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Review

정보라의 <너의 유토피아>: 공감과 연대의 미래

2025년 11월 통권 242호

2022년 부커상 국제 부분 최종 후보로 오른 재밌는 환상 공포 소설 <저주토끼>의 저자 정보라의 단편소설집이다. <너의 유토피아>는 책 표제와 같은 제목의 단편을 포함해 모두 8편의 멋진 단편 소설을 담고 있다. 단편 대부분의 시대 배경은 미래다.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열쇠말로 나는 ‘공감과 연대의 미래’를 꼽아본다. 시간이 흘러도, 이곳 지구가 아니어도, 인간이든 아니든 모든 의식적 존재는 공감과 소통을 꿈꿀 것이라는 작가의 전망이 책에 담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내려면, 나, 너, 우리의 유토피아를 향해 그래도 조금은 한 발짝 다가서려면, 함께 하는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라고 추측해 봤다. 


<영생불사연구소>는 유머러스한 저자의 글솜씨가 두드러지는 단편이다. 읽으며 혼자 킥킥 웃은 문장이 많다. 영생하고 불멸토록 승진 가능성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김과장이 소설의 주인공이자 화자다. 연구소 임원들은 영생불사와 불로장생의 개념적 차이를 가지고 쓸데없는 논쟁을 이어가고, 100주년도 아닌 98주년 연구소 기념식 홍보자료를 만드는 과정에서 한 임원은 ‘초대의 글’을 ‘초대하는 말씀’으로 바꾸라고 하면 다른 임원은 “아니다, 원래로 다시 돌려라”하고 지시하는 일이 거의 무한 반복된다. 직장인 연구소에서 김과장이 겪는 일에 공감하는 대한민국 직장인이 많을 것이 분명하다. 연구소에 발목을 잡힌 채 끝없이 허덕여야 한다는 생각에 슬픔과 무서움을 느끼는 김과장의 독백으로 단편이 끝난다. “영생불사를 하건 안하건, 자기 생계를 자기 손으로 마련해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와 같은 처지다.” 단편 마지막의 반전도 재밌다. 


<너의 유토피아>의 화자는 인간이 이주했다가 결국 버리고 떠난 어느 행성에 남겨진 자율주행 스마트 자동차다. ‘나’는 태양광으로 충전해 에너지 걱정은 없어도 자꾸 고장 나는 부품과 타이어를 교체해 주어야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자동차다. 어느 날 ‘나’는 타이어와 전구와 케이블을 찾아 ‘죽어버린 동료들의 시체’를 뒤적이다 고장 난 로봇 314를 발견해 뒷좌석에 태운다. 이 문장에 등장하는 ‘죽어버린’, ‘동료’, 그리고 ‘시체’라는 단어가 단편 앞부분에서 이미 이 스마트 자동차의 내부 인식을 보여준다. ‘나’는 작동이 멈춘 자신과 비슷한 유형의 스마트 자동차를 죽은 동료의 시체로 여긴다. ‘너의 유토피아는’은 로봇 314가 계속 반복하는 질문이다. 스마트 자동차인 주인공 화자인 ‘나’는 이 질문에 현재의 충전 상태를 1에서 10사이의 숫자로 바꿔 답한다. ‘나’는 다른 기계를 끊임없이 흡수해 몸집을 키워가는 ‘괴물’을 만나 도망친다. ‘나’라는 개별적 존재로 살아남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함께’는 ‘획일’ 혹은 ‘동일’과 동의어가 아니어서 진정한 소통과 공감은 각자가 ‘나’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일지 모른다. 이 단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314는 ‘Zero’를 말하고 곧이어 작동을 멈춘다. ‘나’는 314를 위해 뒷좌석의 난방을 켠다.


<여행의 끝>은 마지막 문장의 반전이 눈에 띄는 소설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의 인간을 뜯어먹게 되는 전염병이 지구를 휩쓸고 이를 피해 소수의 인간이 우주선으로 지구를 탈출한다. 나는 이 소설에서 우주선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금 바로 이 순간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은유로 읽었다. 지구와 우주선으로 크기만 다를 뿐, 어찌 보면 사실 우리 모두는 ‘지구’라는 우주선에 갇혀 우주를 여행하고 있는 셈이다. 다른 인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먹이로 보는 소설의 전염병은 다른 모든 존재를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이자 도구, 그리고 소비의 자원으로 여기는 우리 현대인 모두가 지금 이곳 지구에서 걸려있는 감염병일 수 있다. 소설의 암울한, 하지만 재밌는 결말이 쓰라리다.


의 화자는 엘리베이터 5호다. 자신 내부의 벽을 쓰다듬는 5305호 거주자와 엘리베이터의 교감이 감동적인 단편이다. 엘리베이터는 ‘사물의 둥지’라는 인공지능에게 5305호 거주자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늙고 약해진 인간은 왜 부품을 다시 제작해서 교체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사물의 둥지는 “출생하고 성장하여 활동하다가 노화하여 사망하는 것이 인간이며, 인간은 설계도가 없어서 다시 제작할 수 없다”고 답한다. 단편의 제목은 5305호 거주자가 사망하고 나서 엘리베이터가 연주하는 노래의 가사 일부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처음으로 운행하고 싶지 않다고, 이대로 멈춰서서 그녀를 위한 단 하나의 음악을 영원토록 들려주고 싶다고 독백한다.


<그녀를 만나다>에서 저자는 생생한 목소리로 지금 바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서 멀쩡한 청년이 죽고, 크레인이 무너져 사람을 깔아 죽이고, 광고판을 고치던 사람을 딱 한 명의 운전자가 운행하던 지하철이 치어 죽이고, 배가 가라앉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사람은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된다고, 사람은 늙어 죽어야 한다는 작가의 울부짖음이 가슴 아팠다.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지금 이곳 대한민국의 모습이 정말 안타까웠다. 소설이 그리는 미래는 그래도 조금은 밝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서 군인, 엄마, 아내, 음악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녀’가 소설에 등장한다. 가상의 미래, 살아있는 그녀의 이름이 바로 ‘변희수 하사’라고 작가가 속삭인다고 생각했다. 


는 2018년 프랑스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작가가 착안한 소설이다. 책의 끝에 담긴 ‘작가의 말’에서 저자는 프랑스 남부 한 기차역에서 남성 경찰관이 자신의 아내와 두 아이를 권총으로 쏘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한 사건을 들려준다. “신이 남성이라면 여성이 느끼는 일상적 위협을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저자의 목소리가 책을 읽고 나서도 귓가에 생생하다. 


<씨앗>의 주인공은 미래의 나무다. 나무들이 살아가는 숲에 찾아온 모셴닉 사의 직원들은 나무들이 모셴닉 소유 식물종이 파종된 밭을 다른 식물로 오염시키고 있어서 소송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무들이 들려주는 말이다. “여기가 우리의 거주지입니다. 이 공터에서 자고, 빗물에 몸을 씻고, 저쪽 시냇물을 마십니다. 우리는 요리를 하지 않습니다. 햇볕과 자연이 있으니까요. 우리는 여기에 뿌리를 내리고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습니다. 죽고 나면 땅으로 돌아가서 다음 세대를 위한 거름이 됩니다. 그게 우리 방식입니다.” 모셴닉 사의 직원들은 나무들의 행위를 매장 허가도 받지 않고 시신을 유기한 뒤에 그 부지에서 그대로 먹고 자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비난한다. 나무들이 말한다. “해는 당신들의 허가를 받고 뜨지 않습니다. 비도 당신들 허가를 받고 내리지 않습니다. 당신들이 기업을 만들고 특허를 내고 이윤에 혈안이 되기 훨씬, 훨씬 전부터 자연은 자연의 방식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 방식대로 사는 겁니다.” 나무들이 가만히 당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에 대한 나무의 반격 방식이 바로 이 단편의 제목 ‘씨앗’이다. 나무들은 “자신들이 뿌린 씨앗이 결국 싹을 틔울 것이라고, 그런 날이 온다면 땅과 바다는 더 이상 상처 입지 않고 사람과 자연은 햇살 속에서 하늘을 향해 함께 자라나게 될 것이라고, 우리는 여전히 그날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책의 여러 단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이자 화자는 주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다. 자율주행 자동차와 인공지능 엘리베이터가 다른 존재와 소통을 시도하고, 나무가 인간에게 자연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한다. 다른 인간을 아무렇지도 않게 뜯어먹는 인간, 영생불사하는 인간도 등장한다. 이들도 인간이지만 인간은 아니어서 일종의 비인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소설은 비인간 존재 사이, 그리고 비인간 존재와 인간 사이의 공감과 연대를 말한다. 


로봇 314가 내게 묻는다. “너의 유토피아는?” 내가 답할 숫자는 유토피아에 대한 갈망의 정도다. 그 숫자가 0이 되면 나는 완전히 방전되어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일종의 죽음의 상태에 다다른다. 모든 것을 집어삼켜 동일화하는 ‘괴물’로부터 벗어나려면 끊임없이 충전해 앞으로 계속 나아갈 일이다. 모든 충전은 결국 나의 밖이 필요하다. 태양과 바람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른 존재가 나를 충전해 줄 수도 있다.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을 것, 이 세상 모든 억압과 차별을 잊지 않고 연대할 것을 다짐해 본다. 당신의 유토피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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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준
성균관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