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I-FI

인공의 밥상 <1부>

2022년 9월 통권 204호

(일러스트레이터 : 박재령)


‘에반스 매듭’을 검색했다. 머릿속에서 천천히 매듭을 묶는 방법을 그려보았다. 줄을 바닥에 놓고, 지그재그로 놓은 다음에 가운데에서 감아올린다. 감아올리면서 생긴 고리 위로 줄을 잡아 뽑으면 완성이다. 집에 밧줄은 없지만, 이사할 때 썼던 노끈 정도는 있다. 노끈으로도 할 수 있을까. 지금 꺼내와서 한 번 시험해 볼까.

에반스 매듭을 검색한 건 오늘이 처음은 아니었다. 최근 일주일간은 하루에 한 번씩 검색했다. 이걸 검색해서 보고 있을 때면 마음이 조금은 고요해졌다. 검색은 했다고 해도, 집안에 노끈을 걸 곳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꼭 위쪽에 걸지는 않아도 될지 모른다. 죽겠다는 마음만 확실하다면, 문고리에 걸어도 죽을 수 있다. 줄을 당기면 고리가 점점 좁아지는 매듭. 어쩌면 이미 그 매듭을 목에 걸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그 메일을 열었을 때부터.


그 메일은 하마터면 수많은 광고메일과 함께 잘못 선택되어서 지워질 뻔했다. 아니, 어쩌면 지워지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지. 안타깝게도 나는 휴지통 버튼을 누르기 전에 그만 그 노란색 뱃지를 발견하고 말았다. 체크표시 하나를 지운 다음에 나머지 광고메일을 싹 삭제했다. 그리고 아무런 경계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노란 뱃지가 달린 메일을 눌렀다. 메일 제목은 [휴가 사용으로 부당징계를 받았습니다] 였다. 뭐, 연차나 휴가 제대로 못 쓰도록 하는 못된 회사 얘긴가보다 했다. 그런 얘기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접한다. 여기에 부당징계까지 결합했다면 못됐을 뿐만 아니라 멍청한 회사였다. 근로기준법을 저렇게 우습게 여기는 회사는 보통 다 비슷비슷했다. 사용자들이 가족으로 엮여있고, 회장이랍시고 있는 놈은 80대쯤 되는, 전체 고용인은 50명에서 200명 정도 되는 조그만 회사일 것이다. 원할 때 휴가를 쓸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못 하는 회장님이 길길이 날뛰어서 징계가 무리하게 진행된 경우다. 물론 메일 제목을 보고 여기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내가 메일 제목을 봤을 때는 그냥 이 정도의 가벼운 마음이었다는 거다. 설마 이런 내용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3개월 전에 출산휴가를 받은 여성노동자입니다.]

그냥 일반 연차가 아니라 출산휴가인데 부당징계를 했다고? 아무리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정신 나간 기업이라고 해도 그럴 리가 있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뒤의 메일 내용은, 정말이지,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메일을 보낸 사람이 일하고 있는 곳은 조그만 가족 기업이 아니라 이 나라의 공영방송이었다. 그녀는 재택근

무자였다. 공영방송의 모니터링 요원이라고 했다. 재택근무자라고 해도 출산휴가 90일은 공평하게 부여되는 권리였고, 그녀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출산휴가를 신청했다고 한다. 그렇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가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신청했다.


“왜 그렇게 멍한 표정이야?”


아까 부탁한 아메리카노를 내 책상에 살짝 밀어 놓으면서 동료인 수경이 말을 건넸다.


“야…… 출산휴가 말인데…….”


“응, 90일. 2명 이상이면 120일이잖아. 왜?”


“인공자궁으로 낳아도, 보장되냐?”


“어?”


수경도 눈이 휘둥그레져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메일을 읽으면서 수경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거 평범한 사람은 거의 못하는 거 아니야? 돈이 억대로 들어갈 텐데.”


“그렇지?”


“인공자궁까지 쓸 수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부당징계 운운하면서 메일을 보내와? 아.”


“응? 왜?”


“왜 메일 보냈는지 알겠네.”


수경이 마우스로 블록처리 해 놓은 자리에 쓰여있는 글자는 부당징계가 아니었다.

[회사는 이 출산휴가가 사기로 월급을 부당편취한 것이라며 저를 고소했습니다.]

나는 더 숨을 깊이 내쉬었다. 백번 천번 알만한 일이었다. 작은 기업이라고 생각했던 애초의 생각이 와르르 무너졌다. 작은 기업이었으면 오히려 이런 사건은 뭐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생소하기도 하고, 대충 유야무야 징계해고나 때리면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공영방송이다. 국민의 세금이 투여되는 공간이다. 수많은 증빙서류가 필요한 곳에서는 이런 일은 대충 넘어갈 수가 없다. 출산휴가는 출산을 하는 신체의 부담을 줄이기 위한 건데, 인공자궁으로 출산을 해 놓고 출산휴가를 달라고 했으니 국민의 소중한 세금을 써야 하는 회사 차원에서는 보수적으로 사고할 수밖에 없었겠지.


“그건 그렇고, 이 사람 글 깔끔하게 잘 쓴다.”


사실이었다. 보통 우리에게 오는 메일은 자기들 억울함에 복받쳐서 제대로 상황을 설명하지도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고(그리고 메일을 보내기보다는 보통 전화를 걸었다), 대체로 모든 문장이 격앙되어 있게 마련이었는데, 이 메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주 서늘한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상황을 건조하게 전달하면서, 자신이 왜 이게 문제라고 생각하는지까지. 결국, 인공자궁이 낳았더라도 출산은 한 게 아니냐는 건데. 이런 논리로 캠페인이라도 만들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메일은 [개인적 사정으로 사무실로 찾아가기가 어려우니, 저희 집에서 상담을 진행하고자 합니다.]라는 문장과 함께 자기 집 주소를 쓰는 걸로 끝을 맺었다. 그 흔한 조율도 없이 내일 오전 11시에 오라고 되어 있었다. 전화번호 하나 남겨두지 않았다. 


“하…… 어떡하지.”


“뭘 어떻게 해. 당연히 가야지.”


“뭐? 왜? 너 이거 답이라도 보여?”


“보이겠냐? 당연히 아니지.”


“그럼 왜?”


책상에 걸터앉아서 두 손으로 찻잔을 들고 차를 마시던 수경이 어깨를 으쓱했다.


“메일을 봐라. 안 받아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수경의 말이 맞았다. 건조하고 단정한 문장, 자기 말이 당연히 다 맞다는 태도, 사무실로 찾아오겠다는 게 아니라 자기 집으로 찾아오라는 결론까지. 백화점 판매사원이나 미용사들이 멀리서 표정만 봐도 진상을 알아보는 것처럼,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는 인간들이란 감이라는 게 생기는 법이다. 활동가라는 미묘한 이름의 직업이라도 다르진 않다. 나중에 일 크게 만들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만나는 봐야 했다.

인공자궁으로 아이를 낳은, 재택근무자인, 성북동에 사는 사람. 대궐 같은 저택은 아니라고 해도, 상당히 잘 사는 사람을 상상했는데. 주소를 보고, 다시 스마트폰 지도를 보고, 또다시 주소를 확인했다. 틀림없이 여기가 맞았다. 이 빌라는 대충 80년대 후반쯤에 지었으려나. 거기다 양쪽에 똑같이 못생긴 건물들이 자리해서 햇빛도 제대로 안 들 것처럼 보였다. 메일을 보낸 이는 101호라고 써두었다. 101호는 반 계단 정도를 올라가서 있었다.

일단은 벨을 누르자. 누르면 누구라도 나오겠지. 나는 벨을 누르려다가 당황해서 벽을 더듬었다. 벨이 없었다. 생판 손으로 두드려야 할 모양이었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시간은 11시 2분.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손을 들어서 철문을 천천히 두드렸다. 안에서 작은 신음이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전화번호 하나 가르쳐주지 않은 여자는 한눈에 알 수 있는 뇌성마비였다. 꼬인 손을 뒤틀면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는 신음을 내더니,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얼떨결에 여자를 따라 집안으로 들어섰더니만, 집안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제대로 된 가구도 없고, 덩그러니 책상 하나와 노트북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책장은 좀 있었다만, 옷은 그냥 행거에 걸려 있었고 옷장 하나 없었다. 어떻게 봐도 억 소리 난다는 인공자궁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집 모양새는 아니었다. 나는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을 둘러보다가 여자에게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너무도 비싸 보이는 가구, 와 사람 하나를 발견했다. 최신식 요람형 보육기기였다. 신체 온도와 움직임을 측정해서 기저귀를 갈고, 시간에 맞춰서 밥을 먹이고 트림을 시키고, 정서함양에 좋은 음악을 틀어주고, 포옹하는 것처럼 움직이면서 아이를 어른다는 그 보육기기. 이 보육기기의 가격도 웬만한 외제 차 가격쯤은 될 텐데. 새근새근 자는 아이는 틀림없이 생후 3개월 정도 되어 보였다.


“어…… 안녕하세요. 제가 메일을 받은 라임입니다.”


여자는 꾸뻑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앉으라는 듯 다 무너져가는 소파 쪽을 가리켰다. 가죽이 여기저기 벗겨진 소파 위에 어정쩡하게 엉덩이를 걸치고 앉자, 여자는 내 옆에 앉아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냈다. 으, 으으, 같은 소리를 내며 여자는 수첩에 글씨를 써서 내게 건넸다.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메일을 보낸 김은아입니다.]

이제야 대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재택근무를 했던 이유, 왜 사무실로 찾아오지 않았는지, 인공자궁으로 아이를 낳은 이유까지, 어느 정도 윤곽이 그려졌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나 생각하다, 갑자기 울컥 화가 치밀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한단 말인가. 출산휴가는 출산한 산모의 신체를 보호하려는 목적 외에, 태어나자마자 반드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인간 아이를 돌보려는 목적 정도가 있을 텐데. 여기 있는 이 아기는 심지어 돌보는 것조차 남이 하고 있는데! 어떻게 이걸 방어할 수가 있지? 아무것도 떠오르지를 않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네, 메일 내용은 제가 다 보았고요……. 인공자궁으로 태어난 아이가, 저쪽의 보육기기 안에 있는 아인가 봐요?”


으, 여자는 짧게 소리를 내고 왼손 엄지와 검지로 O.K. 모양을 그려 보였다. 그리고는 다시 수첩에 뭐라고 써서 내밀었다.

[김하린. 하늘에서 내려준 아이라는 뜻이에요.]


“되게 기다리던 아이셨나 봐요. 남편분은, 출근하셨어요?”


여자는 입을 벌리고 하, 소리를 내며 한 번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수첩에 펜을 들이댔다.

[남편 없어요. 정자는 기증된 정자예요.]

뭐야? 뭐가 하늘에서 내려준 아이라는 거야? 죄다 인공이잖아. 기증받은 정자에, 시험관 시술에, 인공자궁에, 보육기기까지. 모든 게 다 인공인데, 이름은 왜 이렇게 지은 거야. 어이가 없어서 김은아를 쳐다보니, 김은아는 아까보다 조금 더 큰 소리로 키득거렸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사건을 들고 와 놓고, 뭐가 그렇게 신나서 웃는담. 난감하게 시선을 피하는데, 그때 잠에서 깬 하린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은아는 왼쪽으로 기울어진 몸을 재게 움직여 보육기기 곁으로 다가섰다. 하린이는 엄마를 보고 입을 오물거리며 손을 뻗었다. 엄마는 구부러진 손가락을 힘겹게 아이에게 가져갔다. 아이가 엄마의 손가락을 꼭 쥐었다.

내가 보육기기 곁으로 다가서자, 김은아는 아이의 손을 뿌리치고는 다시 수첩을 꺼냈다.

[애를 키워야 합니다. 저는 소송에서도 이겨야 하고, 해고도 당할 수 없어요. 돈을 돌려줄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더 많은 돈이 필요합니다. 하린이와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린이의 새까만 눈이 내쪽을 향했다. 이리로 뻗어오는 태어난 지 3개월짜리 조막만 한 손을 보며, 나는 망했음을 직감했다. 나는 분명히 이 일을 떠맡게 될 것이었다.


*


김은아는 휴대폰에 글씨를 쳐서 내게 보여주는 대신 꼭 쥐고 있었지만, 김은아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김은아는 명백하게 눈으로 욕을 하고 있었다. 절대 안 가겠다고,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냐고 완강하게 버티던 김은아에게 변호사 상담은 그런 식으로 하는 거 아니라고,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변호사 상담을 대리로 해 주냐며 김은아를 끌고 온 건 나였다. 김은아는 거칠게 노트에 글자를 쓰다가 한 번 펜을 놓치기까지 했다.

[메일로 상세하게 설명할 수 있어요. 주고받으면 되잖아요.]

물론 김은아는 메일로 상세하게 설명을 할 수 있었다. 그때 김은아에게 받은 메일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 메일은 역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나는 그 메일을 보고 김은아의 변호를 맡겠다고 받을 변호사를 찾을 자신이 없었다. 생소한 상황, 냉담한 말투, 자신이 다 옳다는 거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태도. 노동 사건이라면 열 일 제쳐놓고 맡으려고 드는 변호사들도 김은아의 메일을 받으면 거절할 것 같았다.

김은아가 변호사를 찾아가지 않으려는 이유도 알만했다. 김은아의 메일은 많은 걸 설명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는 데에 성격적 문제가 있었다. 이 일에서 나는, 오히려 취약점을 무기처럼 휘두르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나왔다. 그러니까 김은아는 내가 만나본 적 없는 종류의 진상이었다. 나는 당했고 약하다고 바닥에 드러눕는 게 아니라, 고슴도치처럼 몸을 웅크리고 보잘것없는 가시를 바짝 세우는. 드러눕는 게 싸움박질할 때는 더 유리하다는 생각을 하다, 결국 걸음을 멈췄다. 김은아는 한참 걷다가 노려보고, 다시 걷다가 노려보고를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좀! 소송을 하겠다고 한 건 은아 씨잖아요. 상황을 해결하려면 좀 더…… 좀 더…… 직접적으로 대응해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처음 떠오른 말은 ‘약해보여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였다. 안 되지. ‘몸을 낮춰야 할 때도 있는 거예요’? 절대 안 되지. ‘상황을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게 효과적’…… 지금 당장 집에 가버릴 지도 몰라. 짧은 순간 동안 온갖 말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말의 홍수 속에서 조심스럽게 고른 말이 ‘직접적으로 대응’이였다. 내 말을 김은아는 걸으면서 한쪽 손으로 qwerty 자판이 있는 기종의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어떤 사람들에겐 그렇게 힙하다는 블랙베리를 눈으로 본 건 처음이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에게는 화면이 제대로 있는 것보다 물리 키보드가 훨씬 쓰기 편할 것이다. 김은아는 달칵달칵 스마트폰을 두드리더니 내게 화면을 건넸다.

[내가 뭐라고 했어요?]

이를 악물었다. 진짜, 이 여자가.

고심 끝에 찾아간 변호사는 변호사보다는 노무사를 더 많이 채용하고 있는 양변이었다. 6년 전에 출산을 한 싱글맘이었다. 양변을 찾아가기로 한 건 언젠가 노무 상담을 받던 날 술 한 잔을 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양변은 그날 아이를 낳은 과정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아이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끝까지 말해주지 않았다.


“어쩌다 생겼어. 근데 그때가 서른일곱이었단 말이지. 결혼하고 싶지 않은 사람한테는 애를 낳을 마지막 기회일 거 같았어. 낳고 싶더라고.”


그때는 무슨 말인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김은아의 사건을 맡게 되고나서 가장 많이 생각났던 건 양변이었다. 양변은 김은아의 마음을 좀 더 잘 이해할 것만 같았다.

라는 건, 물론 나만의 생각이었다. 양변은 사건을 보자마자 한쪽 입꼬리를 찌그러뜨리며 자기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아오, 뭐 이렇게 골치 아픈 사건을 들고 왔어.”


그리고 김은아를 휙 보더니 다시 서류에 고개를 돌렸다.


“은아 씨도, 이게 골치 아픈 사건인 건 아시죠? 어후…….”


싱글맘이 되기를 선택한 여성들끼리의 좀 더 아름다운 여성연대적 만남…… 같은 건 없었다. 양변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를 들고 이리저리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다가 다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출산휴가를 안 줘서 사달이 나는 꼴은 봤어도, 출산했다고 속였다고 사달이 나는 꼴은 처음 보네. 가끔 외국 언론에서 보기는 했다만 그런 거야 진짜로 속인 거라도 했지. 이건 애가 실제로 태어났잖아. 이걸 뭐 어떻게 해야 하지?”


손톱을 세워서 미간을 긁어대던 양변은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김은아는 약간 긴장한 듯 양변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가방 안에서 수첩과 펜을 다시 꺼냈다. 글씨를 쓰는 동안 김은아의 왼쪽 팔이 머리 쪽으로 계속 올라갔다. 양변의 침묵이 길어졌지만, 김은아도 무언가 아주 길게 글을 쓰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는 시간이 한참을 지나는 동안, 나는 양쪽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침묵을 먼저 깬 건 김은아였다. 김은아는 약하게 소리를 내며 양변에게 노트를 내밀었다. 김은아의 팔이 양변에게까지 닿지 않아, 나는 노트를 양변에게 밀어주었다. 그러면서 힐끗, 노트를 보았다. 

[모든 경우에 새로운 기술이 생겨나면, 관련 법령이 없죠. 그러다 보면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고요. 저작권법이 그랬고, 인터넷과 관련한 법들이 그랬고, 변호사님이 다루시는 노동법도 사실 그랬지 않습니까. 변호사님께서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길을 가게 되시는 걸 수도 있고요. 변호사님이 계속 맡아오신 사건들을 보면, 이 사건은 이기건 지건 간에 변호사님에게 좋은 경력이 될 거 같은데요. 인공자궁과 노동에 대한 이슈를 사회에 던지는 것 아닙니까. 변호사님의 이름을 역사에 남기는 여정을 저와 함께해 보시면 어떨까요. 이름이 더 알려지면 변호사님께 나쁠 건 하나도 없습니다.]

양변은 노트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고, 김은아는 노트를 내미느라 흘린 침을 닦기 위해 티슈를 뽑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나는 티슈를 뽑아서 김은아가 테이블에 흘린 침을 닦아냈다. 김은아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런 식으로 양변을 설득하란 소리는 아니었는데. 양변은 노트를 톡톡 두들기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김은아 씨 말도 맞네요. 지더라도 괜찮을 거 같고.”


양변은 그리고 내 쪽을 돌아봤다.


“라임이 바깥에서 붙어줘야 돼요. 무슨 말인지 알죠?”


양변을 설득하려고 김은아를 데리고 온 건 맞았지만, 막상 양변이 설득되는 걸 보니 기분이 나빴다. 기분이, 나빴다! 서로를 이해하는 아름다운 여성연대 같은 건 아무것도 없고, 오로지 명예욕과 실리로 설득이 된 거 아닌가. 이게 대체 무슨 놈의 활동이야?

거기다가 바깥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양변은 김은아 말대로 지더라도 사회적 명예와 실리가 남지. 그럼 나는 뭘로 설득할 건데? 왜 나한테는 실리적 제안을 안 해? 월급도 기부금으로 쥐꼬리만큼 받는데! 거기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캠페인을 만들 각도가 보이질 않았다. 인공자궁에 대한 사회적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그 비싼 걸 쓰는 사람을 누가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누가 이 사람을 위해서 목소리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하겠냐고. 내가 대체 어떻게 밖에서 붙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고 양변에게 역으로 묻고 싶었지만, 김은아를 양변에게 데리고 온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양변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변호사 사무실을 나왔다.

시간은 마침 12시 30분이었다. 어차피 사무실로 돌아가기 전에 밥은 먹어야 했다.


“식사하고 가죠?”


김은아는 한 손으로 다시 O.K.표시를 만들어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떡볶이 집이 하나 보였다.


“떡볶이 괜찮아요?”


김은아의 O.K. 사인이 다시 떨어졌다.

떡볶이집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하나씩 짚으며 김은아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김은아는 여전히 O.K. 사인을 보여줬다. 문제는 막상 떡볶이와 순대가 나온 다음이었다. 김은아는 포크를 들 생각조차 하질 않았다. 순대 세 개째를 입에 넣었을 때야 나는 김은아에게 물었다.


“은아 씨는 안 먹어요?”


김은아는 손을 내젓더니 다시 휴대폰을 꺼냈다.

[밖에선 밥 잘 안 먹어요. 저도 불편하고, 보는 사람도 불편해 해서.]


“아니, 그럼 말을 하시지……. 저 사무실 근처에서 혼자 먹어도 되는데.”


[라임 씨한테는 밥 한 끼 사고 싶어서요.]


“아…….”


밥을 사거나 술을 사겠다고 말하는 내담자들은 종종 있었다. 그렇게 친해져서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담자들도 물론 많았다. 하지만 상대방이 같이 밥을 전혀 먹지 않는 경우도 처음이고, 굳이 한 턱을 내겠다는 의사를 밝히면서 사는 게 떡볶이라는 것도 상식 밖이었다. 약간 얹힐 것 같았다.

뭐, 김은아에게 비싼 밥을 얻어먹는다면 지금보다 더 얹힐 거 같을 테니까. 나는 그냥 맛있게 잘 얻어먹기로 하고, 삶은 허파에 떡볶이 국물을 푹 찍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은아 씨는, 돈이 많은 건 아니죠?”


다시 O.K. 사인.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들 수 없으니 손을 흔들거나 O.K. 표시를 하는 걸로 긍부정을 표시하는 거라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도대체 어떻게 인공자궁을 쓰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직까지 쓴 사람도 별로 없잖아요.”


[돈이야 모으면 되고, 빌릴 수도 있고요. 나이 들면 난자는 채취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까지 입밖으로 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누구나 자기 삶이 있고, 삶에서 중요한 선택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디에나 쉽게 말을 얹어서도 안 되고, 함부로 짐작해서도 안 되는 이유들이 있다. 내가 다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순대와 떡볶이만 먹고 있는 걸 김은아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시 톡톡 휴대폰을 두드렸다.

[뭘 묻고 싶은지 알아요. 힘든 길이라고 하고 싶은 것도 알고요. 맞아요, 저 지금 야단났어요. 대학생 때부터 꾸준하게 일해서 모아놓은 돈은 좀 있는데, 그 돈도 죄다 여기 부었고요. 부모님이 남겨주신 유산도 좀 있는데, 그것도 죄다 여기 부었어요. 보육기기 빌린 거 아니고 산 거예요. 저는 남들처럼 잠깐 빌려서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잖아요. 빚도 많이 졌어요. 그런데 지금 빚지고, 돈 쏟아붓지 않으면 절대로 못 할 것 같았어요. 평생, 못 할 것 같았어요.]

조금 시간을 두고, 김은아는 다시 휴대폰을 보여줬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불쌍해 보이긴 싫어요. 그렇게 안 보이는 게 내 삶의 목표 중 하나예요.]


“하린이는, 보육기기가 잘 봐요?”


김은아가 활짝 웃었다. 휴대폰으로 어플리케이션을 하나 틀어서 보여주었다. 하린이의 심박수, 체온, 호흡량이 일정하게 표시되고 있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언제 깨었는지도. 조금 전에 잠이 깬 하린은 보육기기가 보여주는 홀로그램 모빌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의 하린도, 화면을 보여주는 김은아도 행복해 보였다. 앞으로 계속 행복할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삶은 행복한 순간을 하나씩 쌓아가는 거니까.


“여기 떡볶이 국물 맛있네요.”


나는 천천히 오뎅을 씹으면서 이 행복한 순간을 기억하고자 노력했다. 내일부터는 이 오뎅을 씹던 순간을 여러 번 추억해야 할만큼 피곤하고 고된 순간들이 어마어마하게 쌓일 테니까. 지 엄마와 내 삶을 아는지 모르는지 화면 속의 하린은 꺄르르 웃으며 손을 허공에 휘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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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