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침묵 2
해도연 /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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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FOUR - 코롤료프 크레이터


10.

    정기선 선착장 모듈은 미후와 지아의 사무실보다도 넓었다. 새하얀 곳곳에서는 정기선의 운행시간과 현재 위치가 번쩍거렸다. 선착장은 L2 스테이션의 중앙에 있었기에 인공중력도 없었고, 미후와 지아는 무기력하게 대기실 내부를 떠다녔다. 미후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없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크로포드 씨도 너무하지, 어떻게 이틀 만에 달에 내려갈 준비를 해요?"

    지아가 급조한 경량우주복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접은 상태에서는 손바닥만한 크기였지만 사용할 풍선처럼 금세 커지기 때문에, 지아는 스위치를 확인하며 조심스럽게 바지에 고정했다. 어차피 입을 일은 없겠지만, 만약을 위해 규정상 반드시 가져가야 .

    " 때문에 미안하게 됐네요."

    미후가 자기 머리만 동그란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시선의 끝에서는 달궤도 정기선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속도를 보아하니 도킹까지는 10분은 족히 걸릴 같았.

    미후는 자기 눈앞에 있는 해치의 손잡이를 바라봤다. 광활한 죽음의 공간과 좁은 방을 나눠 주는 얇은 철판밖에 없다. 철판마저도 해치 손잡이를 바퀴 돌리면 끝이다. 해치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상상을 하자 미후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사람이 있는 모듈의 공기가 모두 빠져나가서 경량우주복을 서둘러 챙겨입는다면 10 정도는 버틸 있다. 그때까지 정기선이 우릴 구해줄 있을까? 미후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했다.

    "그나저나 크로포드 씨는 진심일까요? 진짜 우리한테 이런 일을 맡긴 거예요?" 지아의 목소리에는 조마조마함이 묻어났다. 미후는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우리 이해를 아득히 넘어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같아요. 우린 그냥 장기말에 불과하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중력파 시설을... 회사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시설..."

    ...강제로 멈춘다.

    미후는 크로포드가 넘겨준 열쇠를 떠올렸다. 그냥 보면 자그마한 쇠막대기지만, 내부에 자기 코드와 IC칩이 내장되어 있었다. 생산공정 설계정보가 폐기된 이후로는 재생산도 복제도 불가능한 열쇠였다. 크로포드가 가지고 있는 것과 지금 미후가 가지고 있는 , 개의 열쇠를 L2 스테이션 관제실과 중력파 시설 관제실의 컴퓨터에 꽂아서 동시에 돌리면 강제로 중력파 시설의 가동을 멈출 있다. 미후는 여기서 작은 안심을 얻었다. 부사장이 함께하는 일이라면, 혹여나 다 른 일이 생겨도 쉽게 책임을 추궁당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제때 멈추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지아가 물었다.

    "크로포드 말로는... 우리가 멈추지 않으면 그물망 녀석들이 멈추게 거고, 그들의 방법은 결코 얌전하지 않을 거라고 했어요."

    " 그물망을 먼저 잡으려고 하지 않고..."

    미후는 지아의 목소리에서 짙은 답답함을 읽을 있었다. 지아도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던 걸까? 미후는 담담하게 크로포드에게 들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놈들이 내부에 이미 걷잡을 없을 만큼 퍼졌나 봐요. 크로포드 씨는 본격적인 가동 전에 놈들을 철저히 잡아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설이 가동하기 시작하면 놈들도 슬슬 모습을 드러낼 거고, 그때 이 쪽에서 먼저 시설을 멈추는 거로 허를 찌르겠다는 같아."

    정기선이 해치가 앞을 향하도록 회전하며 도킹을 준비했.

    "그런데... 괜찮을까요? 목성계나 토성계에서 가져오는 메탄도 수지타산이 맞고 헬륨3도 곧 부족해질 상황인데, 이걸 해결해 미소공간 에너지 시설을 비상정지한다니. 반물질을 다시 모으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잖아요? '플루토늄 5년' 이후로 에너지 문제가 제일 시급할 건데..."

    "에너지가 지금도 부족하기는 하지만..., 인텍 입장에선 방해꾼들을 잡는 먼저겠죠."

    "크로포드 씨는 일을 혼자 진행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 같은 사람이 있는 같기는 한데... 회사 간부는 믿을 없다고 생각하나봐요. 차라리 우리 같은 일개 직원에게 눈이 휘둥그레지는 보답을 주고 장기말처럼 움직이는 편하겠죠. 아마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은 위험을 크로포드 씨는 알고 있을 거예요. 우리가 알면, 결코 발을 들이지 않을 것들을."

    평소엔 항상 자기가 지아에게 이것 저것 물었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지아가 자신에게 의지하고 있는 듯한 느낌에 미후는 지아의 속마음이 궁금해졌다. 지아는 어떤 사례를 제안받았을까? 역시 L1 콜로니 펜트하우스일까? 아니면 그냥 돈일까?

  

    정기선이 도킹을 마무리하면서 묵직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곧이어 기압을 맞추는 소리가 흘러내리고 해치를 열어도 된다는 녹색 불이 켜졌.

    그나저나, 크로포드는 우릴 어떻게 믿는 걸까? 미후는 그렇게 생각하며 해치의 손잡이를 돌렸다.




11.

    코룔로프 선착지에서 미후와 지아를 맞이한 것은 중력파 시설부장 미셸이었다. 미후와 지아가 달중력에 적응하지 못해 뒤뚱거리며 걷는 앞에서 미셸은 마치 지구 위를 걷는 것처럼 힘차고 우아하게 움직였다. 미후는 미셸의 신발 아래에 자석이 감춰져 있는 아닐까 의심했.

    "2세대 루나리안이래요."

    지아가 미후에게 속삭였다.

    달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달에서 낳은 아이들. 1세대 루나리안들은 달중력에 적응해 월등히 큰 키를 가졌던 반면, 그만큼 뼈와 근육이 약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강한 신체를 가진 이들은 있었고,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2세대 루나리안이었다.

    2세대들은 1세대만큼 키와 지구 출신에 뒤지지 않는 강한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달에서 특별한 체력관리까지 받았기에, 신체적인 대부분에서 지구 출신을 월등히 뛰어넘었.

    그런 이유로 루나리안들은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인텍 사장의 동성 배우자가 루나리안이라는 것이 유일한 예외였다. 덕분에 루나리안들의 입지는 달을 사실상 독점한 인텍 루나 내부에서 크게 뛰어올랐다.

    미후는 루나리안들이 마치 인간 2.0 같다고 생각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이제 인류의 새로운 경지가 펼쳐질 거니까. 미래의 역사가들을 위해서라도 비전문가의 시선을 남겨두는 좋겠죠."

    미셸은 미후와 지아를 비전문가로 불렀다. 미셸의 말투는 부드럽고 공손했지만, 언제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는 시선이 묻어났다.

    처음 홍보부에서 왔다고 했을 , 미셸은 중력파 시설의 모든 자료는 로그가 남겨지고 있고, 불필요한 미사여구로 채워진 신문기사 따위는 필요 없다고 했다. 하지만 결국 미래에 역사를 연구할 사람들은 신문기사 따위나 뒤지는 사람들이라고 하자 마음을 바꿨.

    언제나 미래를 보고 있는 사람이야, 미후는 미셸을 그렇게 평가했.

    "크로포드 양반이 당신들을 직접 보냈다니, 어지간히 뜨고 싶었군요. 하기야, 양반, 사내정치만 하다보니 정작 중요한 중력파 사업에선 좋은 자리를 놓쳤으니까. 홍보물에 자기 이름 번 박아넣으면 나중에 이름 남길 있을 거라 생각하나 죠.

    크로포드가 당신들 때문에 보안규정까지 어겼다는 거나 알아둬요. 자기가 책임지겠다나 뭐라나."

    선착장에서 관제실까지는 제법 멀었다. 지하에 건설된 모노레일을 타고도 시간을 이동해야 했다. 미셸은 정글의 개미집을 비유로 들며, 사람이 들어가는 시설 관제실만이 표면에 드러나 있고 나머지는 모두 지하에 있다고 했다. 헬륨3 채굴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말하면서.

    미셸은 구세대 에너지원 따위 때문에 정작 중요한 시설이 불편하게 만들어졌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사장이 루나리안과 결혼한 덕분에 관제실이나마 지상에 만들 있었다고도 다.

    모노레일에서 내리자마자 드러난 관제실은 생각보다 작았고, 시커먼 헬멧으로 얼굴을 가린 오퍼레이터 명이 벽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입구가 있는 쪽을 제외한 벽면은 모두 숫자와 그래프, 시설 내부를 비추는 영상으로 가득했다.

    “매우 복잡한 시설이라, 시설의 모듈에 오퍼레이터 300명이 분산되어 있어요. 여기 있는 건 퍼슨들(key persons) 뿐이죠. 하나에 씩."

    미셸이 미후와 지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부 유기적으로 연결된 화면들이지만, 당신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죠. 왼쪽 벽은 입자가속기의 상태, 가운데 벽은 중력파 신호 관리, 오른쪽 벽은 알큐비에르-카시미르 엔진 상태를 나타내요."

    "알큐... 무슨 엔진이요?"

    미후가 물었다.

    "알큐비에르-카시미르 엔진. AC엔진이라고도 불러요. 알기 쉽게 말하면 워프 드라이브 엔진 이에요. 초광속 이동을 위한 거죠."

    미후가 입을 벌린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미셸이 살짝 비웃으며 말을 이었.

    "가동이 시작되면 어차피 알게 테니 미리 알려드리죠. 미소공간에서 나오는 중력파와 반물질 뿐만이 아니에요. 소위 말하는 '음의 에너지’를 가진 특이물질(exotic matter)이 나와요. 정확 말하면 미소공간에서의 카시미르 효과를 이용해 끌어내는 거죠. 그리고 특이물질만 있다면 의도대로 공간을 뒤틀 수가 있어요.

    그렇게 앞쪽 공간을 수축시키고 뒷쪽 공간을 늘리면 상대성 이론 따위를 어기지 않고 빛의 속도를 넘어서 이동이 가능해져요. 오래전 영화에 나오던 '워프' 실현되는 거죠. 알큐비에르는 지난 세기에 이걸 이론적으로 완성한 사람이에요."

    미후의 머리가 아득해지기 시작했다.

    "음의... 에너지라는 게..."

    "반물질로 우주에선 시간이 거꾸로 흐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 들어 있나?" 들은 적이 있을리가 없다. 미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그런 있다고만 하고 넘어거죠. 인텍은 원래 중력파 시설과 AC엔진을 우주선 규모로 소형화해서 성간탐사를 시작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결국 충분히 소형화할 없다는 깨달았죠. 그렇다고 우주선을 무작정 크게 만들 수도 없고. 그래서 시설을 모두 수용할 있는 크기의 천체에 직접 시설을 건설하고 우주선처럼 이용하기로 했어."

    "설마 달을 우주선으로 만들겠다는 건가요?"

    미후는 자기 눈이 얼마나 휘둥그레졌는지 알지도 못하고 인상을 찌푸렸.

    "물론 아니죠. 시설을 조금 소형화해서 세레스에 건설할 예정이에요. 우주선 세레스가 되는 거죠. 대신 여기선 AC 엔진으로 달의 공전속도를 조절하는 실험만 하고 있어."

    "벌써 하고 있다고요?"

    "1 전에 AC엔진으로 달의 공전속도를 시속 10센티미터 정도 가속하고 다시 늦추는 성공했어요. 항성간공간 진출을 위한 시카고파일이죠."

    1953년, 시카고에서 처음 만들어진 핵분열 원자로–시카고파일(Chicago Pile)–에서 만들어 낸 전력은 고작 0.5와트, 전구 하나를 밝히기에도 부족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도시 하나를 밝힐 전력을 생산했고, 3년 뒤엔 원자폭탄이 히로사미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다. 플루토늄 5년 이후 누구나 알고 있는 원자력 기술의 역사였.

    미후는 시카고파일이라는 이름에 불안감을 느꼈다. 정말 멈춰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소행성 하나를 우주선으로 만들어가면서까지? 달을 일부러 움직여가면서까지?"

    미후의 물음에 미셸은 마치 하찮다는 듯한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며 대답했.

    "미소공간 에너지 채굴에 성공하면 태양계 내부에선 에너지로는 이상 사업이 불가능해져요. 크로포드 양반의 말을 빌린다면, 그때부턴 에너지는 이제 복지수단에 불과하죠. 그렇다고 잠자코 있으면 누군가가 먼저 시작할 거고.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시작해서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죠."

    미셸은 관제실의 책꽂이에서 두꺼운 책을 하나 꺼내와서 보여줬다. 표지에는 '인텍 인터스텔라'라고 적혀있었다.

    "태양계 주민들만을 대상으로 사업을 하기에 미소공간 에너지는 너무 거대해요. 대신 에너지를 기반으로 태양계 밖으로 진출해 외계자원 사업을 겁니다. 거기에 문명이 있다면, 에너지와 기술을 팔고 현지 고객이나 노동력을 얻을 수도 있겠."

    미후는 현기증 때문에 몸이 비틀거릴 것만 같았다. 도대체 루나리안은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인텍이라는 회사는 이제 인류에겐 관심도 없는 걸까? 미후는 외계의 원시문명지에 인간이 만든 우주선이 착륙하는 장면을 상상했다. 어떤 일이 벌어질?

    미셸이 말을 이었다.

    "문명의 충돌로 인한 비극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는 접어 둬요. 우린 그렇게 진보해왔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 살아남기 위해선 강한 문명의 입지를 지켜야 해요. 다른 곳에서 경쟁자가 생기기 전에 손을 봐야 해요. 놓고 있다가는 문어처럼 생긴 외계인이 우릴 먼저 침략할지도 모를 일이죠. 중력파를 다루는 문명이 이미 적어도 하나는 있어요. 우리가 받고 있는 신호를 보낸 바로 그들이죠. 그들이 우릴 침략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어?"

    미후는 지아를 바라봤다. 지아는 굳은 얼굴로 관제실을 살피고 있었다. 아마 비상정지를 위한 열쇠구멍을 찾고 있으리라.

    "아무리 태양계를 벗어나도... 아무리 빛의 속도 이상으로 달려도, 외계행성까지 가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나요? 항성간공간이 만만한 공간도 아니고."

    미후는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며 우주여행의 어려움을 그려봤다. 자원부족, 방사선, 충돌, 우주선 고장, 정신붕괴, 내란....

    "인텍이 루나리안의 혈통을 관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항성간이동을 견딜 있는 유전자들을 키워내기 위해서예요."

    "그렇다면..."

    "항성간우주선에 당신 같은 평범한 인간이 자리는 없어요. 몸이 망가지든 정신이 망가지든, 결국 버틸 수가 없을 테니까. 아마 4세대나 5세대 루나리안들이 외계행성 개척자들이 되겠."

    이렇게 종분화가 일어나는 건가? 미후는 자기가 너무 앞선 생각을 하는 아니라고 믿었다이미 에우로파나 타이탄 개척시설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다른 점이라면, 에우 로피언이나 타이타니즈는 지구인들에게 차별을 당했지만, 이젠 지구인이 루나리안들에게 차별당 할 차례라는 것이었다.

    조용히 방을 둘러보던 지아가 미후의 손목 옷깃을 살며시 당겼다. 그리고 손등에 손가락으로 화살표를 하나 그렸다. 미셸이 '인텍 인터스텔라' 사업계획서를 원래 위치에 돌려놓는 사이, 미후는 화살표가 향했던 곳을 살폈다.

    가운데 벽과 오른쪽 사이에 빨갛고 투명한 커버가 덮인 열쇠구멍이 하나 있었다. 구멍의 모양과 크기를 보아하니 크로포드가 열쇠를 꽂을 위치가 분명했다. 하지만 열쇠구멍을 덮은 커버 아래에는 번호판이 달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중요한 시설을 멈추는데 열쇠만 박아 넣는다고 가능할 리가 없었다. 크로포드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열쇠만 넘겨준 ?

    미셸이 다시 사람 앞으로 왔다. 그리고 가까이 있던 오퍼레이터에게 말했.

    "가운데 화면에 시설 전경을 비춰봐요."

    오퍼레이터가 손가락을 움직이자 가운데 벽의 화면이 둘로 나뉘었다. 왼쪽에는 중력파 시설을 월면에서 바라본 모습이, 오른쪽에는 상공에서 바라본 모습이 비춰졌.

    중력파 시설은 미후의 생각보다 거대했다. 달은 지평선이 지구보다 가깝기 때문에 사물이 더 크게 보인다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런 착시로 설명할 있는 수준이 아니었.

    시설 중앙에는 지하 30킬로미터까지 이어지는 터널이 시커먼 입을 벌리고 있었다. 화면엔 보이지 않았지만, 터널 아래에는 반경 1700킬로미터의 원형입자가속기 개가 60도로 교차하며 묻혀 있었다. 달을 둘러싼, 태양계에서 가장 거대한 가속기였다.

    "가속기 하나는 미소공간을 안정화하기 위한 거고, 다른 하나는 반물질을 보존하기 위한 페닝 트랩이에요. 마지막 하나는 AC엔진의 일부로, 조금 전에 말한 특이물질을 다루는 시설이."

    터널 입구 바로 위에는 3킬로미터 높이의 거대한 탑이 솟아올라 있었.

    " 기둥의 역할은 뭐죠?"

    미후가 물었다. 미셸은 웃으며 대답했다.

    "셀레네를 겁탈하는 겁니다."





CHAPTER FIVE  - 그물망


12.

    중력파 시설의 시험가동이 다가오자, 미셸은 미후와 지아를 다시 관제실로 이끌었다. 그동안 시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기자 흉내를 내기는 했지만, 그저 명목상의 업무에 불과했.

    두 사람이 노리고 있는 관제실 구석의 열쇠구멍은 여전히 빨간 덮개에 보호되고 있었.

    "저기 솟아오른 피스톤 타워는 선형가속기의 일종이에요. 지하 가속기에서 전자를 광속의 99.9995%까지 가속하면, 거기에 역시 가속된 양전자를 수직으로 쏘는 거죠."

    지난번과 달리 미셸의 이번 설명은 평범했다. 하지만 미후는 그 날 이후 여전히 피스톤 타워와 그 아래의 터널이 거대한 생식기 쌍처럼 보였.

    " 피스톤 타워 안에는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것보다 수십 많은 양전자, 그러니까 전자의 반입자가 채워지고 있어요. 다른 회사가 우릴 따라올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죠. 우린 양전자를 포함한 대량의 반물질을 만들고 상당 시간 보존할 있거든요. 그걸 수직으로 쏴서 전자를 때리는 것도 우리 회사의 기술이고.

    왜 수직으로 쏘는지, 반물질을 만들고 보존하는 그렇게 대단한 일인지, 미후는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아니니까. 열쇠구멍의 빨간 덮개는 어떻게 열어야 까?

    "방출하는 양전자의 양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미소공간이 불안정해지면서 특이점이 생겨요. 거기에 쏟아 넣는 반물질의 양을 적절히 조절하면 미소공간에서 우리가 원하는 중력파 신호가 만들어지죠. 그리고 그와 동시에 미소공간 속에 숨어있던 반물질들도 쏟아져 나와요. 방출된 반물질들은 패닝 트렙으로 보내고, AC 엔진의 가속기는 특이물질을 축적하면서 음의 에너지를 흡수해요.

    계산에 따르면 10분만 운영해도 달을 이끌고 태양계를 벗어날 만큼의 에너지원을 얻을 있어요."

    미셸이 눈짓으로 지시하자 화면 위에 전체 시설의 개략도가 나타났다. 화살표 개가 위를 움직이면서 시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줬다.

    "그렇게 하고 나면 특이점은 며칠 동안 이어질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요. 특이점이 사라지고 나면, 같은 일을 반복하는 거죠. 번이라도 성공하면, 반물질과 에너지 모두 넘쳐나니까 얼마든지 가능하죠."

    "혹시나 예상과 다른 일이 일어나거나... 사고가 생기면 어떻게 하죠? 그렇게 에너지를 다루는 일인데..."

    미후가 물었다.

    " 시설은 십수 동안 수천 명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이 뛰어들어 설계하고 만든 겁니다. 생각할 있는 모든 경우의 수가 반영되어 있어요. 분명한 근거 없이 사고를 말하는 실례."

    미셸의 말은 매우 정중했다. 하지만 말을 들은 지아가 미간을 찌푸리는 것을 미후는 놓치지 않았다. 비서들이란 언제나 예상외의 상황을 고려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일까, 미후는 생각했다.

    미셸이 말을 이어나갔다.

    "굳이 멈춰야 한다면 지금이 기회죠. 가속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멈출 없으니까요.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면 피스톤 타워를 쓰러뜨려서 특이점을 만들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그랬다간 타워 내부에 있는 반물질이 주변 물질과 반응하면서 근방 수백 킬로미터는 완전히 증발해버릴 겁니다.

    유일하게 준비된 비상정지 기능이 바로 피스톤 타워를 지지하는 기둥을 폭파하는 거예요. 현장에 있는 우리가 불타는 대신, 달의 다른 부분들을 지키는 ."

    미셸이 미후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사고의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자폭할 있나요? 사고가 얼마나 확실하면 자폭 스위치를 누르겠어요?"

    미후는 대답을 없었다. 그저 생각했다. 크로포드 개새.

    "이제 곧 가동을 시작합니다."

    미셸이 말했다. 오퍼레이터들의 손발이 금세 분주해졌다. 가운데 벽의 중앙에 거꾸로 흘러가는 시계가 표시되었다. 숫자는 30초에서부터 조금씩 줄어들었다. 미셸이 다시 입을 열었.

    "앞으로 25초 뒤면 가속기가 작동하기 시작하고 피스톤 타워에 반물질을 쌓기 시작할 겁니다. 거기서 30분쯤 지나면...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 우린 신의 힘을 손에 넣게 되겠."

    루나리안이란 놈들의 묘사는 항상 따위일까. 미후는 판도라의 상자 비유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12.

    화장실에 있는 작은 상황판에 피스톤 타워에 반물질이 얼마나 채워졌는지 그림으로 나타났다. 미후는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반물질이 채워지고 있다는 것에 잠시 주목했지만, 다시 크로포드와의 전화 통화로 관심을 옮겼다.

    「...거짓말이야. 비상정지는 그렇게 작동하는 아니니까.」

    전화기에서 나오는 크로포드의 목소리가 좁은 화장실 속에 울려 퍼졌.

    「그렇게 움직인다면 대체 누가 현장에서 비상정지를 하겠나? 루나리안 놈이 자네를 떠본 거야. 거만한 새끼들.」

    "그래도 불안하네요. 그냥 일개 홍보부 직원이었는데, 지금은 무슨 스파이도 아니..." 미후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업무 외' 임무에 대한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이제야 조금씩 실이 보이기 시작했고, 현실은 미후를 이미 압도하고 있었. 초가 지난 , 크로포드가 말했다.

    「...일개 직원이었기 때문에 자네가 필요했던 거야.」 

    미후의 자존심에 살짝 금이 갔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면 루나리안 놈들이 오히려 자넬 경계했을 거야. 그렇게 자네를 가지고 노는 듯한 태도 자체가 좋은 신호야.」

    "크로포드 씨, 그런데 지금 어디 있는 거죠?"

    다시 후.

    「자넨 거기 일에나 신경쓰도록.」

    "대답이 돌아오는데 7초 이상이 걸려요. 혹시 지구에 있는 건가요?"

    7초가 지났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지구에 있다면... L2 관제실에서 비상정지 열쇠를 어떻게 돌리려는 거죠?"

    7 후.

    「충분히 준비를 해놓았으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그리고... 관제실엔 오퍼레이터들도 있고, 게다가 비밀번호가 걸린 열쇠덮개까지 있는데, 여기서 어떻게 열쇠를 꽂고 돌리라는 거죠? 불가능해요."

    10 후.

    「그 부분은 지아가 알아서 거야.

    지아가? 지아에게 나도 모르는 일을 건가? 지아는 내게 그걸 말하지도 않았고? 미후의 마음 속에 지아에 대한 배신감이 슬며시 싹텄다. 크로포드야 원래 개새끼였고. 혹시 크로포드의 진짜 장기말은 지아였던 걸까?

    미후는 불안감을 떨치기 위해, 앞으로 일어날 것이라 예상할 있는 하나를 떠올려 봤다. 그물망이 움직인다. 근데 진짜 움직일까?

    "그런데 그... 그물망이라는 것들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으면 어쩌죠? 그래도 비상정지를 해야 하나요?"

    7 후.

    「내가 그들을 포착할 거야. 자넨 무조건 정지만 시키면 돼.」

    "정말 그물망이란 있기는 건가요...?"

    12 후.

    「이제 그만 가봐야 겠네.」

    전화는 끊어졌고, 화장실을 나오는 미후의 얼굴은 변기물을 마신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도 당혹감에 쓸려내려갔다.

    관제실 구석, 열쇠구멍이 있는 곳에서 지아가 권총으로 미셸을 위협하고 있었고, 오퍼레이터 두 명은 양손이 속박된 바닥에 앉아 있었.

    미후는 헬멧을 벗고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남은 명의 오퍼레이터를 알아볼 있었. 그는 중력파수신해석과의 유민이었다.

 



    14.   

    유민이 컴퓨터에서 물러나며 오른팔을 들어 올리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아는 유민의 손가락을 확인하고는 총구로 미셸의 등을 밀며 말했.

    "관제실로 향하는 모든 통로와 모듈을 폐쇄했어요. 적어도 30분 동안 당신을 구해줄 사람은 없어요."

    미셸 역시 유민의 행동을 슬쩍 보고는 말했다.

    "유민 씨, 실망이야. 당신 재능을 보고 퍼슨으로 고른 나였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열쇠덮개나 열어. 계속 버티면 발목부터 관절을 하나씩 쏴버릴 ."

    완전히 달라진 지아의 말투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미후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왜 유민이 여기에 있는지, 소심한 비서였던 지아는 어쩌다 총으로 미셸을 위협하고 있는지, 미후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미셸이 말했다.

    "여기 벽은 얇아. 허투로 총을 쏴서 벽에 구멍이라도 뚤리면 죽을 ."

    지아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며 말했다.

    "...이러나 저러나 죽는 마찬가지야."

    미셸은 한심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말했.

    "이걸 지금 정지하면 우리도 날아가고 시설도 날아가. 어차피 다시 건설되겠지만, 폐허 속에서 이 시설을 다시 만들고 충분한 반물질을 누적하는 데는 년이 걸릴지 모르고. 그동안 에너지 부족 때문에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워질 건데..."

    "나도 알아. 하지만 이걸 그대로 두면 위험해 질거."

    더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 미후가 물었다.

    "지아 씨, 지금 무슨 말하는 거예요?"

    미셸이 지아를 대신해 대답했다.

    "이 사람들이 그물망이라는 거야. 설마 크로포드와 손을 잡을 줄은 몰랐는데. 꼴을 보니 당신은 몰랐나 보네. 사람을 이용할 아는 크로포드답."

    지아가 총구를 고정한 고개를 살짝 돌리고 말했.

    "유민 씨, 미후 씨에게서 열쇠를 받아와요 미후 씨, 미안해요. 원래 당신을 여기서 내보낸 뒤에 움직일 예정이었는데... 피스톤 타워에 반물질이 차오르는 예상보다 빨랐어."

    지아의 말에 유민이 미후를 향해 다가왔다. 미후는 유민을 향해 경계가 가득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지금 상황이 이해되기 전까지는 열쇠를 주지 않을 거예요."

    "미소공간 에너지는 우리가 사용해서는 안되는 거였어요."

    유민이 천천히 발짝 다가오며 말했다.

    "미후 씨, 지난 번에 제가 설명했죠. 중력파 신호에 담긴 좌표에 대해. 아무것도 없는 간을 가리키고 있다고."

    미후는 유민이 다가올 때마다 조금씩 뒷걸음질 쳤다. 유민이 계속 말했.

    "이미 알고 있겠지만, 152번 좌표가 최근에 추가되었죠. 역시 그 곳도 곳이었어요. 적어도 지금은. 그런데 좌표에서 21년 전에 특이 감마선 폭발이 있었어. "

    미셸도 흥미가 생긴 유민을 향해 돌아섰다. 지아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총구를 미셸의 이마로 향했다.

    "감마선 폭발 자체는 하루에도 수백 개씩 관측돼서 특이한 아니에요. 그런데 보통은 외부은하에서나 있는 건데 152번 좌표는 우리 은하 내부에요. 게다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감마선 폭발은 길어야 시간 정도 이어지고 약한 잔광이 이어져요. 하지만 21년 전에 관측된 감마선 폭발은 크고 작은 섬광이 며칠 간격으로 이어졌고 마지막에야 절정에 이르렀어요, 지금까지 적 없는 종류였어요."

    "전 과학 수업 들으러 아니에요. 핵심만 말해."

    미후가 말했다. 유민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말을 이었.

    "모든 핵심이에요. 이걸 알게 이후, 남은 151개 좌표를 가지고 과거 150년 동안의 연구 자료를 뒤졌더니, 그 중 뒤에서부터 31개의 좌표에서 특이 감마선 폭발이 있었던 게 드러났어요. 아마 앞의 120개에서도 과거에 같은 폭발이 있었겠죠. 그리고 중력파 수신이 가능해지고 지난 20년 동안..., 152번을 포함해 마지막 3개 좌표에서 감마선 폭발이 시작된 날과 정확히 같은 날에 지난번에 말했던 '중력파 단말마'가 나왔어요. 너무 순간적인 신호라서 자세한 없었."

    미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34년 전, 152번 좌표에서 태양계를 닮은 행성계가 있을 가능성이 발표되었어요. 직후에 플루토늄 사고가 터져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뒤에 감마선 폭발과 중력파 단말마가 있었고, 알다시피 이제 거기엔 아무것도 없어."

    유민은 미후의 상상력이 결론을 내리기 전에 먼저 해답을 제시했.

    "지금 우리가 수신하고 있는 중력파 신호는, 그게 누가 보낸 것이든, 우리에게 경고를 하고 있는 거에요. 과거에 우리처럼 중력파와 미소공간 에너지를 다루려다 감마선 폭발과 함께 사라진 문명들의 위치를 보내고 있는 거라고요.

    전자와 양전자, 물질과 반물질이 반응하며 사라질 감마선이 생겨요. 결국, 미소공간 속에서 쏟아지는 반물질이 엄청난 감마선 폭발을 일으킬 있다는 거예요. 플루토늄 5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체가 초토화될 있고, 그땐 지구도 위험해질 거예."

    어느새 유민은 지아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미후 씨, 미소공간 에너지는 우리가 다룰 있는 에너지가 아니에요. 미소공간이 폭주하기 시작하면, 우리도 152번 좌표에 있었던 문명처럼 사라질 거에."

    미후는 유민을 바라보며 속옷주머니 속에 숨겨둔 열쇠의 감각을 다시금 확인했다. 유민이 강제로 빼앗으려고 해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성공했을지도 모르잖아요. 어떻게 실패를 장담하죠?"

    미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유민이 물었다.

    "페르미의 역설, 알아요?"

    모른다. 미후는 고개를 저었다. 유민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우주에 수많은 별이 있고 거기에 역시 수많은 행성이 있다면, 역시 외계문명도 없이 많을 텐데, 아직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가, 하는 거예요. 항성간이동이야 쉽지 않아도, 전파를 이용한 통신은 매우 원시적인 기술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수신하지 못했죠. 도대체 왜?

    그러다가 중력파 통신이 나왔어요. 방향과 주파수를 맞춰줘야 하는 전파와 달리, 중력파는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고, 게다가 웬만한 물질은 그대로 투과해버려요. 기술적 장벽만 뛰어넘는다 면, 광대한 우주에서 통신하기에 매우 적합한 기술이죠. 우주적 소통을 노린다면 자연스럽게 중력파 통신에 손을 수밖에 없어요."

    유민이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이었다.

    "...하지만, 중력파 통신을 위해 미소공간 기술을 개발하면 자연스럽게 엄청난 에너지를 손에 넣어요. 미소공간 기술이 사실은 문명의 자멸로 이끄는... 일종의 여과기라는 거에요. 페르미의 역설이 존재하는 이유는 바로 우주의 침묵을 깨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여과기를 아무도 통과하지 못했기 때문이에요. 그냥 통과하지 못했다는 아니라, 그걸 시도한 문명들은 모두 폭발 속으로 사라졌어요. 오랜 과거의 어느 존재만이, 그나마 반복적인 경고 신호를 발신할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놓았어요. 지금 우리가 수신하고 있는 중력파 신호가 바로 그거."

    "...그물망이라는 이름이 거기서 거군. 문명의 여과기라니."

    미셸이 끼어들자 유민이 잠시 말을 멈췄다. 미셸은 계속 말했.

    "당신이 말하는 그물망..., 위대한 여과기 타령 때문에 지금 인류의 진짜 존속이 걸린 일을 훼방 놓겠다니, 제정신이 아니야. 정말 미친..."

     미후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아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미셸의 발목을 쏴버렸기 때문이었다. 미셸이 불쾌한 비명을 쏟았다.

    "설명 끝났으니까, 이제 얼른 열쇠덮개를 열어. 다음엔 무릎을 거야. 유민 씨, !" 지아의 말에 유민이 미후의 어깨에 손을 내밀었다. 미후는 손을 내치며 말했.

    "...제가 직접 하죠. 원래 제가 맡은 일이었으니까."

    미후는 고작 열쇠주머니 취급을 받고 있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불안감마저 지워버릴 불쾌함이었다. 미후는 지아와 미셸을 향해 다가갔다. 유민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바닥 위로 기다랗게 흘러내린 미셸의 피를 건너 열쇠구멍 앞에 도달한 미후가 물었.

    "...L2 스테이션에선 누가 열쇠를 돌리죠?"

    "열쇠는 하나면 충분해요."

    지아의 대답에 미후가 뒤돌아봤다.

    "크로포드는 그저 당신을 안심시키려고 자기도 열쇠를 돌리겠다고 이야기 했을 뿐이에요. 책임을 분산시키면 좀더 쉽게 설득될 거니까. 양반은 지금쯤 지구로 도망가고 없을 거에요. 비상 정지로 피스톤 타워가 무너지면 L2 스테이션까지 폭발의 여파가 도달할 있으니."

    그래서, 결국 크로포드는 거짓말을 했다는 거군. 미후는 다시 속으로 크로포드 개새끼를 외쳤다.

    미후가 상상 속에서 크로포드를 정도 죽였을 즈음, 미셸의 팔이 열쇠커버의 번호판 위로 올라갔다. 피를 많이 흘렸기에 미셸의 손가락은 달의 모래 만큼이나 창백했.

    "이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미셸이 숫자를 하나씩 누르며 말했다.

    "관제실엔 말이야... 화재가 발생했을 때... 당연하게도... 불을 끄는 방법이 있어. 그런데... 그게 사실 관제실이 누군가에게 점령당했을 때에도... 있게 돼있거든. 아이디어였."

    마지막 숫자를 누르자 관제실의 모든 조명이 시뻘겋게 변했.

    「관제실 차폐를 강제해제합니다.」

    짧은 방송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미후가 뜻을 이해하기도 전에 가운데 벽이 두개로 갈라지고, 눈부신 달표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공으로 내달리는 초속 수십 미터의 바람이 미셸과 지아, 미후, 유민, 그리고 오퍼레이터들을 순식간에 관제실 바깥의 달 표면 위로 날려버렸다. 달의 중력은 그들을 가까이 잡아두기에는 너무 약했다.

 

 

 

CHAPTER SIX - 파수병

 

    15.

    미후는 모래 위에 떨어지길 기도하며 몸을 둥글게 말고 양손으로 눈과 귀를 막았다. 몸에서 공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최대한 숨을 참았다.

    1기압 정도의 차이로는 몸을 찢을 없다. 침착하면 살아남을 있다. 미후는 문장을 끊임없이 머리속으로 되뇌었다.

    달의 중력이 약하다고는 해도, 추락의 충격은 결코 만만하지 않았다. 비교적 부드러운 곳에 떨어진 미후의 몸은 수십 바퀴 구른 뒤에야 겨우 멈췄.

    어딘가 뼈가 부러졌을 것 같았지만,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미후는 당장 옷에 부착되어 있던 경량우주복을 뜯어냈다. 눈을 수는 없었지만, 아직까진 손끝의 감각으로도 충분했다. 경량우주복의 스위치를 누르자 팔다리가 달린 침낭처럼 생긴 새하얀 비닐튜브가 펼쳐졌다.

    미후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튜브 안으로 들어갔다. 안구의 수분이 증발하면서 시야가 조금씩 좁아지기 시작하자 조바심이 들었다. 하지만 서두르면 .

    튜브 안으로 팔다리도 모두 집어넣고 다시 한번 스위치를 누르자 우주복이 밀폐되고 압축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미후는 정신없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몸을 확인했.

    찢어진 옷사이로 팔과 다리의 동상과 화상이 보였다. 전혀 다른 종류의 상처가 바로 옆에 붙어있는 광경은 기묘했다. 손가락 끝이 동상으로 찌릿했지만 참을 만했다. 다행히 외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눈과 귀가 아팠지만, 문제없이 보고 들을 있었다. 옷이 군데 찢어졌고, 속옷이 조금 드러났다. 속옷주머니에 들어있던 열쇠는 발밑에 떨어져 있었.

    우주복의 수축 스위치를 누르자 우주복이 줄어들며 뚱뚱한 피에로 모양이 되었다. 팔다리를 움직이며 겨우 걸을 있는 수준이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손가락 부분 역시 공기로 부풀어 올라 매우 부실했지만, 떨어진 열쇠를 집어 올리기에는 충분했다.

    경량우주복이 견딜 있는 시간은 10분 정도뿐이다. 10분이 지나기 전에 관제실에 도착해 구출을 기다려야 한다. 지아가 30분 동안은 아무도 오지 못할 거라고 언제였지? 부디 20분 이상 지났기를.

    미후는 관제실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관제실의 방향을 확인하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때,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무언가가 눈에 보였.

    경량우주복을 입은 쓰러진 유민이었다. 우주복은 처참하게 찢어져 있었다. 추락하기 전에 우주복을 입으려고 틀림없었다. 자기 나름대로 시간을 아끼고 살아남을 가능성을 높이려고 했겠지. 하지만 경량우주복은 어디까지나 경량이다. 쉽게 찢어지기 때문에 충격이 오기 전에 입어서는 된다. 미후는 유민의 뛰어난 머리도 도움이 되지 않은 사고에서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에 조금 비겁한 안도감을 느꼈다.

    3분 정도 걷자 관제실로 돌아올 있었다. 내부의 시설들은 여전히 멀쩡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붉은 조명은 사라지고, 오퍼레이터들이 쓰던 개인용 컴퓨터 화면이 새파랗게 빛났.

    하지만 열쇠덮개는 떨어져 나가고 없었다. 열쇠구멍은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었.

    「열쇠를 꽂고 돌려요.」

    우주복 속의 무전기에서 형편없는 음질로 지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후가 고개를 들고 주변을 살피자, 한참 떨어진 곳에서 경량우주복 하나가 관제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지아가 분명했다. 도착하는데 5분은 거뜬히 걸릴 같았다.

    「미후 씨, 이제 특이점을 만들기까지 5분도 남지 않았어. 지금 당장 가동을 멈춰야 해.」

    "...왜 가동을 시작하기 전에 멈추지 않은 거죠?"

    미후가 물었다. 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봐요. 비상정지를 하면 피스톤 타워가 무너지면서... 근방이 정말 증발해버리나요?"

    「...맞아. L2 스테이션도 안전하진 못할 거야.」

    크로포드 개새끼, 개새끼, 개새끼.

    "애초에 죽을 생각이었던 거군요. 일부러 반물질이 쌓이길 기다렸다가, 비상정지로 시설을 통째로 날려버릴 생각이었군요."

    미후는 허탈함에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열쇠구멍 앞으로 .

    "도대체 끌어들인 거예요? 그냥 홍보부 직원이었는데... 배신자를 찾으라던 크로포드가 정작 배신자고, 당신을 비서로 만든 것도, 유민을 만나게 것도 위했던 ?"

    「...크로포드가 당신을 고른 거야. 그는 책임을 피하고 싶었거든. 내가 그를 끌어들였는데... 그는 자신이 우릴 막으려 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당신을 이용한 .

    당신이 유민을 조사하게 하거나, 자신도 열쇠를 돌리겠다고 모두, 당신이 믿고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한 장기말로 미후 씨를 고른 거야. 열쇠 운반책이자 보험으로. 그게 그가 우릴 도와주는 조건이었어. 약속해. 정말, 미후 당신을 끌어들일 생각이 없었어.」

    "그물망은 당신과 유민, 그리고... 크로포드 뿐인가요?"

    「아니. 물론 있어. 대부분은 보안부에 숨어 있지만.... 간부 중엔 크로포드 뿐이야.」

    "당신은 크로포드와 무슨 관계죠?"

    「아무 관계도 아니야. 회사 내부 정보가 필요했고 그는 부사장직을 지키기 위한 보험이 필요했기에, 잠시 손을 잡은 거야. 그 뿐이야.」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미후 씨, 그러니까 제발, 열쇠를 꽂고 돌려. 여과기가 우릴 막기 전에.... 아들을 위해서라도. 아들이 있는 L1 콜로니는 안전할 거니까...」

    역시 상서의 비서들은 남의 가족사에 관심을 못버리는구나. 농담이라도 마냥, 미후의 입에서 웃음이 살짝 흘러나왔다.

    미후는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았다.

    멀리서 걸어오는 지아를 바라봤다. 부풀어 오른 경량우주복을 입은 뒤뚱뒤뚱 걸어오는 모습이 우스웠다. 반대편에 있는 지구로 도망간 크로포드의 근엄한 모습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똑똑한 척하다가 죽어버린 유민의 모습도 하찮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완벽하게 농락당한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엇 하나, 자기 뜻 대로 없었다. 크로포드의 미끼에 걸리고, 지아의 거짓에 속고, 유민의 연기에 넘어갔다. 미셸? 그런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미후는 조금 이기적이 되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크로포드에게 집을 요구했던 것처럼. 미후가 유일하게 자기주장을 했을 때처럼.

    그러고 보니 전남편은 인텍 주피터 가스의 임원이었다. 생산이 비용을 따라가지 못하는데 수요마저 줄어들어 어려워하는 곳이었지만, 전남편은 회사가 돌아가기만 하면 돈이 들어오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인텍 주피터 가스는 목성계와 토성계의 현지 주민들을 위해 에너지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멈출 없었다. 적어도 미소공간 에너지가 사용 가능해지기 전까지.

    주피터 가스가 무너지면 전남편도 무너질 것이다. 그는 주피터 가스만을 바라보면서 인맥을 타고 올라간 사람이었으니까. 실제로 아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니.

    미후는 지민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위대한 여과기. 그레이트 필터. 우스웠다.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만든 시설이 그렇게 쉽게 실패할 리가 .

    지난 세기에 입자가속기에서 발생한 미니블랙홀이 지구를 삼킬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걱정에 반대시위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미니블랙홀은 헛소리였고, 과학은 진보했다.

    그런데 위대한 여과기 따위의 멍청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 때문에 자칫 급진파 테러리스트가 될 뻔했다.

    지아가 10미터 앞까지 다가왔다. 미후는 열쇠를 다시 뽑았다. 지아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미후는 있는 힘껏 열쇠를 바깥으로 던졌다. 열쇠가 느리게 포물선을 그리며 곳의 달표면에 떨어졌다. 5분 안에 왕복할 있는 곳이 아니었다. 경량우주복의 유지시간은 이제 길어야 4분 정도. 피스톤 타워가 터널 속으로 반물질을 쏘고 특이점이 만들어지기까지는 2분도 남지 않았다. 이제 이걸 막을 물리적 방법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미래는 정해졌고, 미후는 오늘 일이 제대로 알려져 유명해지고, 남편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고, 아들의 양육권도 되찾는 미래를 그렸.

    미후와 2미터 떨어진 곳에서 지아가 힘없이 주저 앉았다. 무전기 너머로 지아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불편한 달의 중력 속에서 나름 힘껏 뛰어온 것이었다.

    「지아 씨..., 플루토늄 5년 사건이 생긴 알아?」

    지아의 뜬금없는 질문에 미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

    「사람들은 플루토늄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플루토늄을 다룰 안다고. 거기서 안전하게 에너지만 뽑고 저장할 있다고.」

    지아가 말하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근데... 그게 아니었어. 위험한 착각이었지. 플루토늄은 우리가 아는... 가장 복잡한... 물질이었으니까. 아무도 저장소에 있는... 플루토늄-갈륨 합금이 안정적인 이유를 몰랐으니까. 그저 해보니까 굴러다니는 돌만큼 안정적이라서 썼을 뿐이니까. 아무도... 합금이 만들어지고 나면... 150년 뒤에... 갑자기 핵반응을 일으킬 거라고는 예상도 했으니까.」

    이제 말보다 숨소리가 많아졌다.

    「우린 저... 미소공간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지아의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달표면의 잿빛 먼지가 둥그렇게 솟아올랐다. 달려온 탓에 지아의 우주복은 유지기능이 평소보다 빨리 한계에 이른 것이었다. 지아의 숨소리가 조금씩 약해졌다. 그리고 멎었다.

    멀리서 월면차를 타고 관제실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보이자 미후는 지아에게서 뒷걸음질쳤다. 우주복의 산소가 조금씩 줄어들자 미후의 체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후는 조금 전까지 지민이 앉아있던 의자 위에 힘없이 엉덩이를 깔았다.

    컴퓨터의 화면이 미후의 눈에 들어왔다. 피스톤 타워가 반물질을 쏘기까지 15초 밖에 남지 않았다면서, 중력파에 담을 메시지 결정을 요구하고 있었다. 화면 구석에 가지 준비된 선택지가 있었지만, 미후가 이해할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

    미후는 모든 선택지에서 체크마크를 제거했다. 그리고 키보드 위로 섬세하지 못한 우주복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미후는 문장을 쓰고는 입력확인과 완료를 눌렀.

    유민이 개발한 복잡한 이름의 어떤 방법으로 메시지가 컴파일되고, 반물질 주사 패턴에 입력되고 있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월면차가 관제실 앞에 도착하고 구조대–혹은 경비대–가 미후의 몸을 붙잡더니 여기저기를 뒤졌다. 상처를 확인하려는 걸까. 하지만 미후는 그들의 표정 속에서 곤혹스러움을 읽을 있었 다.

    대원 명이 미후에게 뭐라고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미후는 무전기가 고장났다고 생각했다가, 사실은 자기가 이산화탄소에 중독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각이 무뎌지고 잠이 쏟아졌다.

    지평선 위로 솟아있던 피스톤 타워가 새하얗게 빛났다. 미후는 타워가 터널 속으로 반물질을 쏘았다는 것을 있었다. 지금까지 어떤 것보다도 밝은 섬광이 미후의 눈을 잠시동안 멀게 했다. 덕분에 미후는 조금전 소리치던 대원이 그녀의 우주복을 칼로 찢으려고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강력한 월진이 관제실을 덮쳤다. 전체가 진동에 휩싸였다. 미후는 묘한 쾌감을 느꼈.

 



16.

    플로리다의 별장으로 찾아온 인텍 법무팀의 변호사에게 크로포드는 서류뭉치를 건네줬다. 자신은 중력파 시설 관제실에서 발생한 테러를 예상했고 그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증거가 담긴 자료였다. 윗장 자료에서는 미후의 이름도 간간이 눈에 띄었.

    크로포드의 예상대로라면, 며칠 뒤면 전세계에서 중력파 시설과 미소공간 에너지 채굴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날 것이다. 플루토늄 5년 심어진 기술에 대한 공포는 사람들의 뇌리 깊숙 한 곳에 박혀 있으니까.

    과거 30년 동안, 인텍 루나와 주피터 가스를 이끌며 인류를 에너지 위기에서 구한 다름 아닌 크로포드였다. 그런데 달에서 땅이나 파며 살아야 루나리안 놈들이 가속기를 만들더니 헬륨3와 메탄 자원을 무시하기 시작했다. 크로포드는 용납할 없었다. 멍청한 사장이 루나리안과 결혼하는 바람에 그동안 동조하는 척하며 잠자코 있었지만, 이제 한계였.

    크로포드는 변호사를 내보낸 뒤, 포도주가 잔을 들고 창가의 소파에 앉아 바깥을 바라봤다. 해가 진지 얼마 되지 않아 연보랏빛으로 물든 하늘 위로 초승달이 있었.

    원래는 미후나 지아가 비상정지를 실행하는 걸로 주변시설과 증인들, 그러니까 그곳에 있는 모두를 깨끗하게 날려버릴 생각이었다. 지아의 실패와 미셸의 행동 모두 예상 외였지만, 크로포드는 재빠르게 움직였다.

    크로포드의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그가 매수한 경비대원들이 산소가 고갈된 우주복 속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미후에게서 열쇠를 빼앗아 비상정지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아와 유민의 지문을 찍어둔 폭발물을 설치하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그곳은 증발하기 때문에 지문 찍어두는 무의미한 짓이었지만, 비상정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경비대원들을 원활히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럴듯한 가짜 임무를 섞어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 뒷면에서 일어나고 있을 일에 대한 상상을 안주로 삼으며, 크로포드는 포도주를 모금 들이켰다.

    다시 성장하게 인텍 루나와 주피터 가스를 어떻게 이끌어나갈까 고민할 즈음, 크로포드는 하늘에 있는 것이 더이상 초승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

    거기 있는 것은 거대한 보름달이었다. 전체가 새파랗게 빛나고 있었.

    하지만 크로포드에게 그걸 이해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3초 남짓이 지난 후, 크로포드의 눈이 녹아내렸다.

 

 


17.

    달이 빛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달빛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그걸 깨닫기도 전에, 쏟아지는 감마선이 달을 바라보던 지구의 절반을 불태웠다.

    지구의 남은 절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망가기 위해 아우성쳤다. 하지만 한나절이 지나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이 달이 있던 하늘을 향했을 때, 특이점에서 쏟아진 반물질들이 지구에 도달 했다. 60해() 톤의 행성은 거대한 섬광과 함께 에너지로 바뀌면서 감마선을 내뿜었.

    반물질들은 경로상에 있는 모든 물질을 순수한 에너지로 치환하면서 행성간공간으로 뻗어 나갔다.

    특이점은 5일 동안 이어졌고, 그동안 태양계로 쏟아진 반물질의 양은 태양의 질량을 넘어섰다. 초속 수천 킬로미터의 속도로 뻗어 나간 반물질들은 며칠에 걸쳐 가까이 있는 행성들을 하나 둘씩 삼켰고, 그때마다 감마선 폭발이 이어졌다.

    마침내 태양의 차례가 왔다. 반물질들은 자전하는 태양의 중력이 마련해준 궤도를 따라 소용돌이를 그리며 채층를 뚫고 광구로 떨어졌다. 태양의 표면에서 새하얀 감마선의 파도가 일었다. 곧이어 태양계 역사상 가장 폭발이 일어났다.

    거대한 감마선 섬광과 함께, 태양계가 완전히 증발했다.


 


18.

    블랙홀 쌍성을 멀리서 공전하던 파수병은 새로운 신호를 포착했다. 중력파와 감마선이었다. 여러 번의 감마선 섬광이 이어지더니 마지막에는 앞선 것들보다 압도적인 세기의 섬광이 감지되었다. 파수병은 감마선 패턴을 토대로 폭발이 일어난 항성 주변에 커다란 가스행성과 자그만 암석 행성이 서너 개씩 있었을 거라 추측했다.

    중력파 속에는 지적존재가 만들어낸 것이 분명한 패턴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감마선의 양으로 미루어보아 세계는 지금까지의 다른 곳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증발하고 없을 것이고, 내용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파수병은 그렇게 판단하고 중력파 메시지를 폐기했.

    감마선이 완전히 사라지자, 파수병은 데이터베이스에 153번째 좌표를 추가했다. 그렇게 우주의 침묵을 깨려던 문명이 하나 사라졌다.

    파수병은 문득 자신을 만든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파수병도 그들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들은 내부에 대량의 반물질을 가득 채운 파수병을 만들어 블랙홀 쌍성 주변에 두며 가지의 임무를 주었다.

    파수병은 다시 묵묵히 자기 일에 집중했다. 회전하는 블랙홀에 반물질을 조금씩 흘려보내 중력파를 조절하며, 우주의 모든 방향으로 153개의 문명이 어떻게 사라졌는지에 대한 경고를 보 냈다.

    지금 남아있는 반물질이 고갈되거나 블랙홀 쌍성이 충돌하며 파수병을 집어삼키고 나면, 파수병의 임무는 끝날 것이다.

    하지만 부디 누군가가 다른 파수병을 만들어 계속해서 경고를 보낼 있기를, 파수병은 기도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그리고 다시 기도했다.

    부디 모두 침묵을 지키기를.

    우주의 위대한 침묵이 계속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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