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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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권 10 호(2006 년 10 월)
필멸(必滅)의 변(辯) 1
신윤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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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217년 8월 8일 - 천안 갈무리 개인병원

 

단지 넘어졌을 뿐이다. 두 발로 직립하며 무거운 머리를 어깨 위에 이고 사는 대부분의 인간이 가끔 그러하듯, 그냥 어느 순간 두 발이 평행감각을 상실하여 넘어진 것이다. 그러나 박영감은 죽었다. 그리고 그의 육신은 10분 전에 하진석의 병원으로 도착했다. 박영감은 진석을 언제나 젊은 선생이라고 불렀다. 진석의 숨겨진 내력을 알지 못하는 박영감에게 진석은 어리게만 보였을 것이다.

 

진석은 2년 전에 자신이 꿰매어준 박영감 어깨 위의 도톰한 수술자국을 더듬었다. 그리고 어제 처방해준 감기약을 기억해 냈다. 일주일 치를 처방해 주었으니, 그의 집에는 아직 6일치가 남아있을 것이다. 진석은 박영감이 아직 감기에 걸려있을 거란 생각에 애석해했다.

 

박영감의 사인을 알아내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외상은 뚜렷했다. 딱히 개두를 할 필요조차 없어보였다. 박영감은 계단에서 뒤로 넘어졌고 계단의 모서리에 부딪쳐 후두부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충격이 단단한 섬유골격으로 밀봉된 두개골에 상처를 내기에는 역부족이었겠지만, 그 아래에 약동하는 동맥혈을 파열시키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내출혈.

 

피는 고이고, 장시간 산소를 공급받지 못한 뇌의 일부가 괴사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박영감의 연수는 마지막 호흡신호와 심장박동신호를 보내고는 회백질의 대뇌와 마찬가지로 괴사에 이르렀을 것이다. 호흡정지에 이은 맥박정지, 뇌사에 이은 심장사를 통해 박영감은 의학적으로 완벽하게 죽은 것이다.

 

인간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병이 들거나 다친다. 특히나 늙은 육신은 더욱 그러하다. 하진석의 병원에는 그런 늙은 환자들이 언제나 줄을 이었다.

 

진석은 신을 노하게 한 죄로 영원히 돌을 정상에 올리는 형벌에 쳐해 졌다는 시지푸스를 떠올렸다. 그가 하는 일도 그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화분을 텔레비전 위에 옮기다 허리를 다쳐 진석을 찾아온 환자는 얼마 안 있어 그 화분을 다시 내리다가 손목을 다쳐 찾아올 것이다. 노인들은 환절기마다 알레르기 약과 감기약을 그에게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어느 한순간 몰개성한 죽음이 찾아와 인생을 거두어 갈 것이다. 그러면 적어도 그들의 돌 굴리기는 끝이 난다.

 

진석은 박영감의 사인(死因)을 간단히 정리하고는 시내의 큰 병원에 연락했다. 아직 환자 두어 명이 그의 진찰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돌을 정상으로 굴리고 싶지 않았다. 정상에 올려 진 돌은 균형을 잡지 못하고 금세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질 것이다. 적어도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안치소에 있는 그에게 간호사의 호출이 왔다.

 

"하 선생님, 환자분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언제 오신다고 전해드릴까요?"

 

"부검이 길어진다고 전해드려, 내일이나 모레 다시 찾아오시라고."

 

"네, 그리고 오늘 일정 안 잊으셨겠죠. 7시에 강원택 박사님 외진 있으십니다."

 

"아, 그래. 잊을 리 없지."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시계를 바라봤다. 5시 22분. 아직 20분은 여유가 있었다.

 

강원택은 전신일괄대체재(全身一括代替財)를 개발한 6명의 박사 중 한명으로 현재 전 세계에 13개 밖에 없는 불멸자의 도시(immortal city) 중 하나인 서울에서 거주 중이었다. 사실 전신일괄대체재를 개발하였음에도 필멸자(mortal)를 고수한 강원택이 불멸행정특구인 서울 시내의 중심가에 살 권리는 없었지만, 그는 행정에서조차 예외적인 유명 인사였다.

 

시간이 5시 45분을 지날 즘, 하진석은 강원택을 만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2217년 8월 8일- 서울 IC(immortal city) 강원택 박사의 저택

 

하진석은 몇 가지 의료도구를 챙겨 넣은 왕진가방을 비스듬히 들고는 방으로 들어오라는 호출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다양한 목재를 풍부히 사용하여 내부 인테리어를 한 강원택 의원의 집은 마치 르네상스 시대의 명문가를 연상케 했다. 그러나 그에게 목재가 주는 의미는 바로 재력의 상징이었다. 나무를 하나 벨 때마다 지불해야 하는 환경부담세를 생각해 볼 때, 이는 집안 전체에 금칠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 박사님, 들어오세요."

 

스피커를 통해 젊은 여인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의 앞에 있던 문이 열렸다. 문은 열렸지만, 바로 강원택 의원의 방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열린 문 사이로 그의 방으로 통하는 기다란 복도가 보였다. 진석은 복도로 들어섰다. 그의 앞에서 한 사내가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이었다. 젊었을 때에는 꽤 강건한 느낌을 주었을 듯한 체구의 사내가 뭔가 비통한 표정으로 강원택 박사의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 사내는 진석의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고, 하진석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그의 표정은 마치 종이처럼 잔뜩 구겨졌다. 그의 표정에는 너무나 많은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에 진석은 그 표정이 무슨 이유때문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것은 절망 같기도 했고, 분노 같기도 했다. 사내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는 빠르게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진석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강원택 박사가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키고는 진석을 맞아들였다. 콜라겐이 빠져나간 피부 위에는 균열과 같은 잔주름이 가득했고, 일평생 신통찮은 표정만 지어왔을 터인 그의 근육은 얼굴 여기저기에 깊은 고랑을 파고 있었다. 그는 162년의 삶을 얼굴에 지고 있는 '노인'이었다.

 

"어서오너라, 한 달 만에야 찾아오다니, 왕진이 아니면 올 생각이 없는 게냐?"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일이 바빠서 그렇죠. 외할아버지."

 

강원택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복도에서 마주쳤던 노인과 달리, 강원택의 표정은 지나치게 감정이 담기지 않아 무슨 의미인지 알기 어려웠다.

 

"병원을 옮길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아직 천안인 게냐? 8년이나 했으면 주민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데"

 

"조만간 옮겨야겠지요. 지금은 그냥 동안이라 좋겠다는 듯이 농담으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되도록 조심, 또 조심해라. 필멸자들이 불멸자들을 얼마나 증오하는지는 잘 알고 있을게다. 그래, 그래, 너만큼 잘 아는 사람도 드물겠지. 그러니 조심하라는 게다. 경아는 네 일에 관해서 뭐라고 하지 않더냐?"

 

"일을 좀 멀리 나간다는 것 외에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더군요. 그녀는 불멸자의 봉사를 노블리스 오블리제 쯤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길지 않은 대화를 나누는 동안 하진석은 강원택의 혈당치와 혈압을 검사하고, 골밀도 스캐너로 강원택 박사의 뼈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주사기로 나노 머신을 혈관 속으로 흘려보내 콜레스테롤로 인한 동맥경화를 예방했다.

 

"근데, 아까 방에서 나온 사람은 누구죠? 노인이던데. 언제나 필멸자들을 조심하라고 하지 않으셨던가요?"

 

강원택 박사는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불멸자에 한해서지, 나야말로 저승에 한발 걸치고 있는 필멸자아니더냐."

 

"그들은 할아버지의 필멸고수를 위선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껄껄, 적어도 그들은 날 오해하지 않고 있군. 나 자신도 나를 오해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

 

진석은 강원택 박사가 말을 돌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진석은 의자에서 일어나 강원택 박사의 이불을 여며주며 말했다.

 

"나노 머신은 내일 아침에 소변으로 나오니깐 거름종이로 걸러서 분리수거 해주시고요. 현재 골밀도 수치가 조금 낮은 편이니깐 영양사한테 언질하고 가도록 할게요. 그리고……,"

 

진석은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다시 의자에 풀썩 주저앉았다.

 

"왜, 그러냐?"

 

강원택 박사가 깜짝 놀라, 진석에게 물었다. 급격하게 몰려들어 머릿속의 혈류를 엉키게 했던 어지러움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진석은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때가 된 모양이군요."

 

"갱신……, 말이냐?"

 

"17년 전에 한 차례 갱신을 했으니, 슬슬 때가 됐죠. 그래도 굉장히 오래 쓴 편인데요."

 

"……이번이 벌써 6번째구나, 그렇게 긴 세월은 아니었는데. 그만 가 보거라."

 

강원택 박사는 쉬기 위해 돌아누웠다. 진석은 순간적으로 외할아버지의 눈가가 젖어있는걸 보았지만, 강원택 박사는 돌아누운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진석은 저택을 나서면서 이곳저곳에 연락을 돌렸다. 의체의 노후화 징후가 어지러움으로 시작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경우였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한 달이 되기 전에 의체의 기능이 정지될 것이다. 어지러움증과는 달리 사지가 저린 현상으로 노후화 징후가 시작된다면 그 부위를 시작으로 천천히 근육마비가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진석은 서울아산생명연구원에 자신의 주치의를 연결하여 날짜를 잡고는 집에서 자신을 기다릴 자신의 시민 동반자(civil partnership) 이경아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는 진석의 갱신에 조금 당황스러워했지만, 곧 집을 잘 지키겠노라고 따뜻하게 말을 건네주었다.

 

진석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무인택시 위에 올랐다. 바닥의 레일을 따라 이동하는 택시는 고속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음이 없었다. 진석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천안에 있는 병원을 처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간 정이 많이 든 곳이지만, 8년 동안이나 변화가 없는 육신을 환자들에게 납득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진석은 시트를 누이고는 액정디스플레이를 호출하여 뉴스에 채널을 고정했다. 뉴스의 헤드라인은 요새 한참 이슈가 되고 있는 '잭 머레이 살인사건'이었다.

 

잭 머레이는 런던 IC에 거주하는 미국계 영국인이었다. 그의 죄목은 살인이었으며 피해자는 그의 아내였다. 문제는 잭 머레이가 살인을 한 직후 얼마 안 있어 의체 갱신을 받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의체 갱신을 전후하여 상당한 기억손실을 일으켰으며, 그 손실분에는 사건이 일어났던 2215년 6월 7일도 포함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의체연구의 본산인 댑 연구소는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댑 연구소는 잭 머레이는 법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 시시한 저능아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며, 현재 그가 갱신 전의 잭 머레이와 정신적으로나 법적으로 완벽한 동일인물이라는 점과 그가 기억을 잃은 게 사실일지라도 그건 정신병리학적으로 접근할 일이지, 의체에 대한 편견으로서 접근할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못 박았다.

 

2차 공판의 결과는 유죄였고, 불멸자인 그에게 필멸의 형벌이 내려졌다. 그는 인터뷰 하는 내내 꼴사납게 울었고,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소리쳤다. 3차 공판은 2개월 후에 있을 예정이었다.

 

그 뒤를 이은 뉴스는 그렇게 흥미로운 것이 없었다. 출산 순번 대기표가 공공연하게 거래되고 있다는 뉴스가 제법 비중 있게 다뤄졌고, 연이어 몽촌토성에 위치한 댑 연구소 소유의 창고를 부랑자들이 습격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 외 대학로에서 시민 동반자 제도를 2인 제한인 현행 법규를 개정하여 3인에서 4인, 최대 10인까지 가능하도록 하자는 시위가 벌어지는 모습이 화면과 함께 나왔고, 평양에서 내려오던 중에 실신하여 국회로부터 갱신을 권유 받았던 전일기 대통령의 갱신 기간이 끝났다는 발표가 뒤를 이었다.

 

진석이 시끄럽게 세상소식을 전하던 액정디스플레이를 수납시키고 눈을 감았다. 갱신은 아마도 일주일 쯤 뒤에 시작될 터였다.

 

 

2.

 

존 듀갈 박사의 의문은 애초에 하나였다.

 

젊은 시절부터 듀갈에게 뿌리 깊은 냉소주의를 심어주었던 그의 뛰어난 두뇌는 목표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난색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그는 17세에 박사논문을 제출했지만 그가 좀 더 일찍 사회의 권위를 인정했거나 듀갈 부부가 18륜 트럭에 치이지 않았다면 그만큼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세스 듀갈은 당시 11세이던 어린 존을 시립 도서관의 유아 도서실에 넣어두고는 너무 오랫동안 쇼핑을 했고, 어린 존은 기다림에 지쳐 결국 그의 첫 박사 논문 주제를 어린이 문고용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여백에 끼적거리게 되었다. 물론 도서관 사서가 책에 색연필로 낙서하는 아이를 두고 볼 리는 없었기에 허둥지둥 도서관에 온 미세스 듀갈은 울어서 두 눈이 퉁퉁 부은 아이 때문에 도서관 사서와 대판 싸워야만 했다.

 

훗날 하나의 논문으로 완성된 낙서의 제목은 '비연속적 인격과 연속적 신체에 대한 인식 오류 및 연속적 인격과 비연속적 신체에 대한 인식 오류'였다.

 

장장 270페이지에 이르는 논문으로 존 듀갈은 철학 박사가 됐지만, 그는 자신의 박사 논문을 평할 때마다 논 할 가치가 없는 몽상가의 변명이라고 일축했다. 그리고 그는 19세의 나이에 생명공학 박사 학위를 땄다. 철학 박사에서 생명공학 박사로의 변신은 파격적이었지만, 기실 그는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처음의 철학 박사논문에서부터 자신이 심각한 유물론자임을 공공연히 드러내온 그는 생명공학 박사가 되자마자 한국의 강원택 박사와의 합작 아래 실리콘을 이용한 원시적인 규소생명체를 만들어 자신의 유물론이 건재하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렸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듀갈 박사의 의문은 하나였다.

 

 

3.

 

2217년 8월 8일 - 몽촌토성 댑(dab) 물류창고

 

거대한 입방체의 건물을 앞에 두고 경찰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었다. 강렬한 서치라이트가 건물을 환히 밝히고 있었고, 아마도 고문용으로 개발되었다가 용도변경 되었을 것이 분명한 사이렌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지금 경찰들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물류창고에서 섬광과 폭음이 들렸다는 시민 제보가 들어온 것이 약 30분 전. 3개 서에서 5분 만에 경찰차 6대가 도착했고, 10분 뒤에는 4개 서에서 병력이 증원되어 14대의 경찰차와 기동타격대 3소대가 물류창고를 반포위 했다. 현장에는 여전히 포연이 피어오르고 있었고, 물류창고를 둘러싼 높다란 담장 한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있었다. 탄피도 수 십 여개가 발견되어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교전 또한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경찰은 곤란에 처해있을 물류창고의 직원들을 구원하러 나타났지만, 물류창고의 직원들은 강경한 태도로 경찰의 진입을 막았다.

 

올해로 3차례의 갱신을 한 불멸자 이성찬 검사는 팔짱을 낀 채 무너진 담장을 가로막고 있는 댑 물류창고 직원을 보면서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뭐하는 짓이야. 서울 시내에서 나토탄 탄피가 발견되고 RPG가 터진 판인데, 이게 묻어가면 묻어갈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 하는 건가?"

 

그의 옆에 있던 검사 시보 성상두가 조심스런 태도로 예측을 말했다. 날렵한 몸매에 큰 키, 그리고 거친 질감의 가죽 재킷이 돋보이는 사내였다.

 

"재래식 무기를 사용한 걸로 보아, 자연회귀론자들 짓 같기도 합니다만,"

 

"글쎄, 그치들처럼 고지식한 자들한테는 레일건이나 K-2나 문명의 이기이긴 마찬가지야. 그 자들이라면 차라리 소떼를 몰고 와서 벽을 부숴버렸겠지. 근처에 홍채인식단말기는 조사했나?"

 

"예, 근데 아무래도 범인들이 위장용 컨택트렌즈를 착용하였던 거 같습니다. 근처에 있는 홍채인식단말기는 모두 7개, 등록된 홍채의 개수와 무인카메라의 유동인구 등록수는 동일하지만, 7개 홍채인식단말기에 똑같은 명의가 모두 14명입니다."

 

"똑같은 명의라면 누구?"

 

"그게……,"

 

성상두는 유출을 꺼려하며 이성찬의 귀에 속삭였다. 광택이 흐르는 검정 슈트 차림의 이성찬 검사의 가는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그의 두뇌가 바삐 굴러갔다. 이성찬은 성상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그 사람이 범인은 아니겠지. 그렇지만 도대체 무슨 의도를 가진 단체인지는 알겠어.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 그러자면 우선 그들이 도대체 뭘 노리고 이 물류창고에 들어갔는지 알아봐야겠지."

 

이성찬은 근처에 있던 기동타격대원을 불렀다.

 

"형사사건이니깐, 저기 길 막고 있는 새끼들 공무집행 방해로 다 연행해버리고 안으로 진입해!"

 

"네? 상대는 댑 연구소입니다. 섣불리 건들지 않는 게……,"

 

기동타격대원은 내심 꺼려지는지 말끝을 흐렸다. 이성찬은 그런 기동타격대원의 허벅지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뭐야? 이 새끼 소속 어디야? 대기업한테 비실거리라고 국민이 밥 먹여주는 줄 알아? 당장 최후통첩하고 시간되면 가차 없이 들어가!"

 

"네. 넷!"

 

기동타격대원은 포위진형을 지휘하고 있는 팀장에게 뛰어가 말을 전했다. 이성찬은 멀리서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뛰어간 기동타격대원이 두어 번 손가락으로 이성찬을 가리켰고, 거친 몸짓으로 대원을 질책하던 팀장은 이성찬을 바라보았다. 이성찬은 씩 웃어주고는 현란한 몸짓으로 마치 야구사인 같은 신호를 보냈다. 신호는 길었지만 내용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닥치고, 들어가.'

 

팀장은 별다른 신호는 안했지만 표정과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성찬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똑같은 신호를 보낸 후, 손날을 세워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닥치고, 들어가. 집에서 애나 보게 해줄까?'

 

팀장은 포기한 듯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이크를 들었다.

 

"물류창고 임직원들은 지금 바로 퇴거하고 귀가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는 최후통첩입니다. 당신들의 행위는 공무 수행에 막대한 차질을……."

 

이성찬은 어느 새 팀장 곁으로 다가와 마이크를 뺐었다.

 

"지금 사정하나!? 한번 나가주세요라고 울먹여보지 그래!?"

 

이성찬은 팀장을 한번 노려보고는 마이크에다 말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아, 아, 전방에 있는 댑 물류창고 임직원에게 고한다. 형사사건의 현장을 무단 점거한 당신들의 행위는 얄짤 없이 공무집행방해죄에 속한다. 거기에는 사유지고 뭐고 없으니, 알아서 협조하기 바라며 시간은 넉넉하게 180초 주도록 하겠다. 180초 후에도 현장을 무단 점거하고 있을 경우에는 당신네들의 세금으로 우리 대원들이 얼마나 열심히 훈련 받았는지 몸으로 느끼게 해주겠다. 이상."

 

주변의 술렁임을 뒤로하고 이성찬은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경찰차의 본넷 위에 걸터앉았다. 잠시간의 소요가 가라앉고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3분의 시간은 금세 흘러갔다. 직원들은 여전히 길을 막고 있었다. 이성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는 벌떡 일어나서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좋다. 당신들의 애사심은 이제 충분히 알았으니, 약속대로 대한민국 경찰의 수준이 어떤지 몸으로 느끼게 해주겠다. 기동타격대 1소대 2소대 진입!!"

 

이성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투화의 발소리가 일사분란하게 울려 퍼졌다. 돈파 형의 경찰 곤봉을 앞으로 내세운 기동타격대들이 댑 물류창고의 직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충돌하기 직전,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며 거대한 돔을 양편에 달고 있는 자이로헬기가 현장으로 내려왔다.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헬기의 서치라이터가 주변을 한번 훑어내자 사람들은 부지불식간에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떤 새끼인지 등장한번 요란하군."

 

이성찬은 작전을 중단시킨 것이 못마땅한 듯 볼멘소리를 했지만, 헬기의 옆면에 박혀 있는 청와대 표식은 쉽게 무시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헬기는 자연스레 물류창고와 경찰들 사이에 내려앉았고, 곧이어 두 명의 사람이 내렸다. 깡마른 체격에 몸에 붙는 슈트 차림을 한 사내와 슈트케이스를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작은 키의 사내였다. 이성찬에게 다가온 둘은 별다른 말없이 슈트케이스에서 종이 한 장을 건네었다.

 

종이를 읽은 이성찬의 인상이 무섭도록 찌푸려졌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지? 이의조차 제기하지 말고 이 많은 병력을 그냥 물리라고?"

 

깡마른 사내는 그 체형만큼이나 메마르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다 읽으셨으면 명령서는 돌려주시죠."

 

사내는 굳어있는 이성찬의 손에서 명령서를 가볍게 빼들고는 다시 슈트케이스에 넣었다.

 

"그럼 이만,"

 

짤막한 인사를 끝으로 사내는 다시 자이로헬기에 탑승하고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성찬은 급하게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기실 그가 답을 찾지 못하는 이유는 생각할 만한 단서가 부족해서는 아니었다. 이성찬에게는 이 상황자체가 강력한 단서였지만, 이 생뚱맞은 단서들 간의 거리를 좁히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자자, 제한을 두지 말자.'

 

이성찬은 상식을 외면하는 상대들에게 걸맞은 상식을 벗어난 시나리오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성찬은 경찰을 해산하고는 주머니에서 오래 묵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멸자가 된 이후로 담배의 맛은 느낄 수 없었지만, 가끔 예전의 맛이 기억나기는 했다. 담배연기를 따라 올라간 이성찬의 시야에 댑 몽촌 물류창고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4.

 

2217년 8월 11일 - 천안 갈무리 개인 병원

 

"그쪽 화면으로 보이지. 지금 추정 몸무게는 2.1키로고. 유전적 질병이나, 기형도 전혀 보이지 않네. 아주 귀여운 아기야."

 

진석은 병원에 있는 싸구려 인체투사스캐너로 임산부에게 아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임산부는 자신의 뱃속이 훤히 보인다는 사실이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혔지만, 눈동자는 열심히 아기의 몸짓을 따라가고 있었다.

 

"저기 화면이 일그러진 곳은 뭐죠?"

 

임산부는 화면에 나온 아기의 허리 아래를 가리키며 물었다.

 

"모자이크 처리야. 아기의 성별은 10월 말에 확인하라고. 아 그리고 골반이 좁은 편이니깐 난산을 조심해야 해,"

 

임산부는 아기의 성별이 궁금해서 안달이 났지만, 진석은 짐짓 태연한 척하며 임산부를 못 본 척하고 있었다. 스캐너에서 내려온 임산부는 혹시나 해서 진석의 뒤를 기웃거렸지만 진석은 냉큼 모니터를 꺼버렸다.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글쎄, 믿어주고는 싶다만 정말로 상관이 없다면 재미없게 미리 알거야 없지."

 

진석은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려줄 생각이 없었다. 임산부는 이아람이라는 19살의 미혼모였다. 그녀는 2월 초에 외지인에게 강간을 당했고 곧 임신을 하게 되었다. 몇 번의 힘든 고비를 넘기고 그녀는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긍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강간으로 임신한 아이가 사내아이일 경우 임산부가 강간범과 아이를 동일시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진석은 위험한 말은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람은 몸이 힘든지 의자에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선생님, 병원 옮기신다면서요?"

 

"응? 아 그래, 4일 후에 병원을 닫을 생각이다. 그러고 보니 너를 진찰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 되겠구나."

 

"그래요? 어쩌죠? 선생님이 아니면 아이를 낳을 자신이 없는데."

 

아람의 말을 끝으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병원의 시큰한 소독약 냄새가 새삼 코로 파고들었고 밖에서는 매미소리가 요란했다. 진석이 그 침묵을 조금 부담스럽게 느낄 때쯤 아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의체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진석은 속이 뜨끔 하는 걸 느꼈지만, 그건 터무니없는 자격지심일 뿐이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지. 단지 선택일 뿐이라고 생각해."

  

아람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의외네요. 어쨌든 선생님은 의사고 하니깐 의체를 부정할 줄 알았어요. 다른 건 몰라도 밥벌이는 확실히 줄여주고 있잖아요."

 

실제로 대부분의 의사들은 의체를 반대할 뿐 아니라, 제일 극렬한 데모꾼들이었다. 의체와 인체가 없는 자와 있는 자의 계층구분으로 점차 비화되는 시점에서 그들의 투쟁은 많은 정치적, 도덕적 함의를 담고 있었다.

 

"넌 의체를 어떻게 생각하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질문이지만, 진석은 대답을 듣고 싶었다.

 

"전 작년만 해도 너무나 의체를 동경했어요. 영원한 젊음, 영원한 삶, 부럽고 가지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렇지만 저희 집이 결코 의체를 할 사정이 못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영원한 삶을 사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이라는 괴리도 견디기 힘든데, 전 그 중에서도 후자에 속해 있었죠."

 

"근데?"

 

"그냥, 이 아이를 가지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이 아이를 임신했던 그 일이 있고 난 후 한동안 그랬어요. 먹는 것, 마시는 것, 숨 쉬는 것, 모두 귀찮았죠. 도대체 왜 내가 그런 일을 해야만 하는지 의미를 찾기 힘들었거든요. 미약하게 숨 쉬며 몇날 며칠을 방안에서 잠만 잤어요.

 

그러다 어느 순간, 누구의 허기인지도 모를 허기가 불현듯 속에서 올라왔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밥솥을 붙잡고 맨밥을 먹고 있더군요. 그때 깨달았어요. 사람이 하루살이처럼 입과 항문이 봉해지지 않은 채 태어난 이유는 매순간 귀찮게 호흡하고 때맞춰 밥 먹으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신의 배려라는 걸 말이에요. 그리고 이 아이와 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죠."

 

진석이 아람을 검진하기 시작한 것은 꽤 오래 전부터였지만, 오늘 그녀가 하는 이야기는 모두 처음 듣는 이야기들이었다.

 

"아이를 가지니 의체에 대한 생각이 바뀌던가?"

 

"의체를 한 사람들은 그렇다면서요. 아이를 가지고 싶어도 순번을 허락받아야 하고, 자기가 직접 임신하는 것이 아니라 정자와 난자를 시험관에서 수정시키고 인조자궁에서 아이가 자라난다고. 그리고는 마치 선물처럼 집으로 아이가 배달되어 오겠죠. 그 사람들이 과연 아이와 어미가 나누는 교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먹는 것과 숨 쉬는 것, 심지어 생각하는 것조차 공유하는 아이와 어미의 관계를 그들이 알까요? 그들은 모를거에요. 그리고 학교도 없는 그곳에서 아이는 젊은 외모의 어른들 틈에 섞여 외롭게 자라나겠죠."

 

아람은 손으로 진석의 탁자를 가리켰다.

 

"저는요. 아이를 낳으면 저 곳으로 갈꺼예요"

 

탁자 위에 있는 달력에는 세렝게티의 넓은 초원 위를 뒤덮다시피 한 누우 떼의 사진이 있었다.

 

"아프리카 말이에요. 불멸자들의 도시도 없고, 사람들이 순수하게 죽고, 다시 태어나는 곳."

 

진석은 자신의 탁자 위에 놓인 달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 8월인데, 진석은 달력의 사진을 처음 보는 기분이었다.

 

 

5.

 

2217년 8월 12일-서울 IC 대검찰청

 

대검찰청 강력부 강력과 과장실에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미미한 한기가 돌고 있었다. 전투적이고 냉소적으로 보이는 가는 눈매를 가진 사내가 책상에 앉아있는 강력과 과장인 김준기를 내려 보고 있었다. 김준기는 언제나 이성찬의 눈매가 맘에 들지 않았다. 그의 능력은 인정하고 있었지만 얼핏 냉정해 보이는 이성찬이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했을 때 어떤 광기를 띄는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김준기는 그 성향이 자주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젠가는 분명 지금까지 참아온 것을 충분히 상회하고도 남을 만큼의 사고를 치게 만들 것이라고 내심 불안해하고 있었다.

 

김준기가 보기에는 아무래도 그 날이 오늘인 거 같았다.

 

"지금 이걸 보고서라고 쓴 건가? 댑 물류창고를 압수수색해야 한다고?"

 

"물론, 무슨 문제 있나?"

 

이성찬은 다짜고짜 반말로 반문했다. 사실 그와 김준기는 기수가 같았지만, 이성찬의 성격은 아무래도 제도권에 적합하지 않은 편이었다.

 

"어떤 근거로 말인가?"

 

"보고서를 자세히 안 읽은 모양이군. 현장에서 재래식 무기가 다량 발견되고 포연과 폭파흔적이 분명하다고 적혀 있을 텐데? 더불어 그날 방송사의 방송태도는 충분히 외압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이야. 서울 IC에서 부랑자가 대전차포를 들고 다닌다고 하면 개가 웃을 노릇이지."

 

"그건 압수수색의 이유가 될 수 없어. 엄연히 댑 측이 피해자니깐."

 

"사건과 별개로 형사사건의 현장을 무단점거 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합법성을 위심해 볼 수는 있겠지."

 

김준기는 참기 힘들었다. 자신이 납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는 상황자체가 불쾌했을 뿐더러, 이성찬이 뭘 몰라서 경거망동하는 인물은 아니었기에 자신의 설명이란 것은 허공으로 자꾸만 흩어지고 있었다. 이성찬은 아무것도 아닌 듯이 말하고 요구했지만 김준기에게 그의 모습은 전쟁을 준비 중일 뿐 아니라 참전마저 강요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곳은 사유지야. 아니 사실 그게 중요한건 아니지. 알고 있지 않나? 일부러 모른 척 하고 있는 건가? 댑 물류창고는 원양에서 잡아온 참치나 얼려두는 곳이 아니야. 그곳은 신인류의 모태라고. 자네도 그날 겪어봐서 알겠지만 그곳은 청와대의 비호도 받고 있어. 대통령이 개입했단 말이야!"

 

김준기는 그다지 하고 싶지 않은 말까지 꺼냈다. 검찰이 대통령의 개입에 수사의 손길을 걷었다는 것은 절대 명예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사법기관인 검찰이 행정부 통령의 명에 따라 병력을 물린 것은 분명히 위헌일 텐데. 아닌가? 필요하다면 대통령 침실도 뒤질 수 있는 게 검찰이야. 성역 따윈 없어!"

 

"아니, 성역은 존재해. 지금까지 없었을 지라도 지금부터는 존재하고, 그곳은 바로 댑 물류창고야. 알았나? 손 떼. 이성찬. 괜한 희생양을 자처하지는 마. 대화는 이걸로 끝이야."

 

김준기는 대화를 끝마치기 위해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성찬은 과장을 노려보았지만,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김준기는 한 숨을 내쉬며 다시 말했다.

 

"이성찬, 이미 이 사건은 검찰의 손을 떠났어. 군대가 나섰다고, 검찰 내부에서도 더 이상 사건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라는 분위기야."

 

"흐음, 부랑자를 잡겠다고 군대까지 동원되었단 말인가?"

 

상기된 이성찬의 표정을 본 김준기는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이성찬은 김준기에게 바싹 다가오며 말했다.

 

"잘 들어 김준기, 지금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너야. 댑 몽촌 물류창고에 뭐가 있지? 그곳에는 갱신자들의 새로운 육신이 될 영혼이 없는 의체들이 가득해. 그 의체가 어떻게 악용될 수 있을지 생각해봤나? 그 의체들이 예정된 갱신자가 아닌 사람들의 갱신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사회제도가 그런 존재들을 걸러낼 수 있을까? 만약 적당한 대통령 후보가 없는 여당 측이 유력한 인사를 골라 갱신을 바꿔치기할 생각이라거나 한다면 우리가 거기에 제재를 가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갱신에 대한 불신이 쌓인다면 실리카 루시(Silica Lucy) 이후에 쌓아올린 이 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한순간이겠지.

 

김준기, 위정자의 87퍼센트가 7차례 이상 갱신한 불멸자들이야. 그들의 정체성을 우리가 지키지 않는다면 장기적으로는 이 사회 전체가 몰락할 수도 있어."

 

"확대해석 하지 마. 분실된 의체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군대가 동원된 이유는 네 말대로 대량의 재래식 무기가 국내에 들어왔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이야."

 

"그건 검찰이 이 사건에서 소외된 이유가 될 수 없어."

 

"이성찬, 더 이상 해줄 말은 없어. 난 그 어떤 지원도 너에게 해줄 수 없는 입장이야. 이해해주기 바래. 그만 나가줘."

 

이성찬은 굳은 얼굴로 과장실을 나갔다. 김준기는 경직되어있던 어깨를 주무르며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갱신을 바꿔치기 하다니 과도한 상상이야……,"

 

검사 시보인 성상두는 오늘따라 자신의 걸음걸이가 어색하게 느껴지자 뭔가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이는 중량이 최소화된 의체인 슬렌더 타입(slender type)으로 갱신을 받은 후, 자신의 근력과 맞지 않는 체중 때문에 생긴 부작용이었는데, 그만이 가지고 있는 징크스에 의하면 이런 날은 꼭 운수가 사나웠다. 가볍게 섀도복싱을 하며 몸을 풀고 있자 과장실에서 일을 마친 이성찬이 나왔다.

 

"어떻게 됐어요? 쉽지 않을 거 같던데."

 

"이미 이 사건은 검찰 관할이 아니라고 하더군."

 

"아아, 역시 그렇게 됐군요. 청와대 표식을 단 헬기가 날라 오는 순간, 뭔가 예감이 안 좋긴 했어요. 그럼 애초 계획대로 하실 생각이세요?"

 

이성찬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10시, 장비 챙겨서 본관에서 다시 보자고 성 시보."

 

성상두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검사께서 담을 넘으셔서야 누굴 훈계할 입장이 못 되지 않아요?"

 

이성찬은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예외적인 조사일 뿐이야."

 

"야간수당도 안 챙겨준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그렇군요."

 

성상두는 창밖을 바라봤다. 일기예보는 오키나와 쪽에서 올라오는 태풍에 대해 언급했지만, 하늘은 아직 구름 한 점 없이 말끔했다. 바람마저 잦아들어 마치 사진을 보는 것처럼 가로수도 멈춰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레 침묵한 매미들이 태풍이 그리 멀지 않음을 얘기해주고 있었다.

 

 

6.

 

2217년 8월 15일- 서울 IC 삼성동 구 코엑스

 

21세기에 들어선 이후로 건축의 가장 큰 목표는 다시 '더 높게'였다. 20세기에 각국에서 벌어진 고층건물 레이스가 다분히 국가의 위신과 경제력 과시의 면모가 강했다면. 21세기의 고층건물 레이스는 그보다는 더 절박하고 확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

 

더 이상 땅이 없었던 것이다.

 

도시의 수평적 팽창은 많은 면에서 한계였고, 사람들은 바벨탑의 붕괴가 이미 시효가 지난 낡은 우화라고 생각했다. 400층 800층, 1000층 규모의 건물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다리처럼 곳곳에서 솟아올라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자살을 결심하는데 걸리는 시간보다 떨어지는데 걸리는 시간이 더 길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새로운 건축 붐 속에서 많은 옛 시대의 건물들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구 코엑스 또한 그런 옛 시대의 건물 중 하나였다. 2217년에도 사람들은 코엑스라는 이름을 기억했지만, 그들이 기억하는 코엑스는 구 코엑스를 덥고 있는 거대한 쇼핑몰일 뿐이었다.

 

외면 받고 잊혀 진 건물들 속에는 그 건물들을 닮은 거주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행정특구로서 불멸자들의 도시가 된 서울 상층부와 달리 서울이라는 이름을 짊어진 또 다른 그림자 도시는 더럽고 음습했으며, 필멸자들이 살고 있었다.

 

구 코엑스의 거주자는 약 삼 천여 명으로 서울의 지하거주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그곳은 불법적인 거주지임에도 학교나 병원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었고, 다른 지하거주지에 비해 마약의 유통이나 유혈사태도 적은 편이었다. 과거에 극장으로 사용되었다던 장소를 이용해서 주말마다 미사를 드릴 수 있었고 수족관으로 사용되던 곳도 있었기 때문에 식수를 구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의 기틀을 잡은 인물은 30년 전에 구 코엑스로 흘러들어온 한 사내였다. 사내는 들어온 직후에 놀라운 조직력으로 구 코엑스에서 암투를 벌이던 군소 폭력조직을 일소하고, 자경단을 세워 거주지의 질서를 바로잡아갔다. 사내는 해박했고,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종교들의 제례의식도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되어 주었고, 신부가 되어주었으며 재판관이 되어 주었다.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존경의 마음을 담아 그를 '파파(pa-pa)'라고 불렀다.

 

파파는 두 명의 수행원과 함께 '계곡길(Canyon walk)'이라고 불리는 아케이드를 걷고 있었다. 다른 곳 같으면 거주민들이 파파에게 인사를 건네느라 주변이 부산스러웠겠지만 자경단 외에는 출입이 제한되어 있는 '계곡길'에서는 간간이 마주치는 자경단원들의 절도 있는 인사 밖에 없었다.

 

평소에는 자경단원들의 병원 겸 휴게실로 사용되던 '아셈병원'이 평소와 다른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셈병원'의 입구 부근에는 4명의 자경단원들이 k-2소총을 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파파가 다가오자 자경단원들은 다소 어려워하면서 암구어를 물었다. 자경단원들은 파파에게마저 암구어를 물어야 된다는 게 어색했지만 얼렁뚱땅 넘어가다가는 누구보다 파파한테 경을 칠 노릇이었다.

 

"돼지가 먹는 것은?"

 

"사람."

 

"사람을 먹는 것은?"

 

"앰브로스 드 비어스."

 

"지나가십시오."

 

파파는 자경단원을 지나쳐 깊숙한 내부로 들어갔다. 파파가 들어오자 '아셈 병원'의 유일한 의사이자 병원장인 '폴 그린그래스'가 꾸벅 인사했다. 둥그런 안경에 길게 곱슬머리를 기른 이 영국태생 괴짜는 '서울 IC의 그림자 도시, 그리고 저항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타블로이드 신문의 기사를 보고는 바로 서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했다. 그때 그의 나이가 27세. 최초의 의체갱신을 보름 남긴 시점이었다.

 

"어서 와. 파파,"

 

이미 한국에 들어온 지 20년이 지났기 때문에 그의 한국어 발음은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젊은 의학도는 이국의 땅 가장 깊숙한 곳에서 중년이 되어 있었다. 폴의 뒤를 따라가자 장비가 갖추어진 수술실이 나왔다. 이미 첨단이라기에는 시효가 지난 수술기구들이 복잡한 선을 그리며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만들고 있었다. 중앙에 놓인 두 개의 침대 중 왼쪽 침대 위에 젊은 사내가 혼절한 채 누워있었다. 사내의 심장은 느리게 박동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시체 만큼이나 창백했다.

 

"아직 깨어나지 못했는가?"

 

"생명반응은 있지만, 정신은 차리지 못하고 있어. 여러 가지 수단을 써봤지만, 의체전문의가 아닌 나로서는 한계가 있지."

 

"방법이 없겠나?"

 

"이미 통상적인 방법은 다 사용해 보았어. 하지만 반응이 없더군. 아무래도 갱신 직후에 어떤 처리를 한 것 같은데, 그걸 도무지 알 수 없어. 아무리 인체와 의체의 메카니즘이 비슷하다고 해도 어딘가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야."

 

파파는 폴의 말에 신음을 흘렸다. 몽촌토성을 나오는 순간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했었지만 그에게는 아직 난관이 남아있었다.

 

"같이 가져온 '의체 갱신기'는 사용법이 좀 파악되나?"

 

폴은 면목 없는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래도 지금 방법을 찾아보고 있으니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폴, 나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아.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이 일을 마무리 짓지 않고는 결코 죽을 수 없어. 조금만 더 노력해 주게."

 

폴은 파파의 얼굴을 찬찬이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흰머리로 대충 나이는 짐작할 수 있었지만, 크고 건장한 체구와 몸짓은 젊은이 못지않았다. 그러나 폴은 파파의 상태를 알고 있었다. 그의 내부에는 변형 분열된 기생세포들이 자신의 숙주를 갉아먹고 있었다. 지금은 진통제로 병의 상세를 억제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임계점이 넘으면 그의 몸은 쓰러질 것이었다. 폴은 파파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파파의 숙원이 곧 내 숙원이야."

 

 

7.

 

듀갈 부부는 존 듀갈 박사가 15살일 때 사고를 당했다. 친척의 결혼식에 참가했다가 늦은 저녁에 헬싱키에 돌아오게 된 부부는 잠을 자기 위해 자동차를 자동운항 모드로 돌렸다. 미세하게 도로에 코팅된 크롬 입자를 스캐너로 읽어 들이며 달리던 자동차는 차선변경을 하던 도중에 반대편에 있던 차선의 크롬 입자에 혼동을 일으켜 중앙선을 넘어 역주행을 하기 시작했고, 곧이어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18륜 트럭과 충돌하였다. 듀갈 부부의 차는 휴지처럼 일그러졌고 트럭은 차 위에 올라앉아 버렸지만, 기적적으로 그 둘은 목숨을 잃지 않았다.

 

몇 가지 논란, 그리고 재판이 연이었다. 길고 긴 재판기간의 마지막에 회사는 결국 탑승시 차선 설정기능의 오류로 인해 자동차의 자동운항모드가 1차선을 2차선으로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보상금으로 경제적인 문제는 해결이 되었다. 그러나 존 듀갈의 아버지는 두 팔과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어머니는 와이퍼가 두 눈을 찔러 실명하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존 듀갈의 어머니는 실명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정신질환에 빠지게 되었다.

 

분명히 천재였지만, 또한 분명히 청소년기였던 존 듀갈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매사에 진취적이었던 부모의 변한 모습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융프라우에서의 스노우보딩이 낙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왼쪽 다리의 아킬레스건을 물어뜯는 자살시도를 두 번했고, 고등부 교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근처에 사람만 있으면 짐승 같은 괴성을 질러댔다.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비명을 지르는 어머니의 밑을 닦아내면서 그는 자신이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그는 이제 고아였고 그들은 그저 부모의 유령이고 흔적이었다.

 

오래전부터 그의 내부에 있던 의문이 그 깊이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자신의 의문자체가 부모의 사고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전후가 뒤바뀐 기시감조차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16살이 되던 생일날 이후로 더 이상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8.

 

2217년 8월 13일- 몽촌토성 댑 물류창고

 

이성찬과 성상두는 댑 물류창고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건물의 구름다리에 올라 있었다. 멀리 피뢰침처럼 앙상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는 빌딩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물류창고는 3개 동으로 지어져 있었는데, 관리용 건물 한 채와 발전소 역할을 하는 건물이 한 채, 그리고 가장 큰 건물인 창고가 한 채 있었다. 의외로 사건이 일어난 지 5일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물류창고의 주변은 경비가 그다지 삼엄하지 않았다. 물론 일반적인 건물들 보다는 경비의 수가 배 이상 많았지만, 얼마 전에 시가전을 벌인 건물치고는 꽤 평온하다고 할 만한 모습이었다. 기실 이성찬은 경비들의 수 같은 건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총기가 금지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 사설경비단체가 가질 수 있는 장비란 게 다 뻔 한 것들이었고, 그런 것들은 그들이 입고 있는 방호복만으로도 충분히 방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성찬은 중앙정보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얻은 물류창고 투시도를 홀로그램으로 잠시 살핀 후에 다시 물류창고를 내려다보았다. 성상두는 홀로그램 투시도를 보고는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데요. 그런 건 도대체 어디서 구하는 거예요?"

 

"중정원에 친구가 줬어."

 

성상두는 '그 성격에 친구도 있었어요?'라는 말을 꾹 삼키고는 말했다.

 

"대단한 친구군요."

 

위에서 경비들이 배치된 모양새와 폭발의 흔적을 보자 대충 틈입자들이 어디로 침투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전혀 우회하지 않고, 눈앞에 있는 벽이란 벽은 다 부수면서 의체보관소로 향했던 것이었다.

 

대충 목표를 확인한 이성찬이 성상두에게 신호를 보냈고, 서로 거리를 벌린 둘은 구름다리에서 물류창고를 향해 뛰어내렸다. 순간, 이성찬과 성상두의 등에서 새까만 낙하산이 튀어나왔다. 천천히 끈을 조절하며 물류창고의 옥상으로 접근한 둘은 가볍게 환풍기 주변으로 내려앉았다. 낙하산을 차곡차곡 접어 배낭에 수납한 후 둘은 경비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사고현장의 반대편으로 내려갔다. 둘은 창고 건물에 있는 4개의 직원 출입구 중에 가장 후미지고 가장 많이 돌아가는 직원 출입구를 택했다. 출입구는 카드 키 타입이었다. 이성찬은 등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조그만 PDA가 연결된 카드를 꺼내 삽입구에 꽂아 넣었다. PDA를 통해 2분 동안 약 이 천만가지 이상의 패턴이 차례로 입력되었고, 물류창고의 직원용 출입구는 작은 비저 음과 함께 항복 선언을 했다.

 

"그것도 친구가 준거예요?"

 

이성찬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새하얀 통로가 이어져 있는 내부에는 사람도 없고 대단히 한적한 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의체보관소로 통하는 문이 나왔다. 하지만 그 곳에서 둘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출입구에는 세 가지의 보안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음성과 홍채, 그리고 정맥혈 검사가 그것이었다. 성상두는 보안 장비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맙소사. 무슨 영화가 따로 없군. 이건 친구가 준 거 없어요?"

 

"내 친구가 무슨 만물상인줄 아냐?"

 

그 때 그들의 눈에 왼쪽 편 복도에 늘어선 이동식 침대들이 보였다. 침대 위에는 사람으로 짐작되는 무엇이 천으로 덥여 있었다. 이성찬과 성상두는 동시에 서로를 쳐다보며 쾌재를 불렀다. 천을 들어보자 그것들은 역시나 입고되기 직전의 의체들이었다. 둘은 제일 끝에 있는 이동식 침대로 다가가 천을 벗겼다. 하나는 여자였고, 하나는 남자였다. 이성찬은 남자의 의체를 들어서 다른 침대에 넣으려 했지만 좁은 이동식 침대에 둘을 누이려니 조금 비좁았다. 그때 의체의 팔이 밖으로 삐져나왔다. 팔을 다시 침대에 집어넣으려던 이성찬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하고는 의체의 손을 바라보았다. 의체의 손등에는 작은 문신이 그려져 있었다. 누구나 흔히 하곤 하는 패션문신이었지만, 갱신 될 의체에 문신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성찬은 잠시 문신을 바라보다가 다시 팔을 침대에 밀어넣고는 천을 꼼꼼히 덮었다. 당장 급한 일은 따로 있었다. 빈 침대에 몸을 누이려던 이성찬은 여성의체를 바닥에 뉘이고 여기저기 침대를 뒤지고 있는 성상두를 불렀다.

 

"뭐하는 거야?!"

 

"다른 여성의체를 찾고 있었어요."

 

"그냥 아무 곳에나 집어넣어!"

 

"그래도 이제 새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마당인데, 남자랑 동침 시킬 수야 없잖아요."

 

이성찬은 어이가 없었지만 혀를 한번 차고는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새벽 4시가 되어서야 이동하기 시작했다. 깜박 잠이 들었던 성상두는 순간적으로 평소에 잠이 깰 때처럼 사방으로 기지개를 펴려는 자신을 추스르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규칙적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던 발걸음 소리가 성상두의 머리맡에서 멈춰 섰고, 곧이어 어딘가로 침대가 이동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발걸음 소리를 들어보니 침대를 이동하고 있는 사람은 둘이었다. 어느 정도 이동하자 어둠속으로 들어왔는지 흰 천을 투과하던 빛이 사라졌다. 침대는 왼쪽으로 두 번을 꺾으며 이동했고 마지막으로 오른 쪽으로 한번 꺾고는 멈춰 섰다. 아무래도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그 이후로도 발자국 소리는 꾸준히 멀어졌다 다가오기를 반복했고, 10여분 후에는 멀어진 채로 돌아오지 않았다. 안전을 위해 성상두는 그러고도 10분을 더 누워 있었다. 그러나 성상두는 천을 걷어치우고 일어서는 순간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질겁하며 총을 겨누었다. 그러자 놀란 상대방도 순간적으로 총을 겨누었다.

 

"총?"

 

"뭐냐? 너였냐?"

 

상대방은 이성찬 검사였다. 이성찬 검사는 총구로 성상두의 머리를 콕 찍고는 말했다.

 

"침이나 닦아라. 그 상황에 잠이 오냐?"

 

성상두가 황급히 침을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성상두는 끝없이 늘어선 침대들을 볼 수 있었다. 조명이 개별적으로 침대를 비추고 있었다.

 

"정말 많군요. 이 사이에서 분실된 의체가 뭔지 찾을 수 있을까요?"

 

이성찬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의체들 사이를 누비기 시작했다. 의체가 놓인 침대는 가로로 40열에 세로로 60열이었다. 20분이 지난 후, 둘은 뭔가를 발견했는지 멀리 떨어져 있는 서로에게 손짓을 했다. 둘 다 침대에 붙어있어야 할 탭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성찬은 잔뜩 굳은 얼굴로 얼굴이 붉게 상기된 성상두에게 물었다.

 

"뭘 발견한 거냐?"

 

성상두는 이성찬의 물음에 짐짓 빼면서 말했다.

 

"먼저 보여주시지요. 뭘 발견하셨는지는 몰라도 저보다 놀랍지는 않을걸요."

 

이성찬은 성상두의 붉게 상기된 얼굴이 맘에 안 들었지만 먼저 자신이 가져온 탭을 보여주었다.

 

"저기 비어있던 침대에서 가져온 거다."

 

이성찬이 내민 탭에는 'ab age 96- age 156- sex male- name 전일기(Jun Il-ki)'라는 문구가 인쇄되어 있었다.

 

"전일기? 대통령하고 이름이 같네요?"

 

"이름? 이름뿐만 아니라, 나이도 같고 최초갱신년도 같지. 이게 우연일까?"

 

"하지만 전일기 대통령은 며칠 전에 갱신을 끝마쳤잖아요."

 

"그러니깐 말이다. 어딘가 이상해. 다른 의체들도 좀 살펴봐야겠어. 근데 네가 찾은 건 뭐냐?"

 

성상두는 그제야 손에 쥐고 있던 탭을 기억해 냈지만, 머리를 긁적이며 탭을 뒤로 숨겼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내놔봐."

 

이성찬이 다그치자 성상두는 고개를 돌린 채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에 들린 탭에는 'ab age 22- age 39- sex female- name 정유진(Jung Yoo-jin)'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이성찬이 의아하다는 눈으로 성상두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상두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아니, '오늘부터 그대를'에 나온 정유진을 모른단 말이에요? 요새 한참 뜨는 배우잖아요. 얼마나 섹시한데요."

 

성상두는 이성찬의 얼굴이 무표정해지는 걸 보고 속으로 '아차'했지만 이미 이성찬의 발길질이 정강이를 차고 지나간 후였다. 잠시 생각해 보던 이성찬은 탭을 지켜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어디에 있지?"

 

정작 행동과 말이 틀리자 성상두는 히죽 웃으면서 손가락질 하려 했지만 어느새 날아든 발길질에 정강이를 감싸 쥐어야만 했다.

 

이성찬은 천을 끌어내려 정유진을 내려다보았다. 반듯한 이목구비와 깊은 쇄골에서 뻗어 나온 길고 가는 목을 가진 어디 한군데 나무랄 데 없는 미녀였다.

 

"기억이 나는군. 이틀 전에 뉴스에 나왔었어. 갱신 축한 팬 미팅이든가 그랬던 거 같은데, 그리고 그 전에는…,"

 

이성찬은 가슴을 덮고 있던 천을 확 끌어내렸고, 성상두는 손가락을 잔뜩 벌리고는 손으로 눈을 가렸다. 여인의 나신이 조명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골반에 애인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뉴스에 나왔었지."

 

이성찬의 말 대로 정유진의 골반에는 영문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역시."

 

"이상하군요. 왜 갱신을 끝낸 사람들의 의체가 이곳에 있는 거죠? 게다가 이건 아무리 봐도 새로운 의체는 아닌데요?"

 

성상두는 얼굴이 발그레해진 채로 이성찬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이건 새로운 의체가 아니라 시효가 끝나 갱신된 의체니깐."

 

"그러면, 이곳은 새로운 의체를 보관하는 곳이 아니라 갱신이 끝난 의체를 폐기하는 곳이었나 보군요. 겨우 이 사실을 감추려고 기를 쓰고 검찰을 막은 거란 말입니까?"

 

성상두의 물음에 이성찬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정유진의 의체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씩 이성찬의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이성찬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정유진의 코 밑으로 가져갔다. 성상두는 '당황'이란 걸 하는 이성찬의 모습이 너무나 낯설었다. 이성찬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사…살아있어."

 

"네?"

 

이성찬은 마치 이지를 상실한 사람처럼 성상두의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살아있다고! 갱신된 의체가 살아있단 말이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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