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의 포개짐과 자성
지난 글에서는 물질 전체가 자기적 성질을 띠기 위해서는 원자 자석들 사이에 귓속말이 필요하다는 점을 소개했다. 냉장고 문에 만들어놓은 게시판에서 최첨단 반도체까지 다양한 곳에 사용되는 자석(강자성체)의 성질은 이웃하는 원자 자석들 사이에 서로 같은 방향을 가리키자는 귓속말 덕분에 가능한 물리적 현상이다. 이렇게 귓속말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한 종류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자 자석의 배열은 다양한 형태가 가능하다. 일례로 이웃하는 원자 자석들이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자는 메시지가 전달될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원자 자석의 방향이 번갈아 가며 바뀌는 반자성체가 된다.
지난 글에서 예고했듯이 이번 글에서는 원자 자석 사이의 귓속말이 어떤 원리로 전달되는지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교실에서 친구들의 메시지를 훔쳐 듣는 것도 어려운데, 나노미터보다 작은 단위에서 원자 자석들 사이에 전달되는 귓속말을 엿듣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심지어는 이렇게 전달되는 언어는 일상의 언어가 아닌 양자역학이니 더욱 난해한 일이다. 하지만 물리학을 안다면 이들의 메시지를 유추하고 해석까지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원자 자석들의 귓속말을 일상의 언어로 통역해보려 하니, 지금부터 한번 원자 자석 간의 비밀 메시지를 함께 엿들어 보자.
포개짐
어릴 적 귓속말을 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두 손을 모아 깔때기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런 후 입과 친구의 귀를 조심스럽게 손으로 잇대고 속삭여 메시지를 전달했다. 정보는 손으로 만들어진 이 작은 통로를 통해 새지 않고 전달되었다. 원자 자석 사이의 귓속말에도 이렇게 직접적인 연결이 필요하다. 다만 원자는 입도 귀도 없기에 조금 더 직접적인 연결이 필요하다. 바로 두 원자의 포개짐이다.
원자를 당구공과 같이 단단한 물체로 생각한다면 원자의 포개짐을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원자는 그렇게 단단한 입자가 아니다. 원자는 중심에 있는 비교적 단단한 원자핵과 그 주변에 묶여 있는 전자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바깥 경계가 명확하지 않은 유령과 같이 흐릿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렇게 원자가 흐릿한 형태를 띠는 이유는 원자 안에 묶인 전자가 고전적인 입자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입자라는 물체는 크기와 모양이 고정되어 있고 그 속도와 위치도 정확히 알 수 있다. 전자도 원자 밖에서는 고전적인 입자와 비슷하게 행동하기는 하지만 원자에 갇혔을 때 전자는 그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원자 안에 갇힌 전자는 유령과 같다. 특정한 형태를 정의하기 어렵고 동시에 정해진 공간 안을 가득 채울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전자가 풍선처럼 커다랗게 부풀어 큰 입자가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말하자면 원자 안의 넓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한다. 그래서 원자핵 주위를 뿌옇게 채운 구름으로 전자의 행동을 묘사하기도 하는데, 이 모습이 영화에서 자유롭게 크기가 바뀌는 유령과 닮았다. 그러니 원자에서 원자핵은 전자로 이루어진 유령 망토를 두르고 있는 셈이다.
두 원자가 이웃해 있을 때 두 원자가 두르고 있는 전자구름은 서로 포개어지고 섞인다. 원자 자석의 귓속말은 이 포개어진 전자구름을 통해 전자가 이동하며 전달된다.
밀어냄과 퍼짐
이렇게 이웃하는 원자 사이에 전자구름이 포개어지면 둘 사이에 전자가 이동할 수 있게 된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전자는 더 좁은 공간에 갇혀 있을수록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높은 에너지의 상태에 놓인다. 일반적으로 모든 물체는 에너지가 낮은 상태를 선호하기에 전자는 조금이라도 더 넓게 퍼져나가 행동의 반경을 넓혀 운동 에너지를 낮출 수 있는 상태를 갖는다.
전자구름이 겹쳐 있다고 해서 모든 전자가 쉽게 옆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자가 가지는 스핀이라는 물리량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생긴다. 여러 번 다루었지만, 스핀은 개개의 전자가 마치 작은 막대자석처럼 행동하는 것을 설명한다. 스핀은 고전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양자역학의 기본적인 물리량이며, 이 스핀의 값 때문에 전자는 파울리의 배타 원리라는 제약을 받는다. 배타 원리에 의하면 같은 상태에 놓인 두 전자는 같은 방향의 전자를 가질 수 없다. <원자 자석의 단체행동>에서 다루었듯이 원자 안에서 한 에너지 층에 두 전자가 들어있으면 파울리의 배타 원리에 의해 반대 방향의 스핀이 상쇄된다.
두 원자 사이에서 전자가 이동할 때에도 이 법칙을 따라야 하므로, 물질은 특정 자기적 배열을 선호한다. 위의 그림을 보자. 왼쪽의 그림은 전자의 스핀 방향이 위아래를 번갈아 가며 놓인 반강자성체이고 오른쪽의 상황은 스핀 방향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강자성체이다.
우선 왼쪽의 상황1을 살펴보자. 가운데에 놓인 전자를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상황을 상상해 보자. 이 경우에는 전자에게 스핀과 관련된 제약은 없다. 옆으로 이동해도 이미 그 자리에 있던 전자와는 반대 방향의 스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상황2는 가운데에 있는 전자가 옆으로 이동할 수 없다. 옆으로 이동하면 같은 스핀을 갖는 두 전자가 한 원자 안에 있는 형국이며, 이는 파울리의 배타 원리에 의해 금지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좁은 곳에 갇혀 있는 것보다는, 좀 더 운신의 폭이 있는 편이 에너지가 더 낮으니 왼쪽의 상황1을 더 선호할 것이다. 그리고 이 경우 원자 자석들이 하는 귓속말은 ‘우리 서로 반대 방향을 가리키자’일 것이다.
위와 같은 원리로 물질이 반강자성을 띠는 것을 고체 물리학에서는 ‘직접’ 교환 상호작용이라 부른다. 원자들이 직접 닿아 상호작용하고, 이로 인해서 자기적 배열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이 원리는 실제 물질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한다. 대부분의 흥미로운 양자 물질에서 원자 자석들은 산소와 같이 자성을 띠지 않는 원자와 이웃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초교환 상호작용
양자 물질에서 직접 상호작용보다 중요한 것은 간접 상호작용이다. 간접 상호작용 중 가장 유명한 것에는 ‘초’교환 상호작용이 있다. 가만히 보면 물리학자들은 ‘초’라는 접미사를 참 좋아한다. 초전도체 Superconductor, 초끈이론 Superstring theory, 초격자 Superlattice, 초신성 Supernova 등 예는 계속해서 들 수 있다. 아마도 기존의 것을 뛰어넘는 발견이 계속 일어나서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다. 직접 교환 상호작용의 경우 귓속말처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원자 자석들끼리만 정보가 전달되는 것에 반해, 초교환 상호작용은 원자를 하나 건너뛰어 귓속말을 전달할 수 있기에, ‘초’라는 접미사가 주어졌다.
위의 그림에 표현된 예를 한번 살펴보자. 상황은 두 개의 원자 자석 사이에 산소 원자(이온)가 끼어 있는 상황이다. 산소 원자는 전자가 꽉 차 모든 전자가 쌍을 이루고 있어 원자 자석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런 형태에서는 산소 양쪽에 있는 원자 자석이 서로 대화를 할 수 없으므로 서로 어떤 약속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많은 양자 물질들은 이렇게 산소 원자와 같은 원자가 끼어 있는 상황에서도 다양한 자기적 성질을 보이며, 그럴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초교환 상호작용이다.
초교환 상호작용도 이름은 멋지지만 작용하는 물리적 원리는 같다. 파울리의 배타 원리와 전자가 원자 사이를 움직이며 운동 에너지를 낮추는 것으로 원자 자석 간 전달되는 메시지의 내용이 정해진다. 단지 이 경우에는 가운데에 끼어 있는 전자쌍이 관여한다는 점이 다르다. 위의 그림에서 왼쪽의 상황1은 원자 자석이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반강자성 상태이다. 그리고 오른쪽의 상황2는 원자 자석이 서로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강자성 상태로 볼 수 있다.
위의 상황에서도 상황1의 반강자성 상태가 선호된다. 그 이유는 아래의 그림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반강자성 상태의 경우는 아래 그림의 왼쪽 두 그림처럼 전자들이 원래의 자리에서 두 번 움직일 수 있다. 반면 상황2의 강자성 상태는 전자가 한번 움직이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외에는 더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끝난다. 따라서 전자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넓어 운동 에너지를 낮출 수 있는 상황1이 선호된다.
멀리 움직이는 전자
지금까지 소개한 원자 자석의 귓속말은 사실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절연체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원리들이다. 이 경우 전자가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기에 바로 옆에 있는 원자와 혹은 하나 건너 있는 원자에 있는 전자와 상호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며,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반강자성 현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물질의 자성은 절연체뿐 아니라 전기가 잘 통하는 전도체에서도 나타난다. 다음 글에서는 전도체에서의 자성과 강자성 현상을 가능하게 만드는 상호작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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