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중첩 2
박성환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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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거 왠지 김승옥 소설 마지막 부분 같군요."

"우리 세계에선 '서울 1964년 겨울'이지요."

"알아요. 내가 도입부에 그렇게 썼죠. '평양 1964년 여름'을 패러디해서요. 우리 세계와 다른 세계라는 표시로."

"저도 똑같은 작업을 거꾸로 했습니다만, 이제 와서 누구의 세계가 진짜인지 따지지는 맙시다. S교수라는 사람 설명 들어보면 그렇게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거 같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더군요. 정말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해보기로 한 거, 해봅시다. 잘 가세요. 이런 말, 하기 좀 미안하지만,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요."

"피차 동감입니다. 성공하길 빕니다."

"그게 훨씬 좋군요. 저도, 성공하길 빌겠습니다."

둘은 마지막으로 어색하게 악수를 했다. 그리고 동전을 던져서, p선생이 길 건너 반대편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잠시 후, P선생의 버스가 먼저 왔다. 그는 길 건너를 향해 눈인사를 던지고, 여전히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서있는 S교수와 H에게 손을 들어 보인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좋아, 이제 시작이군. P선생은 빈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P선생의 세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5서울 3구에서의 P선생의 삶에 대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하루 두 시간에서 세 시간 수업하고, 세 시간 이상 수업 준비할 시간이 충분하고(쓸데없는 공문서와 행정 업무는 거의 없고. 왜냐하면 정부가 시민을, 그리고 예비시민들을 관리와 통제 대상으로 보지 않으니까), 수업 준비하러 대학 도서관 등에 들르지 않는다면 세 시에 퇴근해서는 아이와 오후의 공원을 산책하거나 동네 극장에서 연극을 보거나 거실 소파에서 고양이가 무릎 위에 앉으면 같이 라디오를 듣는 삶. 가게에서 아내가 돌아오면 함께 나가서 동네 식당에서 저녁을 먹으며 하루 동안의 일을 이야기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아이와 놀아주거나 아이 숙제를 봐주고, 아이가 잠들면 부엌 식탁에 앉아 낡은 워드 프로세서로 몇몇 사람들만 읽을 소설을 쓰는 삶. 풍족하고 편리하지는 않지만, 그만큼이나 느리고 여유 있는 삶. 느리고 여유 있는 세상. 오전에 학교가 끝난 아이가 하루 종일 밖에서 놀아도 P선생은 걱정하지 않는다. 모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가지고 보살피기 때문이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간섭 없이 놀 때 가장 소중한 것들을 배우게 마련이니까.(아이들에게 책임감을 갖지 않는 어른이 과연 어른일까?) 가장 소중한 것들 : 자신의 감정 이해하기, 타인과 어울리기,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 찾기, 무엇보다, 시간을 제대로 흘려보내기한 순간 한 순간을 여유를 갖고 제대로 보내기,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기먼 이야기지만 P선생은 아이가 대학에 갔으면, 내심 바라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당연한 것이다. 아이의 인생은 아이의 것이니까. 미래는 아이들의 것이니까. 대학을 가지 않아도, 좋은 직장을 가지지 않아도 괜찮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니까. 다만 P선생은 아이에게 물려줄 직업이 없는 것이 살짝 미안할 뿐이나많은 아이들이 아버지의 가게나 농장을 물려받으니까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이나 아이는 또래에 비해 미래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것이 아닌가 위안한다. 어쩌면 아내 E가 일하는 장신구 세공 가게에서 일하게 될지도 모르지. P선생은 아내와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는 동네 맛집들을 떠올렸다. 온난화에 따라 향신료들이 다채로워진 갖가지 볶음밥과 국수, 꼬치, 튀김, 부침 요리들. 서울들마다 주변의 연계된 농장이나 어장에서 적당한 가격에 다양하고 신선한 농수산품을 바로 공급받기 때문에 음식점들마다 지난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메뉴가 풍성하다. P선생은 특히 국수와 만두를 좋아한다. 냉면과 막국수, 칼국수, 잔치국수, 그리고 고기만두와 새우만두입맛을 다시는 동안 P선생은 문득 버스의 진동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경유 버스의 진동이 아니라 여기저기 얼기설기 때우고 메운 낡은 도로 위를 달리는 전기 버스의 진동이었다. P 선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오래되어 얼룩지고 뿌연 버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지나가고 있었다. 좁은 차도와 한적한 전기 버스와 전기 트럭들, 그 대신 많은 자전거와 산보객들. 해외와의 교역은 지난 시대에 비해 대폭 축소되었다. 어쩌면 경제 봉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주변 강대국들은 서울 네트워크로부터의 정보 유입을 최소한으로 차단한 채 조용히 서울 네트워크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실험들을 지켜보고 있다. 때문에 석유 등 몇 가지 해외 의존 자원들의 공급이 거의 끊겨, 서울 네트워크는 자원 재활용을 극대화하고 자가용을 폐지하고 대중교통을 활성화해서 대응하고 있다. 가능한 한 내연기관을 모두 전기 모터로 전환한 다음, 대체 에너지 개발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 결과가 이 거리, 이 풍경이다. 버스 차창 너머로 이른 아침의 5서울 시내를 멍하니 바라보며 P선생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불행할까? 우리는 퇴락하거나 퇴보한 걸까? 지난 시기에 건설된 높다란 빌딩들은 대개 텅 비어 있고 주변은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아무도 거주하지 않으니 보수할 필요도 없는 것이지만 물론, 보수할 기술도 여력도 없긴 하다. 1서울, 최초의 서울은 그러니 당연히 도시 전체가 소개되어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퇴거를 거부한 부동산 집착 망령들만이 여전히 살며, 해마다 몇십 명씩 건물 붕괴와 낙석, 싱크홀 등으로 사망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은 소규모 서울들이나 그 주변 마을들에서 여유 있게 살아간다. 사회가 안정되면, 지속 가능한 규모로 최적화되면, 경쟁과 선별과 배제를 통해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을 착취할 주체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인생에서 주체가 된 삶이다. P선생은 32동의 공원을, 공원 한가운데의 연못과 그 옆의 정자를 생각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의 주인공인 사람들이 한가로이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정자에 앉아 바둑을 두고 연못가에서 산책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공놀이를 하는 풍경을. 사회는 한 부분만 바뀌어도 전체가 바뀐다. 역으로, 전체가 바뀌면 부분마다 모두 완전히 바뀐다. 자신이 삶의 주인공인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방 안에서 멍하니 텔레비전을 쳐다보지 않는다. 가짜 방청객의 가짜 웃음소리에 따라 웃지 않는다. 마을마다 극장이 있고 저녁마다 연극이나 음악회가 열린다. 사람들은 저마다 한두 가지씩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고, 음악회에서 전문적인 연주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혼자서, 혹은 친구들끼리 연주하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십대 아이들은 언제나처럼 시끄럽게 록을 연주한다.

 


버스가 5서울 외곽의 어딘가 정류장에서 멈춰서자 P선생은 이제 됐다 싶어 내린 다음, 신호등도 없는 좁은 찻길을 건너 반대편 정류장 긴 걸상에 앉았다. 동이 텄어도 어디선가 풀벌레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그만큼이나 수북한 풀밭 너머 잡목림에서는 벌써 매미들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지금까지 버스를 타고 지나온 길을 보니, 찻길 양옆으로는 옥수수 밭과 감자밭, 콩밭이 드문드문 펼쳐져 있었고 퇴비 냄새가 바람을 따라 짙게 흘러왔다. P선생은 종점을 지나 도시로 돌아가는 버스가 다가와 멈춰 서자 일어나 올라탔다. 버스 옆에는 성당앞, 약국앞 같은 그 동네에서만 알 법한 정류장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거의 다 빈 차내에서 창가 좌석에 앉아 느긋하게, 버스가 다시 5서울 도심을 지나 그의 집이 있는 3구로 가기를 기다리며, 이거 참 쉬운 일이구만. P선생은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다는 안도감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쓰다 만 원고를, 이제는 결코 완성되지 않을 원고를 다시 생각했다. 참 기묘하기도 하지, 그런 세계가 실제로 가능하다니 말이야. 아니, 가능했다니 말이야, 라고 해야 할까? 평행 우주 사이에서는 시제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 걸까?


점잖은 야만의 세계. 아니, 점잖지도 않지. 천박한 야만의 세계. 기술만 첨단이고 물질만 풍부할 뿐 정작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는 세상. P선생은 어젯밤, 두 눈으로 소설 속 세상을 목격했을 때의 전율을 떠올리고 다시 몸을 떨었다. 종종 가장 끔찍한 것들이 그렇듯 그 세상은 한편으로는 끔찍하게 매혹적이었다. 그 세계에서는 밤에도 찬란한 욕망의 불빛들, 텅 빈 영혼을 낚으려는 빛의 거미줄이 밤의 어둠마저 희뿌옇게 더럽히고 있었다. 밤이 밤이 아닌 세상에서는 무엇 하나 자신의 이름에 맞는 실체를 지닌 것이 없었다. 자본을 제어하는 데 실패한 국가의 정부는 정부가 아니었으며, 시민은 시민이 아니었다.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고 가정은 가정이 아니었다. 부모는 부모가 아니었고 자녀는 자녀가 아니었다. 끔찍한 세상. 모든 것이 가격표가 붙은 상품일 뿐이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 모든 상품들을 상품들에게 서로 팔기 위한 거대한 진열대였다. 그러니 찬란하고 끔찍하게 매혹적일 수밖에.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 : 참고 견디지 못한다. 미치거나 죽는다. 결국엔 모두 죽을 뿐이다. P선생은 어젯밤 버스 차창 밖으로 보았던, 배달 오토바이를 생각했다. 차선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배달 오토바이는 사선 위를 달리고 있었다. 배달하지 않아도 죽고 배달해도 죽기 때문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목숨을 비정한 확률에 걸어야 하는 세상. 그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의 오토바이를 타고 자신의 목숨을 걸고 생사의 차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물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떠있는 동안에만). 고통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 누구도 한 순간도 안심하고 내일을 생각할 수 없는 끔찍한 세상. 모두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다함께 종말을 향해 질주하는 세상. 어떤 종류의 끔찍함은 매혹적이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미쳤고 모두가 함께 죽어가는 어리석은 세상의 장엄함은 P선생을 매혹했고, 원고 속 세상이 P선생을 끌어당겼다. 버스의 진동이 다시 바뀌고아스팔트와 디젤 엔진차창 밖의 풍경이 바뀌었어도점점 더 높게 솟구치는 빌딩과 쪼그라드는 가로수, 화단, 녹지와 풀밭, 좁아지는 보도p선생은 의식하지 못했다. 써서는 안 되는 원고에 대해서만 계속 생각했다. p선생이 쓰고 있던 소설의 결말은 세상의 부당함을 고발하기 위한, 주인공의 죽음이었다.

 


 

8.

그리고 꿈의 방향이 바뀌었다. 우주의 파동이 다시 겹치고 교차하고 교란되었다. 가능성이 현실로 수렴되고 현실이 가능성으로 확산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꿈과 현실이 뒤섞이고 재분배되었다.

 


a는 종례 후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방으로 가다가 텅 빈 복도에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텅 빈 학교에 혼자 남은 이상한 꿈에 빠진 것만 같다. 아니, 텅 비지 않았다. 방금 전에 종례 시간에 봤던 담임 선생님을 복도에서 만났는데, 어딘가 잔뜩 짓눌리고 긴장된 표정으로 야자 시간에 어딜 돌아 다니냐고 야단을 쳤다. ? 야자요? 이상한 나라에 빠진 앨리스가 된 기분으로 엉겁결에 돌아간 교실에는 아까는 분명히 동아리방과 공원과 서점과 극장과 레코드 가게로 흩어졌던 친구들이 모두 모여 열과 오를 맞춘 책상에 앉아 똑같은 표지의 문제집을 졸면서 풀고 있었다. 교실 창밖에는 어느새 해가 지고 뿌연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a는 천천히 교실 한 쪽의 빈자리에, 이 꿈속 같은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국어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다. a는 신기한 표정으로 문제집을 훑어보았다. 조별 과제 때문에 친구들과 같이 공부해 본 김수영의 ''에 대해 이 책에는 시인이 마지막으로 남긴 작품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무슨 소리야? 이 국어 문제집이라는 책은 정말 신기한 책이었다. 시와 소설이 감상과 분석이 아니라 문제 풀이를 위해 실려 있었다. a는 깨달았다. 이 문제집은 시와 소설 작품에 대해 공부하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시와 소설을 가지고 만든 문제를 푸는 법을 공부하기 위한 책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정답: 공부를 해서, 문제를 잘 풀어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서. 좋은 점수가 왜 중요하지? : 좋은 점수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듯이 모든 것이 점수로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 위해서. a는 소름이 끼쳤다. 이 학교는 미쳤어. 이 학교는 학생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무언가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 존재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 작동했다. 하지만 문제집을 자꾸 쳐다보며 a는 문제집이 점차 낯익게 느껴졌고, 자신의 문제집이라 생각하게 되었으며, 정규 수업이 오후 두 시에 끝나면 친구들과 동아리방에 가서 연극 공연 준비를 하거나 배우들의 공연을 보러 마을 극장에 가거나 연극에 쓸 노래를 고르러 레코드 가게에 가는 삶을 꿈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런 삶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a는 다른 친구들처럼 졸음을 참고 문제집을 풀었다.

 


그리고 B는 쇼핑을 하다 문득, 어머, 내가 왜 시골 장을 헤매고 있지? 하는 몽상에 빠졌다. 분명히 승용차를 몰고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던 기억이 분명한데 어느새 B는 좁은 골목길 좌판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백화점에 추억의 고향 장 코너가 생긴 건가? 그럼 저기 저 좌판 너머에 앉아 있는 시골 할머니들은 일부러 분장시킨 백화점 협력업체 직원들? 하지만 어디에도 바코드 감식기나 모니터는 없는데? 그럼 도대체 뭘로 결재하지? 그러나, 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들고 있었던 핸드백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고, 그러고 보니 옷차림도 집에서 나올 때 힘주고 나왔던 그 차림이 아니다. 도대체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지? 무엇을 사러 왔는지, 왜 왔는지도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아무 것도 사러 온 게 아니었으니까, B는 씁쓸한 표정으로 좌판 사이를 걸었다. 다만 휘황한 조명과 전시 속에서 나 자신을 잠시 잊고 싶었을 뿐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B는 자신을 잊고 싶었을까?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B는 방금 전의 자신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고 꿈결 같아지는 것을 느꼈다. B는 좌판 위의 채소와 과일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움직였다. 이른 오후의 햇살이 생생하게 살아있어 따가운 눈을 한 손으로 가렸다. 이렇게 햇살을 받아본 게 얼마만일까? 소녀 시절에는 학교와 학원과 독서실 사이를 오가느라, 직장에 다닐 때는 밤늦게까지 야근하느라, 결혼한 뒤로는 집에만 있거나 쇼핑몰과 헤어샵만 다니느라 이렇게 야외로 나와 본 건 정말 오랜만인 것만 같았다. 아니, 그 모든 건 다만 꿈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도대체 무슨 꿈을 그렇게 오래 꾸었지? B는 꿈속에서 자신이 잠시 잊고 싶었던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없다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꿈속에서 B는 언제나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일 뿐이었다. 소유물은 자신이 소유물임을 잊기 위해서 끊임없이 다른 것들을 소유하고무엇보다 아들에 대한 소유를 확인하기 위해 아들을 끊임없이 과외와 학원으로 몰아넣었다B는 고개를 흔들어 어두운 꿈의 기억을 털어내고 장을 계속 봤다. 토마토와 가지, 버섯, 그밖에 샐러드와 샌드위치에 필요한 야채들을 작은 봉지로 몇 개 샀다. 남편이 퇴근하면 같이 자전거 소풍을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마 아들은 안 가겠다고 하겠지. 이제 또래들이랑 노는 게 더 재미있을 나이니까. 햇살을 보니 오후 내내 날씨가 좋을 거 같아 B는 살며시 콧노래를 부르며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C는 잠들기 전까지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침대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였다. 우주 전체가 누군가의 꿈일 뿐이라면, 꿈 아닌 것은 무엇일까? 꿈 아닌 것이 없다면 과연 꿈이 꿈일까? 꿈 속에서 c는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연구원으로. 꿈 속 세상에서 c는 여자라고 차별받지 않았다. 꿈 속 세상은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았고, 따라서 착취의 연쇄 고리의 마지막 매듭에 여자들을 묶어두지 않았다. 사람들이 직장에 오래 묶여 있지 않으니 남자들만 고용할 필요가 없었고, 여자들에게 가사와 육아를 전담시켜 집에 가둬 놓을 필요가 없었다.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은 남자와 여자로 차별되어 키워지지 않았다. 성별보다는 성격이 중요했다. 힘들어하는 사람을 돕고 다른 사람의 아픔을 함께 아파할 줄 아는 것이 남자답고 여자답게 키워지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렇게 키워진 아이들은 고정된 성관념과 성역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가능성을 계발해나갔다. 꿈속에서 c는 비정규직 연구원이었다. 하지만 비정규직이라고 차별받지 않았다. 어차피 전문직은 대개 비정규직이었다. 개인과 직장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일을 조정할 수 있었다. 같은 직장에서 오래 일하면 오히려 전문성은 떨어지기 마련이었다. 사무직으로 일하는 h도 마찬가지였다. h는 파트타임으로 연구소 사무실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생계를 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하숙집 창고를 개조한 작업장에서 발명을 했다. ch의 발명들이 다소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h와 결혼할 것이었다. h는 웃을 때 눈이 예쁘고, 언제나 c를 보면 환하게 웃기 때문이었다. 꿈 속에서 c는 꿈속의 CH를 생각했다. 꿈 속 꿈의 C는 결코 H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었다. H가 소장과 C의 관계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꿈 속 꿈 세상에서 여자들은 낡은 관습과 윤리로 옭아매어져 있었다. 그래야만 지배하고 착취하기 수월하기 때문이었다. 꿈의 세상. 남자들만의 꿈의 세상. 기분 나쁜 꿈이야. c는 울면서 잠에서 깨어나 눈물 자국을 지웠다. 지난 밤 꿈의 기억도 지워졌다. 아침 햇살이 밝았다. 출근하면 시험해볼 실험들이 떠올라 c는 콧노래를 부르며 샤워를 했다.

 


그리고 d씨는 두 갈래로 난 길을 청소한다. 양쪽 길을 모두 빗자루로 쓸고 싶었지요. 하지만 한쪽 길만 쓸 수밖에 없었답니다. d씨가 청소한 길은 어느 쪽 길이었을까? 한쪽 길은 넓고 가로수가 우거졌으며, 쓰레기가 별로 없다. 왜냐하면 사회가 가난하기 때문이고 그렇기 때문에 자원은 아껴서 다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종이 한 장, 비닐 조각 하나도. 그렇지만 다른 쪽 길은 좁고 가로수가 말라비틀어져 있고 보도블록은 담배꽁초와 가래침과 어디서 나온 건지 알 수 없는 핏자국과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 토사물 자국들로 얼룩져 있다. 이 세상은 보행자들에게 친절할 필요가 전혀 없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다른 쪽 세상은 어떨까? d씨는 그 세상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쓰레기도 함부로 못 버리는 사람들이 과연 행복할까? 그 세상의 도로는 깨끗하지만 보도 볼록은 낡고 깨진 곳이 많으며 틈새가 많이 벌어져 있다. 벌어진 틈새는 장애인들을 위해 여기저기 자갈과 시멘트로 메워져 있어 d씨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행복은 과연 어디에 있는 걸까? d씨는 두 갈래로 갈라진 거리 위에 서서 상대편의 d씨를 바라보았다. 거리는 다시 무수히 갈라지고 있고, 각각의 거리마다 d씨가 빗자루를 들고 서 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한 거리는 없었다. d씨는 d씨가 행복한 거리는 어디에 있을까. 어딘가에 그 거리에서 행복한 d씨가 있으리라는 사실이 위안이 될 수 있을까 의문하며 천천히 다시 빗자루를 들어 어딘지 알 수 없는 거리를 힘없이 쓸어 나갔다.




 (일러스트레이션: 유지원)


그리고 E는 새로운 귀걸이 도안을 그리다 말고 문득 현기증 속에서 정신을 차려보니, 공방 바깥 매장에서 아이와 함께 진열장을 쳐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다. 아이는 벌써 흥미를 잃고 지친 기색이 분명하고, 그녀는 조금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과, 아이가 떼쓰기 전에 집에 가야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한때는 그녀도 저런 장신구들을 만들어 팔고 싶었었다. 그게 꿈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꿈이란 걸 가지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보석들은 그녀가 만들어보고 싶었던 문양을 희미하게 흉내내어 반짝인다. 그러나 진열장은 너무 답답하고 조명은 너무 강하고 화려하다. e는 문득 장신구들이 소박한 진열대에서 오후의 넉넉한 햇살 아래 어떻게 반짝이는지 생각하며 혼란에 빠졌다. 어디서 본 거지? 과거에아니면 또 다른 현재에아니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미래에? e는 아이도, 남편도 없는 삶을 꿈꾸었다. 그게 꿈이 아니었을까? 이미 이루어지지 않았나? 아니, E는 아이도, 남편도 있다(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지금? 어느 지금?) 얽어매어 옥죄어져 있지 않고 자유롭고 편안했다.(그게 과연 가능할까? 가능했을까?) 이렇게 강렬한 백일몽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백일몽이 맞나? 기억이, 아니, 현실이 아니었나? 마침내 아이가 집에 가자고 피곤하다고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얘가 왜 여기 있을까? 친구들이랑 밖에서 놀고 있어야 하지 않나? 엄마 미워. 아이가 말한다. 나도 너 싫어. e는 생각한다. 네 아빠가 비겁하게 자기 혼자 자기 속에 틀어박혀 있을 때 나 혼자 갓난쟁이인 너 키우느라 내 삶은, 내 꿈은 모두 부서지고 망가졌어. 난 이미 할 만큼 다 했다고. 그래 맞아, e는 생각했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다 치렀다. 그러니 끝낼 자격이 있다. 이것을 끝낸다면 저것이 새로 시작될 것이다. 나는 끝내는 것도, 새로 시작하는 것도 아무 것도 두렵지 않다.(오로지 그만이 두려워한다. 그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그를 사랑했다.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할지 모른다.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사랑이었고, 잘못된 사랑이다. 이 사회에서 사랑은 왜곡된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만 한다. 그러나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해서 개인의 잘못은 없어지나? 그렇지 않다. 잘못된 세상에서도 올바르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은 있고, 그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잘못이다. 잘못된 것을 말하고 고치지 않고 도리어 외면했고,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그를 떠날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내고 늦었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작가 f2017104일 오후 6, 열심히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이 이야기는 원래 20153월부터 장편으로 쓰기 시작해서 20161월에 500여 매로 듬성듬성하고 거칠고 어설픈 초고를 끝맺었었다.(끝에서 주인공은 우주 간의 연결을 끊기 위해 자살한다) 원래는 다시 1000매 분량으로 확장할 계획이었지만 f는 결코 해내지 못했다. 口服爲累하야몇 번인가 더 시도했지만 지지부진했고, 지금 작업하고 있는 것은 250매 짜리 중편을 써야할 필요가 생겨(마찬가지로, 구복이 위루해서), 2017910일부터 다시 시작한 버전이다. 몇몇 부분은 초고에서 옮겨오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쓰고 있고, 현재 178매 정도 쓴 상태로, 70매 조금 넘게 남았다. 아마 마지막으로 30매 정도는 p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될 테니 이제 40매 정도밖에 여유가 없는 상태다. , 그럼 자리에 맞게 꿈 이야기나 하나 할까? f는 종종 군대에 다시 간 꿈과, 대학에 다시 간 꿈들을 꾼다. 언제나 꿈속에서 이미 제대했고, 졸업했다는 걸 알면서 자신이 왜 다시 여기에 있는지 당혹해하곤 한다. 아직도 f의 일부분들은 여전히 그 시절 그 대학 캠퍼스에, 그리고 그 시절 그 공군 기지에 여전히 남아 있는 걸까?

 


그리고 간호사 G는 현실이 이중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격무로 지쳐서 그래. 한쪽 현실에서 생각하다 말고, 격무? 무슨 격무? 다른 현실에서 의문했다. G는 초대형 병원의 3교대 근무 간호사였고, 동시에 마을 병원의 평일 근무 간호원이었다. 간호사 G는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툭하면 아가씨로 불리며 성희롱이나 당한다. 간호원 g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리며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성실히 하고 있다. G의 한쪽 눈에는 가족과 고용된 간병인들로 어지러운 좁고 더럽고 어지러운 병실이, 다른 한쪽 눈에는 간호원들과 전문 봉사자들만 조용히 오가는 넓은 병실이 보인다. 한 쪽 병원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단절되어 오로지 가족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버텨나가는 환자들이, 다른 한 쪽 병원에는 국가와 사회의 지원 속에 여유있게 회복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누워있다.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할까? 각각 다른 병원의 근무실에 앉아 G는 상대편의 자신을 바라본다. 왜 저 병원은 저렇게 많은 환자들을 저렇게 턱없이 적은 간호원들로 대응하는 걸까? 저 간호원들은 과연 환자 하나하나를 제대로 기억은 하고 있는 걸까?(당연히, 간호사 G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이었고, 기업과 정부와 학교와 병원과 감옥은 모두 근무자들에게 최소한의 비용을 지불하고 최대한의 용역을 뽑아내어 수지를 극대화하려 했다. 사람의 목숨은, 인권과 존엄성 따위는 계산 밖의 문제였다) 간호원 g는 궁금했고, 동시에 간호사 G도 궁금했다. 왜 저 병원은 저렇게 많은 간호사들이 놀고 있는 걸까? 병원이 저렇게 비전문적이어도 되는 걸까? 간호사들이 저렇게 여유 있게, 편안하게 있어도 되는 걸까? 만일 두 현실 중에서 어느 하나를 고르라면 어떨까? 간호사 G는 결코 간호원 g의 현실을 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삶이 그렇게 여유 있고 편안할 수 있다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러면 지금까지 나의 삶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리고 H는 선짓국을 먹고 S선배와 헤어져 연구실로 출근했다. 화장실에서 양치를 하고 선배 연구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연구실을 정리하고 정돈했다. 과연 P선생과 p선생은 서울의 정반대 쪽으로, 자신들의 서울로 잘 가고 있을까? 잘 갔을까? 이제 실험 결과는 정상적으로 나올까? 오전 실험에서는 중간 결과로 정상값이 출력되었다. 어이쿠, 드디어 우리 우주가 다시 중심을 잡았군. 다른 우주를 떼어낸 모양이야. 하지만 오후 늦게 나온 최종 결과는 여전히 불규칙한 무의미한 값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팀장이 잔뜩 화난 목소리로 중국집에 짬뽕과 소주를 시키는 동안 H는 생각했다. P선생이, 혹은 p선생이 실패한 걸까? 사내 메신저에서 C는 혹은 c는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퇴근해 있었다 아니, 퇴근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도매상 I씨는 두 갈래로 갈라진 세상 앞에서 어느 쪽이 더 수지가 맞는지 계산하느라 머리가 아프다. 대리점에서 물건을 떼어다 다음 단계 또 다른 중간 도매상에 파는 이쪽 삶이 더 나은 걸까, 혹은 9서울의 외곽 12, 13, 14구 바깥의 121, 122, 142 농장들에서 거둬 온 상품들을 13구 중앙 시장에 파는 저쪽의 삶이 더 나은 걸까? 그런데, 이윤이 그렇게 중요한 걸까? 한쪽 세상의 i씨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다른 한쪽 세상의 I씨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세상에 과연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가치가 따로 있을까? 한 쪽 세상의 I씨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그리고 다른 한 쪽 세상의 i씨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도대체 어느 쪽을 따라야 할까? 장사꾼은 그저 이익을 좇아 움직이면 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고, 모든 사람들이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자신만의 책임감을 느끼고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하도록 노력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왜 그렇게 피곤하게 살아야 할까? 한 쪽 세상의 i씨가 다른 쪽 세상의 I씨에게 답한다: 삶은 원래 그렇게 피곤한 것이니까. 피곤하지 않은 삶, 생각하지 않는 삶은 잘못된 삶이니까. 결국은 누군가 고통 받고 괴로워하는 것을 외면하는 옳지 못한 삶일 뿐이니까. i씨는 I씨에게 손을 내밀고, I씨는 다시 하나가 되어, 전기 트럭을 몰고 13구 중앙 시장으로 간다.

 


그리고 j기자는 눈이 어지러워진다. 방금 전까지 쓰던 기사가 어디 갔지? 아니, 그나저나 컴퓨터가 뭐 이리 좋아? 사무실이 밝아졌네? 그리고 사무실에 웬 기자들이 이렇게 많을까? 취재 안 나가나? 그리고 j는 모니터를 보고 그 이유를 알게 된다. 극장 스크린처럼 널찍한 모니터에는 몇 개의 창이 떠있는데, 하나는 중앙 통신사에서 받은 보도 자료를 분량만 줄여 편집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 게시판들을 훑으며 쓸 만한 얘기 없나 찾고 있었고(! 인터넷이 된다!), 또 다른 하나는 마찬가지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실시간 검색어 순위를 보고 있었고, 나머지 몇 개는 SNS 사이트에서 유명 인물들 페이지나 실시간 검색어 목록을 열어놓고 있었다. J기자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뉴스도 결국 만들어 파는 상품일 뿐이며, 만드는 것도, 파는 것도 모두 외주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J기자는 잠시, 심란해진 이유를 알 수 없다. 언론은 체제 유지를 위한 정부와 기업의 파트너일 뿐이며, 뉴스는 언제나 정말로 중요한 것, 정말로 알아야 할 것들을 가리기 위한 연막일 뿐이다. 옳지 못하다고? 그렇다고 욕하고 저주할 일인가? 기자도 결국은 먹고 살기 위한 직업일 뿐이다. 세상에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과연 어디 있을까?

 



그리고 시인 k들은 시를 지었다. 시인이란 공화국에서 불필요한 존재, 그러나 어느 세계에나 시인은 있었다. 특히 아프고 병든 세계에서, 시와 문학과 예술이 장식과 상품으로 전락한 세계에서 시인들은 울면서 노래하고 조용히 죽었다. 어느 한 세상에서 시인 k는 시를 지었다:

      사람이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사람이 되어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

      이제 하늘은 누르고 땅은 검다

      별들은 얼어붙고 나무는 빛을 잃었다

      당신의 숨결은 마분지처럼 단단하다

      모든 것은 다만 절망, 오직 죽음. 다시는 아무도

      결코 당신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리라


그리고 또 다른 세상에서 또 다른 시인 k:

      절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 속에서 삶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라디오의 재잘거리는

      소리도 사그러져가고 강 건너에 다만 밤만이 끝없이

      이어진다 해도 이제 나는 이 어둠이 자랑스럽다

 


그리고 배우 L은 황량한 무대 위에 서 있다. 이곳은 오래 전에 방치된 어항, 녹색의 썩고 부패한 물, 비늘도 형체도 없는 가시만 남은 육탈된 물고기들의 버려진 묘지이다. L은 산소가 전혀 없는 극장의 백만 년 묵은 썩은 공기를 심호흡을 하고 무대 위에 올라간다. 그리고 세상이 바뀐다. 줄넘기를 시작한다. 마을마다 극단이 있고 마을 사람들마다 때때로 기분전환 삼아 다른 마을 극단의 공연을 보러 저녁마다 이웃 동네로 구경 다니는 삶이 한쪽 끝에 존재하고, 연극 같은 사치스러운 공연은 사람들로부터 소외되어(왜냐하면 사람과 사람의 직접적인 만남이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은, 삶은 스크린과 모니터 속에 박제된 상품이어야만 한다) 젊은 남녀 배우가 무대 위에서 남사스럽게 반쯤 벗고 뒤엉켜 꿈틀거리거나 아니면 초대권과 할인권과 단체권으로 간신히 끌어 모은 관객들 앞에서 극본 같지도 않은 극본을 꼭두각시 인형처럼 자본의 조종줄에 휘감겨 연기해야 하는 삶이 다른 한쪽 끝에 존재한다. 죽느냐 사느냐, 지워지느냐 존재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배우 L씨와 l씨에게 그것은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m은 돔형 구장에서 관중들의 엄청난 환호를 받으며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다. 동네 공원 옆의 그 조그만 흙먼지 풀풀 날리는 야구장은 어디로 간 거지? 일요일 오전마다 옆 동네 야구팀과 흙먼지 풀풀 날리며 한 게임하고, 점심은 그의 가게에서 볶음 우동과 군만두에 맥주맛 맥주를 마시며 떠드는? 가게? 무슨 가게? M은 불현듯 끼어든 잡상을 받아칠 듯이 스윙 연습을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조기교육, 중고등학교 운동부, 체육 특기를 거쳐 억대 연봉을 받는 프로 선수에게 무슨 우동 가게? M은 결코 야구장 밖의 삶을 알지 못한다. 야구공과 배트, 글러브만이 그의 삶의 전부다. , 물론 룸살롱과 단란주점과 아가씨들도 있긴 하지. 기업이 기업을 경영하듯 구단을 경영하고 증권을 거래하듯 선수들을 거래하는 스포츠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m이 묻고, M이 반문한다: 그렇지만 개인이 재능을 펼칠 수 없는 세상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단 말야? 프로 경기에서도 3할 타율을 올릴 실력으로 주말 동네 야구나 뛰는 우동 가게 주인의 삶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m은 대답 대신 투수가 던진 공을 힘차게 쳐올렸다. 공은 흙먼지 날리는 동네 공원 야구장의 맑은 하늘과 찬란한 조명이 눈부시게 빛나는 돔을 가로질러 자신만의 궤도를 따라 날아올랐다.

 


그리고 변호사 출신 N의원은 훌륭한 인품이 체형에 고르게 반영된 동료 의원이 호화로운 국회 본회의장에서 말도 안 되는 생억지로 정부를 헐뜯는 것을 안락하고 푹신한 의자에 앉아 엄숙하게 눈을 감고 듣는 척하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눈을 떠보니 시골 대서소 사무실 허름한 의자에 앉아 햇볕에 새까맣게 탄 쭈글쭈글한 농민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다. 여기가 어디야, 내가 어떻게 된 거지? 가장 무서운 공포가 N의원의 심장을 옥죈다. 내가 망했나? 내가 미쳤나? 내가 좆된 건가? 사무실 창문에 반전된 빛바랜 글자로 9서울 14구 구의원 n 대서소라고 쓰인 것을 보며 n씨는 한순간 자신을 사로잡았던 공포의 정체가 뭔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한다. 부정맥인가? 동맥경화인가? 지난 번 건강 검진에서 아무 말 없었는데? 서울 네트워크에는 중앙 정치와 지방 정치의 구분이 없다. 지방 정치의 단위만 다를 뿐이다. 아직까지는 구 단위의 입법, 행정 활동의 영향력이 가장 강하지만, 이마저도 서서히 동 단위로 넘어가고 있는 추세다. 물론 동 의회 같은 건 없지만, 시장과 카페에서 마을 신문을 통해 모인 여론이 구의원들을 움직일 정도의 압력을 형성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n의원은 다시 농부 q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였다. 법정이 간소화되고 거추장스러운 법률 대리인들이 사라져 법이 거리로 걸어 내려온 이후 모두들 법 없이는 못 사는 사람들이 되어 송사는 오히려 많아졌다. 농지 옆 도로 확장 계획에 대해 q가 반대하는 이유를 받아 적으면서 n의원은 조금 전의 백일몽에 대해서 생각했다. 오로지 자신들의 특권과 이권을 위해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옳지 않은 것을 옳다고 우기는 삶이라니, 그런 사람들의 손아귀에서 움직이는 세상이라니. 어떻게 그런 삶이,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가능할 리가 없어. 그러니까 백일몽이지. n의원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안 되나요? 아뇨,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잠시 다른 생각을

 


그리고 o목사는 눈을 뜨자마자 잠옷 바람으로 침대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회개하기 시작했다. 주님, 간밤에 도대체 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사탄이 찾아온 건가요? 제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으려고 한 걸까요? 꿈에서 O목사는 초대형 교회의 대강당에서 수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읊고 있었다. 그건 순전히 O목사가 옳다고 믿는 바일 뿐이었고, 아침저녁으로 보는 종편 방송과 보수 일간지들과 똑같은 내용이었다. 이 사회를 어지럽히는 종북 빨갱이들과 항문성교 동성애자들을 물리치고 애국 보수만의 순결한 대한민국을 이루어 십일조를 충실히 내야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영광과 행복과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루에도 몇 시간씩 연습하는 풍성한 성량과 기름진 어조로 엄숙하게 선언했던 꿈 속의 자신을 o목사는 눈물을 흘리며 회개했다. 아니, 사탄은 없다. 스스로 욕망의 올가미에 걸어 들어가는 우리들 마음이 사탄이다. 주님의 이름을 상표로, 기도를 상품으로 파는 회당은 성서에도 없는 타락한 풍경이었지만, 나의 게으름, 나의 어리석음, 나의 욕심이 그런 풍경에 솔깃한 것이었을 게다. 더욱 더 열심히 회개하고 기도해야 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일 게다. o목사는 죄인이 죄를 벗도록 도와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생각하며 몸과 마음을 추슬러 일어났다. 세수와 조식을 간단히 하고 목사관 뒤터에 심은 푸성귀들에게 물을 주고 돌보며 다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p선생은

 


 

9.

그리고 p선생은 뒤늦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 빈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보다는 지하철을 타는 게 낫지 않았을까? P선생의 세계에는 전철이 없는 모양이니 그게 더 확실할 텐데. p선생은 버스보다 지하철을 더 좋아했다. 버스가 덜컹거리고 불완전한 아날로그 탈것이라면 지하철은 매끄럽고 정확한 디지털 운송수단이었다. 순수한 직선과 곡선만으로 위상기하학적으로 가지런하고 우아하게 정리된 지하철 노선이야말로 서울의 이데아가 아닐까? 실제 서울은 다만 이데아 서울의 들쭉날쭉하고 삐뚤빼뚤한 아날로그일 뿐이고. p선생은 언제나 추상적인 것, 이론화된 것을 좋아했다. 거칠거칠하고 울퉁불퉁하고 불명확한 현실 세계에 실재하는 사람과 사물들은 딱 질색이었다. 그러니 내 소설이 매양 그 꼴이지. p선생도 알았다. p선생의 소설은 언제나 너무 직접적이고 추상적이었으며, 압축적이었다. 현실 속에서 살아 움직일 법한 등장인물이 구체적인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그럴싸하게 갈등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이름표만 서로 다른 허수아비들이 딱 필요한 만큼의 두께를 가지고 장광설을 읊다가 돌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갑자기 이야기를 끝맺곤 했다. 그게 소설이냐. p선생은 그런 소설들, 20세기 초엽 미국의 SF들이 딱 질색이었다. p선생의 취향은 소설적으로는 단순해도 이론적으로 과격한 하드 SF나 아이디어 자체는 진부하더라도 소설적으로 현란한 뉴웨이브 SF가 잘 맞았다. 아니면 둘의 창조적 사생아라고 할 사이버펑크라든가. 좋아하는 소설을 쓰지 못하고 싫어하는 소설만 쓸 수 있는 처지를 p선생은 천형이라고 생각하고 체념하게 되었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 마흔 살이 되면서 p선생은 이상하게도 자연스레 인생의 모든 것을 체념하게 되었다. 30대까지만 해도 가지고 있었던 인생의 포부,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목표,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믿음과 자부심모든 꿈이 자연스럽게 스러지고, 자신은 이미 늙었으며, 더 이상은 아무런 성취도 거둘 수 없을 것이며, 다만 끊임없이 부서져 나가는 삶과 그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깁고 짜 맞추고 다시 끼워 넣어서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텨내야 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게 되었다. p선생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어쩌면 그의 마지막 원고가 될 지도 모르는, 그러나 이제는 영원히 결코 완결할 수 없을 '꿈의 중첩'으로 모아지게 되었다. 촌스럽게 '꿈의 중첩'이 뭐람? p선생은 제목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쨌거나 '꿈의 중첩'p선생이 생각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또 하나의 소설이 될 것이었다. 세상에, 유토피아 소설이라니. 그건 다 지난 세기에 폐기하고 왔어야 할 유물이 아니야? 지금 이 세상 말고 더 이상 어떤 다른 세상이 가능하겠어? 동아시아에 끈질기게 퍼진 도가적 유토피아? 무릉도원? 영미권에서 지난 세기에 성행했던 자유주의적 생태 유토피아? 에코토피아? 도대체 다른 게 뭐야? 결국은 지난 세기 이전, 근대 이전의 불편한 세계들에 대한 반동적 향수일 뿐이지 않나? 도대체 유토피아라는 것 자체가 실현 가능이나 하기는 한 것일까? 가혹한 현실 세계에서 낙오되고 도태된 부적응자들, 예컨대 p선생 같은 작자들이나 죽을 때까지 입으로만 나불대는 허황된 몽상에 지나지 않는 것 아닐까?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상상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일까?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던 길만 걸었었다면 우리는 결코 지금 이 자리까지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소설의 끝에서 p선생은 완성되지 못할 소설을 위한 변명을, 발표되지 못할 서문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 위에 조용히 써나가기 시작했다. 인류의 진보는 언제나 나머지 모두가 꿈조차 꾸지 못했던 미답지, 불가침 영역에 대한 소수의 도전과 탐험과 좌절과 희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소수는 대개 앞으로 나아갔지만, 때로는 뒤나 옆으로 나아가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가장자리로, 이름 붙일 수 있는 것들 너머로 용감하게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45년의 원폭 투하는 과학기술에 의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파괴했고, 60년대의 시대적 각성은 자본주의와 환경파괴가 어떤 악몽을 가져올지,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으로부터 돌아서야 할지에 대해서 이미 이야기를 끝냈습니다. 이후의 많은 대안적 유토피아물들이 아나키즘과 생태주의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것은 그 때문이며, 이 소설 또한 그 연장선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많이 이야기되었다고 해서 그만 이야기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많이 이야기되었다고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들은 모두 서로 조금씩 다르고, 조금씩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오래도록 반복해서 꿈꾸었을까요? 그랬다. 꿈을 꿀 수 없는 세상에서, 행복을 꿈꿀 수 없는 세상에서 p선생은 꿈을 꾸었던 것이었다. 그게 p선생의 소심한 반항이었다. 그러나 그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p선생은 e를 생각했다. 때로 끔찍한 것을 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상한 우월감을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진실을 보았고, 나머지들은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p선생은 그렇지 않다고 e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e가 본 것들은 세상의 일면이었을 뿐이며, 우리는 그렇지 않게도 살 수 있다고, 다른 꿈을 꿀 수 있다고. 그러나 이제 p선생은 확신을 잃었다. e가 옳았을지도 모른다. 세상은 다만 악몽일 뿐이고 우리는 거기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p선생은 e에게 새로운 세상을, 새로운 삶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p선생은 자신의 패배를 겸허히 받아들인다. 세계의 승리와 자아의 패배는 근대 소설의 기본이지. 그리고 문득 지금까지 써온 소설들의 문제점이 어디서 왔는지 깨달았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p선생처럼 수동적이었다. 언제나 소설 속 세계를 관찰하기만 할 뿐, 결코 그 세계에 맞서 싸우지 않았다. 싸우지 않으니 패배하지도 않았다. 주인공이 세계의 부당함을 외치며 죽는 결말을 많이 썼으나, 싸우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결말이 아니었다. 소심한 반항. 무의미한. p선생은 자신의 삶도 그와 같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처럼, p선생도 결코 그의 삶에서 한 번이라도 삶의 절정 위에 선 적이 없었다. 암만해도 조금쯤 비껴서 서 있었다. 언제나 다른 사람이 대신 움직일 때까지 가만히 자기 자신 속에 비겁하게 숨어있었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아아, 나는 이야기 같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쓴답시고 인생을 이미 절반이나 허망하게 허비해버렸구나. 그리고 p선생은 다시 e를 생각했다. p선생은 자신의 인생만 허비한 게 아니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는 안 될 것이 사람으로 태어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었구나. 절망 속에서 p선생은 자신의 보잘것없는 소설을 하릴없이 다시 생각했다. 소설 속에서 P선생은 p선생의 세계를 소설로 쓰고 있었다. 나는 도대체 뭐가 잘나서 이 세상을 잘못된 세상이라고 그렇게 욕하고 저주한 걸까?(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욕과 저주였던 걸까?) 그리고 p선생은 깨달았다. 소설 속에서든 소설 밖에서든 p선생의 세계는 p선생처럼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응당한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비겁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착하고 힘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떠넘긴 결과물이었다. 모두 p선생의 잘못이었다. 그러나, 그렇다면 만일 p선생이 바뀐다면 세계도 바뀌지 않을까? 부분이 바뀌면 전체도 바뀌지 않을까? 단 한 사람이라도 잘못된 삶에서 벗어나 올바른 삶을 택한다면, 잘못된 세상도 과연 올바르게 바뀌기 시작하지 않을까? 평행우주가 겹쳐지고 또 다른 자신과 만나고 나니 p선생은 우리는 결코 어느 한 우주에 고정된 것이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매 순간 우리는 다른 우주를,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만 선택과, 실천뿐이다.(그러나 혹시 이 모든 것이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의 결과는 아닐까?)

 


아니, 그렇지 않아. 그래서는 안 돼. 어떤 결과가 기다리든, 그와 상관없이 우리는 올바른 길을 택해야만 한다. 비록 지옥을 향해 나아간다 하더라도 우리는 선의로 가득 찬 길을 걸어야만 한다. 집에서 e가 또다시 분노의 눈물을 흘리며 이혼을 요구한다 해도, p선생은 이제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p선생이 잘못한 것은 당연했고, 그렇다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은 마땅했기 때문이었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의 잘못은 더 이상 저지르지 않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가 초래한 결과라면 마땅히 그가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렇다면, 아이는?


미안해. 그는 창밖의 희뿌연 풍경을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아빠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모두 아빠 잘못이야. 아마도 그는 남은 생을 고스란히 모두에게 속죄하는 데 바쳐야 하리라. 여전히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 안 될 거야. 내 잘못들에 책임을 지려면 글을 쓸 여유 따윈 있을 수 없을 거야. 씁쓸하게, 그 사실을 그는 받아들였다. 언제부터 소설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해버렸을까?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그럼으로써 무의미한 소설들이? 이제 그만할 때가 되었어. 그동안 내가 소설을 쓴답시고, 아무도 읽지 않는 소설들을 쓴답시고 저질렀던 잘못들을 생각해 봐. 이제 남은 삶 내내 나는 그것들을 뒷수습해도 모자랄 거야. 그리고 그는 자신이 꿈꾸었던, 꿈 속에서 잠시 방문했던 세계를 마지막으로 씁쓸히, 마음속에서 가만히 돌아보았다. 그 세계는 아마 98년을 기점으로 우리 세계의 시간선과 갈라져 나갔을 것이었다. 이른바 IMF 사태를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의 과격한 도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맞바꾸어 돌파한 우리 세계에 비해 그쪽 세계는 정반대 방향으로의 사회적 변화를 통해 우회했을 것이었다. 중앙 정부와 대기업 위주의 정치와 경제, 경쟁과 선별 위주의 교육과 사회,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사회적 압력을 해소하는 방식으로부터의 전면적인 전환. 결별. 이 거울상을 통해 그는 자신이 돌아가고 있는 세계의 근본 원리를 더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마치 프랙털 도형처럼, 동일한 패턴이 사회의 가장 작은 부분, 가장 좁은 분야에서부터 사회 전체까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경쟁과 선별, 배제를 통한 억압과 착취의 정당화. 끊임없이 부서지고 부스러지면서 굴러가는 맹목의 눈덩이처럼, 이 세상은 결코 뒤처지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끝없이 앞으로 몰아세운다. 흩어지거나 뒤처지면 아무도 돌아봐주지 않는다는 공포가 사람들을 맹목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내달리게 한다. 미친 붉은 여왕이 끊임없이 빨리감기 버튼을 누르고 있는 세상.(경쟁과 선별 좋아하시네. 그게 제대로 돌아가기만 해도 말을 말지. 모든 어리석은 남자아이들이 똑똑한 여자아이들보다 앞에 놓이는 것처럼, 모든 금수저 은수저들이 모든 쇠수저 흙수저들보다 항상 앞자리에 놓였다. 망가진 시스템 위에서는 잘못된 오류들만 정상값보다 우선순위를 배정받았고 그럼으로써 시스템을 더욱 망가뜨렸다) 이 세상은 이미 망가졌다. 세상은 유기성을 잃어버리고, 모든 것은 썩고 부패한 부분들로 헤어졌다. 우리는 이제 우리들 서로를 사람으로 인식할 인지 기제를 잃어버렸다. 모두가 모두에게 다만 수단과 도구일 뿐이다. 쓰다 망가지면 망설임 없이 버리는 일회용품일 뿐이다. 그러니 그 속에서 그가 다른 세상을 꿈꾼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세상. 저녁이 있는 세상을 넘어 오후가 있는 세상. 사람들이 느긋이 걷고, 전기 버스가 느긋이 지나가고, 사회가 느긋이, 여유 있게, 부족한 사람들, 불편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모두 챙겨가며 다함께 움직이는 세상. 부가 독점되지 않고 권력이 편재하지 않아 누구나 불안하지 않고 자신감 있게 살아가는 세상. 소설 속 세상을(그답게) 추상적인 문구들로 떠올리던 그에게 일순간 갑자기 소설 속 세상의 한 조각이 구체적인 감각들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순간적으로 보았다: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찻집과 공원따뜻한 하얀색 위의 노란 잿빛 그림자, 갓 손질한 정원의 풀내음, 아이들의 웃음소리, 신나게 뛰어다니며 짖어대는 강아지들, 차가 오래도록 식지 않는 무더운 오후의 나른하고 묵직한 공기무겁고 두터운 오후로 퍼져나가는 황초록빛 차의 향기가 밀려왔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너무 가까이 다가가자, 희미해지던 꿈이 돌연 그를 삼키고 마침내 현실로 전환된다. 발치에서 묵직하고 강력한 경유 엔진 대신 전기 모터가 부드럽게 돌아가기 시작하지만 그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고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을 소설에 대한 생각을 이어간다. 학생과 주부, 연구원, 청소부, 작가, 간호원, 도매상, 기자, 연극배우, 야구선수, 구의원과 목사 등이 등장하는, 짧게 분할된 챕터에서 그러한 사회의 모습을 다면적으로 탐구하면서, 원래는 경찰서장과 교도관도 넣을 생각이었다. 이 세계의 경제 체제에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교육 과정대로 수업을 진행하는 경제 교사도. 이 세계라고 해서 문제가 없을 수는 없었으니까. 오히려 자잘하지만 없을 수 없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는 것이 고전적 유토피아물들에 대한 현대 유토피아 소설들의 차이점 중 하나일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과 욕망은 결코 동일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없으며, 그것이 가능하다고 가정하는 순간 유토피아는 뒤집혀 디스토피아가 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으니까. 디스토피아라. 소설 속 세상에 대한 전망을 통해 씁쓸히 되돌아보니 p선생의 현실이 바로 끔찍한 디스토피아였다. 경쟁과 선별과 도태가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부터 가장 큰 단위까지 끊임없이 메아리치는, 모든 범죄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그로 인한 사회적 불안정성마저 오히려 체제 유지의 동력으로 흡수해버리는, 예비 범죄자들을 가득 싣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는 맹목의 기관차. 어떤 종류의 끔찍함은 매혹적이다. 모두가 아프고, 모두가 미쳤고 모두가 함께 죽어가는 어리석은 세상의 장엄함이 그를 매혹했고, 작용-반작용의 원리에 따라 뒤로 물러났던 원고 속 세상이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다가와 그를 끌어당겼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런 사회가 어떻게 한순간이라도 유지될 수 있겠어? 아무리 소설이라고 해도 도대체 어느 누가 개연성을 납득하고 읽어줄까? 밝아오는 새벽빛 속에서 생각해보니 지난 몇 달 동안의 노력은 아무래도 처음부터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이었다는 점이 비로소 명확해진다. 아예 지워버리고 다른 걸 써봐야겠군. 아까우니 남겨놓을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그러기엔 메모리가 아까워.

 


그리고, 그렇게, P선생은 조용히 p선생과 그의 세계를 잊었다. 상쾌한 피로감 속에서 P선생은 버스 창밖으로 이제 막 깨어나기 시작한 거리의 낯익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밤 산책을 하기 잘했어. 생각이 정리가 되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E에게 문자했다. [당신 자는 동안 나와서 산책 좀 했어 지금 들어가요] 시간을 보니 잠깐 눈 붙이고 다시 일어나 씻고 아침 먹고 출근하기에 충분했다. P선생은 집 앞 정류장에서 내려 느긋하지만 꼼꼼하게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있는 d씨와 가볍게 인사하며 골목으로 올라갔다. 당직 교대를 위해 일찍 출근하는 간호원 G와 서로 지나쳐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M씨의 우동 가게 옆 4층 빌라로 갔다. 이웃집 B씨 부부의 단독 주택 마당에서 나이 많은 개가 P선생을 알아보고 꼬리를 흔들더니 다시 개집 안에 들어가 엎드렸다. 빌라로 들어가며 P선생은 손을 흔들어주고 3층까지 계단을 올라가 현관문을 조용히 열었다.


거실에서 남방과 면바지를 벗고 소파에서 동글게 몸을 말고 자는 비쩍 마른 노란 고양이를 쓰다듬어 준 다음, 망설이다가 P선생은 식탁 위의 워드프로세서에서 전날 밤까지 쓰고 있었던 원고를 완전히 삭제했다. 그리고 욕실에서 손발을 씻고 마침내, 어둑하고 따뜻한 침실로 들어갔다. E는 아직 자고 있었지만 살그머니 옆에 눕자 돌아누우며 P선생을 안아주었다. 오직 따뜻함, 오로지 부드러움. 의식 저편에 여전히 남아있던 전날의 개운하지 않은 기억들이 마침내 말끔히 지워지는 것을 느끼며 P선생은 다시 잠들었다. 이제 다시는 악몽을 꾸지 않을 것이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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