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과 정동 <2부>
구병모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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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어렵게 구한 방독면 두 개를 차에 싣고 얼은 철책과 높은 돌담으로 둘린 공장 지구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주위에 지키고 선 군인이 없는지 한번 확인하겠다는 구실이었지만, 그보다는 버려진 땅을 배회하는 안개의 색을 조수석에 앉은 미그라에게 보여주어서 이곳의 공기가 얼마나 유독할지 상상이라도 해보라는 의도였다. 보라색과 녹색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서로의 형태 없는 몸을 휘감는 모습, 그 기이하고 불안한 결속을 차장으로 목격하고서 미그라는 몸서리치기는 했으나 결심을 바꾸지 않았다.

—부지가 얼마나 넓은지는 잘 알았어요. 아무 데나 세워주시고 방독면만 좀 빌려주시면, 그다음부터는 저 혼자 어떻게든 가겠어요. 저도 양심이 있고 당신까지 이 안개에 노출시킬 수는 없어요. 여기까지 데려와준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찬찬히 둘러보기를 포기하고 두 발로 걸어만 다니기에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넓이를, 포복해서 팔꿈치만으로 기어가겠다니 그 오기 한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얼은 그녀의 까진 팔과 쓸린 무릎에 흐를 피와 상처에 엉길 모래를 떠올려보았다. 그렇게 되기 전에 머리 말곤 방독면이 막아주지 못하는 모든 자리에 안개의 공격을 받고 그녀는 백 미터도 전진하기 전에 숨을 거둘지 몰랐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물질과학연구소의 입구라도 찾아보고요. 차로 한 바퀴 20분이면 다 도는데 뭐 하러 그런 체력 낭비를 합니까.

공장 지구를 둘러싼 철책을 한 바퀴 다 돌았을 때, 과거에는 차량이 드나들었을 입구가 나왔다. 차단기는 부러져 녹슬었고 곳곳에 철책 일부도 꺾여 누워 있었다. 얼은 안으로 들어가 안개를 달래어 부드럽게 그러나 완고하게 밀어내듯이 천천히 전진했다. 사람이 떠나간 곳에는 어떤 식으로든 생명의 흔적이 남거나 새로 생겼다. 기형적인 모습으로라도 어느 벽 틈에서 풀이 자라고, 다리 개수나 머리 크기에 있어서 어딘가 균형이 맞지 않아 보이는 동물들이 쏜살같이 달려가고, 최소한 처음 보는 벌레라도 기어 다니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안개에 가려 잘 보이지 않음을 감안하더라도, 생명의 약동이라고 할 만한 장면이 전혀 엿보이지 않았다. 부서져서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모호한 건물들, 강대국의 과학자들이 떠난 뒤 도둑들이 목숨을 걸고 타일이나 고급 건축 자재 내지는 팔 수 있는 금속을 떼어간 모양으로 어느 건물이나 지붕은 뜯어져나가고 콘크리트 사이 철골은 드러나고 도색은 반 이상 벗겨져 원형과 용도를 알기 어려운, 원한과 집념의 단말마 정도나 남아 맴돌 성싶은 유령도시였다. 버려진 땅에 당연히 전기와 수도가 공급되지 않을 테니 설령 연구소의 터와 기자재까지 남아 있다고 한들 거기서 무슨 연구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자리에 다 같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를 모으거나 기도를 하는 일 정도겠지. 사람의 몸 그 자체만 놓고 보면 전기신호도 돌고 필요한 각종 원소를 추출하거나 하다못해 기름이라도 짜낼 수 있겠지만, 사람이 모여 앉아 기를 모은다고 전기가 1와트라도 만들어지는가 말이다. 이런 데에 살아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고 얼은 혀를 차면서도 미그라의 원을 풀어주기 위해 굳게 닫힌 공장과 공장 사잇길로 계속 천천히 차를 몰아 나아갔다. 전체 부지를 한 바퀴 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대부분 반파된 건물들 가운데 무엇이 연구소인지 알 수 없었다. 훼손되거나 쓰러진 각종 이정표에서는 제지공장이나 장갑공장 같은 글자를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지만 연구소를 가리키는 어떤 표지도 눈에 띄지 않았다. 혹시 그것이 군사 기밀 시설의 일종으로 이정표 따위 애초에 없었다고 치면, 아무리 지하에 건설된 제국이라도 최소한 그리로 가는 입구 역할을 하는 건물 정도는 있을 줄 알았다. 눈에 띄게 장엄하지 않더라도 주차 초소 정도 되는 부스나 컨테이너 같은 거라도 말이다. 그런 최소한의 흔적도 남지 않고 파괴된 건 아닐까?

무르익은 불안과 초조에 얼은 자기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텅, 소리와 함께 차가 위로 솟구쳤다. 과속 방지턱 정도가 아니라 꽤 부피감이 있는 무언가를 밟고 튕겨나간 다음 차는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개 때문에 전방 바닥의 장애물이 보이지 않은 것이었다. 브레이크 아닌 액셀을 밟았다면 차체가 뒤집혔을 것이다. 얼은 만약 동물, 설마 사람이라고 해도 그건 지금 차로 치어버린 게 아니라 원래부터 시체였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다시피 하며 기어를 P에 맞추었다.

—잠깐 차 문을 열어야 하니까 당신도 이걸 써요.

얼은 방독면을 미그라에게 건네고 자기도 하나 쓴 다음, 청보랏빛 안개를 바라보며 한번 심호흡하고, 차에서 내려서자마자 그 입자가 가능한 한 차에 덜 침투하도록 빠르게 문을 닫았다. 스키드 마크가 찍힌 모래를 되밟으며 문제의 장애물이 있던 자리로 나아갔다. 다행히 시신은 아니고 애초에 생물이었던 적 없는 물체가 봉긋하면서도 넓게 솟아 있었다. 시멘트나 돌을 담은 자루를 여러 개 쌓아 무언가의 경계선을…… 보호해야 하는 것을…… 그보다는 감추거나 치워버리고 싶은 것을 나타낸 것처럼 보였다.

방독면 속에서 가쁜 호흡을 몰아쉬면서 모든 자루를 치웠을 때 얼은 맨홀 뚜껑이라기에는 너무 크고 두꺼운 철문을 발견했다. 모래먼지를 더 넓게 쓸자 드러난 계기판은 이것이 한때 컴퓨터 프로그래밍으로만 계패 가능했던 물건임을 보여주었다. 전기신호가 무용지물이 된 지금은 문끼리 서로 뒤틀려 맞지 않았고, 손잡이를 힘주어 당기자 조금씩 꿈틀거렸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랜턴을 넣어 바닥을 가늠해보니, 뛰어내려도 다칠 만한 높이는 아니었다. 예전에는 역시 전기를 이용한 에스컬레이터나 리프트가 붙어 있던 흔적이 보였다.

얼이 미그라를 업고 한 발씩 나아가는 동안 등 뒤에서 미그라는 랜턴을 든 팔을 뻗어 전방을 비추었다. 하수도 같은 곳이었다면 물살을 헤치는 걸음이 몇 배나 무거웠을 텐데 다행히 지하는 오염수로 가득 차 있지 않았고 오히려 건조한 편이었다. 랜턴 불빛에 의존하느라 확실치 않지만 짙은 회색 먼지 외에는 특별히 위험한 색을 띠는 공기도 보이지 않아서, 언제 다시 필요해질지 모르는 방독면 두 개는 일단 미그라의 반대쪽 팔에 걸린 채 달랑거리고 있었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저 믿고 뛰어내려서 다행입니다.

—당신이 먼저 내려가서 팔 벌리고 있는데 다른 방법 있나요.

미그라는 조금 전의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듯, 얼의 어깨를 감싼 한 팔에 힘을 주었다. 
연구소가 철수한 뒤 오랜 세월에 걸쳐 뭐라도 팔고자 하는 이들이 다 뜯어내고 군데군데 남은 선로의 일부에 발이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며 걷는 동안 얼은, 이대로 적당히 헤매다 아무런 흔적도 발견하지 못한 미그라가 항복 선언을 할 때쯤 데리고 돌아갈 셈이었다. 연구소의 내부 구조나 지도 같은 정보가 있었더라도, 어디가 연구실인지 어디가 화장실이며 어디가 창고인지 같은 구분이 중요하지 않은 이런 상태에서는 쓸모없었을 것이다. 사장의 해고 통지 직전 최후통첩을 들고 온 회사 동료일 뿐인데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만일 그녀가 혼자 이동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얼은 자신의 호의가 연구소 입구를 찾아주는 데까지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때 굉음이 섞인 미그라의 비명과 함께 눈앞을 비추던 랜턴 빛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얼은 자신의 머리카락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화기를 느꼈다. 얼과 미그라는 그대로 쓰러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바로 몸을 추스를 수 있는 걸로 보아 큰 상처는 아닌 듯했지만, 무릎을 털고 일어나려는 얼의 등 뒤에서 움직이면 발포한다는 나지막한 경고와 함께 총기류의 장전 소리가 들려왔다. 두 손만 머리 위로 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어느 벽감에 숨어 있다가 나왔는지 예닐곱 명은 되는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총 든 사람들까지만 보았을 적에는 정부의 박해를 피해 숨어서 앞날을 도모하는 무장단체인 줄 알았는데, 그들의 지도자라는 아펙이 평범하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백발의 남자라는 점과 그를 옹위한 사람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보자면, 기도하면서 신의 방문을 기다리는 종교 단체나 스스로 신이 되겠다는 신비주의자들의 모임 같기도 하고 어느 쪽이든 공간이동을 본격적으로 연구할 것 같지는 않았다. 샤드가 이 팀을 만났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이 지하세계에 이 같은 생활을 하는 단체가 몇이나 더 있을지 모르니 섣불리 입을 열어서는 안 된다고 얼이 판단하기도 전에, 미그라가 그들에게 먼저 물었다.

—이중에 샤드를 아시는 분은 없나요?

아펙과 그의 동료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저는 샤드에게 이곳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자 아펙이 표정을 풀고 미그라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샤드가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전 몇 번이나 그의 누이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그동안 화물차로 시 경계를 드나들며 둘러본 결과 자기가 사는 도시에는 희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어차피 같은 고생을 할 바에는 최소한 녹물이 덜 나오고 병균이 덜 끓는, 조금이나마 환경이 나은 도시에서 동생을 치료받을 수 있게 해주고 싶다는 얘기를 평소 했다는 것이다.

—그럼 샤드는 무사하다는 거지요? 지금 어디 있나요?

—우리는 모두 샤드가 완전히 존재할 거라고 당연히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아펙과 그의 일행이 또 한번 서로를 마주 보니, 뭔가 말을 맞추기로 작정하고 거짓을 들이미는 눈치인 듯싶어서 얼은 순간 긴장했다. 살아 있느냐, 다친 데는 없느냐, 이곳에 샤드가 있느냐고 묻는데 완전히 존재한다니, 그나마 완전히 존재함도 확실한 게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다니, 그들은 샤드에게 무슨 위험한 임무를 맡긴 걸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집단이 타 도시로의 이동을 꿈꾸며 무력을 갖추는 비장한 결사대 같은 건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때 물질과학연구소에서 일했던 보조연구원들을 주축으로 모이기 시작한 건 맞았고, 근무 기간에 개개인의 교육 수준과 걸맞은 역할은 주어지지 않아서, 이제 와서 남아 있는 오래된 장비로 공간 이동 연구를 시도하기에는 무리가 있음도 사실이었다. 그들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현실적인 절망과 환난 가운데 남아 있는 큰 열망과 결합하여 생겨난 결과란, 얼의 눈에는 한가로이 심신 수련을 하는 영성주의자들의 세미나에 가까워 보였다. 그들이 샤드의 행방에 앞서 유기체니, 구조니, 기관, 호흡, 조직, 은유, 몸, 정신, 확장 같은 말을 동원해가며 자신들의 목적이 얼마나 자연 근본에 부합하며 신성한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듣자니 그랬다.

—피부는 껍질일 뿐입니다. 우리 몸은 여기 있지만 우리 생각은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다른 세계로 건너갈 수 있습니다. 영혼이 자유로이 유영할 때, 사람은 몸의 구차함에 매달리지 않게 됩니다. 바이러스가 창궐하는 혹서 한가운데나 가뭄 아니면 홍수 같은 현실의 제약에도 구애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완전한 이동이 이루어지면 몸은 저절로 따라갑니다. 영혼이 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일으키고 그것을 들어 올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보편의 세상에서 정의하는 것보다 확장된 의미를 지닌 이동이며, 그때는 당신이 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거나 걸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리 중요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동의 행위란 몸이 영혼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가리키는 데에 불과하며, 몸의 불편이 존재의 경험과 양식을 규정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중심으로 하는 이 같은 공간이동 능력을 개발하여, 올바른 호흡과 명상의 힘으로 이곳 아닌 다른 곳에 우리 몸의 구조를 재배열하는 원리를 발견했습니다. 이  방식으로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해오고 있었습니다. 지금 세상에서 바이러스 감염을 차단한다며 사람의 통행을 금지하고 이동 자격을 제한하는 것과 달리 말입니다. 저 값비싸기만 하고 사람을 화물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현실의 이동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이동으로 인간은 이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오빠 샤드는 그 점을 이해하고 우리를 전적으로 믿으며 수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다리 너머의 도시로 건너갔다는 건가요?

—현재로선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없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그전까지 어떤 양자 부스나 양자 패드도 완벽하게 해내지 못했던 혁신적인 공간 이동 방식인 대신, 위험도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과학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지난세월 동안 숱하게 신규 출현하는 바이러스를 겪어왔고, 99퍼센트의 사람에게 안전한 백신을 빠르게 개발하여 이에 대응해왔지만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1퍼센트의 여지를 남겨둘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건 됐으니까 우선 미그라를 안심시켜달란 말이야! 얼은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그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 손에 총을 들고 있었으므로, 뜬구름 잡는 아펙의 가르침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이후로도 현존이니 충만, 각성, 감각, 균형 등 현 시절에는 아무래도 상관없고 귀에만 그럴듯한 말들이 아펙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그 말들을 조합 및 배열하자 이런 결론이 도출되었다. 
모여든 이들은 충분히 시간을 들여 완전한 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각오를 다진 뒤, 동료들 가운데 특별히 영감이 발달하고 훈련 성취도가 뛰어난 일곱 명을 뽑아 이동 결행의 날을 정했다. 먼저 이동에 성공한 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기반을 다지고 이후 이동하는 자들을 도우면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했다. 결행의 날까지 각자 정한 목적지에 대해 강력한 심상을 그리기에 집중하면서 날마다 다짐했다. 바로 저 다리를 건널 뿐이든, 아니면 바다 건너 다른 대륙이 되더라도 조건은 동일하다. 우리가 사는 이 도시로부터 거리가 멀어질수록 우리를 이룬 조각의 일부가 뜻대로 운반되지 않으리라는 불신에 사로잡히지 말라.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란 없을뿐더러, 우리를 이룬 조각 그 자체는 우리가 아니다. 일곱 명의 사람들 가운데 단 한 명만이 다른 대륙으로 가고자 했고 나머지 모두가 건너편 도시를 원했다. 아펙은 그런 독창적이지 못하고 협소한 범위에 그치는 마음이 오히려 한 존재가 지닌 무한한 확장의 가능성을 줄어들게 만들 것 같아 우려하면서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이동을 하지 않음을 원칙으로 하며 살아왔으므로 공간 선택에 과감하지 못함을 감안해야 했고, 각자 나름대로 뜻한  바가 있을 것인데 초를 치거나 그들의 집중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 간절함이야말로 우주의 강력한 원리를 구성하는 에너지가 되어, 그들을 어디로든 데려다 주리라 믿으며. 간구와 동시에 집착을 내려놓는다는, 어찌 보면 모순을 연료로 삼은 사람만이 진정한 이동에 성공할 것이고 지금까지의 수련 내용이란 사실상 그게 거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결행의 날, 샤드와 선발된 사람들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여섯 시간에 걸쳐 몸이 보내는 미세한 전기 신호들에 의식을 집중하고, 영혼에 접속한 감각의 분자들을 몸 구석구석까지 스며들게 하는 명상을 수행했다. 몸이 결정된 물질에 국한하지 않고 항상 어딘가로 나아가려고 하는 유기체이며, 몸 자체가 일종의 과정이고 영혼을 뻗어나가게 하는 통로라는 점에 대해 이해했다. 그리하여 의식이 에너지로 충만해진 끝에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접어든 샤드와 그 일행은, 여덟 시간째 접어들었을 때부터 한 사람씩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는 동안 연구소 전체가 진동하는 것을, 보통의 사람들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선발대의 영혼은 이미 그곳으로 이동했고, 이곳에 남은 몸의 구조가 흩어지면서 몸이 형태를 잃은 까닭에 사라진 것처럼 보인 것이다. 아펙은 이를 두고 각국에 양자 부스를 개발했던 시절, 이쪽의 정보가 삭제되는 동시에 저쪽에 복제된 정보가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보기에는 몸이 사라진 것 같지만 실제론 영혼과 함께 몸의 정보가 자신의 도착지에서 재구성된 것이며, 그 시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전기 에너지를 사용하지 않고 인간 자체에 들어 있는 에너지를 활용한다는 것이었다. 인간에게는 수치가 계량되거나 증명되지 않는 잠재력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작용한 결과물을 신비라 부르고, 신비에 의해 무한히 증폭한 에너지는 아무리 써도 없어지지 않는 거대한 핵용광로가 된다고 말이다. 이 같은 개개인의 거대 에너지가 만나 충돌하면 말하지 않고도 서로의 생각을 주고받는 일 또한 가능하며 그것을 텔레파시라 부르지만, 지금은 당면한 생존에의 위협 앞에서 모두가 이동에 집중하고 있다고.

그들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얼과 미그라에게 중요한 대목은 그다음부터였다. 여섯 명이 무사히 떠났고, 한 명은 영혼만 털어내고 껍질만 남은 양 그 자리에 눈을 감고 있었다. 다른 대륙으로 가겠다고 한 이였다. 그의 껍질은 그 자리에서 별도의 처리를 하지 않은 그대로 바싹 말라갔으며 영혼은 어디를 헤매고 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약 일주일에 걸쳐, 바깥에 정찰 나갔던 동료들이 공장 지구 안팎에서 팔 하나와 발목 하나 등 신체의 일부를 발견하고 수거해 왔다. 물질과학 연구소의 숱한 실험 과정에서도 생물과 무생물 모두 100퍼센트의 공간 이동을 했다고 보기 어려웠던 것처럼, 사람들의 시도는 일부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렇게 주워 온 팔과 다리 그리고 코, 귀, 손가락과 발가락 심지어 하반신을 모으고 결행일 당시의 상황과 비교해보니, 그들 가운데 신체가 모두 완벽하게 영혼이 있는 곳으로 복제 전송됐다고…… 말하자면 아직까지 살아 있다고 판단되는 것은 샤드뿐이었다고.
단지 샤드의 손발이나 머리통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런 결론을 내린다니 보통 어리석은 게 아니라고, 얼은 혀를 찰 뻔했다. 공장 지구의 광활함만큼이나 이 도시 자체도 결코 작은 편이 아니었고, 그들은 도시 전체와 야산 모두를 수색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인간의 잠재력과 에너지를 이용하여 몸과 영혼의 정보를 옮긴다는 것부터가 미친 소리였다. 그게 가능하다면 인간이 지금까지 그것을 상상의 영역에만 남겨두었을 리가. 얼은 그들이 수거해 왔다는 살과 뼈를 불완전 이동의 증거라고 눈앞에 쏟아놓는대도 믿지 않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앉아서 죽은 인간 껍데기는 그냥 빛이 들지 않는 데서 은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쇠약해져 죽은 거고, 부패하거나 시랍화한 팔다리를 부대에 담아 와도 그건 예를 들어 배신자들을 죽이고 조직원들이 잘라낸 것일지 몰랐다. 얼은 아펙이 입을 열기 전까지만 해도 샤드가 망명자들을 화물차에 태워주다가 군인들에게 변을 당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정신 나간 심령 집단의 디오니소스적 이벤트 아래 살해당하여 시신이 어디 파묻혔는지도 알 수 없게 됐다는 쪽이 차라리 합리적일 듯싶었다. 

—그러면 다음번 이동 결행일은 언제인가요. 저도 이동에 성공할 때까지 여기 머물게 해주실 수 있나요?

그래서 오빠를 일단 잃었다고 볼 수 있는 미그라가 이성도 잃고 아펙 일행을 선택했을 때 얼은 마침내 비명을 질렀다. 이제는 둘 다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그른 것 같았다.

—제발 이 사람들 말 듣지 마요. 이걸 믿어요? 믿냐고?

—저는 이제 뭐가 됐든 상관없어요.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든 오빠가 했다면 나도 할 수 있겠지요. 저도 그 이동이라는 걸 배울 거예요.

그렇게 말하는 미그라의 표정은 이미 여기에 없는 사람 같았다. 얼은 머리카락에서 분노가 솟아나오기라도 하는 것처럼 뒤통수를 긁적이며 호흡을 골랐다.

—아니, 지금 당신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어려운 상태라는 걸 알아요. 하지만 우리 머리는 아직 붙어 있으니까 생각이라는 걸 좀 해보십시다, 예? 이 사람들 여기 왜 있는데. 영혼의 스승님, 이분은 진작 공중으로 떠올라서 원하는 데로 가시고도 남았을 실력자라는 거잖아요. 근데 왜 여기 남아 계시냐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요? 이동이라는 건 없어요. 그냥 이 사람들 여기 숨어 사는 거야. 바깥에 정찰도 수시로 나가신다는 거 보니까, 그래요, 내가 하나는 잘못 짚었네요. 색깔만 불길하다뿐이지 저 안개 좀 맞는다고 바로 죽어 나자빠지는 게 아니라는 건 알겠고, 그건 다행이네요. 하지만 나머지는 다 상상이라고요. 이분들이 일부러 당신을 엿 먹이려고 거짓말한다는 게 아니라, 다들 너무 공부 오래 하시고 명상에 빠져서, 자기가 그리는 세계랑 실제 세계가 막 섞일 수 있단 말입니다. 이런 세상인데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안 그렇습니까?

미그라의 고요한 표정 속에 두려움과 의혹,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춤과 움직임이 자신에게는 다르지 않으니 움직일 가능성이 일말이라도 있는 쪽을 고르겠다는 집념이 피어올랐다.

—지금 막…… 당신이 말했네요.

—뭐요?

—이런 세상이니까 무슨 일이든 못 일어나겠느냐고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면, 인간의 힘으로 저 건너편으로 이동하는 일 또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법 없겠지요.

얼은 체머리를 털었다.

—좋아요, 그럼 상상을 좀 바꿔봅시다. 그래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지요. 저 건너편 도시에 간 샤드를 아무도 직접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서도 샤드의 팔 다리가 뒹구는 게 없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이건 어때요. 샤드의 몸이 옮겨가서 구성되는 데에 실패해서, 우리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 원자 단위로 이 허공을 떠돌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안 듭니까? 어쩌면 샤드의 존재를 이루었던 원자가 지금은 한때 샤드의 일부였다는 자각도 없이 지금 여기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영혼? 영혼은 영혼대로 그걸 담을 그릇을 잃은 채로 어딘가 떠돌고 있겠지. 샤드에게 무슨 일이든 일어났을 수도 있지만 그게 뭔지는 모르는 상태에서 샤드를 따라가기라도 할 겁니까? 여기서 기다린다고 답 나와요?

—그러면! 

미그라는 거의 절규하듯이 반박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간다고 답이 나올 것 같나요? 나한테?

얼은 움찔하여 말문이 막혔다. 기약 없는 샤드의 소식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미그라를 기다릴 것은 가족의 부재와 어둠, 단수. 태어날 때부터 차지할 수 있는 공간의 지분이 남들보다 덜 허락되었으며,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최소한의 식료품을 사러 가게에 가는 일도 불가능한 몸. 똑같은 어둠과 암담 속이라면 혼자 버려지느니 미치광이들의 옆이 당장은 안전하겠다고 느끼는 게 무리는 아니었다. 
만약 이것이 구시대의 영화 속 한 장면이나 되었다면, 얼은 그녀를 혼자 두고 갈 수 없다고 단호하게 아펙 일행과 대치하거나, 자신도 지하에 머물기로 결정할 것이었다. 미그라에게 첫눈에 반했다든지 인간이 되어갖고 혼자 갈 수는 없다든지 하는 구실로 말이다. 그러나 얼은 만난 지 얼마 안 된 미그라를 선택하여 일상을 내던질 만큼의 이타심이나 의협심이 자신에게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신은 돌아가요.

직전까지의 혼란과 막막한 표정을 추스르고 미그라가 말했다.

—여기까지 나를 데려다 줘서 고마웠어요.

그들이 미치광이가 아닌 다만 순진하고 깨끗한 수행자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믿음이 얼의 안에 어렴풋하게나마 생긴 것은, 자의로 이곳에 남겠다고 하는 미그라를 받아들이는 한편 놀랍게도 얼을 고이 돌려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아펙은 직전까지 얼의 폭언을 옆에서 고스란히 듣고서도 자신들에 대한 인상 평가를 바꾸려 들지 않았고, 얼도 여기 남아야 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다만 당신은 우리의 동료가 아니니 이곳을 나서는 즉시 여기서 본 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을 뿐 그 말투조차도 위협과는 거리가 멀었다. 비록 단 한 명의 사람도 해치지 않았다고 가정해도 그들은 일단 각종 경로로 입수한 총기류를 보유하고는 있었고, 연구소 내부에 옛날 그대로 남아 있던 녹슨 관에다가 수도를 다시 끌어와서 사용하는 불법도 거리낌 없이 저지르고 있었다. 끊겼던 전기도 조만간 어딘가에서 끌어온다는데 그게 가능한 걸 보면 역시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인 것 같고, 그런데 인간 고유 에너지가 무한하다면서 왜, 인간을 발전기로 쓸 것이지. 어쨌거나 이들이 테러를 도모하거나 시민들의 망명을 돕는 게 아닌 순수 명상 모임에 불과하더라도, 출입 금지 구역에서의 이 같은 단체 생활이 외부 세계에 알려져서 좋을 일은 없었다. 최소한 선량한 사회 대중을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감을 조성했다는 등 내란죄가 적용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찬성하지 않는 자를 어떤 담보도 없이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낸다는데, 아펙의 결정에 반대하는 이들이 없었다.

—일상으로 돌아가, 당신도 움직이기를. 움직이는 것이야말로 생명의 근본이니까요.

그래서 얼은 이때만은 확고한 어조로 다짐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겁니다.

그 뒤로 얼은 회사에 돌아가 샤드가 행방불명되었음을 사장에게 밝혔고, 사장은 샤드를 퇴직 처리했다. 반드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최초의 제보자가 포상 대신 어떤 번거로움과 부당함을 비롯한 고초를 겪는지 익히 알고 있기에 얼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미궁 속의 괴물이나 되는 듯 자신의 기억에만 봉인했고, 회사 사람들이나 이웃들이 간혹 공장 지구에 대한 뜬소문을 퍼 나르는 데에도 끼어들지 않았다. 그거 아니라고, 거기에는 실제로 사람들이 산다고 위험을 감수해가면서 정정하고 싶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큰 이익이나 보람을 얻지 못하는 대신 뼈저리게 후회할 일도 없었다. 얼은 자신의 현재에 충분히 만족한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너머를 보기에는 역시 현재에 발목이 붙들려 있었다. 자신이 선 곳을 구태여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바꿀 필요가 없었다. 화물차 할부도 다 갚았다. 물론 갚기가 무섭게 새로 구입해야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타서 낡아졌지만 그런대로 버티고 있었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은 부모님뿐이었고 그중 아버지는 지병으로 거액의 병원비가 들었는데 신종 전염병 유행 당시 백신이 개발되기 전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또한 전염병을 우려하여 그전까지 틈틈이 부식비를 벌던 허드렛일과 봉사활동을 중단하고 집에서 지냈다. 움직이지 않으면 탈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를 집에 모셔두고, 비교적 기동력이 있으며 비용과 소득 면에서도 효율적인 자신이 최소한의 동선을 따라 움직여 식구를 부양한다. 그 정도면 되었다고, 당신도 움직이라는 저주인지 주문인지 모를 아펙의 인사가 떠오를 때마다 다짐했다. 얼은 화물을 싣고 도시 경계선을 드나드는 자격을 취득한 서민들 가운데에서도 모범 운전수에 속했다. 다리 경계선 안쪽으로 돌아오는 시간을 준수하여 벌금 한 번 문 적 없었다. 정해진 노선을 타고 규정된 구역만 오가며 물건을 옮기는 동안 건너편 도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잘사는지, 자신들과 같이 질병과 홍수와 사악한 기후에 고통 받고 있는지 그런 데에 한눈팔지 않았다. 이대로 고요하게, 신호에 따라 정지선을 지키며 살면 되는 일이었다. 그 불안한 고요를 지키기 위해 얼은 아펙 일행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설령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그라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 샤드의 파편이나마 만나게 되기를 빌었다.

사회 불만 세력이 폐허가 된 공장 지구에 모여 반란을 도모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군대가 그곳을 진압한 것은 그로부터 반년이 채 지나기 전의 일이었다. 뉴스를 본 얼은 당장이라도 화물차를 돌려 그곳으로 가고 싶었지만 앞의 열 대만 지나면 자기가 다리를 통과할 차례였으므로 운전대만 꼭 움켜쥐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규정된 시간까지 돌아올 수 없을 테고 하루 장사를 다 접어야 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무엇이? 그들은 민심 혼란을 획책하는 게릴라들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로 떠나고자 하는 부질없는 꿈을 꾸었을 뿐인 무해한 자들이었다. 만약 모여서 불가능한 상상을 하는 것이 반란이라면, 사회에 유익한 재생산 노동 대신 무위를 선택한 것이 소요라면, 거기에 조금도 해당되지 않는 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었다. 내일 없는 삶에 염증을 느낀 동조자들이 늘어나 너도 나도 무익한 꿈에 매달린 끝에 좌초한대도 사회 근간이 흔들린대도 그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아니야, 아니라고. 무엇이? 내가 말한 것이 아니야. 누구에게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고, 자신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 약속을 지켰다고, 그들을 고발한 적 없다고, 아펙에게든 미그라에게든 만날 수만 있다면 설명하고 싶었다. 설령 그들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대도 외치고 싶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알 길 없었으나 대규모의 군경이 폐허 지구의 지하 공간까지 털었음에도, 오래된 몇 구의 시신과 훼손된 신체 일부 외에 그곳에서 발견된 살아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없었다는 후속 보도가 나왔다. 이를 두고 관계 기관에서는 제보를 받은 이들이 군경 도착 전에 거점을 다른 데로 옮겨 산발적으로 활동하는 것 같다고 결론을 내린 뒤 곧 다른 방식으로 수사가 재개될 것을 천명했으나, 세상에 군경이 꼭 해야 할 일은 그것 말고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았으므로 그게 속히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들은 없었다. 다수 시민들의 입장은, 그런 숨어 사는 이들이 사회 불안 요소라고 하기에는 애초에 사회부터 안정적인 구조가 아니었으므로 수색 작전을 펼치든지 말든지 무관심했다. 일각에서는 군경이 지하 생활자들을 몰살시킨 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는 거짓 보도자료를 낸 게 아닌지도 의심했지만 그 같은 추측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러니 얼은 아펙과 그의 동료들 그리고 미그라가 손에 손을 잡고 정말로 이곳 아닌 다른 어딘가를 선택해 떠났기를, 그들이 이미 이곳에 없는 이유가 모두 완전한 이동에 성공했기 때문이기를 기원하는 편이, 조금이나마 마음 편한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도록 허가 받은 선량하고 순종적이며 경제력도 안정적인 시민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젊은 군인이 열린 차창으로 신분증을 스캔했다. 위조되지 않은 신분증임을 확인하는 표시가 떴다. 안경을 벗어봐. 모자를 벗고 여기를 봐. 그 옆에서 근무 기간이 오래된 다른 군인이 참견을 할 듯 말 듯 말했다. 이 사람은 일주일에 세 번은 여기를 통과하는 모범 운전자야. 물론 철저히 해서 나쁠 건 없지. 언제나 사고는 익숙함에서 일어나니까. 젊은 군인은 스캐너를 갖고 얼의 화물차 둘레를 한 바퀴 돌며, 사전 보고된 화물의 개수와 일치하는지 파악했다. 조만간 생체 반응 측정기의 개발 보급이 활성화되면 이 같은 수색 방식이 달라질 것이었다. 전에도 화물차를 일일이 열지 않고 몰래 탄 사람들이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도입한 적 있으나, 정밀도가 떨어져서 운전자의 생체반응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단점 때문에 정식 도입 시기가 늦추어졌을 뿐이다. 군인은 스캐너가 파악한 화물 개수를 신고 대장과 대조한 뒤 얼에게 손짓했다. 컨테이너 문을 열라는 명령이었다. 천천히 열린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간 군인은 내부 조명 아래서 대충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상자에 위나 옆 등 무작위로 칼을 꽂아보았다. 금속류나 가전 등 훼손될 만한 품목은 보통 보충재에 싸여 있으므로, 꽂았을 때 칼끝이 꼭 본품에 닿을 만큼만 깊이 넣었다가 본품의 감촉을 알아채고 제때 뽑아내는 것도 훌륭한 군인의 자질이었다.

몇 분에 걸쳐 그 의식을 마치고 내려선 군인은 마침내 통과 신호를 보냈다. 얼은 컨테이너 문을 닫고 군인들에게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네며 다리를 통과했다. 대대적인 유지 보수가 필요한 다리 위를 불안한 리듬과 동작으로 달리기 시작하자 차내 지불 시스템에서 알림음과 함께 47,500미트라가 결제되었다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다리를 다 건너자 이번에는 반대편 도시국가의 군인들이 손짓했다. 이쪽에서는 화물 검사는 추가로 하지 않고 대신 운전자를 내리라고 지시했다. 얼이 차에서 내려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리자, 어떤 주의도 신호도 없이 그의 온몸으로 소독약이 분사되었다. 평소 별다른 느낌은 없는 무색무취의 소독약이지만 오늘따라 피부가 따끔거리고 털끝이 오소소 일어났다.
각종 절차 때문에 기다리는 시간이 오래 걸릴 뿐, 한 대의 차량이 다리를 통과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5분에 불과했다. 고작 이만한 거리와 이 정도의 간격이, 움직일 수 없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세계 내지 다른 세기의 장벽이었다.

도시로 진입한 얼은 평소의 정해진 루트와 반대되는 차선을 탔다. 이 차선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오늘 제시간에 돌아갈 수 없을 것이었고, 최초의 벌금을 물게 될 것이었다. 기준이 나날이 촘촘해져서 심한 경우 모범 운전수 자격을 한 달간 정지당할 수도 있고, 그 경우 당분간 도시 안에서만 물건을 옮기는 일을 맡는 등 사무실에서 충분한 일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그나마 직접적인 위험에서는 벗어난 것 같지만, 이게 정말로 그런 불이익을 감수할 만한 일인가? 
얼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인적도 CCTV도 없는 숲에 차를 세웠다. 컨테이너 문을 열고, 칼집이 난 상자들 가운데 ‘전기오븐’ 라벨이 붙은 것을 개봉했다. 그 안에서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듯싶은 한 아이가 두 팔을 벌리고 허우적대는 것을 안아다가 컨테이너 아래로 내려놓았다. 아이의 온몸에 두른 화물용 상자를 벗겨내자 비로소 아이는 환하게 웃었다. 상자에는 아까 군인이 찌른 칼자국이 얕게 나 있었다. 

브로커의 사전 연락을 받고 나온 기 탈출 생존자 집단의 어른들이 아이를 마중 나와 있었다. 그것도 적인지 아군인지 몰라 수풀 안에 숨죽이고 있다가 아이가 내리는 걸 확인하고서 뛰어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서로 오랫동안 접선을 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므로 눈인사만 나누고, 마중 나온 이들은 황급히 아이를 안고 숲속으로 사라져갔다. 아마 숲에 사는 것은 아니고 자기네들 사는 곳으로 통하는 다른 길이 있을 것이었다. 
얼은 그리 감상적인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지체 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아이만이라도 전염병과 가난에서 조금이나마 떨어진 곳에 살기를 원하는 부모의 마음이 브로커를 찾게 했을 테지만, 도대체 이렇게 한두 명씩 도시 바깥으로 내보낸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또한 이렇게 탈출한 한 명의 아이가 나중에 자라 위인이 될지 강도가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는가? 사람들은 왜 참담함으로 치자면 여기나 거기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면서도 여기만 아니면 어디라도 되는 것처럼 몸과 마음을 움직이기를 포기하지 않는가? 얼은 그것에 대해 지금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앞으로도 이해하지 않기로 했다.

당신도 움직이기를.
얼이 만약 움직였다고 한다면 그것은 한 걸음을 넘지 않을 것이었다. 얼은 그 한 걸음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되도록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설령 움직이더라도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위험의 범위 내에서 한 걸음 미만의 보폭을 유지할 것이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결코 아펙이 말하고 미그라가 바라던 완전한 이동은 이루어지지 않을 테며, 얼은 언제까지나 요동치기는커녕 미동조차 없는 경계선 안쪽의 존재로 남는다 해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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