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꿈의 중첩 1

2018년 3월 통권 150호

1.

잠에서 깬 P선생은 하루가 두 갈래로 갈라진 것을 깨달았다. 삶과 꿈으로, 혹은 꿈과 삶으로. (과연 어느 것이 꿈이고 어느 것이 삶이라고 단정해서 구분할 수 있을까, 만일 꿈과 삶이 동시에, 매 순간마다 함께 펼쳐진다면? 겹쳐진다면?)


아내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난 P선생은 거실에 나와 물을 마셨다. 비쩍 마른 노란 고양이가 어디선가 나타나 등으로 뛰어오르더니 어깨 위에서 냥냥거렸다. 알았어. 텅 빈 그릇에 사료를 덜어주고 베란다 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베란다에 나가 계단식 텃밭 화분마다 물을 주고 고양이 모래상자를 치운 다음 손을 씻고 돌아와 식탁 위의 워드프로세서를 다시 켰다. 그 순간 다시 삶과 꿈이 다시 뒤섞였다. 고양이? 무슨 고양이? 무슨 텃밭? 다시 바라본 베란다 바깥은 온통 회색 풍경청회색 새벽하늘 아래 회청색 고층 아파트 그림자들, 피로에 지친 누런 가로등 불빛과 벌써 줄지어 달리기 시작한 출근길 자가용들의 창백한 전조등과 불길한 정지등 불빛들로 얼룩져 있었다. 아니, 무슨 아파트? 무슨 자가용? 현기증 속에서 식탁을 짚고 낡은 노트북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희뿌연 전자 잉크 패널 너머로 혹은 환한 LCD 모니터 너머로 지난밤에 썼던 원고들이 두 가지 내용으로 떨리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게 P선생이 정말로 쓴 걸까? 식탁 너머에서는 어느새 일어난 아내가 P선생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 손을 내밀고, 혹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고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왜 그래? 어디 아파? 다행히도 아내의 말은 하나로 들렸다. 그렇지만 P선생은 여전히 식탁을 짚은 채 흔들리는 팔뚝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불행히도 아내의 목소리는 하나로 들리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걱정을, 한편으로는 냉소를 담아서 흔들리고 있었다.


 

새벽과 아침의 갈림길에서 p선생은 혼란스러워하면서도 어쨌든 출근은 했다. 한편으로는 뒤이어 거실로 나온 아이와 라디오를 들으며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함께 집을 나선 기억과, 다른 한편으로는 아내도 아이도 여전히 자고 있는 어두컴컴한 거실에서 혼자 주스 한 잔을 마시고 조용히 이를 닦고 옷을 갈아입고 나온 기억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도대체 어느 쪽이란 말인가, 무엇이 진짜란 말인가. 길거리도 온통 혼란과 혼돈이 휘몰아치고 있다. 사위가 아직 어둑하고 창백한 눈알 같은 새벽해가 죽은 거인들처럼 침묵하는 고층 빌딩들의 어두운 그림자 사이로 빛나는가 하면 어느 순간 길거리는 아침 햇살 속에서 다채로운 건물과 가게들 앞의 폭넓은 보도를 여유 있게 걷는 사람들과, 이따금 좁은 차도를 지나가는 전기 버스와 트럭들로p선생은 문득 그날의 수업을 확인하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가 현기증이 더욱 거세어지는 것을 깨닫고 서둘러 다시 호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어떡하지? 시간표는 한편으로는 주당 20시간 수업에 그 중 나흘은 또 70분짜리 보충수업이 추가된 살인적으로 촘촘한 시간표와 다른 한편으로는 주당 8시간 수업의 적당하고 정상적인 시간표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수업을 끝낸 거지? 오후에 도서관으로 향하며 새삼스럽게 P선생은 의문했다. 교문을 들어서서 줄지어 등교하는 학생들 틈에서 인사를 주고받으며 걷는 동안 세상의 떨림이 가라앉고, 모든 것이 꿈만 같은 가짜 기시감도 꿈결처럼 사그라들었었나? 3교무실에 들어가 먼저 온 선생님들에게 인사하며 녹차 한 잔을 따라 자리에 앉았던 게 맞나? 수업 종이 울리고, 1교시 수업이 있는 선생님들이 일어나 각자 교실로 가는 것을 보며 가방에서 수업 자료를 꺼내서 천천히 2교시 수업 준비를 시작했던 기억이 과연 사실일까?


2교시 '소설의 이해' 수업에서는 김승옥의 '평양 1964년 여름'을 읽었다. 학생들이 작품에 반영된 북한의 정치적 상황을 읽어내기 힘들어 해서 P선생은 다음 시간에 역사 선생님이나 사회 선생님과 통합 수업을 알아보기로 하고 수업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5교시 '현대시와 사상' 수업에서는 마지막 모둠 발표와 토론을 진행한 다음, 개인 발표 주제들을 수합했다. 교무실에 돌아와 훑어보았더니 안전하고 나태한 선택들도 많았지만 수업 의욕이 높아지는 야심찬 주제들도 간간히 보였다 : '' 이후 김수영의 생태주의 시, 기형도의 90년대 후반 시의 정치적 함의, 진이정의 밀레니엄 이후 시편과 우파니샤드오늘은 끝나고 도서관에 들러야겠는걸, P선생은 계획서 주제들을 메모리한 다음 가방을 쌌다. 아직 수업 정리가 남은 선생님들에게 인사하고 3교무실에서 나온 P선생은 계단을 내려오다가 2교무실에서 나오던 나이 많은 경제 선생과 마주쳐 가볍게 인사했다. 경제 선생은 어딘가 꿈에 잠긴 듯한 눈길이었고, 그러자 한 박자 늦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꿈속에서 자기만의 꿈을 꾸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서로의 꿈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우리의 꿈은 비로소 현실로 엮이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뒤를 잇는 의문 : 만일 그렇다면 저 선생님은 어떤 꿈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어떤 꿈속에서 살고 있는 걸까?

 


도서관? 무슨 도서관? 교문을 나서자 다시 흐릿한 지난 꿈의 파편들이 p선생의 의식 위로 엄습한다. 끼어드는 세계에서 도서관은 다만 고시 공부와 취업 준비를 위한 영혼 없고 자릿세 없는 책상들의 건물일 뿐, 거기서 책들은 구차한 장식물에 불과하다. 아니야. p선생은 진저리친다. 그렇지 않아. 그래서는 안 돼. 어쩌면 의지만으로 세상의 떨림을 멈추고 그가 원하는 세상으로 현실을 고정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듯이. 그러나 혼란은 계속된다. 수업 자료를 찾아 대학 도서관으로 가는 길 내내. 그 대학의 이전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서울마다 종합대학은 대개 하나씩만 있다. 인구 비율상 그 정도면 적당하다. 5서울에 있으니 정식 명칭은 5서울대학교이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냥 대학교라고 부르고, 대학 정문 정류장 이름도 그냥 '대학 앞'이다. 서울 네트워크의 대학들은 서로 큰 차이가 없이, 학생과 교원들은 서로 자유롭게 교류한다. 그리고 대학 시설은 모두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다. 경쟁과 선별, 배제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했던 지난 시기에는 대학마다 정말로 스스로를 시민 사회로부터 단절하여 가치를 높이고자 했지만(어떤 가치?) 경쟁과 선별, 배제의 주체가 될 수 있는 가치. 그 시기의 대학들은 그러한 가치를 얻기 위해 교육과 연구 대신 홍보와 투자에 치중하고 학생들을 어린 나이부터 경쟁시키고 선별하여 뽑고, 학생은 학생끼리, 교수는 교수끼리 끊임없이 경쟁시키고 선별하며, 지역 사회와 일반인을 배제하였으나그러나 경쟁과 선별, 배제의 체제 속에서는 누구도 주체일 수 없었으며, 대학도 스스로를 학생과 학부모, 기업과 정부에 판매하는 상품으로서 경쟁과 선별, 배제의 또 다른 대상이 되었을 뿐이었다. 무너지는 벽 속의 또 하나의 금간 벽돌일 뿐이었다. 그러나 '대합의' 이후 대학은 이제 그 본연의 교육과 연구 기능에 집중하는 한편 지역 사회의 일원으로 도서관을 포함한 모든 시설을 지역에 개방하고, 그럼으로써 자연스럽게 사회로부터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다. 적어도 지금, P선생이 세계의 떨림 속에서 흔들리며 들어선 대학 캠퍼스는

 


대학 캠퍼스는 한적했다. 오후 3시의 노란 햇살이 대학 건물들 사이 잔디밭을 나른하게 비추었고 어디선가 포크 기타 연주가, 강의가 끝나서 떠들썩하게 강의실을 나서는 한 무리의 학생들의 대화와 웃음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세속을 초탈한 분위기유예된 인생을 즐기는 젊은이들, 시간이 멈추어 참으로 아름다운 곳. P선생은 캠퍼스 중앙의 큰 길을 따라 올라가며 왼쪽의 도서관 건물로 향하다가 문득 어느 강의동인가 연구동 2층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시선과 마주쳤다. 그를 내려다볼 이유가 있었을까? 그냥 캠퍼스를 내려다보는데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거겠지. 그렇지만 P선생은 유난히 그 시선이 기억에 남았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학자풍의 그 남자는 어딘가 자신만의 꿈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아직도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김수영의 후기작들, 교통사고 이후 회복 과정을 통해 나타난 변모에 대한 근래의 연구들과 기형도를 중심으로 한 90년대 시단의 주된 경향에 대한 책들을 찾아보고, 필요한 부분은 메모패드에 메모리한 다음, 온 김에 지금 작업 중인 원고를 위한 참고자료들도 더 찾아보았다. P선생이 쓰고 있는 소설은 일종의 대체 역사를 통한 디스토피아물이었고, 우리 사회가 지금과 다른 방향으로 변화했다면정확히는 '대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위해서는 9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의 사회상이라든가 해외의 다른 고도 자본주의 국가들의 사회상을 참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P선생도 조심하는 바였지만, 자칫하면 현 체제를 옹호하는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는 성격의 주제였기 때문에, 학술 논문에서는 크게 도움이 될 만한 자료가 없었다. 꺼림칙했지만, 정부의 홍보처에서 나온 간행물들이 제일 도움이 됐고, 그밖에는 학술 단말기에서 여러 언론사들의 해외 기사들을 이리저리 검색해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래도 도서관을 나왔을 때는 슬쩍 날이 저물고 있었다. 오래된 전력난으로 캠퍼스는 특히 더 어두웠고 인적도 없었다. 이따금 대학 경찰이 순찰을 돌기 시작한 모습만 보였다. 대학 교문을 빠져나온 P선생은 몇 정거장 안 되니 그냥 걸어갈까, 망설이다가 피곤하다는 핑계에 기대어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버스에 앉아 있으려니 P선생은 문득 자신이 쓰고 있는 원고 속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느낌을 받았다. 꿈이 다시 엄습한 것이다. 아니면 또 다른 현실이 : 버스 차창 밖으로 보이는 것은 90년대 중반에서 다른 쪽으로 뻗어나간 세상의 풍경밤은 불야성에서 뻗어 나온 빛살들로 하얗게 오염되어 있고 색색깔의 네온사인들이 빛나고 있으며, 널찍한 차로에는 수많은 자가용들이 꽉 차 있다. 버스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모두 화려하게 차려입고 하나같이 지쳐 있으며, 건드리기만 하면 분노나 히스테리가 폭발할 것만 같다. 버스 운전사는 쉬지 않고 욕설을 내뱉으며 붐비는 차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차선을 변경하려고 분투했다. (버스 전용 차선이 있지 않나?) 이건 악몽이야. P선생은 오늘 하루가 온통 그랬던 것처럼 어서 빨리 이 꿈의 물결이 지나가고 다시 현실로 세계가 고정되기를 조바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 속과 같은 세계에 매혹되어 차창 밖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이 세계는 전력 문제가 전혀 없는 듯 건물들마다 환하게 불을 켜고 있다. 높은 층들까지 모조리! 분명 엘리베이터가 가동되고, 에어컨도 잔뜩 틀어져 있으리라. , 멋진 신세계. 잔혹하고 끔찍한 신세계. 사람들은 밤늦게까지 미친 듯이 일하면서도 자신들의 노동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렇게 모인 돈의 대부분은 극소수 재벌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그중 일부는 그러는 것이 불법이 아니도록 사회 시스템을 교란하고 중독시키는 데 쓰인다. 또 다른 일부는 노동의 대가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근무의 피로를 제대로 풀 시간적 여유도 없는 사람들을 가능한 한 짧은 시간 동안 스트레스를 풀고 업무에 복귀시키기 위한 향락 사업들에 투자되고그 결과가 지금 저 차창 밖의 풍경이다 : 피로한 백열등 조명으로 불야성을 이룬 빌딩 사이사이 골목마다 펼쳐진 것은 술집들과, 단란하지 않은 단란주점, 노래방 아닌 노래연습장들이며, 그 사이를 헤매는 것은 피로와 절망과 술에 취한 직장인들이다. P선생은 수업 자료가 든 낡은 가죽 가방을 꽉 움켜쥐고 눈을 감았다. 제발, 집 앞 정류장에서 고개를 들면 세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기를, 그의 불쌍한 영혼이 그의 사악한 악몽 속을 너무 오래 헤매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기도라고 해도 좋을 것이었다.

 


그리고 P선생의 기도는 응답받지 못했다. 정류장에서 내린 뒤에도 악몽의 세계는 여전히 지속되었다. 분명 집으로 가는 골목길이었지만 풍경은 전혀 달랐다. 조용한 주택가여야 할 그의 집 앞까지 단란 노래방과 24시간 감자탕 집과 성인용 바다이야기 게임장이 들어서 있었고, 어디선가 누군가 술에 취해 쉰 목소리로 유행가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고 있었다. 그는 황급히 빌라의 계단을 뛰어올라 현관을 열고 들어갔고, 차가운 목소리로 "일찍 왔네?" 안방에서 나오는 아내와 맞닥뜨려야만 했다. 늦게 왔는데 일찍 왔다니? 어리둥절한 상태에서 P선생은 자신의 소설 속 세상에서는 교사들도 야간 자기주도학습 지도라는 명목 아래, 회사원들만큼이나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경우가, 교실 붕괴라는 필연적인 결과 아래에서 다소 완화되었다고 쳐도, 여전히 많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P선생은 소름이 확 끼치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그리고 그것을 지금 자신이 겪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국어 선생의 아내 e는 이혼을 결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국어 선생은 아내를 위해서라면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면 자신의 삶은, 아이의 삶과 함께 송두리째 부서져버릴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그의 삶이 부서지는 것은 개의치 않았다. 누군가가 부당하게 희생하면서 유지되어야 할 삶은 그렇다면 유지되어서는 안 되었다.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그의 아이의 삶은? 이제 막 학교에 들어가,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갈 준비를 방금 시작한 저 가녀린 아이는 도대체 무슨 잘못이 있기에 그런 일을 겪어야만 하는 것일까? P선생은 결코 그 답을 알지 못했다. 알 수 없었다. 대학 시절 P선생은 나름 급진적이고 과격한 예술 지망생이었다. 아이와 개는 죽이지 않는다는 할리우드의 철칙을 그때는 비웃었으나, 그러나 이제는 결코 그럴 수 없다. 오히려 덧붙인다 : 아이와 개와, 고양이와, 그 밖의 모든, 자신이 여기에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며, 여기 있기를 선택한 적이 없는 작은 존재들은 결코 다치게 하지 말 것. 할리우드 액션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젖은 손으로 전기 코드를 만지고 주유소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술 먹고 자동차 키를 꺼내는 멍청한 성인 남녀들뿐이다.


"당신 힘들까봐" 어쨌거나 소설 속 대사를, 자기 줄에 얽매인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으로 말한다. 그녀가 쏘아붙인다. "그러지 말랬지? 이젠 그래도 소용없어." 아내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 너무 늦어버렸어. P선생은 무력감 속에서 생각한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고, 너무 늦게 그 사실을 깨달았어. 20165월 이후로 우리는 모두 이전 세계로 되돌아가지 못하리라. 하지만, 그동안의 잘못을 깨닫고 그것을 고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 결과가 지금 이 집, 이 집안의 풍경이다. 사회가 개인의 삶을 착취하고 남은 빈 껍질. 그가 그녀의 꿈을 부숴버리고 남은 형식적인 빈 껍질. 생존의 대가로 행복을 모두 지불해버리고 남은 껍질뿐인 풍경. 안방에서 소리죽여 우는 아이를 달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P선생은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것을, 자신의 소설을 닮은 악몽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지독히도 사실적인 분위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흐릿해졌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이 자아낸 악몽에 사로잡히는 것이겠지. 자기 거미줄에 묶인 거미처럼.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난 미쳐있는 걸까? 내가 돌아가야 할 현실과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걸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할까? 어떻게 소설과 꿈이 현실과 같아질 수 있는 걸까? : 우리는 결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않으니까. 바라볼 수 없으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란 결국 우리가 매일매일 써나가는 우리만의 소설, 매일매일 꾸어나가는 꿈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우리 자아를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교한 방어 체계를 통해서만 현실을 여과하여 인식하며, 그 과정은 우리가 꿈을 꾸거나 극히 일부의 우리가 허구의 이야기, 소설을 만들어나가는 것과 유사하다. 꿈이란, 혹은 꿈이 언어나 문자로 고착화된 형태인 이야기나 소설은, 그래서 우리 의식의 백도어를 열고 들어갈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나는 어느 시점에선가 그 망할 백도어를 잘못 열고 들어가 길을 잃은 게 아닐까. 소설과 이야기에 대해 생각이 미치자 문득 P선생은 서재로 가서 책장 앞 책상 위의 노트북을 켰다. 서재라니, 이 공간부터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 방 둘짜리 빌라에서 왜 그가 따로 방을 가진단 말인가. 함께 썼어야 해. 아니면 그가 거실로 나갔든지. 하지만 방에서 작업하는 걸 답답해했던 건 아내였다는 사실이 떠오르고, P선생은 왜 이따위로 원고를 썼는지 알 수가 없어졌다. (ep선생과 함께 있는 것이 답답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렇다면 e는 또 왜 p선생과 같은 방에서 따로 작업하기를 답답해했을까?) 만일 원고를 모두 지운다면, 혹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고쳐 쓴다면 어떻게 될까? 하지만 노트북이 켜지고 아침에 봤던, 이중으로 떨리던 원고 중 그가 쓰지 않은 버전이 뚜렷이 떠올랐을 때, P선생은 다른 것에 신경을 빼앗겼다. 인터넷 브라우저 아이콘. 소설 속 세계는 대합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체제적 모순에도 불구하고 외형적으로는 나머지 세계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 때문에 체제적 모순이 심화된 것일지도 몰랐지만. (재미있는 생각인 걸. P선생은 머리 한켠에 메모해두기로 했다), 어쩌면 냉장고에는 수입 맥주와, 무엇보다도 부엌에는 진짜 커피가 있을지도 몰랐지만, 아니, 있을 것이 확실했지만, P선생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야. 여긴 꿈과 허구, 이야기 속의 세계일 뿐이야. 진짜 커피라고 해도 진짜는 아니야. (그렇지만 그럼 뭐가 정말로 진짜인 걸까?) 인터넷에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뭘 검색하든 내가 아는 것만 나오겠지. 꿈속에서 책을 읽는 것과 똑같아. 여긴 밖으로 확장되어 나온 내 머릿속이야. 난 내 머릿속에 갇힌 거라고. P선생은 다시 원고를 열어 마지막 부분을 확인했다. 여기도 그가 쓰다만 부분까지 저장되어 있었다. 사태 파악의 실마리가 될 물리학자가 등장할 차례였다.

 


 

2.

S교수는 잠에서 깬 뒤 방금 전의 꿈을 찬찬히 곱씹어 보았다. 꿈속에서 S교수는 형이상 물리학회지의 정신입자 물리학 분과 논문정신역학 3법칙과 정보 엔트로피에 대한 수비학적 접근에 관한 논문이었다을 읽다 잠들었다가 다시 일어나 컴퓨터를 켜고 이상한 이메일을 확인했는데, 지엔다오의 초대형 강입자 충돌기에서 최근 진행 중인 실험이 불러올 다차원 정신 융합 현상을 경고하는 내용이었다. S교수는 연구실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발치에는 잠깐 전에 읽다 잠들었던 학회지가 떨어져 있었는데, 다행히 그저 평범한 이론 물리학회 저널이었다. 소파에서 일어나 컴퓨터 책상으로 가서 습관적으로 이메일을 확인하려다가, S교수는 꿈이 생각나서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쳤다. 미신일 뿐이다. 꿈이란 시냅스 회로의 잡음, 뉴런 데이터베이스의 조각 모으기일 뿐이다. S교수는 고개를 흔들며 컴퓨터를 재활성화하고 웹 브라우저를 켠 다음, 이메일을 확인했다.


                                       J-VLHC 뉴스레터 149"43일차 운영 현황 및 24차 실험 외"

                                       2017103(월요일) 오후 7:49 읽지 않은 상태로 표시

                                       보낸 사람: "J-VLHC News"

                                       받는 사람: "Seungw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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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VLHC 통신 149(가동 43일차)

                                       1. 초전도 코일 H-83 교체 완료. 출력 1.2% 증가

                                       2. 미세 유도 프로그램 버그 수정. 제어 가능 범위 갱신

                                       :

                                       :

                                       6. 입자 확률 분포에서의 변이와 다중우주간 간섭 확산 우려

                                       요약 : VLHC의 실험 환경이 정상 우주에서 보기 드문 양자 확률로 조성되었다는 점은 사회적으로는 많은 우려를 불러 일으켰으나, 학계 내에서는 거의 무시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말레이시아의 연구 그룹 M-G-U에서는 특정 조건 하에서 J-VLHC의 실험이 다중 우주 사이의 균형에 중대한 변수를 도입할 것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다원우주론을 바탕으로 한 M-G-U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J-VLHC의 실험 프로그램 중 일부에서 생성될 예측불가능한 고에너지가 우주들 사이의 다차원공간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잠이 덜 깬 게 분명해. 아니, . 꿈같은 소리군. 책상에서 일어나 본다. 다리에 힘이 없다. 그렇다면 아직 소파에 누워 있는 게 분명하다. 아직 눈도 뜨지 않은 채, 일어나 있다고 꿈속에서 착각하는 것이다. 어쨌거나 천천히, 발을 움직여 창가로 가본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본다. 꿈이라지만 별 거 없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오후의 캠퍼스다. 잔디밭에는 학생들 몇이 나앉아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고 어디선가 곡조를 알 수 없는 기타 아르페지오가 희미하게 들려온다. 연습을 하는 건지 연주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다. 어쩌면 현대음악 전공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업이 끝나 캠퍼스를 빠져나가는데, 또 몇몇 사람들은 캠퍼스로 유유히 들어오고 있다. 대개는 일과 후 직장인 대상 교육 프로그램을 들으러 오는 사람들이겠지. S교수도 교양 물리학 강연을 일주일에 두 시간씩 하고 있다. 사회적 봉사 활동, 시민 사회에 대한 학문 기관의 책무로서(솔직히는 물리학에 대한 대중의 이해가 두터워지면 사회적 투자도 조금 더 늘지 않겠느냐는 계산속도 있고). 그러나, S교수는 창밖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캠퍼스 안으로 들어오는 몇몇 사람들 중에서 하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큰 키에 홀쭉한 체구의, 후줄근한 옷차림의 안경 쓴 사내였는데, 어딘가 자신만의 꿈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마치 아직도 그 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마침 대중 물리학 강의가 있는 날이어서 오후 수업을 끝낸 S교수는 교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이과 대학 강의동 지하1층 대강의실에서 최신 우주론에 대한 입자물리학의 실험 결과를 주제로 한 시간 반 동안 강의를 했다. 계단식 의자에 앉은 사람들은 대개 4,50대 남녀들이었고, 군데군데 조숙한 청소년이나 느긋한 노인들도 보였다. 빠짐없이 강의를 듣는 낯익은 얼굴들도 있었다. 강의를 진행하면서 S교수는 오후 수업보다 더 맥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고립감. 고독감. 괴리감. 자명한 것을 굳이 말로 풀어 설명하는 데서 오는 권태감. 왜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걸까? 왜 나는 해외의 연구 성과들을 배워서 가르치는 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걸까? S교수는 다시 한 번, 이곳이 아니라 다른 땅에 태어났더라면,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죽은 지식을 되새김질 하는 것이 아니라 미지에 대항해서 살아있는 새로운 지식을 쟁취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초대형 프로젝트에서 새로운 실험을 구상하고 갓 나온 실험 결과를 처음으로 분석하고S교수는 문득 자신의 삶이 실질적으로 이미 끝났음을 자각했다.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을 이루지 못할 거야. 지금까지 아무 것도 새로운 것을 이룬 게 없는데도. 지독한 기시감 속에서 매년 하루하루를 반복적으로 살아야만 하겠지. 이미 아는 것을 이야기하고, 이야기한 것을 또 이야기하고! 그러나 그건 S교수의 잘못이 아니었다. 잘못이라면 S교수가 하필이면 서울 네트워크에 태어났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물론, 다른 나라에 태어났다고 한들, S교수가 지금 이렇게,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고, 무엇보다 재능을 가지고 계발할 수 있었으리라는 보장은 없기는 하다. 하지만평행우주에 대해 기계적으로 설명을 이어나가며 S교수는 슬쩍 웃었다. 어딘가 다른 우주에는 정말로 마음껏 연구하고 있는 S교수가 있을까? (또 다른 자신에게는 더 나은 삶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강의가 끝나고는 연구실 냉장고에서 맥주맛 맥주를 꺼내 소파에 앉아 천천히 마셨다. 첨가된 에탄올로 살짝 취기가 오르자, 웹브라우저를 열어서 연구자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아는 사람들의 신변잡기 글들이나 구경할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오후에 메일로 받았던 M-G-U 관련 주제 글들이 올라와 있었다. S교수는 심드렁하게 눈으로만 훑어보다가, 수식들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하자, 몇 개인가 메모를 시작했다. 이윽고 일어나서 연구실 한켠의 화이트보드에 옮겨 적고 풀어보다가 고쳐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정이 다 되어, 오후에 봤던 수상한 남자 둘과, 대학원 후배였던 연구원 H가 함께 방문했을 때, 여유 있게 커피맛 커피를 권할 수 있었다.

 

 


3.

모든 것은 꿈이다. 내가 아픈 것도, 슬픈 것도, 기쁘지 않은 것도 행복하지 못한 것도 모두, 모든 것이 다 꿈이기 때문이다. 라고 C는 생각한다. 새벽 다섯 시 반의 핸드폰 알람을 끄고 억지로 일어나 씻고 옷 갈아입고 화장한 다음, 여섯 시 반 지하철에 실려 서울 변두리로 가면서, 지하철에서 남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거나 어쩌나 늦은 날 붐비는 지하철에서 달라붙거나 만져도 모든 것은 꿈일 뿐이다. 지하철로 20분쯤 가면 나오는 조그만 역에서 다시 10분쯤 걸으면 C가 일하는 작은 국립 연구소가 나오는데, 그곳에 취직했을 때 친척들과 심지어 친구들마저 부럽다는 투로 축하해줬지만, 그것도 모두 덧없고 부질없는 꿈이었을 뿐이었다.


출근해서 자리에 가방을 놓자마자 C는 사무실 창문을 다 열어 환기하고 탕비실에 가서 커피포트에 남은 물을 사무실 곳곳의 화분들에 부은 다음 다시 씻고 새 물을 부어 전원을 올린다. 찻숟가락들을 씻어 담고 갓 끓은 물을 반쯤 붓고 물티슈 한 장을 뽑아 테이블 위를 닦은 다음 복사기에 A4지가 많이 남아 있는지 열어서 확인하고 가끔씩 전날 치우지 못했던 문서 세절기 문을 열고 종이 가루로 가득 찬 비닐봉지를 뽑아내 끝을 묶고 새 비닐봉지를 깔아 넣은 다음, 비로소 자리에 앉으면 직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기 시작한다. 그래봤자 행정실은 네 명에 불과한 직원 중 세 명이 더 출근한 것일 뿐이며, 행정실장은 언제 출근할지, 출근하긴 할런지 전혀 알 수가 없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업무는 그녀가 거의 도맡아 처리하고 있고, 나머지 세 명도 방해가 되면 되었지, 도움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만일 내가 직원들 월급 지급 결의서에 0을 하나씩 더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정답: 그녀만 즉각 잘리고 그녀가 모두 물어내고 추가로 그녀에게서 벌금까지 뜯겠지. 아니, 아예 감옥에 가둘지도 몰라. 그녀의 죄는 이 연구소에서 유일한 비정규직이라는 것이니까. 물론, 경비실이나 청소 아줌마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쪽은 외부 용역이니까 다른 게 아닐까? C는 알 수 없다. 모두 어른들이 세운 규칙이고, 꿈일 뿐이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에 가면, 대학에 간 뒤에는 졸업을 하면, 어른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모두 지나고 나도 C는 여전히 C였고, 주변에서는 모두들 훌쩍 C만 남겨놓고 어른이 되어 있곤 했다. 아니, 어른이란 것도 모두 꿈일 뿐이야. 정말 필요할 때는 아무도 어른이 아니잖아.


오전 내내 어제 밀렸던 일을 하고 나면 딱 점심때가 된다. 물론 나머지 직원들은 빈둥거리다 일찌감치 궁시렁거리며 끼리끼리 점심 먹으러 간지 한참 된 시점이다. C는 연구소 정문을 나와 왼쪽으로 돌아갔다. H는 오른쪽으로 돌아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연구소 뒤 가운데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공원이 나오고, 둘은 공원 옆 편의점에서 각자 좋아하는 도시락을 사서 공원 한켠의 벤치에 나란히 앉아 조용히 점심을 먹는다. H는 대개 데리야키나 치킨마요 같은 달고 느끼한 메뉴를 고르지만 C는 항상 불닭이나 핵폭 같은 수식어가 붙은 맵고 짠 메뉴를 고른다. 밥을 다 먹으면 공원 한쪽의 지하철 역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남은 시간 동안 공원 밖을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동차들을 쳐다보며 마신다. 이때도 별 얘기는 안하는데 오늘은 문득 H가 일 이야기를 꺼냈다.


"요새 실험 결과가 좀 이상하게 나오고 있어서 골치 아파요. 기기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꼭 우주 자체가 어딘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아"

"무슨 소리야, 광자 회로에서 양자 효과 연구하는 거 아니었어요? 무슨 일이길래 우주론까지 나오고 거창해요?"

"내 말이. 지금까지는 실험값이 괜찮게 나왔는데 요즘 갑자기 뒤죽박죽이라니까요. 매 번 광자를 몇 개씩 놓쳐서 팀장은 길길이 날뛰고 다들 전전긍긍이에요. 근데 아무리 봐도 우리 실수나 기계 오류가 아니라 입자 흐름 자체가 이상해진 거 같아요. 이 우주가 지금까지랑은 살짝 다른 설정값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거 같다니까."

거창하기는.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광자의 움직임이 바뀌었다면, 광자의 속성이 바뀌었다면 그것만 바뀌었을 리는 없으니까그런데 그게 가능할까? 이 우주가 그저 복잡한 태엽 장치가 아니라 그냥 멈추기 직전에 휘청대는 팽이 혹은 변덕스런 바람개비 같은 것뿐이었던 걸까? 그렇다면 과학은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잠깐, 그건 말이 안 돼요. 광자만 바뀔 수는 없잖아. 다 같이 바뀌어서 우주 전체가 다른 세팅으로 전이되지 않으면 안 돼요. 그런데그러면 차이점을 알아낼 수 없었을 거야. 그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C는 말하는 동안에 생각이 핑 핑 도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꿈만 같다. H가 미묘한 미소를 짓는 것을 보고 C는 기분이 상했다. 이 얘길 왜 꺼냈나, 하는 후회? 이걸 어떻게 얘기하나, 하는 망설임? , 그럼 들어주고 있는 사람은 뭐니.

"아직은 모르겠어요. 어쩌면 그냥 기기 오류일지도 몰라요. 워낙 민감한 장비니까. 어쩌면 조작 실수인지도 모르죠. 젠장, 그럼 내 잘못이네. 어쩌면 우리 의식이나 기억만 관성적으로 이전 우주에 남아 있는 건지 몰라요. 어쩌면 우리 의식만 다른 우주로 옮겨진 건지도 모르고요. 아니면 이 모든 게 그냥 내가 미쳐서 그런 걸지도"


C는 공원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차피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죽기 전까지 죽어라 먹을 점심 한 끼를 오늘도 또 하루 해결했다고 뿌듯함에 웃고 떠들며 길거리를 걷는 직장인들. 바람이 불고 공원 잔디밭의 풀들이 흔들린다. 이 모든 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정오에서 42분 지난 햇살이 도시의 빌딩들 사이로 내리쬐고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신경질적으로 움찔거렸다. 저 모든 사람들, 바람들, 풀들, 햇빛들, 빌딩들, 차들을 구성하는 모든 기본 입자들의 기본 값이 바뀌고 있다고? C는 세상 전체가 꿈이라는, 우주 전체가 하나의 꿈일 뿐이라는 느낌이 바람처럼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짧게 자른 귀밑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것만 같다. 이 꿈에서 깨어난다면 나는 도대체 무엇을 보게 되는 걸까?


"혹시 뭔가 다른 원인으로 인한 간섭 현상은 아닐까요? 어디서 전기장 같은 게 발생해서 광자 흐름에 영향을 준다든지그러면 탐지기 같은 걸 만들어서 찾아볼 수 있지 않겠어요?"

H의 눈빛이 살짝 바뀐다. 그렇지만 표정은 변하지 않는다. C는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고, 그렇지만 그것을 억누른다. 그는 그녀가 말한 것의 핵심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것을 티내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H는 망할 놈의 남자니까. 하지만 너는 알지 않니? 학부 때는 내가 성적이 더 좋았어. 시험 때마다 내가 널 도와줬잖아. (우리가 언제부터 존대하기 시작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알았다. 모두 부질없다. 모두 꿈일 뿐이다.

 

점심을 먹고 돌아와(H와는 또 각각 따로 연구소에 들어갔다) 다시 슬금슬금 자잘한 업무를 처리하면서 CH가 한 이야기를 계속 생각해봤다. 우주의 기본 상수값이 바뀐다는 게 가능할까? 문서를 복사하고 전체 메일을 돌리고 오후 간식 테이블을 치우고 소장한테 놀러온 할 일 없는 외부 손님들한테 커피도 돌리면서 계속 생각해봤다. 전체 비례가 유지되는 틀 안에서 다함께 요동치고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그러면 도대체 그 원인은 무엇일까? 그걸 과연 우리가 알아낼 수 있을까? 의식이나마조차 할 수 있을까? (해와 달과 별이 없었어도 우리가 과연 이 우주의 구조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희뿌연 발광 성운 중심에서, 낮도 밤도 없는 하늘 속에서 희미하게나마도 보이지 않는, 작은 태양 주위를 공전하는 행성에서 살아간다면물론 코리올리의 힘은 작용할 것이고, 중력 가속도와 관성의 법칙에 대해서는 알아낼 수 있겠지만도대체 우주 안에서 우주 구조의 변동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꿈속에서 꿈과 현실을 골라낼 수 있을까?) 생각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과가 다 끝나고 내부 메신저로 확인해보니 H는 계속 근무 중이었다. C는 메시지를 보낼까 망설이다 결국 그냥 저만의 꿈에 빠져 웅웅대는 컴퓨터를 껐다.

 


저녁은 소장과 호텔 한식당에서 먹었다. 평소와 다르게 소장도 별 말이 없었다. 이럴 거면 왜 불렀나 싶고, 이러다 또 위로 올라가자는 건가 싶기도 했는데, 그냥 2차로 근처 와인바에 가서 와인 한두 잔 마시다 끝났다.


"힘드신 일 있으신가 봐요?" 짐짓 떠봐도, "매사가 다 힘들지, . 누구나 안 힘든 일 있나." 뚱한 표정으로 말을 끊는다. C는 더 캐묻기도 귀찮고 H의 이야기를 생각하면 뻔하기도 해서 그냥 텔레비전 막장 연속극이랑 아이돌 그룹 스캔들이랑 요즘 뜨는 뮤지컬 같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이야기들만 이리저리 주저리주저리 혼자 떠들었다.


집에 가는 길에도 차를 태워줬는데, 그땐 C도 지쳐서 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소장은 또, "화났나? 미안해. 다음엔 좀 더 재밌게 보자구." 그렇지만 C, 아 제발. 재밌게 안 보는 게 더 좋거든요. 이럴 거면 초과근무 신청이라도 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일주일치 일과 근무를 합친 것보다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하며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갔다. 엄마 아빠는 소장님이 태워주신 걸 보며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한데, (특히 친구가 소장이라서 부탁했더니 C를 취직시켜주었다고 좋아하고 으스댔던 아빠는?) 그저 한없이 희뿌연할 뿐인 밤하늘을 잠깐 올려다보는 동안 어딘가 한없이 서러워져서, 눈물이 나오기 전에 그만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모든 것은 다만, 꿈일 뿐이니까.


잠들기 전까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C는 침대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H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사실이겠지), 소장은 이만저만 난처한 게 아니긴 하겠다. 현장에서 물러나 관리자로 일한지 오래긴 해도 다른 낙하산 인사들처럼 아예 아무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니니 더 골치 아프겠지. 생각해야 될 것도 많을 거고. (그런데 나한텐 뭘 바란 걸까?) 그러나 잠에 빠져들기 직전에 든 생각은 결국 이런 거였다: 우주 전체가 누군가의 꿈일 뿐이라면, 꿈 아닌 것은 무엇일까? 꿈 아닌 것이 없다면 과연 꿈이 꿈일까?

 

 


4.

버스에서 내려 골목을 지나 집으로 올라가는 동안 p선생은 어딘가 다른 세계로 온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가짜 세상에 들어온 듯한, 삶이 모두 꿈으로 변해버린 듯한 느낌. 현실의 두께가 너무 얇고 가벼워, 손을 뻗치면 마치 찢어낼 수 있을 듯하다. (그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위가 너무 조용하고 어두워 밤의 어둠이 자체의 무게를 가진 듯 묵직하게 느껴졌고 가로등마저 침침하게 느껴졌다. 마치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속 세상 같군. 무슨 정전이라도 났나? p선생이 쓰고 있는 것은 현실 세계를 뒤집은 세상에 관한 이야기였다. 만일 IMF 직후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로 경도되는 대신 정반대의 길을 택했다면? p선생은 이것이 흔해 빠진 대안적이고 목가적인 유토피아물이 될지, 수구꼴통들이 좋아할 프로파간다 디스토피아물이 될지 정하지 못했다. 아니, 알지 못했다. 자신이 쓴 글이라도, 아니, 어쩌면 자신이 쓴 글이니까, 그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헛소리였는지는 언제나 항상, 쓰고 나서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어느 날 도둑처럼 찾아오는 법이니까. (우리의 삶도 그렇게,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의미는 항상 지나간 다음에야 찾아오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단 말일까?)

 


현관을 들어섰을 때 조용하고 어둑한 집안을 보면서 p선생은 안도감을 느꼈다. 만일 거실에서 아내가 불을 켜놓고 그를 또 기다리고 있었다면, 다섯 시간 수업 동안 문제를 풀어주고 세 시간 동안 야자 감독을 한 p선생의 지친 가슴 속에서 심장은 부서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아내는 안방에서 아이와 함께 자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 수 있겠군. p선생은 씁쓸하게 생각하며 서재 문을 열었다. 불을 켜려고 했지만 이미 켜져 있었다. 그리고 P선생이 그의 노트북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그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 애랑 애엄마는 자고 있어. 여기서 떠들다가 들키면 곤란하니까, 밖으로 나갑시다."

 


그 말에 순순히 도둑처럼 살금살금 따라 나와 골목 입구 편의점 바깥 테이블에 앉아 만 원에 네 캔 짜리 수입맥주를 앞에 놓고 자기 자신과 마주 앉아 있는 자신을 p선생은 믿을 수가 없다. 그 자리에서 비명을 질렀어야 되지 않았을까? 아니면 경찰을 부르거나? 그래, 이건 뭔가 사기나 그런 걸 거야. 그러나 P선생은 캔맥주에서 눈과 입을 떼지 못하며 띄엄띄엄 오늘 하루 겪은 일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쪽이 내 세계로 갔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뭐랄까, 질량 보존의 법칙이랑 비슷한 뭔가가 있지 않았을까요? 내가 이 소설 속 세상에 들어온 대신 그쪽은 소설 밖 세상으로 나가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p선생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지적했다. "당신이 내 소설 속 세상에서 나온 거예요." 그렇지만 P선생은 별로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 상대적인 문제겠죠.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말이에요. 어쩌면 그게 문제였을지도 몰라요. 난 내 원고에서 그쪽이 내 세상에 대한 소설을 쓰도록 하고 있었어요. 아까 보니까 그쪽도 소설에서 내가 이 세상에 대한 소설을 쓰도록 했더라고요. 플롯이 그렇게 너무 복잡하게 꼬인 바람에 이런 사태가 벌어진 건 아닐까요?"


p선생은 P선생이 겉모습은 자신과 똑같아도 성격은 어딘가 다른 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 더 여유가 있고, 그만큼 좀 더 허술하고 무책임하다. 이건 내가 소설을 쓰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환경의 차이일까? 이 세상과 달리 소설 속 세상은 여유가 있고, 그만큼 좀 더 허술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책임한 건? (그나저나 도대체 나는 왜 나를 소설 속에 집어넣은 거지?) 어쨌거나 p선생은 반론했다. "고작 소설을 조금 복잡하게 썼다고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요? 우리-당신과 나는 모두 저주받은 유물론자 아닌가요? 이게 물리적으로 가능한 일일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긴 하지만, 어떡합니까.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잖아요. 유물론자라면 이미 일어난 일은 현실로 받아들여야 해요." P선생이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신 다음 말했다. "나도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건 아니에요. 빨리 소설 밖 내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맥주나 인터넷이나 흥미롭긴 하지만, 어차피 실재는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어떻게 나가죠?"


그러면 어떡하지? p선생은 아마 P선생도 생각해보기는 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렇지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도플갱어가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로군.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자신이 창조한 괴물이 어디론가 저만의 삶을 찾아 사라져주기를 바랐지만, 삶이란 그렇게 뜻대로만 되지는 않는 법이다. 만일, 입장을 바꿔서 p선생이 P선생의 세상으로 들어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데 그때,


", 두 분, 혹시 쌍둥이는 아니겠죠?" 어둠 속에서 웬 사내 하나가 다가와 쭈뼛대며 말을 걸었다. 20대 후반에서 삼십 대 초반, 체크무늬 남방에 면바지를 입고 등에는 묵직한 백팩을 메고 한손에는 이상한 장비를 들고 있었다. p선생은 문득 어린 시절에 봤던 고스트 버스터 만화를 떠올렸다. 유령 탐지기. 하지만 그 장비는 지금 그와 P선생 둘을 향해 뻗어 나와 삑삑거리며 반짝이고 있었다.

", 안녕하세요. 아마도 두 분이 지금 우주를 혼란스럽게 만든 분들 같네요."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5.

만일 꿈이 실체를 갖는다면 어떨까? 꿈속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모두 현실의 무게를 갖는다면? 그때에도 현실은 여전히 현실이고 꿈은 여전히 꿈일 뿐일까? 현실과 구별할 수 없는 꿈은 현실인 것일까? 그렇지만 어떻게 그냥 그렇게 될 수 있을까? 객관적이란 말은 관측자가 누구든지 간에 관측 결과가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관측자에 따라 관측 결과가 변경되는 현상이란, 세계란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갖는 걸까? 아무 의미도 없는 걸까? 그러나,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밥을 먹고 돌아와 보니, 여전히 측정값이 제멋대로였다. 다시 테스트용 회로를 바꿔 걸어놓고 처음부터 측정을 다시 시작했다. 기다리는 동안 H는 조금 바보가 된 듯한 기분 속에서도 C가 말한 대로 단결정 회로에서 광자 수를 세는 감지기를 구상해봤다. 생각보다 구조가 간단하고 부품도 실험실에 굴러다니는 것들로 금방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장소라든가, 구체적인 실체로서 원인이 있기는 한 걸까? 선배들이 말하듯 구조적인 문제가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검토해 봐도 모듈 자체에 문제가 있진 않았고, 결합된 회로와의 간섭일 가능성이 높지만, 처음에는 이상이 없었는데 요즘에야 문제가 생겼다는 게 이상했다. 그렇지만 도대체 어떤 외부 원인이 광자가 하나씩 지나가도록 잘 설계된 초극미세집적회로에서 광자들이 사라졌다 나타나게 하는 걸까? 광자들의 흐름을 보면 마치 실선이 아니라 점선 같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나온 오후 실험의 결과도 신통치 않았다. 팀장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짬뽕이나 먹자고 했고, 팀원들은 연구소 근처 중국집에서 짬뽕에 소주 몇 잔까지 걸친 다음 다시 들어와 막내인 H가 그날치 실험 보고서를 작성하는 동안 양치질을 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고 연구실 한쪽 벽 다트에 화풀이를 하다가 초과근무 시간을 모두 채운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하나둘 씩 퇴근하기 시작했다. H는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어차피 내일이나 모레나 계속 야근일 거라고 생각하고, 탐지기를 들고 지하철 2호선에 올라탔다.


10시의 2호선은 언제나처럼 우울했다. 하루 종일 생업에 생기를 빨리고 남은 사람들의 잔해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하루 종일 서울을 뱅글뱅글 돈 지하철도 지쳤는지 불빛이 흐리고 공기는 탁했다. H는 자신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연구소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도, H는 그다지 큰 포부나 기대는 없었고, 그냥 직장을 구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이제는 모든 것을 다 빨려버리고, 껍질만 남은 것 같다.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나는 알맹이였을까? 애초에 껍데기뿐이었던 건 아닐까? 인생이라는 게 다 이렇게 구차하고 구질구질한 거였던 거였을까? 세상은 이렇게 조용하게 지친 슬픔들로 가득한 것뿐일까? 지하철이 지상으로 나와 차창 밖으로 지친 건물들이 달려가다 마침내 밤의 눈물 같은 고요한 한강이 나오자 H는 문득 C를 생각했다. C는 소장님과의 관계를 H가 정말로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러나 과연, H에게 C는 누구인 걸까. C에게 H는 누구인 걸까? H는 차창에서 눈을 돌렸다.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세상에서 사랑은 사치일 뿐이다. 인격도, 인권도, 질서와 자유도. 어쩌면 전자들이 회로 속에서 제멋대로 돌아다니는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그때, 탐지기의 바늘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H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 못하다가 열차가 다음 역에서 멈추자마자 뛰어 내리다시피 내렸다. 다행히 신호는 약해지지 않았고,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꿈길을 걷는 것 같군. 아니면 바다 속을. 심해처럼 깊은 피로. H는 격무로 인한 피로 속에서 묵직한 발을 힘겹게 움직이며, 멍한 머리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낯선 거리에서 탐지기 신호가 강해지는 쪽을 향해 나아가는데, 어쩌면 나아가는 쪽으로 신호가 강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원인과 결과가 뒤섞여버린 듯한 꿈 속 같은 느낌이 피로감을 더 강하게 했다. 문제가 먼저일까, 답이 먼저일까. 중고등학교에서 학부 시절까지 지겹게 봤던 객관식 문제들은 답이 먼저인 문제들이었다. H는 지금 이 문제도 어쩌면 답을 먼저 정해놓고 만들어놓은 문제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출제자는 누구일까? 자연? ? 어쨌거나 누군가 만들어 놓은 문제를 푸는 건 이제 질렸는데. 대학원에서 좋았던 건 그거 하나였다. 만들어진 게 아닌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거. H는 문득 S를 떠올렸다. 박사 과정에 있었던 그 선배는, 그중에서도 제일 과격한 가설을 세우고 급진적인 이론들을 좋아해서 괴짜 취급을 받았었다. 그래도 무슨 빽이 있었던지 4, 5년 외국에 나갔다 돌아오더니 어느 대학에 교수로 들어갔다고 했다. 나랑은 류가 다른 사람이지. 그런데 이상하게 SH를 좋아해서 자주 데리고 다녔다. 성격도, 배경도 공통점이라곤 하나도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H는 생각난 김에 S선배를 한 번 찾아가볼까, 생각했다. 이상한 것에 관심이 많고 쓸데없는 것들을 잔뜩 알아두는 사람이라 혹시 뭔가 알아낼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탐지기는 이제 큰길에서 차도와 인도의 구분도 없는 좁은 길로 접어들면서 점점 신호의 강도가 올라갔다. 마침내 신호가 최대치로 올라갔을 때, H는 좁은 길에서 다시 더 좁은 골목으로 갈라지는 어귀에 서 있었다. 골목 어귀 편의점 테이블에 두 남자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마치 한쪽에 거울을 놓은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었다. 쌍둥이일까? 하지만 아무리 쌍둥이라도 저렇게 똑같이 후줄근한 옷을 똑같이 후줄근하게 입을 리가 있을까? 두 남자가 천천히, 동시에, 꿈꾸는 듯한 눈길을 H에게 던졌다. ", 두 분, 혹시 쌍둥이는 아니겠죠?" H는 쭈뼛대며 입을 열었다. ", 안녕하세요. 아마도 두 분이 제 문제랑 관련이 있는 거 같은데요."

 

 


6.

"중국 지엔다오의 초대형 강입자 충돌기, J-VLHC에서 최근 진행하고 있는 실험은 가설로만 존재하는 다중우주론을 실험적으로 규명해보는 것이었습니다." S교수는 P선생과 p선생, H를 앞에 두고 강의를 하듯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를 위해서 J-VLHC는 임의의 두 우주 사이의 다차원 간격을 관통하는 초미세 중력파를 만들어내도록 조정되었습니다. 이 펄스의 생성과 방출, 반향 수집이 단순한 관측을 넘어서 두 우주 사이의 교섭과 교란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실험은 강행되었고, 어느 정도 유의미한 자료가 입수된 걸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임의의 다른 우주가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만일 그렇다면 우리 우주와 얼마나 다차원적으로 먼 거리에 존재하는지.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려했던 대로 두 우주가 서로 겹쳐지고 섞이는 현상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거칠게 예를 들어보자면, 하나의 우주를 하나의 선으로, 3차원 좌표 속에서 이리 저리 구부러지는 선 그래프로 비유한다면, 우리 우주, 우주A와 다차원 간극 너머의 다른 우주, 우주a는 상당히 유사한 궤적을 그리고 있으며, 몇 개의 점에서는 실제로 서로 교차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한 교차와 중첩의 직접적인 양상은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알겠군요." S교수는 흥미롭다는 눈초리로 P선생과 p선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잔뜩 위축되어 똑같은 동작으로 어깨를 움츠리고 시선을 피했다. 마치 거울상 같아서 S교수는 아무 생각 없이 매혹되어 바라보았다. 한없이 졸리고 피곤하면서도 정신이 맑았다. 이 활기, 이 집중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지? S교수는 의문하고, 답을 찾았다. 지금 S교수는 일생일대의 기회 위에 서 있었다. 이 우주와 저 우주, 두 우주에서 각각 온 두 사람. S교수는 H가 대략 들려준 이상한 실험 결과의 원인도 이제 알았다. 결정 회로에서 광자를 잃어버리고 찾기가 반복된 이유는 비정상적으로 겹쳐진 두 우주 사이를 광자가 마치 바늘이 두 천 사이를 누비듯 움직인 것이었다. 심장이 비로소 뛰고 마침내 뜨거운 피가 온몸을 돌기 시작했다. H의 연구소 데이터를 분석하면 저쪽 우주에 대해서 더 많이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어쩌면 나는 이 세계 전체를, 아니, 이 모든 세계들 전체를 제대로 바라보는 첫 번째 사람이 될지도 몰라. 이 유폐된 무명의 탑에서 마침내 당당하게 걸어 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러나 P, p선생들은 전혀 알아들은 눈치가 아니었고 그래서 H가 옆에서 물었다. "두 우주가 겹쳐지는 계기가 이 두 분이 쓴 소설 때문이라는 건가요?" S교수가 대답했다. "가능한 이야기야. 두 분 말씀처럼, 서로 거울상에 해당하는 소설을 짓고 있었다면, 그동안에 둘의 뇌파가 중첩되었을 수 있어. 아마 J-VLHC가 뚫은 차원 사이의 미세한 틈을 통해 마침 거의 동조 상태에 있던 두 사람의 뇌파가 완전히 겹쳐지고, 그에 촉발되어 두 우주가 서서히 이끌려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중첩되어 나가기 시작했겠지." 인식이 인식 대상을 바꿀 수 있을까? 그보다는 인식이 인식 주체를 바꾸고, 그럼으로써 다만 인식 주체가 인식하는 내용만 바꾸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도대체 차이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순수한 객관이 과연 존재는 하는 걸까? 그때, P선생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럼 어떡하죠? 어떻게 해야 두 우주가 다시 분리되고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 질문에는 S교수도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P선생과 p선생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거기서부터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도, 사실은 아무런 검증을 거치지 않은 가설일 뿐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해결책은 저는 전혀 아무런 확신도 할 수 없습니다." S교수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천천히 한 모금 마시며 생각을 정리했다. "다만, 한 가지 제안드릴 수 있는 것은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두 분이 이렇게 만난 것이 두 우주 사이의 중첩의 직접적인 원인이거나 원인과 가장 밀접한 증상이라면, 반대로 두 분이 각자 최대한 떨어지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두 분이 각자 서울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향해 출발하는 것을 제안하겠습니다. 걸어가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느릴 테니 두 세계에 공통된 교통수단이를테면 버스를 타면 어떨까요? 각자 상대편 세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생각하지 않고 계속 멀어지다 보면 두 분이 각각 자신의 세계에 닿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어느 쪽이나, 자신이 쓰던 원고는 더 이상 이어 쓰지 않고 지워버리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예 잊어버리시는 게 좋을 거예요."

"그걸로 정말 다 해결이 될까요? p선생이 묻자 S교수가 잠시 생각하고 대답했다. "두 분이 괜찮으시다면, 출발하기 전에, 두 분이 각자 겪으신 내용을 녹화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 동영상에 저의 해석을 덧붙여 J-VLHC 운영진에게 더 이상의 실험을 중단할 것을 권유해 보겠습니다. 그쪽에서 믿어줄지, 받아들일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그게 가장 낫다고 생각됩니다." 그 제안에 따라 P선생과 p선생은 나란히 앉아, 다소 바보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H의 핸드폰을 향해 차례로 자신이 겪은 일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S교수의 연구실 소파와 의자들에 눕고 기대어 두 시간 정도 간신히 눈을 붙인 다음, 첫차가 다니기 시작할 무렵 일어나 S교수의 남은 커피를 모두 마시고 대학 정문에 나가 각각 건너편 정류장에 가서 버스에 올라탔다.


"고마워요, 선배." 둘을 배웅한 다음 HS교수에게 인사했다. "뭐가?" S교수가 반문하자, H는 실실 웃었다. "선배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S교수도 픽 웃었다. "지도 마찬가지면서."

둘은 정문 앞 큰길을 건너 이제 막 문을 연 해장국집에 가서 선짓국 두 그릇에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나저나, 이걸로 문제가 해결된 걸까요? H의 질문에 S교수는 소주 한 잔을 꿀꺽 삼키면서 답했다. "누가 알겠어. 가장 중요한 건 J-VLHC에서 이 실험을 중단하는 거겠지. 그리고, 두 국어 선생에 대해서는글쎄, 그런 일이 있었던 게 과연 사실일까? 네 핸드폰에 동영상이 남아는 있을까?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해장국집은 두 사람의 세계 중에서 어디에 놓여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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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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