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비트루비우스 인간

2019년 8월 통권 167호

1.

   

 

 버스 정류장에서 승훈은 종이에 싼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있었다바나나 케이크였다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아이싱이 달콤하게 부서졌다어젯밤에는 아내와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며 케이크에 촛불도 켰다빨간색노란색초록색의 몸이 녹아내렸다서둘러 촛불을 끄려고 하는 승훈을 말리며 아내는 조금만 더 보자.”라고 말했다

   

 촛불 때문에 주변이 환해졌다가 이내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승훈은 촛농이 녹아내린 자리를 걷어내고 모처럼 데이트 기분을 내며 아내와 케이크를 나눠 먹었다그러고도 남은 케이크 한 조각을 출근길에 들고 나온 것이다승훈의 볼에 슬며시 미소가 떠올랐다어젯밤 아내를 포옹하던 순간 느꼈던 따뜻함이 바나나향과 함께 온 몸에 퍼지는 기분이었다

   

 저 멀리 구부러진 길에서 승훈이 타야 할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버스 앞에는 트럭이버스 뒤에는 승용차가 뒤따르고 있었다. ‘벌써 10년이 지났다니시간 참 빨라.’ 버스가 가까이 오는 게 보였다승훈은 입가를 털며 의자에서 일어섰다그런데 트럭의 방향이 이상했다버스 정류장 쪽으로 빠르게 달려왔다. ‘설마.’ 승훈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기 시작했다트럭의 빈 운전석이 승훈을 향하고 있었다자율 주행 트럭이었다승훈은 반사적으로 몇 발짝 뒤로 물러섰다정류장에서 빠져나가려고 했을 때 이미 트럭은 인도를 넘었다승훈은 정류장과 함께 산산이 부서지고 찢겼다.

   

 같은 시간유영은 미술관에 있었다.

 “비트루비우스는 기원전 1세기로마의 건축가였습니다. ‘건축십서’, 즉 건축에 관한 열 권의 책을 썼는데요. 3권에 이렇게 적습니다. ‘균형 잡힌 인체의 대칭과 비례 규칙을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신전도 제대로 세워질 수 없다.’ 그러면서 사각형과 원에 꼭 맞는 인간을 그릴 수 있다고 했는데요고대인들은 원이 우주적인 것을사각형은 지상의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서 원과 사각형 안에 들어맞는 인체를 그리며 우주의 중심을 탐구한다고 여겼습니다.”

   

 유영이 미술관 관람객들에게 여기까지 설명했을 때 동료 한 명이 전시장 안쪽으로 뛰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관람객들을 불안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미술관 직원들은 뛰면 안 되었는데 뭔가 이상했다유영은 설명을 이어갔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비트루비우스의 주장에 착안해서 지금 보고 계시는 비트루비우스 인간을 그립니다팔과 다리를 벌리고 누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볼까요사람의 배꼽을 중심으로 해서 컴퍼스를 한 바퀴 돌리면 손가락과 발가락 끝을 지나는 원이 완성됩니다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또 발을 붙이고 선 인체를 중심으로 정사각형도 그렸죠발끝에서 정수리까지의 길이가 두 팔을 가로로 벌린 너비와 같다는 것을 기초로 했습니다.” 

   

 동료가 유영 쪽으로 달려왔다관람객들의 시선이 비트루비우스 인간에서 달려오는 직원 쪽으로 옮겨 갔다.

   

 “원과 정사각형을 겹쳐 그렸기 때문에 마치 사람의 팔이 네 개다리도 네 개인 것처럼 보입니다.”

   

 관람객들은 더 이상 유영의 설명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동료는 관람객들에게 실례합니다.”라고 말한 뒤 유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유영은 마이크를 껐다

   

 유영이 정신없이 택시를 잡아타고 병원에 도착했다안내데스크로 달려가 남편의 이름을 외치자 로봇이 이렇게 말했다

   

 “저를 따라오세요.”

   

 로봇을 따라 병원 로비며 에스컬레이터복도를 지나쳤다걸을수록 복도가 더 길어지는 것 같았다급한 마음에 유영은 로봇의 뒤에 대고 빨리.”라는 말을 여러 번 외쳤다로봇은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진료 상담실의 문이 자동으로 열리자마자 미리 연락을 받은 의사가 모습을 드러냈다방금까지도 처치를 하고 있었는지 얼굴에는 흰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로봇이 물러가고 유영은 의사 앞에 섰다탁자 위에는 유리와 금속으로 된 작은 모형들이 늘어서 있었다투명한 욕조유리관호스원통형 캡슐 등이었다특이한 공예품처럼 보였다의사는 자리에 앉으며 한쪽 귀에서 마스크의 고리를 뺐다나머지 한쪽 귀에 걸린 마스크가 흔들렸다

   

 “남편은요?”

   

 유영은 앉지도 못하고 물었다의사가 입을 열었다

   

 “일단 앉으시죠보호자께서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유영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유영은 내려앉은 심장에 맞춰 몸을 낮추기라도 하는 것처럼 의자에 앉았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주세요.”

   

 유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승훈 씨의 몸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지금 중요한 건 머리입니다응급 구조 로봇이 머리의 절단면을 잘 처치해서 가져왔어요.”

   

 유영의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머리 절단면처치이런 말들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절단면이라뇨.”

   

 “사고 충격으로 복합골절이 일어났고 장기들은 모두 파손됐어요심장과 폐는 이미 멈췄습니다법적으로는 사망했습니다.”

   

 유영에게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뇌는 살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로봇이 가져온 겁니다.”

   

 유영은 핏기 없는 얼굴로 멍하니 의사를 바라보았다

   

 “힘드시다는 것압니다하지만 선택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어요.”

   

 “선택이요?”

   

 “크라이오닉스(cryonics)뇌를 냉동해서 안정적으로 살릴 수 있을 때까지 보관하는 겁니다.”

   

 의사는 탁자 위의 모형들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다옷을 입고 있지 않은 작은 인형이 유리관 안에 누워 있었다

   

 “환자의 몸이 병원에 도착하면 몸의 온도를 영하로 낮춥니다몸에서 모든 피를 빼고 보존액을 넣어요.”

   

 의사가 유리관에서 인형을 빼내 원통형 캡슐에 머리를 아래로 해서 넣었다

   

 “그리고 환자의 몸을 액체질소가 채워진 냉각 캡슐에 넣고 분자 활동이 멈추는 영하 196도를 유지시킵니다남편분의 뇌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칠 겁니다물론 결정하신다면 말이죠.”

   

 “냉동인간 말이군요.”

   

 “맞습니다.”

   

 유영도 들은 적이 있었다한국에서 크라이오닉스 서비스가 시작된 이래로 많은 불치병 환자들이 미래에 병을 고칠 수 있도록 사망 직후 몸을 냉동해달라고 했다

   

 “얼음 결정이 생기면 세포가 손상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어요또 냉동보다 해동이 어렵다면서요.”

   

 “그런 우려가 있었죠다 옛날 얘깁니다한국 극지연구소가 북극 효모에서 결빙방지 단백질을 발견해 대량으로 배양한 지가 언젠데요피를 빠르게 빼내는 기술얼음 결정이 생기는 현상을 막는 유리화’ 기술도 발전했고 보존액의 종류도 다양해졌어요몸의 부위에 따라 냉동과 해동의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게 돼 해동 성공률이 높아졌습니다동물들은 이미 성공적으로 해동되고 있어요지금 신경 쓰실 건 기술적 측면보다는 뇌를 냉동할지 말지입니다.”

   

 처음 해야 하는 선택유영은 온몸이 떨렸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지금은 뇌에 산소를 공급하는 중입니다만 곧 한계가 올 겁니다.”

   

 유영의 머리에 중요한 질문이 떠올랐다

   

 “그치만 나중에 해동할 때… 몸이 없잖아요.”

   

 “생체와 기계를 잇는 실험이 잇달아 성공하고 있어요그것도 반복된 실험에서요머지않아 머리도 연결하게 될 겁니다그때를 기다렸다가 이승훈씨를 해동하는 겁니다.”

   

 유영은 남편의 냉동이해동이혹시 실패한다 하더라도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놔두고 남편을 그저 죽게 놔둘 수는 없는 거라고남편의 삶을 자율 주행 트럭 사고로 끝낼 수는 없는 거라고 계속해서 되뇌었다

   

 캡슐 모형 안에 들어간 인형이 유영의 눈에 남편으로 보였다

   

 “하겠습니다남편을 냉동해 주세요.”

   

 유영은 크라이오닉스 전자 동의서 위에 지문을 찍었다의사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빠르게 일어서며 말했다

   

 “시작하기 전에 남편을 보시겠습니까.”

   

 “당연하죠.”

   

 유영은 의사를 따라가 금속 문 앞에 섰다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문이 양쪽으로 열렸다투명한 액체가 든 수조 안에 눈을 감은 남편의 머리가 담겨 있었다유영은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의료진들이 유영을 부축해 다시 상담실에 앉게 했다분리된 남편의 몸은 시체 보관실에 있다고 했다

   

 유영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겨우 일어나 복도로 나왔다환자들과 의료진이 돌아다녔다어느 병동에선가 생일 축하 노래가 새어 나왔다어젯밤 결혼기념일 케이크를 나눠먹은 후 남편을 포옹했던 순간이 기억났다남편의 몸은 따뜻했고 얼굴에서 바나나 향이 났다부드러운 피부를 덮은 면 티셔츠의 감촉과 남편의 목소리도 기억났다

   

 “촛농 떨어지잖아.”

   

 케이크 위에서 녹아내리던 초가 갑자기 남편의 몸처럼 느껴졌다곧이어 거대한 파도가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환영을 보았다막을 수 없는 파도였다

   

   

  2.

   

  낮잠이라도 자고 깬 것처럼 승훈이 눈을 떴다유영이 승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승훈은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유영은 승훈의 얼굴 쪽으로 손을 뻗다가 무안해서 손을 거두었다아무래도 남편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것 같았다.

   

 “여보나야괜찮아…….”

   

 승훈을 안심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말하자마자 유영은 알았다자신은 괜찮지 않다는 걸승훈은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유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긴 어디지뭐가 어떻게 된 거야.” 

   

 지저분한 가운을 입은 의사가 승훈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승훈의 뇌를 냉동했던 의사가 아니었다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승훈도 유영도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혼잣말이었다유영이 말했다

   

 “저랑 얘기 좀 하시죠.”

   

 유영은 우두커니 서 있는 남자 간호사에게 잠시 부탁한다는 눈짓을 하곤 병실을 나섰다승훈은 유영을 따라나서는 의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의사는 엉덩이에 달린 금속 꼬리를 바닥에 일부러 부딪쳐 탕탕 소리를 냈다

   

 보통 때라면 의사가 고객인 유영을 안내했을 터였다유영은 의사보다 앞서서 복도를 걸어갈 만큼 마음이 급했다복도에는 낡은 문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해동된 사람들은 저 안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방금 스쳐 지나간 문 안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유영은 그 웃음소리가 자신을 비웃는 소리 같다고 느꼈다남편의 해동이 자꾸 미뤄지면서 생긴 증상으로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길에서 웃음소리를 들으면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 해동을 의뢰했던 상담실에 도착했다유영이 홱 돌아서며 따지듯이 물었다

   

 “기억을 못 하다뇨?”

   

 “냉동 당시에 상황이 급박했다면서사고 후 냉동한 거라면 치료할 시간조차 없었을 거 아니야해동하면서 나노 로봇을 투입하긴 했지만 그쪽을 못 알아보는 걸 보니 기억 일부가 사라진 것 같아이런 말을 여기까지 와서 해야 하나거기서 하면 되지.”

   

 유영이 얼굴을 찌푸렸다

   

 “환자가 듣잖아요.”

   

 “깨어난 것만도 감지덕지해야지.”

   

 “반말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의사는 유영의 말에 답하지 않고 손목에서 시간을 확인한 후 자기 할 말만 했다

   

 “내일 오전까지 퇴원해다음 환자가 예약돼 있으니까.”

   

 유영이 더 말을 붙여볼 틈도 없이 의사는 꼬리 끝으로 방문 손잡이를 열고 나갔다꼬리로 복도 벽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유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돌아가서 남편의 상황을 살펴봐야 했다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까스로 마음을 가라앉혔다걸어왔던 복도를 되짚어 남편에게로 돌아가면서 이번엔 또 어떤 문 안에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들었다유영은 그것이 가족의 해동에 성공한 사람들이 기뻐서 우는 소리이고 자신은 영영 그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그녀의 사고가 점점 왜곡되어갔다

   

 병실 앞에 다다르자 남편의 비명소리가 들렸다목 아래로는 모두 기계라는 걸 알게 된 것이 분명했다유영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간호사는 별 수 없다는 듯이 승훈을 쳐다보다가 유영이 온 것을 보곤 이제 모든 것이 유영의 책임이라는 듯 병실에서 나갔다승훈은 선 채로 유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유영도 오른쪽 눈과 귀가 기계였고 얼굴왼쪽 팔뚝을 제외한 모든 몸이 금속이었다금속들의 색깔과 재질이 서로 달라서 마치 누덕누덕 기운 옷처럼 보였다

   

 유영은 남편이 자신을 못 알아봐도 상관없다고의사의 말마따나 깨어났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승훈이 유영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로 말했다

   

 “유영… 당신이야?”

   

 유영이 새어 나오는 울음과 웃음을 두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떻게 된 건지 말해주겠어?”

   

 유영은 밤새도록 승훈에게 이야기해 주었다사고 후 냉동을 선택한 순간과 길게 이어지던 기다림의 시간에 대해서지진이 나서 냉각 캡슐을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했을 때 얼마나 급박했는지더 나은 기술이 개발돼 승훈을 다른 장치로 옮길 때마다 얼마나 두려웠는지를

   

 그때마다 많은 돈이 들었고 결국 자신의 늙고 아픈 몸을 바꿔야 할 때는 싼 부품을 구하거나 버려진 부품들을 주웠다고 했다유영에게는 심장위장 등의 장기가 없어서 음식을 먹을 필요도 없었다.

   

 “보기에 어떨지 몰라도 이 몸 덕분에 백 년 동안 당신을 지킬 수 있었어깨어나 줘서 고마워보고 싶었어.” 

   

 승훈은 백 년이 지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자신이 냉동된 사이 인류는 사이보그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했다사고를 당했을 때가 서른 살그렇다면 아내는 130살이었다. ‘나는 몇 살인 거지?’ 말을 하지 못하다가 승훈이 겨우 입술을 떼고 한 말은

   

 “기다리기 힘들었겠다.”

   

 “나도 냉동할까 생각한 적이 있어당신과 함께 깨어나고 싶어서그런데 법적 사망자만 할 수 있다는 규제 때문에 하지 못했어나중에 규제가 풀렸지만 지진 때문에 당신을 옮길 때 깨달았어나는 두 눈 똑바로 뜨고 당신을 지켜야 한다는 걸내가 냉동시킨 거니까 해동까지 책임져야 하는 거잖아당신을 두고 가버릴 순 없었어그게 어디든.”

   

 결정적인 순간에 사이보그가 되길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했다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미(의식이나 더 나은 신체적 능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사람들은 거침없이 몸을 기계로 바꾸었지만 장기와 혈관까지 모두 인공으로 바꾸어 예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명이 늘어나는 기점에서는 선택하기를 마다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승훈은 낯선 아내의 얼굴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아내의 남은 피부에 주름이 깊었다승훈은 혼란스러웠지만 지금껏 자신을 지킨 아내를 생각해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둘은 이제 사이보그였다

   

 날이 밝았다둘에게는 특별한 아침이었다유영은 자신의 왼쪽 팔뚝에 망토를 덮었다남편에게 헬멧을 씌워주고 자신도 썼다그리고 남편의 기계손을 꼭 잡고 불법 해동센터에서 나왔다

   

 승훈은 아내의 손에 이끌려 해동센터에서 나오자마자 반짝이는 것들을 보았다떠다니는 검은 입자들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곧 철가루가 기계 몸을 긁는 소리가 났다철가루가 섞인 바람이대로 가도 괜찮은지 물어보려고 아내를 쳐다보았다아침 햇빛에 아내의 몸이 더 자세히 보였다알루미늄 합금 허벅지구리 종아리티타늄 뼈대스테인리스와 실리콘으로 된 손과 발군데군데 녹이 슨 철외장 없이 드러난 금속 부품들아내의 몸에서도 철가루가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승훈은 묻지 않기로 했다

   

 아내의 몸에 외장이 없다는 건 다른 사이보그들을 보고 알았다균일한 색으로 매끈하게 외장 처리가 된 사이보그일수록 정교하고 튼튼해 보였다붉은색 치마 정장을 입고 허리에 금속 허리띠를 맨 여자는 오른쪽 무릎에서부터 발끝까지가 기계였다뭉툭한 발끝은 소의 발처럼 가운데가 갈라져 있었다뼈가 몸 밖으로 나온 것처럼 금속을 세공해 디자인한 사람도 있었고 온몸에 형광등이라도 단 것처럼 빛이 나는 사람도 있었다투명한 해골 안에 뇌를 넣은 사람도 있었다

   

 “여기선 몸을 기계로 더 많이 바꾼 사람일수록 능력 있고 돈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지 않으려고 자기 몸을 로봇으로 만들었다지게차가 되어 무거운 짐을 나르고높은 곳에 오르려고 다리를 사다리로 만들고먼 곳을 보려고 눈을 망원경으로 만들고계산을 잘하려고 뇌에 컴퓨터 칩을 심었다몸에서 바퀴가 나와 자동차처럼 굴러가는 사람등에서 날개를 펼쳐 허용된 고도까지 날아오르는 사람도 있었다

   

 원하는 대로 몸을 개조한 사람들 사이에서 승훈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자신의 몸은 이곳에서 그리 멋있는 몸이 아니라는 걸좀 더 걷다가 다른 것도 알게 되었다자신의 몸은 보급형 구형 모델이라는 걸자신과 똑같은 몸을 가진 사람들을 벌써 여럿 지나친 것이다

   

 승훈의 몸은 검은색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관절마다에 둥근 부품이 장착되었고 등과 배에는 퍼즐 조각들의 이음매와 같은 선들이 보였다팔과 다리의 곳곳에 볼트와 나사들이 박혀 있었고허리에는 등산용 카라비너처럼 생긴 금속 고리들이 허리띠처럼 둘러져 있었다무슨 도구이든 걸기에 편리해 보였다

   

 보급형 몸들은 이곳에서 보수공이라고 불렸다각종 재해로 파손되고 무너진 시설물들을 보수하는 사람들이었다태풍쓰나미화재지진화산 폭발……지구는 들썩였고 도로항만발전소통신시설마다 보수공들이 달라붙어 고쳐 놓았다사람들은 보수공이 일하는 모습이 개미와 닮았다며 그들을 개미떼라고 불렀다

   

 승훈은 자신의 허벅지에 길게 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왜 이런 거지?’ 승훈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내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앞을 보고 걸었다컨테이너 박스들이 죽 늘어선 길에 다다랐다낡은 창고들 같았다

   

 “집에 다 왔어.”

   

 승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간이로 낸 문에는 잠금장치조차 없었다낡은 식탁과 의자작은 냉장고가 보였고 구석에 폐 부품들이 쌓여 있었다유영이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쳤다

   

 유영은 냉장고에서 작은 유리병 두 개를 꺼내고 식탁에 딸린 서랍에서 주사기 두 개를 꺼냈다비닐 포장을 벗긴 주사 바늘을 유리병에 꽂으며 유영이 승훈에게 말했다

   

 “항거부제야하루에 한 번씩그렇지 않으면 생체와 금속 사이에 종양이 생기거나 피부가 검게 변하기도 해영양제는 뇌를 위한 거고.”

   

 승훈은 의자에 앉아서 잠자코 유영을 바라보았다유영은 시범을 보인다는 듯이 먼저 생체로 남아 있는 자신의 왼쪽 귀 아래에 주사 바늘을 두 차례 찔러 넣었다곧 승훈의 귀 아래에도 주사 바늘을 찔러 넣었다주사를 맞은 후 승훈이 말했다

   

 “거울을 볼 수 있을까아직 얼굴을 못 봤어.”

   

 유영은 서랍에서 손거울을 꺼내 승훈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대로야두개골도 뇌와 함께 보존했거든.”

   

 승훈은 거울을 얼굴 높이로 들어 올렸다아내의 말이 맞았다냉동 이전과 같은 이목구비였다하지만 바로 알 수 있었다인공 피부를 성형한 것이란 걸아내의 얼굴 피부와는 달리 너무나 매끈해서 아내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 보였다그는 식탁에 거울을 내려놓았다.

   

 어지러웠다잠이 몰려왔다긴 세월 차갑고 외롭게 잠들어 있었으니 오늘은 포근하게 잠들고 싶었다이불이 어디에 있는지 찾았다유영은 승훈에게 사이보그는 이불 없이 서서 잠을 잔다고 했다

   

 승훈은 꿈을 꾸었다한 아이가 감옥에 갇혀 있었다아이를 감옥에서 꺼내 주려고 다가가 손을 뻗었는데 자신에겐 손이 없었다내려다보니 발도 없었다기이하게 머리만 허공에 붕 뜬 채로 무력하게 아이를 바라보았다그러는 사이 아이는 붙잡고 있던 검은 창살과 같은 색깔이 되어 굳어버렸다승훈은 잠에서 깼다

   

 머릿속에서 꿈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유영은 곤히 자고 있었다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른 시대에 도착해버린 승훈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라고 걱정했다아내를 위해서라도 빨리 이 몸에 적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훈은 밖으로 나가려고 조금씩 움직였다아내를 깨울까봐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했다천천히 식탁 의자로 다가가 망토를 집어 들었다사람들이 자기 몸을 쳐다보는 게 싫어서였다어깨에 망토를 두르고 문 앞으로 걸어가자 바닥에 헬멧 두 개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승훈은 허리를 숙여 헬멧을 집어 들었다헬멧까지 쓰고서야 그는 컨테이너 집을 나섰다발목까지 내려오는 망토가 흔들렸다

   

 컨테이너 박스는 녹슬어 있었다도시 전체가 삭아가는 것이 보였다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철가루들이 반짝거리며 승훈의 몸을 스쳤다승훈은 자연스럽게 걸으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저 앞에서 머리에 뿔이 난 사이보그가 마주 걸어왔다의기양양한 걸음걸이였다헬멧 전면에 위험이라는 빨간 글씨가 떴다승훈은 영문을 몰라 그저 멈춰 섰다

   

 뿔이 난 사이보그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선형으로 회오리치는 모양으로 세공한 금속 뿔이 자세히 보였다팔뚝보다 긴 길이에 끝이 뾰족했다그는 승훈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를 스캔하듯이 쳐다보았다승훈은 먼저 시선을 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그와 얼른 멀어지고 싶었는데 걸음이 느려 답답했다곧 위험이라는 글씨가 사라졌다뒤돌아보니 그가 사라지고 없었다

   

 한참을 걸었다골목마다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처음 몇 번은 골목을 그냥 지나쳤다그런데 갈수록 골목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숫자가 많아졌다승훈은 멈춰 서서 골목의 안쪽을 바라보았다어두웠다뒤에 오던 사람이 승훈과 부딪치더니 바닥에 침을 뱉고 지나갔다마치 더러운 것이 묻었다는 듯이 자기 몸을 툭툭 털면서승훈은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에 숨은 사람들이 겁을 먹은 것 같았다그들은 몸을 웅크리며 승훈을 올려다보았다눈가에 진물이 흘러 눈자위가 지저분했다바닥에는 한 남자가 등을 보이며 옆으로 누워 있었고 열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바닥에 누운 사람을 보호하듯 둘러앉아 있었다승훈은 헬멧을 벗고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그들 모두 기계 몸이 아니었다생체였다

   

 “저 사람 아파요?”

   

 누운 남자를 가리키며 한 말에 다들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병원에 가야 하지 않아요?”

   

 한 소년이 대답했다

   

 “갈 거야.”

   

 “해가 지기 전에 가지왜 여기 있어요?”

   

 소년의 곁에 앉은 할머니가 승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냉동인간인가?”

   

 승훈은 움찔했다

   

 “말씨가 다르네모르는 것도 많고 질문도 많고.”

   

 승훈은 들키고 싶지 않은 걸 들킨 사람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피부 신경이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사이보그야 햇빛을 견디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해해가 지면 갈 거야.”

   

 철가루와 강한 자외선……그랬다기계 몸이 아니면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우리는 파라다이스로 갈 거야.”

   

 소년은 계속 반말로 말했다

   

 “천국에 간단 말이니?”

   

 소년은 왠지 신이 나서 승훈을 가르치듯 말했다

   

 “메타버스 몰라메타버스를 파라다이스라고 부르잖아거기서는 몸이 없어도 살 수 있어.”

   

 소년은 등 뒤에 누운 남자를 돌아보더니 희망에 찬 얼굴이 되었다

   

 “울 아빠도 오늘 해가 지면 파라다이스에 가.”

   

 메타버스라면 승훈도 들어본 적이 있었다가상현실이 계속해서 발전하면 헤드셋을 끼고 게임을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이버 공간으로 이주하게 될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었다자신이 냉동되기 전에 들었으니 벌써 백 년도 더 된 얘기였다그런데 그 메타버스가 여기선 실현된 모양이었다

   

 “메타버스에는 지금 모습 그대로 가는 거니?”

   

 승훈은 질문이 정확하지 않은 것 같아서 손가락으로 소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그 몸 그대로 가는 거니?”

   

 소년이 화를 냈다

   

 “그럼 우리 아빠는 계속 아프란 말야?! 말했잖아몸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알았다.”

   

 ‘메타버스로 이주하면 저들의 생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몸은 현실에 남는 건지남는다면 그 몸은 산 건지 죽은 건지메타버스 속 세계는 진짜인 건지 가짜인 건지이곳 사람들은 다 아는 걸 자기만 모르는 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승훈은 일어섰다소년과 사람들이 망토가 벌어진 사이로 기계 몸을 바라보았다부러워하는 눈길이었다승훈은 망토를 보는 줄 알고 망토를 벗어서 소년에게 건넸다소년이 불쾌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손을 저었다

   

 “필요 없어우린 파라다이스에 갈 거니까.”

   

 “잠깐이라도 아버지를 덮어드리라고.”

   

 소년은 주저하다가 망토를 받았다승훈은 소년의 시선을 받으며 골목을 빠져나갔다기계 몸이 없는 사람들이 메타버스에 희망을 품은 걸 보고 승훈은 궁금해졌다. ‘저들이 파라다이스라고 부르는 게 혹시 사이비 종교 같은 건 아닐까.’ 승훈은 다시 헬멧을 쓰고 강한 햇빛 아래로 걸어 나갔다

   

 얼마 걷지 않았는데 멀리서 거대한 무언가가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거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벽 쪽으로 붙어 섰다. ‘저건 또 뭘까.’ 승훈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이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오늘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승훈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몸을 사람들 사이에 끼워 넣느라 애를 먹었다사위가 조용해졌다

   

 철가루 때문에 타닥거리는 바람소리가까이 다가오는 건 회백색의 몸이었다승훈의 눈과 입이 크게 벌어졌다지금껏 보아온 사이보그 중에서 가장 키가 컸다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하반신은 말상반신은 남자의 몸이었다머리에는 산양처럼 둥글게 말린 굵은 뿔이 자라나 있었다울룩불룩한 근육질인 데다 상반신과 하반신 모두 균일한 회백색이라서 마치 켄타우로스 조각상처럼 보였다뼈대와 근육핏줄이 툭 불거져 나온 곳마다 승훈의 시선이 머물렀다승훈은 압도되었다

   

 켄타우로스가 승훈 앞에 멈춰 섰다승훈이 그의 그림자에 잠겼다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고개를 숙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승훈은 아차’ 싶었다

   

 켄타우로스의 모습을 한 사이보그가 근엄하게 승훈을 내려다보았다손에는 긴 창을 쥐고 있었다승훈은 다른 사람들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아내를 위해 얼른 이 사회에 적응하고 싶어 나온 건데아내가 없으니 위험한 외출이 되어버렸다

   

 켄타우로스는 앞다리를 치켜 올렸다사람들 사이에서 낮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쿵-

   

 바닥을 지친 말발굽이 은색으로 빛났다승훈의 우러러보는 시선을 즐긴 거대한 사이보그는 다시 가던 길을 갔다사람들도 웅성거리며 다시 벽에서 떨어져 나와 제 갈 길로 흩어졌다

   

 승훈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위압적이고 기괴한 사이보그인데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계로 저 강력한 존재를 만들다니.’ 불법 해동센터에서 보았던 금속 꼬리나 길에서 보았던 금속 뿔이 저 사이보그를 따라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승훈은 군중들 사이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벽에서 등을 뗐다켄타우로스가 자신을 구경하듯 쳐다보고 간 표정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내가 모멸을 당한 걸까.’ 승훈은 이제 막 태어나는 낯선 감정이 어떤 것인지 헷갈렸다켄타우로스가 사라진 쪽으로 멍하니 몇 걸음쯤 걸었을까등에서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돌아보지 마.”

   

 승훈은 동작을 멈췄다

   

 “멈추라고는 안 했어계속 걸어.”

   

 승훈은 무슨 일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한테선 훔쳐갈 게 없는데.’

   

 “여기서 돌아.”

   

 승훈은 등 뒤에 느껴지는 날카로운 감촉을 떨쳐내지 못하고 모퉁이를 돌았다아까 그 골목이었다어둠 속에 숨어있던 사람들은 벌써 사라지고 망토는 버려져 있었다골목 끝에서는 해가 지고 아무도 골목 안을 들여다보지 않았다뒤에서 승훈을 밀었다서너 걸음쯤 아무렇게나 튕겨져 휘청거렸다헬멧이 벗겨져 바닥에 떨어졌다그제야 헬멧 안에 위험이라는 글씨가 떴다승훈은 겨우 균형을 잡으며 뒤돌아섰다

   

 금속 뿔을 달고 있던 그 사내였다

   

 “이제야 찾았네중간에 놓쳐서 얼마나 짜증이 났다고.”

   

 골목을 비집고 들어온 석양이 사내의 몸을 비췄다여러 가지 금속들을 조합해 만든 조악한 몸이었다어쩔 수 없이 아내가 떠올랐다볼은 피부가 뜯긴 것처럼 안쪽의 금속 뼈가 들여다보였다승훈을 훑어보는 사내의 두 눈에 빨간색 불이 들어왔다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데요.”

   

 “잘못 보긴내가 내 몸도 못 알아볼까 봐?”

   

 승훈은 뭔가 크게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도대체 이 낡은 몸을 어디다 쓰려고 훔쳤나 했더니 너한테 갖다 붙였구나참 급했던 모양이야허벅지에 난 상처도 그대로네도둑년.”

   

 “이 몸이 그쪽 거라고요?”

   

 “그럼네 거야말해봐네 거냐고.”

   

 승훈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냉동에서 깨어날 때부터 자신은 이 모습이었다당연히 주어지는 몸이라고 생각했다아내가 어디서 구해온 몸일 거라고는더구나 훔쳐온 몸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아내가 자신의 몸을 싼 부품으로 교체하며 살아왔다고 했으니자신의 몸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닐 텐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시간 낭비하지 말자.”

   

 그는 원을 그리듯 양팔을 들어 올려 머리에서 뿔을 뽑았다나선형 뿔이 빠르게 돌아갔다

   

 위잉

   

 “내 몸만 가져갈게목 아래로난 도둑놈이 아니니까.”

   

 뿔의 톱날이 회오리치며 승훈에게 다가왔다승훈의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채로 고함을 지르고 발버둥을 쳤지만 그럴수록 뇌가 더 위험해질 거라고 사내는 경고했다

   

 승훈은 움직이기를 포기하고 눈앞에서 튀어 오르는 파란색 액체를 바라보았다. ‘아내는 어떤 일들을 겪고 변해버린 걸까.’ 위급한 상황에서 이런 생각을 한다는 건 나쁜 신호였다승훈의 뇌가 몸과 분리된 상태여서 통각 신호를 받지 못하고 그래서 최소한의 저항 행위도 하지 못한 채 생각 속으로만 잠겨 들어간다는 걸 뜻했으니까

   

 사내가 톱날을 털어 액체를 떨구더니 머리에 다시 꽂았다그리고 방금까지 승훈의 몸이었던 것을 질질 끌고 골목을 빠져나가려고 했다역광 속에서 사내는 켄타우로스사이보그보다도 더 무시무시해 보였다승훈은 몸이 없어서 남자를 쫓아갈 수조차 없었다눈동자만이 하릴없이 움직였다

   

 그때였다골목에서 만났던 사람들이 나타나 순식간에 사내의 손과 발을 결박하고 승훈의 몸을 빼앗았다. ‘이제 살았다.’라고 승훈이 안심하려는 순간그들이 사내의 뿔을 뽑아 사내의 머리를 잘라내고 골목 안으로 던져버리는 것이 보였다머리가 데굴데굴 굴러 승훈의 눈앞에서 멈췄다

   

 생체를 가진 그들은 밤이 되자 날렵한 몸짓으로 기계 몸 두 개와 뿔을 훔쳐서 달아났다머리만 남은 사내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눈에서 서서히 불이 꺼지는 것이 보였다승훈은 사내의 꺼진 눈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백 년 전의 결혼기념일케이크에 꽂았던 초들에서 작은 불꽃들이 흔들리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타들어가다 마침내 촛농으로 녹아내린 초들. ‘내 목숨은 그때 끝났어야 하는 게 아닐까.’ 승훈의 두부(頭部신경 또한 서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남편을 찾아 헤매던 유영이 골목에 들어섰다유영은 말없이 버려진 망토를 주워 남편의 머리를 감싸 품에 안았다그녀는 사내의 머리 또한 알아보았다사내의 머리가 자신을 향해 울고 웃는 환영을 보았다그 울음과 웃음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졌다그녀는 남편을 살리기 위해 사내에게서 몸을 훔쳤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매몰차게 사내로부터 돌아섰다

   

 유영은 머리만 남은 남편을 어떻게든 또 살려보려고 불법 해동센터를 다시 찾았다의사의 더러운 가운은 그대로였다

   

 “말했잖아몸이 있어야 한다고.”

   

 “임시로라도 어디에 연결해 주세요.”

   

 “그건 뭐 돈이 안 드는 줄 아나 보지?”

   

 “당신이 해동한 환자잖아요제발요이렇게 보낼 수는 없어요.”

   

 잠시 생각하던 의사가 선심이라도 베푼다는 듯이 말했다

   

 “보기에 딱해서 말해주는 거니까 잘 들어지금 그쪽이 선택할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야뇌의 정보들을 코드화해서 메타버스 시험버전으로 업로드 하는 것이마저도 모르면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냥 끝인 거지.”

   

 기시감유영은 남편의 냉동을 선택할 때 의사 앞에 앉아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마인드 업로딩 말이에요?”

   

 “맞아알아듣는군메타버스에선 뭐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서 파라다이스라고 불리지.”

   

 유영은 또다시 파도가 자신을 덮쳐오는 환영을 보았다이번에도 막을 수 없는 파도일까. ‘이제는 멈춰야 하지 않을까차라리 이쯤에서 남편을 놓아줘야 하는 게 아닐까.’ 

   

 “메타버스라면… 생체 인간들이 거기서 실종됐다고 하던데요.”

   

 “뜬소문이지그 인간들이야 철가루가 박히고 햇빛에 타들어가고어차피 여기서 살기 힘들잖아실종된 게 아니라 잘 살고 있으니 소식이 없는 거야나도 갈까 해.”

   

 의사가 빙긋 웃었다

   

 “시험버전이면 다시 돌아와야 하나요?”

   

 “돌아와야 하는 건 아니야원한다면 거기서 계속 살 수 있어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가는 선발대인데 그 정도 혜택은 줘야지.”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데요?”

   

 “시간 지각의 변화.”

   

 유영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

   

 “메타버스 시험버전에서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보려는 거거든사람들이 시간을 어떻게 인지하는지도사이보그들이 좀처럼 지원을 안 하니까 냉동인간을 해동하는 우리한테까지 의뢰가 왔지내 생각엔 사이보그 하고 냉동인간은 몸이 다르니까 시간도 다르게 인식할 것 같은데모르지어떻게 될지는그런 위험을 말하는 거야시간을 지각하는 방식이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어.” 

   

 유영은 어떻게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의사가 진지하게 말했다

   

 “이승훈 씨는 지금 죽어가뇌의 몇 퍼센트나 옮길 수 있을지 장담 못해우리야 모니터링 자료를 다운로드 받아서 연구소에 넘기는 게 일인데 이승훈 씨에게선 건질 수 있는 자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유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남편은 죽어가고 당장 연결할 몸을 구할 수도 없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여태껏 살았는데.’ ‘긴 세월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당신을 구할 수만 있다면 세상 끝까지 갈 거야.’ 유영 안에서 여러 목소리가 뒤섞였다달리 방법이 없었다

 

 “남편을 메타버스로 보낼게요그리고

   

 의사가 유영의 말에 집중했다

   

 “나도 같이 갈게요.”

   

 의사는 씩 웃으며 나야 좋지.’라고 생각했다

   

 “특별히 보내주는 거야.”

   

 남편은 유영이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유영은 남편을 놓아버린다면 자신의 삶도 끝이라고 생각했다

   

 승훈의 머리 옆에 유영이 누웠다

   

 “여보우리 곧 봐.”

   

 유영과 승훈의 머리카락이 후드득 바닥에 떨어졌다둘이 누운 금속 트레이가 속을 전혀 알 수 없는 문 안으로 밀려들어가기 직전유영은 다급하게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내 몸은 어떻게 되죠?” 

   

 의사는 금속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팔아야지값이야 보내주고 싶지만 메타버스로 보낼 수 있을까?”

   


   

 3. 

   


   

 유영이 눈을 떴다안개가 가득한 공간이었다그녀는 일어나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기계 몸이 아니었다물컹하게 잡히는 살 위에 흰 무명옷을 입었고 맨발이었다시각도 촉각도 생생했다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아보았다남편이 보이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유영님파라다이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누구세요?”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목소리입니다파라다이스는 모든 주민들이 연결된 공동의 디지털 세계입니다.” 

   

 “내 남편은 어디 있죠?”

   

 “이승훈님은 김유영님과 함께 파라다이스에 도착했습니다.”

   

 “지금 어디 있어요?”

   

 “첫 번째 파라다이스.”

   

 유영의 눈앞에서 안개가 걷히더니 10개의 초를 밝힌 바나나 케이크가 나타났다바나나 향이 실재세계에서보다 훨씬 더 진하게 느껴졌다유영은 어리둥절했다승훈과 함께 나눠먹은 케이크. ‘하지만 지금 내 곁엔 남편이 없는 걸.’ 

   

 “남편이 어디에 있냐고요!”

   

 “유영님의 곁에 있습니다.”

   

 “곁에 있다고여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유영이 다시 물었다

   

 “내 남편은지금어디 있어요?”

   

 “두 번째 파라다이스.” 

   

 안개가 몰려와 바나나 케이크를 지우더니 이번에는 낡은 컨테이너 집이 나타났다집은 텅 비어 있었다남편을 해동한 후 집으로 데려간 날이 떠올랐다남편은 냉동 이전처럼 누워서 자려고 했고 유영은 사이보그들이 이불 없이 서서 잔다고 알려주었다그때 남편은 유영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곁엔 남편이 없는 걸.’

   

 유영은 말을 바꿔보았다

   

 “이승훈 씨를 찾아줘요.”

   

 “세 번째 파라다이스.”

   

 안개가 몰려와 낡은 컨테이너 집을 지우고 낯선 풍경을 보여주었다축제가 한창인 광장이었다하늘을 날며 연주하고 노래하는 사람들그보다 아래에서 사자원숭이공작새코뿔소 등의 탈을 쓴 사람들이 술을 마시며 춤을 추었다사자의 갈기와 원숭이의 꼬리공작새의 화려한 깃털이 허공에서 들썩였다그 사이로 배 한 척이 흘러 다녔는데 그 배에는 동물들의 두개골이 가득 실려 있었다뱃전에 닿을 때마다 동물들은 수시로 모습을 바꾸었다늑대와 염소까마귀고양이뱀의 머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거대한 벌들이 털과 날개를 떨어 윙윙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내려앉았다유영은 가면무도회가 열리는 공간으로 들어섰다한 손에는 술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파트너의 몸을 끌어안은 사람들이 바닥을 훑으며 춤을 추었다술잔에는 빨간색노란색초록색의 액체가 담겨 넘실거렸다유영은 메타버스에서 새로운 몸을 얻은 남편이 신이 나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상어의 가면을 벗기고 싶었지만 손이 미끄러졌다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들 모두 가면을 쓴 게 아니라 동물이나 거대한 곤충의 일부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춤을 추는 우리는 파라다이스의 주민입니다우리의 신성한 곳에는 이승훈님이 없습니다그러므로 이승훈님은 이곳분리구역 안에김유영님과 함께 있습니다.”

   

 축제 현장이 순식간에 안개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사라졌다

   

 “분리구역?”

   

 “이승훈 님파라다이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파라다이스의 목소리가 보여준 그 어떤 공간에도 남편은 없었다그런데 남편의 이름이 언급되었다모든 것이 이상했다고장 난 세계에 들어온 것은 아닌지 유영은 의심이 들었다

   

 “남편을 보여 줘요.”

   

 서서히 안개가 걷히고 긴 복도와 죽 늘어선 문들이 보였다수많은 문들이 한꺼번에 열리고 맨발들이 걸어 나왔다유영이 입은 옷과 똑같은 무명옷들문밖으로 나온 그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떻게 된 거야?!”라고 울부짖었다.

   

 문들에서 몰려나온 사람들이 유영 쪽으로 우르르 달려왔다유영은 뒷걸음질 쳤다사람들은 유영의 코앞에서 일제히 멈췄다팔이 네 개다리가 네 개인 사람들이었다

   

 불현듯이 유영은 미술관에서 비트루비우스 인간을 설명하던 때가 떠올랐다

 

 “비트루비우스는… 균형 잡힌 인체의 대칭과 비례 규칙을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면 어떤 신전도 제대로 세워질 수 없다.’… 고대인들은… 원과 사각형 안에 들어맞는 인체를 그리며 우주의 중심을 탐구한다고 여겼습니다… 원과 정사각형을 겹쳐 그렸기 때문에 마치 사람의 팔이 네 개다리도 네 개인 것처럼 보입니다…….” 

   

 메타버스에선 팔이 네 개다리가 네 개인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정말로 팔이 네 개다리가 네 개였다어떤 이들은 머리가 두 개였다유영은 머리가 두 개인 사람을 보자마자 거울을 본 것처럼 자신의 머리도 두 개라는 걸 깨달았다섬뜩했다

   

 유영과 승훈이 서로를 동시에 쳐다보았다남편의 머리는 유영의 목에 가지가 뻗은 것처럼 붙은 채로 눈을 끔뻑였다. ‘남편에게 몸을 주지 않고 내 몸에 붙여버리다니!’ 메타버스 시험버전에 들여보내는 게 큰 혜택인 것처럼 말했던 의사를 찾아가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다파라다이스의 목소리가 말하기 시작했고 모두들 조용해졌다

   

 “이곳은 분리구역입니다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파라다이스 시험버전에 들어왔던 사람들을 모아놓은 쓰레기통 같은 공간입니다여러분은 실험에 쓰인 후 버려졌습니다필요한 데이터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씩 붙어 버렸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이곳에 모아놓았습니다.”

   

 유영과 승훈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우리와는 함께 할 수 없는 의식이라고 판단했습니다당신들은 둘씩 붙어있고 우리는 모두 붙어 있으니까요그러나 이제 당신들은 인간의 원초적 의식을 회복할 수 있는 중요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계속 우리라고 말하는데 정확히 우리가 누구지?”

   

 “우리는 파라다이스 주민들이 공유하는 단일 의식의 목소리입니다파라다이스 주민들은 이미 벌집형 사고(hive mind)를 구축해서 독립적인 자아는 사라진 상태입니다그래서 우리는 우리라고 말합니다우리는 새로운 땅에서 살아갈 새로운 개체들이 필요합니다그래서 여러분을 깨웠습니다.”

 

 분리구역 사람들은 당연히 궁금한 게 많았다

   

 “새로운 땅이라니?”

   

 “지구는 연쇄 소행성 충돌로 폭발했습니다모든 생명체가 불타버렸습니다.”

   

 소란스러워졌다어떤 이들은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승훈과 유영이 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메타버스는 어디에 있지?”

   

 “메타버스는 여러 개가 출시됐습니다미리 준비하지 못한 메타버스들은 소행성 충돌과 함께 삭제됐습니다충돌 직전 파라다이스는 우주선에 실려 쏘아 올려졌고 지구를 대신할 새로운 행성을 찾아 먼 길을 떠났습니다생체 유전자 지도와 배양할 세포도 함께 싣고서 말입니다삼십 분 전행성에 알맞은 몸이 디자인되고 프린팅을 시작하기까지 천 년의 시간동안 인류는 파라다이스 안에서 의식으로만 살아 있었습니다.” 

   

 “또 우릴 가지고 실험하려는 거지!”

   

 분노한 사람들이 외쳤다

   

 “아닙니다우리는 고차원으로 건축된 의식입니다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몸도새로운 땅도 필요하지 않습니다개별적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는 지점에서 통합되었기 때문입니다당신들만이 새로운 몸으로 들어가는데 알맞게 변화한 의식입니다.”

   

 사람들이 조용해졌다의심하는 사람들이 물었다

   

 “너희에게 새로운 땅이 필요 없다면 그냥 두면 될 텐데왜 굳이 우릴 그곳에 보내려는 거지?”

   

 “우리는 시간을 설계하고 창조하니까요.” 

   

 분리구역 사람들은 창조라는 말을 듣고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에 부풀었다승훈과 유영은 침울해졌다고개를 숙이고 뚝 뚝 눈물을 흘렸다파라다이스의 목소리가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우린 이렇게 붙어버렸는데 몸속으로 한 명씩 잘 들어갈 수 있을까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떨어져만 있었어도…….”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팔이 네 개다리가 네 개머리가 두 개인 것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행성에 맞게 디자인된 몸에는 자웅(雌雄)이 붙은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고 보니 모두들 서로 다른 성()끼리 붙어 있었다비트루비우스 인간들이 저마다 네 개의 팔을 흔들며 기뻐했다팔들이 끝없이 물결 쳤다유영과 승훈이 물었다

   

 “새로운 행성을 테라포밍 한 건가?”

   

 “아니요의식 전송이 완료되면 새로운 행성에 맞게 여러분이 변화할 겁니다몸이 완성됐습니다여러분을 새로운 몸으로 전송해도 되겠습니까?”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의심하던 사람들도 분리구역에 계속 갇혀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였다두 개의 머리네 개의 머리……그 움직임이 파도처럼 퍼져 나갔다파라다이스의 목소리가 말했다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빛으로 변하더니 한 명씩 사라졌다누군가 사라지기 전에 진짜 천국일지도 몰라.”라고 말하며 웃었다

   

 유영과 승훈 차례였다둘은 마지막으로 물어볼 것이 있다고 했다

   

 “파라다이스 사람들은 어떻게 되지?”

   

 “우리는 여기서 춤을 추고 인류의 지성을 넘어서서 노래할 겁니다합창으로 말이지요언젠가 여러분과 만나게 될 겁니다.” 

   

 유영과 승훈의 몸이 빛으로 바뀌어 전송되었다

   

 유영-승훈이 동시에 눈을 떴다자주색 평야 위로 네 개의 태양이 떠 있었다유영-승훈은 햇빛을 보자마자 눈에서 싹을 틔웠다생체시계가 빠르게 째깍거렸다초록색 줄기가 뻗어나가더니 돌돌 말린 이파리가 펼쳐져 넓적해지고 도톰해졌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새로운 땅에 착륙한 우주선은 구 모양이었다구를 뚫고 나온 빛이 연달아 번개처럼 땅에 박혔다곳곳에서 눈을 떴고 눈에서 싹을 틔웠다덩굴들이 솟아나 엉클어지고 굵어진 몸 속 물관에서 물이 흘렀다어떤 눈은 신전의 기둥과도 같은 나무가 되려고 뿌리를 내렸다쑥 쑥 자랐다자주색 땅에 산소가 차오르기 시작했다하얗고 노랗고 붉은 꽃들이 팡 팡 터졌다.

   

 유영-승훈은 몸 속에서 파도가 살아 움직이는 것을 느꼈다그건 더 이상 환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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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