이터를 꺼냈다.

“박대위 담배 안 피우잖아.”

“리선생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련해뒀지요.”

나는 히죽 웃고는 즉시 구속도 가능한 범죄를 저질렀다. 병원의 공기에 담배 연기를 태연히 섞어놓은 나는 계속 말했다.

“카이와판돔은 위탄인의 성조합 중 하나야.”

“성조합이오?”

“그래. 우리 경우야 후손 생산을 위한 성조합이 한 가지뿐이지.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

“부부 말이군요.”

“그래. 우리는 성조합이 하나뿐이니 성조합이라는 말 자체도 필요 없지. 그런데 위탄인의 경우엔 여러 조합이 가능하거든. 여자가 둘 결합하면 딸만 나오고 여자와 남자1이 결합하면 남자2 아들만 나오지. 여자 둘과 남자1로 삼인조합을 이루면 딸과 남자2 아들이 나올 수 있고 여자 하나와 남자1, 2의 삼인조합에서는 두 종류의 아들들이 태어나지. 그러면 위탄인이 모든 성을 재생산하려면 어떻게 조합해야 할까?”

“녀자 두 명에 남자1과 남자2가 한 명씩 있어야겠군요.”

“맞아. 그렇게 모든 성을 배출할 수 있는 사인조합을 카이와판돔이라고 해. 그 동화는 카이와판돔을 구성하기 위해 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모이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신데렐라와 마찬가지로 ‘소년, 소녀를 만나다’인 셈이지. 소년이 둘이고 소녀도 둘이긴 하지만.”

박대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은하표준어 사전에 없었던 것이군요. 위탄의 고유한 풍습이라서.”

“아냐. 재생산 같은 중요한 문제에 관련된 말이라서 등록되어 있어. 사전 뒤져보니 나오더군. ‘위탄인의 모든 성을 배출할 수 있는 성조합을 주윙빈담이라 한다.’ 그런 조합을 위탄에서는 주윙빈담이라고 해. 카이와판돔이 아니라. 그래서 못 찾은 거지.”

“주윙빈담이오? 그러면 카이와판돔은 뭡니까?”

나는 최대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문교촉위에서 알아보니 그 동화가 전래된 지방에서는 주윙빈담을 카이와판돔이라고 부른다더군.”

박대위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 후 그가 폭발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총상 때문에 아픈 옆구리를 움켜쥐고서도 박대위는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내가 의사를 불러 진정제를 한 대 놓게 해야 하나 고민할 무렵 박대위가 쥐어짜듯 말했다.

“사투리군요!”

“어, 꼭 그렇지는 않아. 내가 짐작하는 바에 따르면 위탄에선 언어 개념이 우리와 조금 다르단 말이야. 음파 외의 대화수단도 우리보다 잘 발달한 것 같고. 우리의 표정이나 몸짓보다 훨씬 나은 것들로 말이야. 위탄인들의 몸은 서로 똑같이 생겼으니 그런 대화수단에는 사투리가 없고……”

박대위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설명을 그만두었다. 박대위는 금방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헐떡거리며 동시에 킬킬거렸다. 게다가 말까지 했다.

“우주를…… 건너뛴…… 사투리군요!”

나는 입을 다물고 담배만 빡빡 피웠다. 환자 옆에서 잉글랜드의 수호성인이 달려올 정도로 연기를 뿜어대고 있는 나를 간호사가 봤다면 경찰에 살인미수범으로 고발했을 것이다. 사실 실제로 10분 뒤에 그런 일이 발생했다. 박대위의 만류가 없었다면 격분한 간호사는 나를 또 한 명의 자기 고객으로 만들어놨을지도 모른다.

뭐, 그거야 10분 뒤의 일이다. 간신히 웃음을 멈춘 박대위가 말했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하신 겁니까?”

“의역이지. 사실 그 정도면 의역도 아닌 오역에 가깝지. 개역에 착수하면 바뀔 가능성이 커. 하지만 일단은 그래.”

“이대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온가시버시’라. 무슨 뜻인지 리해하기 수월합니다. 위탄인들의 부부 조합이 여럿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고.”

“괜찮겠어?”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카이와판돔은 한국어로 온가시버시가 되었다. 한국 제일의 은하표준어 전문가의 권위와 구 조선인민군 상위의 동의에 의해서. 대부분의 위탄인들이 카이와판돔이 아니라 주윙빈담이라고 한다는 것을 알면 잘못된 번역이라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식겠지. 그래도 끝끝내 따지고 싶다면 당신들 말을 만들어내서 내 말을 밀어내면 될 거다. 시간이 도와주니 그 날이야 오겠지만, 그때까지 카이와판돔은 온가시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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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