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나는 한국 SF 작가 중에서 가장 뛰어난 거장으로 통한다. 이미 처음으로 글을 쓴 지 30년이 지났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열심히 글을 쓰고 있고 족히 지난 20년 간 한국 최고 수준의 SF 작가로 두루 언급되기도 했다. 아마 지금도 한국 SF 작가들 사이에서 누가 최고의 작가인지 조사를 해 보라고 하면 한 목소리로 듀나라는 답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듀나 작가가 어떤 작가인지 그 대표작은 어떤 것인지 또 소개하는 글을 쓰는 것도 조금은 민망한 느낌이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1990년대 중반에 나온 듀나 작가의 초창기 소설을 두루 모아 놓은 단편집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를 들추어 가까운 시선으로 차근차근 설명해 보려고 한다. 그러는 동안 한국 SF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듀나 작가는 어떤 식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등등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느낌을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의 맨 처음에 실린 소설은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다. 아마도 이것이 듀나 작가가 공개한 최초의 소설일 것이다. 듀나 작가가 소설을 공개한 곳은 PC통신 하이텔의 SF 동호회였다. PC통신이란 지금처럼 인터넷을 사람들이 자유롭게 쓰는 것이 어려웠던 시대에 전화선을 이용해서 업체에 운영 중인 다른 컴퓨터에 접속해서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덧글을 달 수 있게 해 주는 서비스를 말한다.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는 매우 짤막한 소설이다. 그 내용은 시간 여행 같은 놀라운 일이 벌어지면 쉽게 떠올리기 어려운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의외로 조심하지 않으면 세상이 뒤집히는 큰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하나의 우화로 보여 주는 것이다. 듀나 작가 보다 40년 정도 먼저 앞서서 1950년대에 레이 브래드버리가 쓴 “천둥소리”를 비롯해 비슷한 소재를 여러 작가들이 다룬 적도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SF를 접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지만 SF를 여럿 읽어 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신기해 하고 즐거워 할 만한 소재를 하나 골라다가 약간 다르게 가공해서 선 보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인 그 시절 PC통신에는 이런 부류의 아주 짧은 SF 단편을 써 올리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1990년대 중반 SF 팬들 중에는 “SF는 애들이나 보는 유치한 것이다”라는 편견과 거의 원수진 듯이 싸우려고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대보다 한 시절 앞 선 1980년대의 한국에서는 어린이용 로봇 애니매이션이 너무나 인기가 많았다. 그래서 SF하면 애들이 로봇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분야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거의 전염병처럼 퍼져 있었다.
그런데 세상에 퍼져 있는 SF, 특히 소설로 나와 있는 SF를 막상 여럿 읽어 보다 보면 장난감 판매용으로 만든 이야기들 보다는 훨씬 심각한 이야기들이 많다. 특히 다른 소설에서는 마주치기 힘든 인류 전체에 대한 고민을 다룬다거나 인간의 가장 뿌리 깊은 본성에 대해 사색하거나 혹은 대단히 거대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상상을 다루는 심하게 거창한 이야기들도 자주 보인다.
그러니까 관심을 갖고 파고 들어 보면 SF는 유치한 것이기는 커녕 오히려 너무나 심오하다. 그 어려움에 감탄한 그 시절의 SF 독자들은 “SF 좋아하신다고요? 아직 동심이 살아 계신가 보네요”라고 비웃는 사람들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정반대로 2010년 경에 SF를 소개하는 방송 같은 데 나가 보면 “SF는 어려워서 접근하기 쉽지 않다는 인식이 있다”는 편견에 대해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이것이 20세기 한국 SF 독자들이 SF가 유지하지 않음을 부르짖은 반작용이 아닐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그래서 1990년대 PC 통신에는 다른 SF 독자가 아니라면 별로 접하지 못했을 것 같은 심각한 주제, 복잡한 이야기, 오묘한 소재에 적당히 포장을 씌워서 소설로 만들어 올리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시간을 거슬러 간 나비”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올리는 그런 여러 소설 중 하나라고 할만한 글이었다. 특색을 찾는다면 지나치게 이야기를 거창하게 꾸미지 않는 담백함과 경쾌함을 잘 갖추었다는 정도다. 그러니 첫 소설 기준으로 따지면 듀나의 글 역시 많은 그 시절 글 쓰는 사람들과 비슷했다. 뒤이어 책에 실려 있는 소설인 “시간 여행자의 허무한 종말” 시리즈도 비슷하게 볼 수 있다.
오히려 최초의 듀나 소설에서 눈에 뜨이는 점은 따로 있다. 책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듀나 작가가 30년 전 이 소설을 처음 PC통신에 올렸을 때는 말미에 “---수다장이 듀나와, 이름을 밝히기를 죽기보다, 아니 죽기만큼 싫어하는 누군가가 보냅니다---”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이 소설이 올라 왔을 때 그 부분을 읽었고 저장해 둔 자료를 지금도 내 컴퓨터에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듀나는 PC통신에서 수 십 편의 소설을 올리면서 항상 말미에 이런 말 한 줄 씩을 집어 넣곤 했다. “--- 듀나와 그 일당들이 보내드립니다 ---” 이런 말이 항상 있었다. “듀나 작가의 정체는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협력해서 작업하는 것이다” 등등의 주장은 바로 그 때문에 나온 것이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인데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한 초창기에 이게 멋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냥 듀나 작가의 뛰어난 소설을 많이 읽다 보니 별 게 다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겠지만, 그때는 심오하고 심각하고 지구가 멸망하고 우주가 파괴되는 소설을 쓰고 나서 맨 마지막에는 무슨 TV 쇼 프로그램 마무리할 때 진행자가 하는 말 같은 이야기를 한 마디 던지는 게 아주 근사해 보이는 대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초창기에 나는 듀나 작가를 따라 하여 소설 말미에 “곽재식과 게렉터들이 보내드립니다” 뭐 그런 말을 매번 써 넣을까 했던 적도 있었다. 너무 흉내내는 것 같아서 곧 그만 두었고 대신에 나는 지금까지도 항상 소설 말미에 그 소설을 쓴 연도와 장소를 적어 넣는 다소 밋밋한 일을 하고 있다.
책에 실려 있는 그 다음 소설은 “미메시스”다. 이 소설은 초창기 듀나의 2단계 성장을 보여 주는 이야기다. 내용은 미래 시대의 어두운 밤거리 뒷골목에 이상한 범죄도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 곳에 기계와 로봇들이 돌아 다닌다는 이야기로 <<블레이드 러너>> 같은 사이버 펑크 영화 사이에 끼어 있으면 딱 어울릴 소설이다. 그 중심 소재는 역시 SF 독자들은 친숙하게 여기고 “SF하면 어린이들의 로봇 장난감 아니야?”라고 하는 사람들은 기이하게 여길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이전처럼 단순히 소재를 포장해 던질 뿐만 아니라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가 보여 주는 그 정서와 감각을 글로 보여 주는 일도 썩 잘 해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글은 글솜씨가 단단히 다듬어진 작가가 쓴 소설로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단숨에 이야기의 핵심으로 빠르게 진전하며 치렁치렁 묘사와 감정 표현을 버무리지 않고 핵심을 장식하는 단어 몇 개로 감성을 짙게 만드는 듀나 특유의 솜씨는 살아 있다. 나는 만약 듀나 작가가 1980년대 미국에서 이 소설을 공개했다면 할리우드에 적당한 값을 받고 영화나 TV시리즈 원작으로 판매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 정도의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결코 당시 한국에 흔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30년의 시간이 흘러 한국 SF 전성기라고 하는 요즘도 이 정도 글을 써 놓고 “아주 좋은 글을 썼다”고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다.
굳이 더 파고 들어 이야기해 보자면 듀나 작가가 쓴 1990년대 중반 시점에서 볼 때, 소재의 신선함이나 구성의 박력이 세다고 할 만하지는 않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뛰어난 외국 SF 작가들이 이미 여러 차례 보여 주었던 것을 한국 작가도 이제는 해 내는구나 하는 느낌으로 읽을 만한 소설이다.
더 재미난 이야기로는 이 소설 말미에는 원래 다음과 같은 말이 붙어 있었다는 이야기를 꺼내 보고 있다. “원래 이것은 내 만화 줄거리로 쓰려고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타고난 게으름과 실력의 부족으로 그 만화를 결코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죠. 만화와 잘 어울릴 수 있는 줄거리가 아니란 것도요[이 줄거리로 그린다면 만화가들이 쓰는 은어로 소위 ‘대갈치기’라고 하는 것을 끝도 없이 하게 됩니다.] 그래서 대충 정리해 여기 올립니다. 부족하지만 이해하시기를.”
이제 와서 돌아 보면 젊은 듀나 작가에 대해서 갖가지 상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 아닌가? 듀나 작가는 만화를 좋아했을까? 그림도 잘 그릴까? 스스로 만화가가 되거나 만화 업계에서 일하고 싶었을까? 가까운 친구나 친지가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었고 듀나는 그 사람과 협력하면서 줄거리를 만들어 주는 사람이었을까? 내가 알기로 이런 이야기에 대해 명확히 듀나에게 물어 보고 답을 공개한 사람은 없다.
“미메시스” 다음으로 책에 실린 소설은 “바벨의 함정”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바로 우리가 아는 지금의 듀나가 탄생했다고 보고 있다. 이 소설은 듀나 작가의 3단계 성장, 완성에 가깝다.
단숨에 읽어 나갈 수 있는 날렵함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구성해 두었고 중반의 흐름은 계속해서 신비와 호기심을 더할 수 있도록 우주 저편의 이상한 세계를 구경하게 해 주는 재미를 펼쳐 놓았다. 그래 놓고 결말에서는 인류 역사에서 문화의 원천을 더듬는 예상 외로 무거운 소재를 갖다 붙이면서 강하게 독자의 감정을 뒤흔든다. 발상이 뛰어 나며 그 발상을 옮기는 솜씨도 질척거림 없이 멋있다. 자신이 뛰어난 발상을 했다는 뿌듯함에 지레 자만하거나 도취되지도 않는다. 참신한 소재들과 자유로운 사고 방식을 자랑하지만 거기에 글이 파묻히지 않는 균형 감각이 멋지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그 시절 한국 문학계에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설령 소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동안 계속해서 자신을 발전시키며 2025년까지 글을 쓰는 일을 이어오며 거장이 된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다. 분명 그 무렵이면 듀나 작가가 글을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때 아닌가? 어떻게 그새 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었을까? 그런 실력이 있었으니까 지금까지 이 정도의 글을 계속해서 써 내는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 후로 이어지는 소설들은 여러 훌륭한 다른 듀나 소설을 읽듯 그저 즐기면 된다. 그러다 보면 초창기 시절, 1990년대 PC 통신에서나 가능했을 “존재 증명” 같은 짧은 글의 묘미를 다시 한 번 느껴보는 것이 중간중간 색다른 체험처럼 끼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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