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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우/도서평론가
나는 일찌감치 이즈음 유행하는 말로 수포자였다. 풍운의 꿈을 안고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꿈은 거기까지라는 절망감이 불어닥쳤다. 가정 형편이 나아질 기미도 없고, 건강도 나빠졌다. 나는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건만 학교는 진도를 마냥 나갔다. 정신 차리고 보니 어디서부터 공부해야할지도 모르겠더라. 다행히 고등학교에 갔으나, 수학은 공부할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다행히 학교가 문과생은 생물을 공부하도록 해 그 과목은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그러니까 한동안 내 인생 모토는 시장에서 콩나물 값만 계산할 줄 알면 된다, 였던 셈이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과학은 별 상관 없었다. 그러나 눈이 휘둥그레진 적이 있으니, 엥겔스가 쓴 <반 듀링론>을 읽을 때였다. 갑자기 물리학이 나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더랬다. 수학과에 다니는 친구의 친절하지 않은 설명을(평소 문학에 젬병이었던 녀석을 놀렸던 죗값이었다) 들으며 다시 과학과 나는 멀어졌다. 물론, <반 듀링론>은 다 읽었다. 뒤늦게 철들어 공부하면서
최낙언/(주)시아스연구소이사
예전에는 가공식품과 첨가물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요즘에는 우유, 밀가루, 설탕, 소금 같이 천연물에 대한 논란이 많아진 것 같다. 최근에는 특히 소금이 논란의 중심이 되어 9월 4일에는 스페셜>이 주최한 소금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가 천일염의 위생 문제를 거론해 논란이 일자,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서 토론하여 논란을 종식시키자는 의도였다. 사실 그동안 정제염은 공장에서 생산하여 모든 미네랄이 제거된 나쁜 소금으로 일방적으로 매도당했고, 천일염은 온갖 미네랄이 풍부한 최고의 소금으로 찬양되었는데, 완전히 곤란한 지경에 처한 것이다. 사실 소금의 사용을 시작한지 5000년이 된 가장 오래된 식품소재인데 논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운 사실이기도 하다. 1. 소금의 본질은 염화나트륨(NaCl)이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15가지 정도의 미네랄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그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필요한 것이 나트륨(Na)과 칼륨(K)이다. 나머지 모든 미네랄
이형열/과학커뮤니케이터
생의 다른 커리어와 달라서 과학을 연구하는 분들은 아주 이른 시기에 진로가 결정되어 평생 한길로 매진해온 경우가 대부분이리라. 그 이름만으로도 주눅이 들고 마는 아시아 태평양 이론물리센터의 웹저널 크로스로드는 주로 이런 분들이 읽고, 쓰는 매체 아닌가? 여기에 글을 쓴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쓰려해도 머리 속은 필라멘트 끊어진 전구마냥 도무지 불이 들어오질 않는다. 끙! 용기를 좀 내보자. 이런 얼토당토않은 고백으로 글을 시작하는 나는 19년째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두 달 후면 만 55세가 되고, 20세기의 마지막 달부터 21세기가 13년이 지난 2012년까지 약 13년간 한국 서적을 미국에 유통하는 일을 해왔던 은퇴자다. 평범한 대한민국 문과출신 사람이었던 나는 10대 때엔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20대 때엔 인문사회과학을, 30대와 40대 때엔 컴퓨터 책과 일에 필요한 경영서적을 주로 읽었던, 독서 이력상 아무런 특징이 없었던 '그렇고 그런' 사람이다. 나이 50세를 맞게 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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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환/소설가
영원히 빛이 있다는 아름다움이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날이랍니다. 그러므로 모두들 머물러 있는 날이랍니다. 받기 어려웠던 선물처럼― - 김종삼, 「받기 어려운 선물처럼」 中 그가 일요일오후에 도착한 것은 밤이었다. 밤의 일요일오후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거칠게 뭉쳐진 그림자들의 마을이었다. 여기저기 작고 둥근 창문에 달빛이 부서져 희미하게 반사되었고, 그는 마치 은하수 속을 헤매는 우주선이 된 기분 속에서 쉴 곳을 찾았다.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고, 물어볼 데도 없이 오랫동안 밤거리를 헤매다 마침내 절망 속에서 아무 집에나 가서 문을 두드렸다. - 계십니까? 창에 불이 켜지며 집이 깨어나고 나서도 한참 뒤에야 문이 열리고 그림자가 나타났다. - 누구십니까? 갑자기 쏟아진 불빛에 눈을 깜빡이며 그가 고색창연한 대사로 답했다. - 지나가던 나그네입니다. 여관이나 호텔이나 가까운 숙소가 어딘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주인은 그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그가 사용한 어휘들을
이덕래/소설가
축하하고 감사한다 크로스로드 10주년을 축하한다. 개인적으로는 감사한 마음이 앞선다. 크로스로드로 인해 프로가 되었다. 늘 아마추어라고 생각했다. 글쓰기에 관련해서 프로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속적인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 아래와 같은 글을 읽었다. 명망이 높은 작가인 어슐러 K. 르귄(Ursula K. Le Guin)이 한 말이다. "프로란 아마추어가 열정 때문에 하는 일을 돈을 받고 하는 사람에 불과하다. 하지만 돈의 경제학에서 보면, 보수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한 작업을 여러 사람이 알게 되고 읽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작가와 독자의 의사소통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이는 예술가의 목적이기도 하다." 단순하고 명확한 르귄의 통찰력에 충격받았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어떤 것이었다. 크로스로드에 글을 싣게 되어 프로가 된 셈이다. 의도하지 않았으나, 르귄의 정의에 따라 프로가 되었다. 프로라는 말을 싫어했던 이유는 프로는
박정영/POSTECH
들어가며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마지막이 있다. 하지만 그 ‘마지막’이 예고도 없이 나에게도 오고야 만다는 것을 인지하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늘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한다. 박사과정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올 준비를 할 때 열에 아홉은 교수가 되는 것이 목표냐고 나에게 물었다. 나머지 하나는 박사학위로 무엇을 할 것이냐고 물었던 것 같다. 박사과정을 마치는 데는 최소한 4~5년의 시간이 걸리는데 그만큼의 시간을 건너뛴 질문에 대해 나는 정확하게 준비된 답이 없었다. 장기적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물리학자 박명훈은 ‘과정이 목표다’ 라고 망설임 없이 답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과정이 목표이면 좋은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아직 과정 중이므로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또 다른 과정으로 넘어갈 때 마다 안주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게 된다. 과정에 집중한다고 해서 결실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과정이 이어
조성면/문학평론가
1. 동도서기(東道西器)와 쥘 베른 SF는 대중적이되, 한국SF는 소수문학이다.1) 일백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한국문학의 중심부에 진입하지 못하고 있으며, 학술담론의 오불관언(吾不關焉)도 여전하다. 충성도 높은 마니아급 독자들을 보유하고 있으나 외국작품의 번역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한국문학사를 압도할만한 걸작도 산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학술담론의 침묵과 일반적 몰이해 속에서도 한국SF는 꾸준하게 수준급의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맨 처음 SF를 한국문학사 속으로 끌어들인 주체는 계몽의 열정이었다. 한국문학사에 등장한 최초의 SF는, 알려진 바와 같이 1907년 『태극학보』에 게재된 『해저여행기담(海底旅行奇譚)』이다. 『해저여행기담』은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해저2만리(Vingt mile lieues sous les mers)』을 번역, 연재한 작품이다. 『해저여행기담』을 연재한 『태극학보』는 1906년 8월 재일본 유학생들의 손으
정보라/SF작가
0. 크로스로드 10주년 기념행사 초대장을 받았을 때 나의 가슴은 뛰었다. 내가 비록 아무도 들어본 적도 읽어본 적도 없는 무명작가이지만, 최근에는 그다지 작품 낸 것도 없지만, 드디어 누군가 나의 노력을 (별로 안 했지만) 알아보고 나를 SF 작가로 인정해서 이런 행사에 초대해줬구나 생각하니 기쁘기 한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생전 안 바르던 립스틱도 꺼내 바르고 뺏딱구두도 찾아 신고 할 수 있는 한 정성스럽게 꽃단장을 하고 행사장으로 향했다. 행사장에 도착해 보니 낯익은 얼굴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주로 내가 열성팬의 불타는 마음으로 쫓아다녀서 알게 된 분들이며 그 분들은 나를 모르는 유명 SF 작가님들이었다. 작가님들뿐 아니라 SF판타지 도서관 관장님과 SF출판사 관계자분들, SF 전문 평론가 선생님들, 그리고 당연히 크로스로드 편집위원님들과 각 대학 이공계 학과의 교수님들도 와 계셨다. 문득 이 행사장에 외계인들이 쳐들어와서 폭격이라도 하는 날에는 한국 SF계는 작가,
김보영/SF작가
얼마 전에 과학동아에서 행사에 초대해주셔서 SF 강연을 처음 하게 되었다. 10년쯤 썼으면 이제쯤 할 말이 쌓였을 것 같아서였는데 정작 준비하고 보니 그리 할 말이 없었다. 그리 많이 안 쓴 작가여서인지도 모르겠다. 강연 중에 나는 ‘처음부터 잘 쓰는 사람은 없다. 글은 운동과 같다. 들인 시간만이 답을 준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했다. 다 하고 내려와서야 강연을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구나 하고 혼자 웃었다. 처음 쓴 글은 망할 수밖에 없고 초안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매양 제 실패와 마주하는 작업이다. 어떻게 해야 잘 쓸 수 있는지 사실 나는 잘 모른다. 어떻게 해야 글이 망하지 않을지도 잘 모른다. 그저 계속 고민할 뿐이다. 그 고민 중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어렵다는 것, 그리고 틀린다는 것에 대해서. 1. 어렵다는 것 ‘과학기술 창작문예’에 당선된 이후로 내 일상은 크게 변했다. 1년만 해 보고 안 되면 재취직하자고 생각했던 내 인생의 경로는 완전히
고장원/번역가,SF작가
■ 한국과학소설의 소사(小史) 문헌상 확인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과학소설은 줄 베르느의 원작을 번안한 <해저여행기담 海底旅行奇譚; 1907년> 혹은 <철세계 鐵世界; 1908년>다. 박용희(朴容喜)가 <해저2만리그>를 번안한 <해저여행기담>은 당시 재일 유학생들 잡지 [태극학보 太極學報]에 연재되다 중단되었기 때문에 완역본 기준으로는 이해조(李海朝)가 <인도왕비의 유산>를 번안한 <철세계>가 우리나라 과학소설의 효시가 된다.1) 그러나 구한말부터 해방 이전까지의 과학소설은 번역물이건 창작물이건 간에 양적 질적인 면에서 지지부진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1910년 한일합방 이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처럼 부국강병을 위한 과학문명 고취 차원에서 과학소설을 선전계몽용으로 이용하려는 주체세력이 적극적으로 조직화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둘째는 식민지를 전쟁수
라퓨탄/SF작가
누군가 “넌 유교가 뭐라고 생각하니?”하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말이 없다.분명 유교가 전통인 나라에서 태어나 자랐고, 또 중학교, 고등학교 수업시간에도 배웠는데, 그래서 분명 삼강오륜, 장유유서가 뭔지 알고 나름 실천도 한다고 하면서 살고 있는데, 선뜻 ‘유교란 이것이다’라고 말하기엔 뭔가 부족해 보인다.내가 아는 유교란 게 고작 작은 한 부분이지 전체는 아닌 것 같고, 뭔가 더 큰 궁극적인 게 있을 것 같고. 그래서 괜히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왜 그런 걸 나한테 묻나 싶어진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답을 못 하는 이유를 좀 더 생각해보면, 내게 유교란, 이미 몸에 밴 일상이지 더 이상 머리로 생각해야 하는 학문, 사상,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그것처럼 ‘SF는 어떻게 쓰느냐?’는 물음도 내겐 참 난감하다. SF를 쓰는 것이 거의 일상이 된 탓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너무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질문 같고, 또 어디서 글쓰기를 배운 것도 아니라서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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