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과 정동 <1부>
구병모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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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재령)

<1부>
길르앗 사람들은 에브라임 사람을 앞질러, 요단 강 나루를 차지하였다. 도망치는 에브라임 사람이 강을 건너가게 해 달라고 하면, 길르앗 사람들은 그에게 에브라임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가 에브라임 사람이 아니라고 하면, 그에게 쉬볼렛이라는 말을 발음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 말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고, 시볼렛이라고 발음하면, 길르앗 사람들이 그를 붙들어, 요단 강 나루터에서 죽였다. 이렇게 하여, 그때에 죽은 에브라임 사람의 수는 사만 이천이나 되었다.(사사기 12:5~6)


47,500미트라의 통행료를 내지 않기 위해 용을 쓰는 자, 어떻게든 깎아보겠다고 그동안 긁어모은 타인 또는 회사 명의의 할인 쿠폰을 우수수 쏟아 들이미는 자, 적재된 짐의 수량이나 무게를 속이는 자, 위조된 프리패스로 비벼보려다 발각되어 실랑이를 벌이는 자 등을 생각하면 다리를 건너는 데 앞으로 한 시간은 걸릴 터였으므로 얼트루이는 시동도 끄고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국경 다리 통행료가 6,380미트라였던 시절을 전생의 어느 한 페이지나 되는 듯 떠올리고 있었다. 저들에게 낡은 수단이 통한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아직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도시국가의 낙후한 사회 문화와 제도 및 시민 정서를 증명하는 거라고, 이곳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지 않는 자신의 현명함을 통감하면서.

국가 관리 하의 고속도로가 구간별로 각각의 관리 경쟁력 강화를 구실 삼아 민간 기업에 위탁 경영 체제로 넘어간 즉시 통행료가 지금 수준으로 치솟은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기업들도 너도나도 눈치라는 걸 보았다. 그때 얼은 운전대를 막 잡기 시작했던 무렵이었다. 통행료는 조금씩 티 나지 않게 그러나 경쟁적으로 올랐다. 국경 다리를 통과하는 비용이 편도 약 7.5배 상승하기까지 7년 걸렸고 얼의 벌이는 그간 내내 제자리걸음이었는데, 제자리걸음이라도 할 두 다리가 남아 있다는 처지부터가 현 시절에는 행운의 별이 이마에 붙어 다니는 거나 다름없었다. 얼과 비슷한 시기에 입사하여 물류 일을 시작했던 이들은 갈수록 까다로워지다 못해 사실상 금지라고 해야 마땅할 통과 절차에다가 유류비 등 물류 운반에 드는 각종 세금의 가파른 상승을 견디지 못하여 트럭이나 보트를 고철 값만 받고 처분했으며, 지금 남아 있는 인력은 의도한 바 없이 극소수 정예가 되어 있었다.

진입 허가를 받지 못하고 축출된 차량이 군인들의 수신호를 따라 옆 차선으로 이동했다. 교량을 통과하는 운전자의 자격이 기준에 미달하거나 화물이 사전 신고된 내역과 부피 또는 수량이 맞지 않는다고 그런 불합격 카드를 받는 장면도 흔했다. 한때 언론사에서는 그 광경을 보도에 담으며 헤드라인을 「차들이 길게 줄을 선 진풍경」이라는 식으로 달아서, 생명투쟁당을 위시한 군소 정당에서 즉각 항의 서한을 내기도 했다. 한 올의 거미줄만 한 가능성에 목숨을 매달고 경계선을 넘어가려는 민중이 당신들의 눈에는 볼만한 구경거리인가. 진풍경이라는 생각 없는 말에 사죄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결여된 데스크 담당자는 강도 높게 문책 또는 해임 후 언론 기초 재교육을 받게 하라.

자신이 자격을 충족시키지 못했고 다리를 통과하지 못할 것을 예감하면서, 속임수나 운으로 어떻게든 때워보자고 시도하는 차들이 오늘도 이렇게 대기 중이었다. 어떤 대형 트럭은 일반 화물을 나르는 척하면서 화물칸 양쪽으로 만든 좁은 격벽 안에 사람들을 실어 가다 적발된 적도 있었다. 미세 구멍이 군데군데 뚫린 자리를 군인들이 수상히 여기고 화물을 모두 내리게 한 다음 격벽을 뜯어냈을 때—이미 용접기를 들이댔을 때부터 그 안에서 아우성이 들려왔다고 한다—, 일렬로 다닥다닥 붙어 서서 열기를 견디는 사람들이 드러났다. 견딘다기보다는 세 명 제외 전원 사망이라고 했다. 살아남은 세 명은 옆 사람이 죽어가면서 붙들고 할퀸 상처로 인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불법 침입자들을 수용하는 교도소에 보내져선 고열과 염증에 시달리다 죽었다. 일행 가운데 아기를 안은 한 여인은 산소 부족 끝에 선 채로 죽어 있었으며, 정황상 아기 쪽이 먼저 숨을 거두었는데 몸을 모로 틀 공간이 부족하여 그 시신을 내려놓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성공 비율로 봤을 때 위험을 감수하거나 죽음을 각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 발로 관 뚜껑 열고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지만 살아서 국경을 넘는 극히 일부 가운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포함될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놓지 못하고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얼은 모르지 않았다. 물론 아는 것과 동의하는 것 사이에는 누구도 깊이를 재어본 적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감정적 동의와 실질적 조력 사이에는 최소 광년 단위의 거리가 있게 마련이라, 얼은 지금까지 그 누가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태워달라고 청해도 망설임 없이 거절해왔다. 허가받지 않은 강아지나 새 한 마리라도 실었다가 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적발되면, 운전자에게 적용되는 가장 낮은 단계의 처벌이 화물 면허와 차량 몰수다. 이에 불복하고서, 저들은 빗장 풀고 물건 실을 때 몰래 탄 놈들일 뿐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거세게 항의하다 그 자리에서 사살당한 운전수도 있다.

한 대가 빠지고 앞줄부터 타이어가 한 번 돌 만큼 기어가는 모양이었지만 얼한테까지 그 한 바퀴 회전의 차례가 오려면 멀었으니 시동을 끈 것은 최선의 선택이었다. 유류비 걱정에 차내 에어컨은 틀지 못하고 창문을 활짝 여는 한편 운전석에 부착한 미니 선풍기에 의존하는데 그나마 배터리가 다 닳아가는지 날개 돌아가는 속도나 모양이 시원찮았다. 얼은 다른 모든 마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비행기를 타본 적 없으나 중대형 화물을 주로 맡아 운반했던 얼의 사수 샤드가 예전에 말하기를, 사람들이 외국에 자유롭게 여행도 다니고 사업도 하던 시절, 공항의 출입국 게이트에서 이렇게 줄지어 선 풍경을 흔히 볼 수 있다고 그랬다. 샤드는 그 시절에는 화물차가 아니라 여행사의 외주를 받아서 12인용 승합차에 서른 명쯤 되는 입국자 혹은 출국자들을 블록처럼 끼워 태워다가 공항과 도심 사이를 오가는 일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줄서서 각종 자격을 검증한다면 여행이든 노동 목적이든 그게 어떻게 자유롭다 할 수 있느냐고 얼이 되물었을 때 샤드는,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겠지 얼트루이, 그게 그렇지가 않다고 그때는 출입국 게이트와 검역소에서 아무리 오랫동안 기다리더라도 합법적이며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그 너머로 건너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고, 지금처럼 국경을 막 넘어간 사람들을 모두 세균으로 간주하고서, 살충과 살균 목적에 특화됐을 뿐 인체에 남는 후유증과 부작용 여부는 검증되지 않은 분무식 살균제를 살포하지 않았다고, 그나마 그 살균제를 맞는 사람들마저 꼼꼼한 비교 분석에 의해 선발되어 특권에 가까운 자격을 획득하는 시절이 아니었다고, 세상 누구도 본 적 없는 기원전의 한 귀퉁이를 더듬는 듯 말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중요한 국가 간 결정을 내려야 하는 정치가들, 산업 발전과 유지를 위한 정책 결정권을 가진 기업체의 고위 임원들, 기업들의 하청을 받아 실제로 생산과 소비 진작에 기여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10프로 안팎에 한해 마치 천국으로 가는 입장권처럼 통행증이 발부되니, 여권이나 비자만 있으면 일반인도 남의 나라에 드나들 수 있었던 시절과는 다르다고 했다. 정작 샤드 본인은 얼과 마찬가지로 비행기를 타고 남의 나라로 자유롭게 날아간 적 없고 그저 꾸준히 공항에서 도심으로 그리고 도심에서 다시 공항으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을 뿐으로, 그 많은 사람들이 이동과 통과의 자유를 누렸던 건 샤드와 같은 사람들이 철저히 제한된 이동 경로 안에서 붙박여 일하고 살아가기 때문이었다.

국경을 넘는다고 하여 즉시 질병과 가난과 위협으로부터 자유로운 대지가 펼쳐져 있는 건 아님을 알면서도, 통행의 자유마저 없어진 만큼 세상의 이야기를 전해들을 경로는 줄어드니,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사람들의 원념이 술통 속의 효모처럼 부풀어 오르는 건 당연하다. 웃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바이러스로부터의 면죄부. 그러면서도 동시에 돈이나 힘이나 운이라는 삶의 3종 세트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아주 없어서는 또 안 되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게 더 쉬우리라는 언약은, 극소수를 제외한 모두가 낙타들인 오늘날에는 휴지 조각에 불과한 어음의 언어. 지금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든 바늘귀든 들어가고 그런 의미에서 얼은 부자다. 부자…… 맞나? 얼은 자신의 포지션이 의심스럽다. 생활비의 절반 가까이 지분을 차지하여 허덕이더라도 어쨌든 통행료를 납부할 수는 있는 상대적 부자. 이 도시에 사는 이들 대부분은 설령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 하더라도1) 「요한」 3장 5절에서 예수가 니코데모에게 한 대답.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1) 「요한」 3장 5절에서 예수가 니코데모에게 한 대답.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영원히 닿을 수 없는, 건너편이라는 이데아.

사람의 수를 줄여 탄소 저감에 도움이 되는 방식을 포함한다면, 거듭난다고 보아야 할 쪽은 사람 아닌 지구였다. 묵시록의 묵시默示는 묵시默視와 다르지 않다. 이 세상이 어떻게 되어가든 신은 인간을 구원하지 않고 인간이 자멸을 거쳐 절멸로 이를 때까지 바라만 보리라는. 어쩌면 바라봄조차도 인간 중심의 사고이며, 먼 옛날 에피쿠로스 학파를 따르던 무리의 견해대로 신은 인간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고 보는 게 맞을 터였다. 빙하가 녹아내리고 육지 가두리에 쌓인 해양생물들의 시체 중에는 예전에 특수 장비로 촬영한 화보로나 일부 볼 수 있었던 심해의 동물들도 적지 않았다. 그전부터 꾸준히 개체수가 줄었던 펭귄과 흰곰들은 멸종했다. 얼음집을 짓고 얼음을 깨어 물고기를 낚고 살던 민족은 광란의 문명 세계로 이주했다. 원래의 관습과 생활방식을 바꾸고 문명인들의 지향에 맞추어 살면서 큰 탈 없이 대를 잇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새로운 형태의 삶에 적응하지 못한 이들은 만성적인 우울감에 동반되는 현기증과 구토증 및 이명을 호소하다 자살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은 좁아졌고 인간의 대이동은 수십 년에 걸쳐 여전히 진행 중이었는데 터전을 찾지 못한 이들과 정착을 거부하는 이들은 모세 일행처럼 광야를 헤매며 그 와중에 피임 실패나 강간 등으로 인해 아이를 낳고 기르고 그 아이들이 디아스포라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들이 통과하는 사막에는 군데군데 호수마저 생겼고 툭하면 붉은 비가 내렸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로 금속 문을 잡아 열면 그대로 붙어버려 언 살을 베어내야 했던 나라에서는 이제 사람들이 민소매와 반바지를 입고 선글라스를 꼈다. 원체 그전부터도 반년 단위로 혹한과 혹서를 모두 통과하느라 저마다 살림살이를 번다하게 짊어지고 살아야만 했던 지역은 겉으로 보기에 격변이 없는 듯했지만, 혹한과 혹서 사이의 수은주 눈금이 점점 더 크게 벌어져서 이에 대응하는 더 많은 연료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더 많은 연료의 사용으로 더 크게 수은주의 눈금이 벌어지는 악순환을 불러왔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만성피로에 찌들어 있었다. 

연료비를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저소득층은 죽어갔고, 눈앞의 죽음을 막기 위해 국가는 몇몇 주요 사업 규모를 축소하여 연료 지원 쪽으로 예산을 몰아주었으며, 예산이 삭감되고 사업이 무산된 부처와 관련 종사자들은 사흘돌이로 시위를 벌였다. 해안을 면한 국가는 영토의 상당 부분이 잠겨 사람들은 압축적으로 모여 살았는데, 지난 세기에 비해 인구가 확연히 줄었는데도 몇몇 주요 도시만이 생활 가능한 공간으로 남은 까닭에 인구 밀도는 높았으며, 이주하여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과 기존 시민들과의 정서 및 소득 차이는 날로 심해져 반사회적 범죄의 유형은 다양해지고 정도는 과격해졌다. 일부 섬나라들은 바다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 전 국민이 내륙으로 피신하기 위해 대통령이 국가 포기 선언을 하고 국제사회에 협조를 요청했는데 막판에는 그 어조가 확연하게 구호救護 호소로 바뀌었다. 국토와 함께 가라앉기로 작정한 국민은 남고—이들은 「소멸 국가를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 같은 비장한 헤드라인과 함께 그 나라의 마지막 발행물에 대서특필되었으며, 정부에서는 이들을 구조하기 위한 설득의 제스처를 세 차례쯤 취했다가, 정부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자필 각서를 공증 받은 다음에야 확실하게 그들을 버렸다—탈출에 동의한 섬나라 사람들은 기후 난민의 망명과 통상적인 이민을 받아주는 10여개 국가에 할당되었는데, 당연하게도 관리 효율과 통제를 위해 자신이 희망하는 국가로 갈 수는 없어서, 이미 기능을 거의 상실한 정부의 마지막 역할은 국민이 갈 국가를 임의로 배정하는 것이었다. 잡음과 충돌 속에서도 당장 전 국민이 바다에 빠지느니보다 협조해야 한다는 쪽으로 여론이 형성되기가 무섭게 이동은 거의 강제집행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친족 단위는 비교적 세심하게 묶여 배정되었지만 연인이나 지인 내지 일터와 적성, GNP나 GDP를 비롯하여 사회 문화 선호도 등의 사치스러운 조건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각 국가의 가용 영토가 얼마나 된다든지 인구 규모가 어떻다든지 하는 기초 자료를 근거로 삼기는 했지만, 이 나라의 국민 정서가 난민에게 우호적이라든지 저 나라의 GDP가 더 높다든지 같은 이유로 이민 행선지를 바꿔달라는 배부른 소리를 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고소와 벌금 부과를 통한 정신적 물리적 으름장뿐이었다. 사분의 일가량은 질서정연하게, 나머지는 아수라장으로 배정과 이동이 끝난 다음 각 나라에서는 우리 국가의 영예로운 국민이 되신 것을 환영한다고 대규모의 연회를 한번 베푼 뒤 이민자들에게 동일한 납세 의무를 부과했으며,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시민권을 발급했다. 

갱신 시험의 내용은 해당 국가의 경제와 정치 상식, 문화 관습을 포함한 인문학적 소양을 평가하는 30여 개의 문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커트라인은 60점이었다. 이 나라에서 계속 살기 원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명분을 지닌 시험으로, 원래의 국민 밑에서 노동하거나 작은 가게를 꾸리며 튀지 않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60점을 충족하면 되었지만, 매출이나 사원 수 등의 객관적 지표에 따라 사업 규모가 커진 사람들의 커트라인은 70점이었다. 공직에 있다면 80점을 유지해야 하며 시험 간격 또한 5년에 1회가 아닌 3년에 1회라고 특수 조건도 명시되었으나 이민자들의 공직 진출 기회는 사실상 막혀 있었으므로 이 기준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일반적인 경우 설령 60점을 넘지 못한다고 해도 이미 바다 속 어딘가에 잠겨버린 본국으로 송환되거나 그러지는 않았고 분기별로 재시험 기회가 세 번 더 주어졌으므로 커트라인에 미달하는 사람은 나오지 않았지만 반복 시험에 따른 시간적 금전적 지출은 발생하게 마련이라, 대리시험이나 시험감독관 매수, 족보 거래 등의 문제와 함께 사회의 환부로 뿌리 내렸다. 기존 국민들은 갑작스러운 대인원의 신규 국민을 가능한 한 까다롭게 감독 관리해야 한다는 의견과 함께 이 소모적인 시험에 찬성하는 보수파와, 자신이 선택하고 지원하는 학교나 회사나 운전면허 시험장이 아닌데 시험을 보게 하고 커트라인을 정하는 것 자체가 징벌적인 발상이며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온건파로 나뉘었다. 한편 기존 국민 정서가 자연재해로 인한 난민에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더라도, 이동해 온 사람들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주시하거나 박해하는 이들은 어디를 가나 있게 마련이라, 신규 국민들을 우리 틈에 시나브로 스며들게 놓아두지 말고 그들을 위한 거주 지구를 따로 설정하여 불안에 떠는 자국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의 과격파가 산발적 시위를 이어갔다.

그런 전 지구적인 대혼란 가운데 얼과 그의 선량한 이웃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안정이라는 정의를 폭넓게 내린다면. 강수량이 늘면서 물난리 빈도가 높아지기는 했으나 더위는 늘 있던 것이라 새롭지 않았고, 평균 기온이 매해 조금씩 오르는 환경에도 신체 건강한 청년과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나갔다. 상승한 기후에 따라 틈만 나면 창궐하는 정체불명의 생물과 새로운 전염병은 그들만이 아닌 온 세계를 공평하게 덮쳤으므로 그 자체가 억울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처 방식과 생사 여부 등을 포함한 결과와 양상은 국가 발전 수준에 따라 판이하여 시민들의 탈출 욕망을 부추겼으나, 그나마 돌보던 소와 일군 땅을 버리고 타 국가로 망명한다고 하여 당장 높은 수준의 의료 혜택과 복지를 누리는 게 아니라 난민 수용 지구에서 홀대 받다가 죽어갈 가능성이 좀 더 높았으므로, 결국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말로는 어느 곳에 존재하는지와 무관하게 무자비했고, 야생의 숲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의 사회적 안전망이 있을 뿐 각자도생이 삶의 제일원칙으로 자리 잡은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쨌든 얼은 시난고난하면서 각자도생을 시도라도 할 수 있는 신체와 생활조건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고, 그가 사는 도시에는 그조차 불가능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이 도시가 아닌 최소한 옆 도시, 아니면 저 멀리 다른 어딘가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무용한 고생을 목숨 걸고 하는 사람들이 오늘도 도시와 도시를 가르는 다리 앞에서 솎아내졌다. 백주의 꿈도 신의 말씀도 아닌 초능력이라도 있어야 저 건너편으로 갈 수 있을 것이었다. 

맨 앞 차량의 소동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확인차 망원경으로 당겨보니, 국경을 넘으려다 걸린 사람들이 냉동트럭에서 끌어내려진 모양이었다. 일부 신선식품을 실어서 위장했지만, 대형 스티로폼 박스를 몇 개 꺼내서 개봉하자 태아 자세로 쭈그린 채 숨죽이고 있던 사람들이 이를 부딪치며 끌려나왔다. 결국 그 화물차는 모든 내용물을 개봉하라는 명령을 받고 옆 차선으로 이동했다. 이 도시에서는 솜옷이나 털옷을 구하기 어렵고 그게 필요하지도 않은 환경에서 살다가 충분한 준비 없이 냉동트럭에 탄 사람들이, 하나같이 거적을 몇 겹이나 친친 감아 두툼한 몸으로 뒤뚱거리며 끌려나오다 넘어져서 바닥을 굴렀다. 일행 가운데 마지막으로 나온 젊은 여성은 결행일 전에 부상을 입은 듯 발목에 깁스를 하고 있었다. 그런 상태로 이를 악물고 아이스박스 안에 쭈그린 그녀는 이미 성치 않은 몸을 엉거주춤 폈는데, 군인이 다른 쪽 발목을 걷어차자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바닥에 코를 박곤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망명에 적합하지 않은 몸이었다. 설령 경계를 넘는 데 성공했더라도 건너편의 땅을 밟은 순간부터 그녀의 존재는 다른 사람들의 짐이 되거나 버려졌을 터였다. 
언뜻 일별했을 뿐이지만 코가 깨진 여성은 미그라의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언젠가부터 일주일에 한 번꼴로 결근하다 점차 사흘에 한 번으로 간격이 밭아지고 급기야는 아무런 기별 없이 열흘째 회사에 나오지 않는 샤드네 집을 찾아가서 얼은 미그라를 처음 만났다. 
두드려도 대답 없는 문을 조심스레 잡아당겨보니 결이 벌어지고 휘어진 나무 문짝이 신음을 내며 열렸다. 서너 개의 알전구가 깜박거리며 집 안의 일부를 밝히고 있었으며 하수구에 오줌을 갈긴 것 같은 냄새가 세간과 벽 모서리를 타고 흘렀다. 샤드의 이름을 작게 두어 번 부르며 발을 옮기면서 얼은 혼잣말 가까운 소리로 말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얼의 가슴보다 낮은 위치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여기 있어요. 

뒤돌아보다가 깨진 바닥 틈새에 발이 걸려 중심을 잃고 얼이 엎어진 자리는, 바닥이 아니라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한 여인의 무릎 위였다.

—오빠네 회사에서 찾아오신 건가요? 아니면 경찰인가요.

여인의 목소리가 눅눅한 어둠 속에서 곰팡이의 포자처럼 번져나갔다. 얼은 놀라서 얼른 몸을 일으켰다. 경찰인지 묻는 걸 보니 샤드는 무언가 좋지 않은 일에 얽힌 모양이었다. 웬만한 보험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화물차 접촉 사고라도 일으킨 걸까. 아니면……

—회사입니다. 같이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가요.

여인의 목소리는 안도인지 근심인지 모를 한숨으로 바뀌었다. 

—집도 이 지경이고 제 몸도 이래서 변변한 대접을 해드리기가 어렵네요.

—샤드는 어떻게, 몸이 안 좋은가요? 지금 집에 있으면 잠깐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요.

얼은 짐작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일에 샤드가 연루된 게 아니기를 바라며 물었다.

—그게 실은, 어디 있는지 저도 몰라서요. 저는 경찰이 오빠의 소식을 가지고 왔나 했어요.

여인의 말에 좋지 않은 예감이 넝쿨처럼 얼의 몸을 휘감았다. 샤드는 화물차를 가지고 비밀리에 화물이 아닌 다른 것을 운반하는 아르바이트라도 하다가……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종사하는 일의 성격과 회사 규모뿐 아니라 본인 건강 상태에 따라 화물을 싣고 도시를 왕복 이동하는 자격의 문턱이 높아진 데 더하여 이동 비용의 고공 상승에 따라 물류가 줄고, 어떻게든 그 진입 장벽을 통과하더라도 수시로 신규 창궐하는 바이러스에 자칫 감염되기라도 하면 이동이 전면 중단되기는 물론 감염자가 운반한 화물이 폐기 처분되기 일쑤라 거액의 손해가 발생하고, 이 루트를 반복하다 공업과 산업이 무너지면서 폐허가 된 공장 지구에는 유독 가스를 비롯한 각종 위험물과 오염물만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쥐 시체들이나 뒹굴 성싶은 그 지역에 샤드가 드나들기 시작한 것은 석 달 전부터였다고 한다. 미그라는 도시 간 이동은커녕 집 밖으로 나가는 일조차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어려운 의자 생활자라 그곳이 어떤 상태인지는 자세히 몰랐으니, 샤드가 거래처를 새로 뚫어서 가끔 그리로 다닌다는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래처를 새로 뚫었다면서 어째서 수금은 제때 되지 않는지, 월급은 제대로 받고 있는지, 자주 끊기는 전기와 물은 언제 확실하게 살려놓을 건지 미그라는 묻고 싶었다. 전기가 없으면 어두운 대로 불편하게 산다 치고, 창문만 열었다 하면 언제 침입해 들어올지 모르는 전염병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전을 위해 수도는 필수였다. 생활환경이 악화일로를 걸으면서 그 수도마저도 불투명한 색을 띠거나 성분 불명의 이물질이 함께하지만, 그런 거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랬는데 어느 날 집에 오더니 이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동안 다닌 곳은 사실 사람이 모두 떠나고 텅 빈 공장 지구로 아무런 거래처도 없었지만, 단 하나 물질과학 연구소만은 남아 있었다고요. 

물질과학 연구소라면 얼의 증조할머니가 태어나기 전쯤의 시대에 물질의 공간 이동을 주요 연구 과제로 삼은 곳으로, 이동 실험 진행을 위해 주요 도시국가를 선정하여 그 지부를 두었다. 세계 1위 강대국에서 각국에 건설과 협력 투자를 했고, 그들 나라에는 얼의 어머니가 태어나기 전쯤 지어졌다고 들었다.

—기존 연구원들과 제조 노동자들은 철수했지만,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 가운데 뜻이 맞는 이들이 게릴라 부대처럼 활동하다가 그리로 조금씩 모여들었다는 거였어요.

물질 자체를 분자 단위로 전송하는 것이 아닌, 그 물질을 구성하는 정보를 전송하여 이쪽의 정보가 삭제되는 동시에 저쪽에서 정보가 완벽하게 복제 구현되게 한다는 공간 이동의 기본적인 이론은 정립되어 있었으나 그것을 현실화하는 일은 매우 더뎠다. 비현실을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는 것과 같은 차원의 일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최소한 사람 한 명 이상을 전송해야 하는데, 최초 연구소의 설립으로부터 백 년 가까이 지나도록 책 한 권 제대로 전송할까 말까 하는 정도였다. 무생물이라면 정보 구성과 복제 구현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이를테면 책 모서리 일부가 깎여나간다든지, 몇 개의 글자나 페이지가 누락된다든지 같은 일들. 그러나 생물은 더욱 조심스러운 시도를 해야 했다. 사람을 전송했는데 팔이나 다리가 하나씩 누락되어 있으면 그건 좀 곤란한 일이었고, 외관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세포의 개수가 모자란다든지 유전자 정보가 다르다든지 해서도 안 되었다.

언제나 실험실에서 인간을 위해 희생했던 생쥐가 이번에도 양자부스라는 이름의 공간이동 장치에 넣어졌다. 도착한 국가에서 생쥐의 정보는 거의 완벽하게 복사되어 나타났다. 외부 모습도, 내장 기관 촬영 결과 및 유전자 데이터도 흠잡을 데 없어 보였다. 그러나 며칠을 두고 지켜보아도 생쥐는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모로 쓰러지기만 했다. 눈앞에 먹이가 있어도 후각이 손상된 것처럼 그것이 먹이인지 알지 못했고, 먹어서 생존한다는 원리 자체를 잊어버린 듯 그대로 누웠다. 몸을 구성하는 데이터는 무사히 복제 전송되었으나 영혼의 일부가 탈락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생존을 위해 주사로 영양제를 투입하면서 지켜보았지만 생쥐는 도착 장소에서 열흘 뒤 죽었다. 그 뒤로 각국에서 거리와 환경, 실험체의 신장과 무게 등 여러 조건에 변화를 주면서 3천 마리 이상의 생쥐를 전송해보았으나 그때마다 서로 다른 부작용에 시달리다 평균 보름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생쥐가 이 정도인 마당에 그보다 더 고등한 동물이라면, 도착한 장소에서 ‘저쪽 나라에서 나를 이루는 데이터는 모두 삭제됐고 이쪽 나라에 있는 나는 복제 구현된 데이터인데 여기 있는 나는 저기 있던 나와 동일한 나인가’ 같은 우아한 고민을 하기 이전에, 고민할 머리가 붙어 있지 않은 채로 전송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전 세계적 전염병이 창궐하여 하위 단계의 프로젝트들부터 속속 중단되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연구소는 막대한 연구비 및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씩 문을 닫기 시작했으며, 얼이 자라날 무렵에는 이미 연구원들이 짐을 싸서 자기네들의 강대국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연구원들의 밑에서 일하던 보조 연구원들은 대부분 이 도시국가 출신 사람들로, 한때는 유학도 다녀왔다든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비교적 수준 높은 공부를 한 조수들이었지만 일터를 잃고 직업을 바꾸었다. 그들 가운데는 지식과 기술을 살리고 싶어 연구원들을 따라가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애초에 사람을 빛보다 빠른 속도로 목적지에 보내기 위해 진행하던 연구였는데, 이제는 오히려 사람을 보내지 말아야 할 필요가 생겨 프로젝트가 폐기된 마당이었다. 연구 자체의 효율성뿐만 아니라 이동이라는 명분도 사라진 것이었다. 그 뒤로 이동은 인간의 모든 행동 가운데 가장 부담스럽고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 와서 폐허가 된 연구소에 사람이 새삼스레 모여든다고 한다면, 어깨너머로 강대국의 지식을 흡수한 조수들을 비롯하여 그들과 뜻을 함께하는 이들일 터였다.

그것도 어디까지나 연구소가 아직 남아 있음을 전제로 했다. 얼은 물질과학 연구소의 존재에 대해 거의 고대 신화 급으로 들어본 적 있을 뿐이고, 얼의 어머니도 엄선된 연구원들의 인터뷰와 일부 시설물 정도만 언론을 통해 봤을 뿐 전체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하에 지은 대규모의 기지는 대량의 방사능 에너지를 필요로 하다 보니 공장 지구 내에서도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옛날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던 대규모의 공장들, 그것들을 떠받치던 지표면 아래로는 모두 연구소였다는, 그리하여 그 안에서도 연구원들이 필요할 때는 도보가 아닌 카트를 타고 선로를 따라 이동해야 했다는 전설 정도가, 얼과 같은 보통의 시민들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지금은 공장 지구 자체에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는데 그 주위를 군경이 지켜 설 필요도 없었다. 산에 올라 먼눈으로만 보아도 지옥이 아가리를 벌린 것 같은 색의 안개가 그곳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보여서, 호기심에 접근했던 이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거나, 어쩌다 돌아온 사람은 헛소리와 고열에 시달리다 온몸의 구멍으로 피를 뿜으며 죽어갔다는 괴담이 기정사실처럼 정착하여 평범한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샤드 개인의 면역력과 신체가 얼마나 강철 같든지 그런 장소에 몇 번이나 드나들고 무사했을 리 없는 것이다. 샤드는 아마도…… 얼은 성급함으로 얼룩진 자신의 예감을 드러내지 않고 미그라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오빠는 페요테를 통째로 삼킨 것 같은 눈빛을 하고 감전된 것처럼 손을 떨고 있었는데, 내가 구체적으로 물어도 격앙과 도취에 감염된 말투로 계속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했어요. 일찍이 상상해본 적 없는 새로운 세계를 만났고 우리가 당장이라도 그곳으로 가야 한다며, 그래야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다른 형태로 살 수 있는 거라며, 제 몸이 이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도 잊고선 금방이라도 손목을 잡아챌 것만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어요.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완전한 이동을 연구한다곤 하나 과거에 해산된 물질과학 연구소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 따를 수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었다. 물질과학 연구소에서 일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으나 이미 나이를 많이 먹어 당시 기억이 부정확했을뿐더러, 연구팀이 없는 상태에서 연구소에 남은—작동이 될지 어떨지도 모르는—장치들과 자료만 갖고 후속 연구를 이어갈 수 있을 만큼 밑바탕을 갖춘 이는 없었다. 보조연구원이라는 이름은 달았지만 그 실상은 어디까지나 연구원들이 사소한 데 신경 쓰지 않고 편안히 일할 수 있도록 하는 잡무 처리반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배달된 약품이나 연구원들이 마실 생수 따위를 지정 장소에 깔끔하게 정리해놓는 일. 실험에 쓰인 도구들을 초음파로 세척하는 일. 전날의 실험 결과 데이터를 분류하여 언제라도 찾아보기 쉽게 폴더를 정리하는 일. 실험에 쓰인 동물들의 사체를 감염 위험 없이 깨끗이 처리하고 연구실을 수시로 소독하는 일 같은 것.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눈에 띄고 불편하며 불쾌한 정도를 넘어 중요한 일들마저 지연시키지만, 섬세하고 꼼꼼하게 갖추어져 있으면 처음부터 그것이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자연히 그렇게 이루어진 양, 많이 배웠거나 힘 있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치워져버리고 마는 그런 일들.

—그러니 부디 저를 데려가주지 않겠어요? 오빠가 대체 어떤 곳을 갔고 거기에 정말 사람들이 있는지, 오빠가 본 게 무엇인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얼은 그곳에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최소 열 가지는 댈 수 있었지만 그중 가장 명분이 서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샤드가 다니던 곳은 폐허가 된 공장 지구가 아니라 어딘가의 지하 점조직일 테며, 거기서 브로커의 의뢰를 받고 사람을 실어 경계선 밖으로 나르는 임무를 맡다가 화를 입었으리라 짐작되니 공장 지구로 가봤자 소용없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신의 오빠가 이미 죽었으리라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얼은 그러마고, 사실은 안까지 들어간 적 없어서 알지 못하나 대단히 위험한 곳임에는 분명하며, 만약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돌아 나올 거라고, 그리로 가는 것은 이번 한 번뿐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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